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서(글창융경영·21)
손현서(글창융경영·21)

 

스무 살이 됐던 첫날을 누가 잊을 수 있을까. 힘들었던 수험생활을 끝내고 맞이한 자유,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나 또한 성인으로 내딛는 첫발은 설레고 두려웠다. 내가 느꼈던 세상은 꿈인 것처럼 다 바뀌었던 것 같다. 당시에 나는 원하던 학교에 합격하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 ‘나의 선택에 관한 결과는 오직 나만이 질 수 있다’라는 생각으로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살아갈 방법에 대해 찾아보곤 했다. 공무원, 학점은행제, 사업 등 내가 원하지 않던 미래를 그리고 있던 나는 꽤 우울했던 시절을 보냈던 것 같다. 그러던 차에 가정에도 암울한 시기가 찾아왔다. 부모님의 건강이 갑자기 안 좋아진 것이다. 낮에는 식당 아르바이트를, 저녁엔 어머니 병간호를 했다. 새벽에 병실 간이침대에 누워 많이 울었다. 제일 친했던 친구에게 시간이 많은데 자기와 놀아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마음 아픈 절교를 당하기도 했다. 왜 힘든 일은 한꺼번에 오느냐며 신을 많이 원망했다.

보통 스무 살이 되고 대학에 가기 전 운전면허를 많이들 따는데, 나는 그 시기에 쓸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친구들이 면허를 따지 않는 이유를 물어볼 때면 ‘차를 운전하는 게 무서워서’라는 변명을 했다. 그 시간에 나는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자신을 정신적으로 학대했다. 그런 와중에도 가족을 챙겨야 했다. 암울했던 겨울이었다. 병실에서 ‘쇼코의 미소’라는 책을 읽었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상황이 나와 비슷해서였기 때문이다. 영화계 진출을 꿈꿨지만 시간이 지나며 현실과 타협해버린 주인공과 가족을 위해 대학진학을 포기한 주인공의 친구 얘기였다. 나의 삶은 둘의 얘기를 섞은 삶이었다. 패션계에 나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과 가족을 위해 안정된 삶을 추구해야만 했던 나의 현실이었다. ‘어디로 떠나지도 못하면서 그렇다고 그렇게 박혀버린 삶을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의 맨얼굴을 들여다보는 일은 유쾌하지 않았다.’, ‘그래서 꿈은 죄였다. 아니, 그건 꿈도 아니었다.…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이미 죽어버린 지 오래였다. 나는 그저 영화관에서 비중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꿈, 그것은 허영심, 공명심, 인정욕구, 복수심 같은 더러운 마음들을 뒤집어쓴 얼룩덜룩한 허울에 불과했다.’ 책에 형광펜을 그으며 마음속으로 곱씹으며 새겼던 구절이다.

나만 빼고 행복하고, 따뜻했으며, 아름다웠을 1, 2월이 지나갔다. 그때의 나는 그저 껍데기. 생각이나 감정 따위를 신경 쓰기에 너무 지쳤었다. 분명 지쳤는데도 더 지쳐가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정시 점수로 이곳 연세대학교 미래캠퍼스에 입학할 수 있었고, 3월부터 대학생이라는 시작을 할 수 있었다. 교수님의 수업을 듣고, 동기들과 만나며 추억을 쌓으며 진정한 스무 살이 된 것만 같았다. 부모님의 건강도 그때부터 호전돼, 더는 병원에 다니지 않아도 괜찮게 됐다. 내가 버는 돈으로 여행도 다니고 사고 싶은 것도 사며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대학생의 삶을 얼추 따라 할 수 있었다. 우정, 사람, 꿈이라는 무형의 가치를 기대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열정을 가지고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다시 그때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발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지금 스물한 살의 나를 보고 다른 사람들은 열심히 사는 모습을 칭찬한다. 부럽다고 말하기도 하고, 닮고 싶다는 감사한 말을 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겪어야만 알 수 있는 우울의 늪과 눈을 뜨면 보였던 병실, 내일에 대한 두려움, 자유로웠지만 스스로 가했던 제한, 그 모든 것들이 나를 움직이게 만들고 있다. 그래서 나는 겁쟁이다. 아무것도 없는 그때로 돌아갈까 봐 끊임없이 애를 쓴다. 누군가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현서 너는 네가 이 정도를 해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맞는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나는 힘들었기에 지금 주어진 시간과 자유를 쓰고 싶다. 열정은 비참함과 섞인 절규로 내 안에서 아직까지도 맴돈다. 빛이 있는 것은 어둠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을 기억한다.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는 이유는 어두웠던 그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 기억을 잊으려고 노력하기보단, 글로 남김으로써 비망(備忘)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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