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예서 사회부장(경영·19)
김예서 사회부장(경영·19)

 

돌이켜보면 나는 ‘어린이’인 게 좋았다. 언니와 11살 터울이 난다고 할 때마다 ‘집에서 예쁨 받겠다’는 말을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친척 일가 중 유일한 어린이였던 나는 그 사실이 꽤나 자랑스러웠다. 평생을 어른으로만 살아야 하는 이들과 달리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나를 설레게 했다.

아동 문학가 방정환 선생은 ‘어른’에 대한 대칭어로 ‘어린 사람’이라는 뜻의 ‘어린이’를 처음 고안해냈다. “어린이에게 경어를 쓰시되 늘 보드럽게 해 주시오.” 이는 어린이를 더 이상 어른의 소유물이 아닌 독립적인 인격체로 대우하자는 의미다.

100년 전, 아이들은 ‘애놈’ ‘애새끼’ ‘자식놈’이라 불렸다. 우리 사회 구성원으로서 전혀 존중받지 못했음을 엿볼 수 있는 호칭이다. 현재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어린이로 살기가 참 팍팍하다. 어린이를 향한 사회적 잣대가 엄격해지면서 어린이들의 입지가 날이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최근 무비판적으로 사용되는 ‘-린이’라는 신조어는 그런 의미에서 곰곰이 생각해봄직 하다. ‘무언가에 미숙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를 일컫는 말이다. 때로는 어리버리한 초심자의 면모를 놀리는 용도로 사용된다. 자신은 아직 부족한 ‘-린이’에 불과하니 ‘너그럽게 이해해달라‘는 뜻이기도 하다. ‘요린이(요리+어린이)’ ‘헬린이(헬스+어린이)’ ‘주린이(주식+어린이)’ 등 각 분야의 초보자를 ‘-린이’라 표현하는 식이다.

어른들은 ‘어린이’라는 말로 자신의 미성숙을 포장하기 시작했다. ‘-린이’의 반댓말로 ‘-른이’라는 합성어가 등장하면서다. 어리숙한 ‘헬린이’의 반대편에는 능숙하게 운동을 소화해내는 ‘헬른이’가 있다. 누군가를 능숙하게 가르치는 것은 ‘어른’의 몫이고, ‘어린이’는 그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어린이가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만 하는 ‘불완전한 존재’라는 인식이 여기에 있다.

어른들의 구분짓기 속에서 어린이들은 ‘미성숙한 아이’로만 대상화되고 있다. 과연 어린이를 미성숙하다고만 규정해도 될까. 그저 나이가 다를 뿐, 어린이는 어른보다 뒤처진 존재가 아니다. 어린이는 ‘어른이 되기 위한 준비 단계’가 아니라, 어른과 동등한 인격체라는 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린이’라는 표현이 어린이들을 비방하고 폄하할 불순한 의도가 아니라는 반문이 있다. 어린이는 필연적으로 부족한 존재가 아니냐는 지적도 존재한다. 그러나 ‘어린이는 미숙하다’는 판단의 기준 역시 어른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린이’라는 표현을 마음대로 가져와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어른들의 권력을 보여준다.

어린이는 무한한 가능성이 내재된 존재다. 어쩌면 우리 어른들은 어린이에게 내재된 고유한 ‘어린이다움’을 마음대로 규정 짓고 있던 것은 아닐까. 최소한 어린이를 어린이의 것으로 남겨둬야 한다. 2022년 5월 5일. 어린이를 위한 사회를 100번째 외치는 날이다. 이제는 어린이의 시선으로 차별의 언어를 바꿔나가자는 약속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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