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근호(언홍영·17)
여근호(언홍영·17)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윤동주 「자화상」 中

 

윤동주의 시를 좋아한다. 시는 시인의 내면을 전한다. 윤동주는 내면의 우물을 시에 담았다. 윤동주의 내면은 한없이 깊으면서도 높다. 우울하면서도 희망차다. 그의 우물은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과 연민, 그리움으로 가득하다.

고등학교 때부터 나름 기자가 되겠다고 발버둥 치는 중이지만, 훌륭한 기사를 쓰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세월호 참사를 다루는 언론의 모습을 보고 기자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사람들의 관심을 쫓는 보도 경쟁은 피해자의 가슴을 난도질했다. 기자가 기사에 담는 것은 무엇인지 의문이 들었다. 이어지는 영자신문, 청소년언론, 대학신문 활동은 이러한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연세춘추에서 수십 개의 아이템을 발제하고, 이십여 번의 취재를 다녀왔다. 모든 기사가 소중하고, 모든 취재가 각별했다. 하지만 공영장례 취재만큼은 절대 잊히지 않을 것 같다. 무연고 사망자와 공영장례에 관한 기사를 준비하면서, 서울시 공영장례 현장을 직접 방문해 기사에 담고자 했다. 서울시 공영장례를 지원하는 ‘나눔과나눔’에 취재를 문의하고 일정을 잡았다. 처음부터 큰 의미를 부여한 기사는 아니었다. 하지만 취재를 진행할수록, 내가 기사에 담으려 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기사가 담는 것은 결국 사람이었다. 공영장례 현장의 분위기는 무거웠고 진중했지만, 우울로 차 있지는 않았다. 고인을 위하는 마음, 애도를 준비하는 열의, 유족을 맞는 정성으로 가득했다. 부끄러웠다. ‘나눔과나눔’에 취재 당위를 강조하면서, 현장이 담기지 않는 기사는 반쪽짜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현장의 분위기를 예단했다. 공영장례 뒤에 자리한 사람을 생각하지 못했다. 현장을 담는다고 사람이 담기지는 않는다. 사람이 없는 기사는 아무것도 아니다. 내 기사에는 사람이 있을까. 내가 쫓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언뜻 보면 세상은 우울로 가득 차 있다. 누가 더 슬프고 고통스러운지 경쟁하는 듯하다. 하지만 저마다의 우울을 걷고 외딴 우물을 가만히 들여다본다면, 그 안에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과 풍경이 가득하다. 우울을 뜻하는 영어 단어 ‘블루(Blue)’는 동시에 희망을 의미한다. 한없이 짙던 우울은 어느 순간 맑은 희망이 돼 있다. 한없이 밉고 가엾던 기억도, 나중에는 한 줌 추억으로 남아있다.

연세춘추 생활도 어느덧 3주밖에 남지 않았다. 이곳에서 정말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들 덕분에 내 우물은 한층 깊어졌다. 여전히 기자가 되겠다고 발버둥 치는 중이지만, 더이상 훌륭한 기사에 집착하지는 않는다. 다만 부끄럼 없는 기사를 쓰고자 한다. 모든 우울을 읽을 수는 없다. 다만 어떤 우울을 읽고 싶다. 파아란 바람과 가을을 품은 누군가의 우물을 전하고 싶다. 내 기사를 통해 서로의 우울을 읽는다면, 자신의 우울을 되돌아본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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