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근래 우리 사회의 이념 간의 대립이 극심한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본디 이념이라는 것이 사회를 바라보는 인식론적 틀을 의미한다고는 하나, 같은 시대의 같은 사회를 보는 와중에도 정치적 이념에 따라 해석의 양극화가 극심해진 것은 적지 않은 문제를 야기하는 듯하다. 모두가 일치된 생각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불가한 것이며, 그래서도 안 되는 것이지만 나와 다른 의견을 일체 배격하는 것 또한 민주주의의 자유와 존중의 정신과 어긋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정치권의 위정자들은 국민들의 극심한 분열을 부추기며 자신의 정치적 이득을 꾀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실정이다.

보수 대 진보라는 이념 구도는 상당히 그럴듯한 구분이지만 개인의 의견이 온전히 보수 대 진보의 이분법적 틀 속에 포섭되지는 않는다는 것은 사실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순전히 정치적인 관점에서 자신이 동일시하는 정치적 이념에 따라 무비판적으로 정치적 이념에 편승하도록 하는 것은, 적어도 공정한 상식의 관점에서 본다면, 온당할 수 없다. 헌법 제19조의 <양심의 자유>나 제20조의 <종교의 자유>, 제22조의 <학문, 예술의 자유> 등은 개인의 내면적 자유를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를 보편적 규범의 형태로 명시한다. 한 국가를 지탱하는 근본규범을 명시하는 헌법이 말하듯이 개인이 자신의 내면에 귀 기울이고 이에 따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자유를 존중하는 국가의 근본적 원리다. 이러한 원리는 지난 수천 년의 긴 역사를 통해 습득된 것이면서 동시에-우리의 경우에는-최근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생생히 경험된 가치기도 하다. 군사 정권 시절을 거쳐오며 개인의 자유로운 양심에 따른다는 것이 얼마나 달성되기 어려운 것이면서도 소중한 것인지를 몸소 체험한 것은 우리 현대사의 중요한 특징이다. 어쩌면 이러한 특수한 역사적 경험이 지금의 이념적 양극화의 주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른다.

이념의 양극화에 따른 반대 의견 배척이 가지는 심각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다른 사람의 의견을 충분히 존중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데 있다. 이는 달리 말하자면 자신과 다른 의견을 충분히 사려 깊게 고려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일종의 인의 장막을 스스로 친다는 데 있는 것이다. 자신의 눈과 귀를 가리는 것이 수직적인 권력의 힘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발적인 의지로부터도 비롯될 수도 있다는 것이 인간과 사회의 모순적 측면이다. 나는 다른 의견을 듣지 못하도록 강제될 수도 있지만 나 스스로 자신의 눈과 귀를 가려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양심의 자유나 종교의 자유, 더 나아가서는 학문활동과 예술활동의 자유는 개체적 존재로서 각 개인이 사회적 상황이나 시대적 요구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이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이에 따를 수 있도록 하는 것을 가능케 해주는 원리이다. 특히 헌법 제22조에서 가리키는 학문활동과 예술활동의 자유는 그것을 단지 내면적으로 생각하는 차원을 넘어서 공개적으로 알리고 밝힐 수 있는 자유를 함의한다는 점에서 뜻 깊다. 제19조에 명시된 양심의 자유로부터 발원하는 학문의 자유는 지극히 개인적일 수 있는 진리를 그 자체로서 존중한다는, 그러니까 개체적 진리를 사회적으로도 포용하겠다는 실천적 의지의 표현인 셈이다.

헌법 제31조 4항에 명시된 대학의 자율권도 학문활동의 자유를 위한 조항이라고 할 수 있다. 학문 연구의 본진이면서 진리 탐구의 산실인 대학의 자율권을 보장하는 것이 학문의 자유를 보장하는 가장 일차적인 길이면서 나아가서는 양심의 자유를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길이기도 하다. 학문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그토록 중대한 문제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우리의 일상이 진리에 다가서 있는 것이기보다 이해관계에 기초한 정치적 논리에 오염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마주한 심각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우리의 일상이 지나치게 정치화돼 있다는 것, 즉 정치적 이념과 구호가 넘쳐 난다는 점에 있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일상을 조율하고 관장하는 것이 정치라고 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정치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함께 고려돼야 할 진실은,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이 정치적 논리에 포섭될 수는 없다는 점이다. 개인의 삶은 정치와 관련된 것이면서도 정치적 논리나 이념보다 근본적인 차원에 속해 있다. 각 개인은 시민이나 국민이기 이전에 각 사람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각 사람이 발 딛고 있는 토대는 정치가 관장하는 현실이라 할 수 있지만 정치가 관계하는 것은 삶의 거시적 차원과 토대지 삶의 부분부분 모두는 아니다. 만약 정치가 개인의 일상 속에 빠짐없이 침범해 있다면 그러한 정치는 더 이상 참된 의미에서의 정치가 아닌 억압이 될 것이다. 매일의 삶에 정치의 이념적 논리가 스며 있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그러므로 이념이 양극화되고 정치적 논리가 과잉돼 있는 사회의 모습이 필히 억압적인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치적 논리가 아닌 진리에 다가서려는 노력을 무산시키는 것이 타인의 의견을 충분히 존중하지 않는 태도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혹은 나는 정상이고 너는 비정상이라는 식의 논리는 사실이나 진리에 대한 세밀한 고려를 방해한다. 진리에 보다 다가서려 노력하고, 그 과정에서 보다 사실에 걸맞는 것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학문 자유의 본질이다. 이것은 개인적 양심의 문제이면서 학문활동의 정직성을 암시한다. 개인의 양심과 진실에 따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지 않는 상황에서 단지 허울 뿐인 규정만 남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실질적인 학문활동의 자유를 보장하기 어려울 터이다.

