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엽 교수(우리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유상엽 교수(우리대학교 사회과학대학)

 

하버드 대학 교육심리학자인 하워드 가드너는 한 분야에서 창조적 도약과 혁신을 이루려면 적어도 10년의 기간 동안 꾸준하게 그 분야의 전문지식을 습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필자도 박사를 취득하고 교편을 잡은 지 올해로 10년이 된다. 지난 10년 동안 학자로서 열심히 전문지식을 습득해왔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렇다고 창조적 도약과 혁신을 이루었다고 자평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그러나 한 가지, 10년 전과 지금을 돌이켜볼 때 중요한 것을 배운 것이 있다. 공부를 거듭할수록 다름과 틀림의 차이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주변에서 흔히들 ‘다르다’와 ‘틀리다’를 혼동해서 쓰는 경우가 있다. 가령 ‘이번 신입생은 작년 신입생하고 틀려’ 라든지 ‘저 교수님의 생각은 나와 틀려’라는 식의 표현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틀리다는 ‘셈이나 사실 따위가 그르게 되거나 어긋나다’는 뜻이다. 즉, 정답이 존재하는데 그 정답에서 벗어났을 때 우리는 틀리다는 말을 쓴다. 반면, 다르다는 ‘비교가 되는 두 대상이 서로 같지 아니하다’라는 뜻으로, 여기에는 정답이 있을 수가 없다. 단지 그 비교 대상이 같지 않을 뿐, 무엇이 더 낫다, 맞다를 전제하지 않는다.

필자가 ‘다르다’와 ‘틀리다’를 늘 신경쓰는 이유가 있다. 우선 진실을 탐구하는 학문을 하는 입장에서 공부를 거듭할수록 필자가 아는 것이 진실에 가까워지기보다는 오히려 ‘틀릴 수 있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박사로서 그리고 교수로서 10년 간 학술활동을 하면서 나름 공부를 했다고는 하지만, 그럴수록 아직 배우지 못한 것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래서 더욱 필자가 알고 있는 것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게다가 예전 같았으면, 잘 몰라도 우기고 지나가면 됐다. 바로바로 확인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같이 ICT가 발달한 상황에서는 수업에서든 혹은 학회에서든 조금이라도 사실과 다른 언급을 할 때 학생/청중은 바로 팩트체크를 한다. 그리고 필자의 발언이 사실이 아닌 순간 학자적 권위에 치명타를 입게 된다. 따라서, 필자는 조금이라도 확실하지 않거나 혹은 스스로 맞다고 확신하는 사항에 대해서도 늘 틀릴 수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대한다. 이러한 의심은 스스로 공부한 것을 재확인하고 나아가 새로운 학습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나아가 필자는 필자의 생각이 타인과 ‘다를 수 있다’는 마음가짐을 늘 가지고 있다. 필자가 처음 유학을 나가서 중국 유학생을 만난 적이 있다. 중국인과 대화를 나눈 것이 그때가 처음이었다. 평소 북한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필자는 조심스럽게 중국 유학생에게 한국전쟁에 대해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의외였다. ‘한국전쟁은 대한민국의 북침으로 발발한 전쟁’이라는 것이다. 필자에게는 그야말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20년을 넘게 살아가면서 한국전쟁은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것을 의심한 적이 없는데 전혀 다른 교육을 받은 중국학생들은 정반대로 한국전쟁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중국 유학생의 대답은 굳이 역사적 증거를 나열하지 않더라도 ‘다른’ 것이 아닌 ‘틀린’ 것이다. 비록 중국 유학생이 ‘틀리게’ 말을 했지만 중국의 정치적, 사회적, 교육적 맥락을 이해하면 왜 그 학생과 필자가 역사적 사실을 ‘다르게’ 인식하는지 알 수 있다. 정답이 있는 사안에 대해서도 그 맥락에 따라 ‘다르게’ 이해할 수 있는데, 하물며 정답이 없는 가치와 주장은 어떨까? 당연히 나와 상대가 생각하는 가치관이, 그리고 그 가치관 형성에 영향을 준 맥락이 서로 ‘다름’을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

장황하게 ‘다름’과 ‘틀림’을 설명한 이유는 우리 사회의 다양성을 논하고 싶어서이다. 우리 사회는 최근 들어 다양성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성별, 나이, 종교, 문화, 인종 등 개인이 가지는 특징이 ‘틀린 것’이 아닌 ‘다른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다양성이 적은 사회는 공통분모가 많아 쉽게 뭉치고 끈끈한 유대감을 가질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생각하는 바가 비슷하여 새로움을 추구하고 혁신을 도출하기엔 한계가 있다. 반면, 다양성이 높은 사회는 사회적 결속력이 느슨한 편이지만, 새로운 아이디어의 유입이 가능하고 나아가 혁신을 이룰 가능성이 높다. 다양성이 높은 사회가 좋은 사회인지, 혹은 그 반대인지는 각자가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우리 사회가 성별, 인종, 나이 등 여러 측면에서 다양성이 높은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는 우리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다양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 사회는 혁신을 통한 변화를 도모할 수 있다. 특히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살아가는 이 순간 혁신이 화두인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우리 사회의 다양성은 기회에 해당한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의 장관 임명을 두고 다양성의 부족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있다. 한편에선 국정은 능력을 인정받은 국무위원으로 꾸려야 하고, 따라서 능력위주의 인사를 하다 보니 다소 다양성이 낮아졌다고 항변한다. 그러나 다양성이 부족한 내각은 혁신을 도모하기 어렵고 나아가 4차 산업혁명에 대응하기 어렵다. 역설적으로 능력위주의 인사가 무능력을 야기할 수 있다. 대통령이 직접 임명할 수 있는 자리가 3000개에서 4000개 사이라고 한다. 남은 대통령의 인사권은 다양성을 보장해, 다양성이 제공하는 기회를 십분 활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

물론 이러한 필자의 주장도 누군가와 다를 수 있고, 또 필자의 생각도 틀릴 수 있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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