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서현 보도부장(아동가족/정외·19)
김서현 보도부장(아동가족/정외·19)

 

춘추에서 네 학기째다. 그간 내 기자소개란에 기재된 직함도, 대표기사도, 심지어 전공까지도 학기마다 바뀌었지만 ‘기자의 한마디’만은 초지일관이었다. 

바야흐로 콘텐츠의 홍수와도 같은 시대다. 매일매일 볼 것들이 새롭게 넘쳐난다. 굳이 뉴스가 아니고서도 눈 돌릴 곳이 너무 많다는 소리다. 특히 시각적 매체가 아닌 글 기사는 더 그렇다. 소외되기 쉬워졌다. 거기다 각자는 각자의 종교를 가진 세대다. 세대를 관통하는 하나의 시대정신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기자의 신념은 누군가에게는 필연적으로 쓰레기가 되고, 그 신념을 말하는 기자는 숙명적으로 ‘기레기’가 된다. 개별 언론사 하나하나의 입지가 좁아진 것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리라 생각한다.

캠퍼스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학보사의 위기라는 말이 제법 구전동화처럼 학습됐다. 대학생은 누구보다 사회적인 트렌드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때로는 흐름을 만들어나가며 그 중심에 있는 분자들이다. 캠퍼스 안이라는 특수상황이라고 해서 학내언론, 그것도 지면 언론의 입지가 예전과 같을 리 만무했다. 독자층을 확대하자든지 과거의 영광을 되찾자든지 하는 당찬 포부조차 억지스러울 정도다. 지켜보던 많은 눈도, 공통된 목표도, 합의된 옳고 그름도 사라진 이 작은 사회 속에서 보도부는 의식적으로든 자연적으로든 매 학기 부장이 바뀔 때마다 스스로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립해야 했다.

내가 부기자였던 시절 보도부는 마치 전문가 같았다. 오랜 학생사회 경험으로 학내 사안들을 깊숙이 알고 있는 부장들 덕분이었다. 정기자 시절 보도부는 독자들과 조금 더 가까워졌다. 기존보다 더 화제성 있고, 시의성 있는 기사들이 다수 발행됐다. 보도부 기사 장벽을 낮추고 싶다던 당시 부장들의 소중한 다짐이 반영된 결과였다. 비대면 학기가 저물고 2022학년도에 들어서면서는 시기적으로 학내 구성원이 대폭 물갈이됐다는 느낌을 받는다. 학생사회 판도도 변했다. 이제는 폐지된 총여학생회가 무엇이었는지 청소노동자 노조가 왜 매일 중앙도서관 앞에 진을 치고 있는지를 읽는 이들에게 처음부터 차근차근 설명해 줘야 하는 때가 왔다. 더 친절한 기사, 서로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기사를 쓰고 싶었다. 예전 같았으면 너무 당연한 말이라며 부장 선에서 자비 없이 잘렸을 부분조차 기사에 모두 담게 했다. 이번 학기 보도1부 기사들이 평균적으로 매수가 더 많아진 건 어쩌면 예정된 수순이었다. 그런 마음을 담아 2년간 고수했던 기자의 한 마디다. “이해가 오해보다 쉽기를”

위축된 입지와 축소된 독자층을 보며 회의감에 무력해지는 경우를 종종 봐왔다. 기자 개개인에게도, 춘추라는 집단 전체 분위기에도 예외는 없었다. 조회수라는 계량적 수치는 당장 우리에게 제일 가깝다. 그리고 단적이다. 눈앞에 보이는 숫자는 얼핏 결과로서 해석되기 충분하다. 그러나 한정된 여건과 사안의 경중을 고려해 아이템을 선정하고, 여기저기 긁히고 부닥치며 취재를 하고, 머리를 싸매며 동료들과 함께 기사를 쓰는 그 모든 일련의 과정은 숫자로만 미처 다 계산될 수 없는 일이다. 잔잔했던 학내 기관과 학생대표자들에게 돌을 던져 문제를 문제로 만들고, 삶을 내걸고 싸우는 사람들에게 작게나마 희망을 보태기도 했다. 광활한 캠퍼스 어느 곳도 기댈 언덕 하나 없는 절박한 사람들은 보도부의 문을 가장 먼저 두드렸다. 일명 ‘코로나 학번’의 후배님들 중 교내 정보를 찾다 우연히 춘추 기사를 접했고, 땅 한번 밟아보지 못한 학교에 대해 몰랐던 많은 이야기들을 알게 됐다는 말도 심심찮게 들었다. 그래서 늘 우리는 이 자리에 있어야 했고, 매주 신문을 만들어야 했다. 언젠가는 우리를 찾아올 누군가를 위해서. 그래서 더더욱 ‘이해되는 기사’에 집착할 수밖에 없기도 했다. 단 몇 줄의 활자로도 과열되고 분열되는 시대에, 찾는 이 없다고 단발적인 관심이 고파 미끼와도 같은 기사를 쓸 순 없었으니. 금 간 세태를 이어붙이긴 역부족이더라도 적어도 서로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 그 틈에 반창고 하나 겨우 붙일 수 있다면 좋겠다고, 감히도 생각했다. 고로 보도부 기사가 언제 누가 찾더라도 이해가 되고 믿음이 가는 기사들이기를 바랐다. 언제나 같은 자리에 굳건한 보도부이기를 바랐다. 학내언론은, 학보사는 존재 자체가 그 존재의 이유다. 

그래서 이곳의 각자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두가 진정으로 귀하다. 춘추는 이들 한명 한명의 눈물과 고뇌와 행복과 땀을 먹고 존재한다.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하는 우리 기자 네 명을 비롯해 보도부라는 이름으로 함께 묶였던 모든 구성원들에게 진심으로 고맙다. 부장으로서 많이 부족했음을 안다. 매주 마감 시간이 한정된 일을 하며 내린 내 결정과 판단이 필연적으로 기자들에게 부담도 불만도 갖게 했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부끄러운 장면도 불현듯 참 많이 떠올라 미안하고 괴롭다. 그러나 한가지 늘상 후회하지 않으려 노력하던 건 있었다. 기자들에게 고마움을 단 한 순간도 잊지 않고 싶었다. 자리를 지키고 시간을 버텨주는 기자들이 눈물겹게 고마웠기에 그러했다. 그들이 이곳에 쏟는 시간과 물질 그리고 그 무엇으로도 치환되지 않는 마음까지 어느 것 하나 당연스레 여긴 적 없다. 고맙다는 말은 직접 입 밖으로도, 쑥스러운 손가락과 펜 끝으로도 해도 해도 부족했다.

다른 부서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시선이 머무는 곳이 다를 뿐, 결국 본질적으로는 모두 다름없는 소명을 다하고 있다. 같은 시절에 같은 일에 몰두하고 있는 이들은 존재만으로도 나에게 든든했다. 내가 틀리지 않았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과욕일지 모르겠으나, 춘추에서 나름대로 자신만의 의미를 찾으려 헤매는 중인 이들에게 이 글이 작은 위로와 응원이 되기를 바란다.

임기를 마친다. 내가 이곳에서 써냈던 기사들이 전부 뜻한 바대로의 결과는 아니었을지라도, 이곳에 담겨있던 시간들은 모두 하나의 과정이었다고 믿는다. 연세춘추라는 길목에서 이 자리를 지켜줄 다음 사람을 기다려 버티고 선 초여름 어느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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