오늘의 이념 과잉이 우리 사회 곳곳에 퍼져 있는 분노와 증오, 적대의 정서와 연결되는 것도 이러한 현상과 연결돼 있다. 이념의 과잉은 분노와 증오, 적대를 부추기는 원인으로 작용하면서도 반대로 분노와 증오의 감정이 이념적 과잉을 야기하기도 한다. 이 두 가지는 쌍을 이루어 악순환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리해 정치적 논리에서 파생되는 분노의 감정이 진리 탐구의 영역에까지 옮아간다. 거듭 강조하건대 지극히 정치적인 논리는 우리 삶의 공간을 억압적인 것으로 만들 뿐만 아니라 나아가 개인의 정신적 자유의 영역까지 침범한다.

깊이 생각해보자면, 정치적 논리나 이념이라는 것도 그 자체로서만 놓고 본다면 많은 편의를 가진 설득력 있는 가설이기도 하다. 이념 혹은 이데올로기가 지난 인류 역사에서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연유도 이데올로기가 단지 현상들의 단순화나 일반화에 지나지 않고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데올로기는 사회를 지탱하는 사상적 구심을 이루면서 많은 편의를 제공해왔다. 이것은 보편 규범으로서 헌법이 가지는 성격의 단면이기도 하고 인간 사회가 피해갈 수 없는 불가피함이기도 하다. 핵심적인 것은 정치적 이념이나 이데올로기를 주목할 때 그것의 가설적 성격을 잊지 않는 것이다. 삶의 해석에 전체성을 부여하는 정치적 이념은 반드시 개체적 진실과 조화를 이룰 때 그 진실성이 견지될 수 있다. 이념이라는 것은 사실과 관련되는 것이면서도 삶의 당위적인 측면과도 깊이 관련되기 때문에 이것은 개체적 진실에도 닿아 있어야만 마땅하다. 하지만 개체적인 것이란 각자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게 마련이다. 개인의 실존적 경험에 근거하는 진실이란 이념적 전체로 일반화될 수 없는 법이다.

그러나 학문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것이 비단 정치적 논리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 논리 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 뿌리깊이 내재한 생산성과 단기적 유용성에 대한 집착 역시 학문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요인 가운데 하나이다. 자금을 조달하는 중앙 정부의 입장에서 학문 연구의 유용성을 가늠하는 것이 일정 부분 불가피한 면이 있다고는 하겠으나 학문 연구가 단기적 유용성에만 복무한다면 진리 탐구 본연의 목적과는 상당히 멀어질 수밖에 없다. 학문 연구는 무엇보다 진리를 겨냥하는 것이다. 탐구의 성과나 생산성, 유용성은 진리 탐구에 기여하는 바에 따라 사후적으로 가늠되는 것이지 생산성과 유용함이 먼저 전제되고 이에 따라 진리 탐구가 존재할 수는 없다. 시대적 상황의 요구에 복무하는 것이 학문활동의 의무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을런지 모르지만 그것이 시대적 요구를 초월하는 진리에 대한 탐구보다 우선돼서는 안되는 법이다. 헌법에 규정된 학문활동의 자유나 대학의 자율권이 지나치게 추상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는 학문의 자유와 대학의 자율을 말하면서 동시에 이를 침범하는 듯한 우를 너무 자주 범하는 것이다.

물론 학문의 자유는 보편적 가치들과 양립가능해야 할 것이다. 학문의 자유라는 미명 하에 타인의 인격을 말살할 수 있는 허위 사실 유포나 왜곡, 조작, 혹은 사회 구성원의 아픔을 공감하지 못하는 몰이해,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연구에 대해서는 얘기가 달라진다. 거듭 강조했듯이 학문활동의 본질에는 진리에 대한 탐색이 자리하고 이때의 진리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양립가능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 가치라는 것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 가변적일 수 있는 모호한 실체일 수 있다. 때문에 학문활동의 자유는 신중하게 다루어져야 하는 것이고 한편으로는 신성한 규범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대학의 자율권과 학문의 자유에 대한 보편적 규정이 보다 구체화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이 지점이다. 시대적 요구나 정치적 상황에 구애받지 않는 자율성은 온전한 학문활동을 위한 조건이다. 대학의 자율권이나 학문의 자유라고 포괄적으로 규정된 것은 헌법과 법률이 보편 규범이라는 성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진리 탐구의 본연에 더 다가설 수 있는 구체화된 법률이 고안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타당한 생각일 것이다. 정치적 이념, 상황의 소용돌이와 이해관계로 인해서, 혹은 경제적 요구에 따라 학문의 자율성이 온전히 보장받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극복해야만 하는 어려움이다. 학문의 자유가 독재 정부의 검열을 피하는 소극적 수준을 넘어서 적극적 의미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이러한 자율성이 법의 힘을 빌리는 것이 타당하느냐는 물음도 던져볼 수 있다. 사회의 모든 부문이 법의 지배 아래 놓여 있는 것도 그다지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있다. 참된 자유는 법 없는 자유다. 그러나 법의 규율 없이도 보장되는 학문의 자유란 대단한 의식의 전회를 요구한다. 의식의 전회가 먼저이냐 법적 규정이 먼저이냐는 계몽주의 철학자 루소가 고민한 문제기도 하다. 우리는 학문의 자유에 대해서도 이 문제를 깊이 고민해봐야 한다. 이제 우리 사회도 학문의 자유와 진흥에 대해 더 발전된 고민을 해야 할 시기가 도래한지도 모른다.

 

신준수(철학·20)

 

*기고자의 의견일 뿐 우리신문사 입장과는 무관함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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