김서하 편집국장 (QRM·20)
김서하 편집국장 (QRM·20)

 

“넌 너무 착해서 문제야” 업무에 치이던 어느 날, 동료 기자가 짧지만 깊숙한 한마디를 던졌다. 그리고 이어진 짧은 정적.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적절한 대답을 고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 개인의 선량함이 그 자체만으로 문제일 수 있을까. 수많은 물음표가 머릿속을 헤집었다. 착한 사람이고 싶다는 평생의 소망이 갑작스레 낯설어 보였다. 

돌이켜보면 언제부턴가 “그럴 수 있지”를 남발하는 스스로가 싫었다. “그럴 수 있지”는 주어진 상황을, 상충하는 의견을 최대한 이해해보겠다는 의미로 들린다. 가능한 타인의 처지를 모두 헤아리고 인정하겠다는 선량함이 묻어난다. 그렇지만 이 한마디를 외칠 때마다 어딘가 꺼림칙했다. 마치 빛 좋은 개살구를 내놓는 듯했다. 결국 이해보다 체념에 가깝다는 걸 알아서였을까. 

“그럴 수 있다”는 말의 이면에는 상황이 이러하니 어쩔 수 없다거나, 나도 맞고 너도 맞으니 여기서 끝내자는 식의 태도가 서려 있다. 이는 모든 논의를 초기화한다. 동시에 수많은 논의의 가능성을 차단한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가장 간편하게 상황을 종료할 수 있는 한마디라는 걸 알았지만, 그렇다고 비겁해지고 싶진 않았다.

 

모두가 평등을 바라지만, 
선량한 마음만으로 평등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불평등한 세상에서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리에게 익숙한 질서 너머의 세상을 상상해야 한다. 


- 김지혜, 『선량한 차별주의자』

 

“그럴 수 있지”의 위험은 일상의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책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선량함에서 비롯된 긍정을 경계한다. 차별과 배제를 불러일으키는 구조를 공고히 하기 때문이다. 이때 ‘질서 너머의 세상을 상상’하는 힘이 바로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외칠 수 있는 용기다. 반면 그 대척점에 놓인 “그럴 수 있지”는 고착화한 질서를 긍정하는 일종의 변명이다. 

선량함의 탈을 쓴 변명이 곳곳에서 들려온다. 집회로 인한 소음이 학생들의 수업권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청소·경비 노동자들을 고소한 학생. 공권력을 투입해 장애인 이동권 시위를 제압하겠다고 말하는 당 대표. 그리고 볼모로 잡힌 구성원들의 피해를 고려하면 충분히 “그럴 만했다”고 반응하는 이들. 나아가 그것이 당연하다 주장하는 말들. 그 가운데서 이들은 죄 없는 사람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행동하는 ‘선량한’ 시민으로 둔갑한다.

이 변명은 누군가에겐 폭력이다.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이동권 보장을 위해 투쟁해온 이들의 서사를 지운다. ‘집회가 시끄러우면 신고할 수 있지’, ‘시위가 방해되면 제지할 수 있지’라는 말은 어쩌면 그 자체로 권력의 징표일지 모른다. 기존의 질서 속에서 우위를 점한 이들의 한마디는 누군가가 삶을 바쳐 이어온 싸움을 단번에 무너뜨린다. 이는 ‘그럴 수 있는’ 영역 밖이다. 차별과 소외를 직면해온 이들의 외침과 그 대척점에 놓인 이들의 주장을 동일선상에 놓고 바라봐서는 안 된다. 선량하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기계적 중립이 질서 밖 세계로의 논의를 가로막는 건 아닐는지. 우리는 그 가운데서 선량한 차별주의자로만 남는 것은 아닐는지. 

“그럴 수 있지” 대신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들려오길 간절히 소망한다. 그 한마디에는 상대의 의견을 경청한다는 전제하에 나의 목소리를 이어가겠다는 다짐이 담겨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와는 확연히 다르다. 주어진 상황을 헤아리면서도 서로 다른 의견을 경청하면서도 논의의 끝이 아닌 시작을 말하는 것.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며 대화를 이어가는 것. 단편적 사실 너머의 맥락을 고민하고 상상하는 것. 과도한 선량함이 낳은 무조건적 이해보다 훨씬 건강한 발걸음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세계는 마침표 대신 물음표로 가득하다. 노동자들의 집회가 소란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장애인들의 시위로 예기치 못한 불편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투쟁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야 하는 이유. 차별을 직시하고 기존의 질서를 해체하기 위한 논의들. 새로운 질서를 그리기 위한 움직임들. 그 여정에 놓인 수많은 물음표를 고민하는 건 우리 모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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