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동물권기록 활동가 홍은전을 만나다

▶▶홍은전은 교사로 일하던 노들야학을 떠나 인권‧동물권기록 활동가, 작가,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홍은전은 교사로 일하던 노들야학을 떠나 인권‧동물권기록 활동가, 작가,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균형 감각이 부족하다”는 홍은전(43)은 여러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해내는 게 어려운 사람이다. 하나에 제대로 집중하려면 주변의 스위치를 모두 꺼야 한다. 대학 시절 전공 공부보다 학생회, 학회 같은 학내 공동체 활동에 열심이었다. 사범대 4학년이 됐지만 임용고시를 준비할 스위치를 제때 켜지 못했다. 늦게 공부를 시작하려니 조바심이 났다. 임용고시를 접고 잠시 방황하다가, 1년간 야학 교사를 하며 쉬는 시간을 갖기로 마음먹었다. 포털사이트에 ‘야학’을 검색하자 가장 상단에 뜬 노들장애인야학(아래 노들야학). ‘아무것도 모른 채’ 그곳에서 야학 교사를 시작한 그는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세계로 빠져들었다. 장애인에게도 존엄한 공동체가 있다고 말하는 그곳에서 ‘인권’이라는 스위치가 하나, 그에게 새로 생겨났다.

그는 노들야학과 깊은 사랑에 빠졌다. 관심조차 없던 장애인의 열악한 삶이 ‘문제’로 읽히기 시작했다. 이 낯선 세계의 스위치를 누를 때마다 장애인 교육권, 이동권, 탈시설이라는 생생한 현실이 눈앞에서 번쩍였다. 그곳에서 장애인은 차별받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차별에 저항하고 세상을 바꾸는 존재임을 깨달았다. “세상의 변화는 ‘장애인’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아니라 ‘장애인에게 닥쳐온 어떤 세상’에 대해 이야기할 때 시작된다”는 그는 “불의와 비참에 저항하는 기적같은 존재들”을 찾아 여기저기 인권의 스위치를 켜놓기 시작했다.

지난 2019년 반려묘 ‘카라’와 ‘홍시’를 입양하고 두 번째 사랑이 찾아왔다. 동물적인 언어로 대화하고 서로의 존재를 탐색해나가는 세계가 또 한 번 새로웠다. 이들의 소리와 몸짓을 공부하다 보니 인간 중심적 세계에서 착취당하는 동물들의 고통이 들리기 시작했다. ‘동물권’이라는 두 번째 스위치가 켜지는 순간, 동물에 대해 갖고 있던 편견은 이미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어떤 존재를 만날 때 내 안의 무언가가 무너지는 순간이 좋아요. 여태껏 상상해보지 못한 세계가 열리는 경험이거든요. 더 알고 싶고, 그곳에 풍덩 빠지고 싶고, 그렇게 새로운 사랑이 시작돼요.”

노들야학 교사, 인권‧동물권기록 활동가, 작가, 칼럼니스트. 해를 거듭할수록 그를 소개하는 직함이 하나둘 늘어난다. “나를 어떻게 소개해야 할까, 이게 참 어렵더라고요.” 자기소개를 부탁하자 그는 몇 초간 생각에 잠겼다. 요즘엔 인권과 동물권 중 어느 곳에 서 있어야 할지가 큰 고민거리다. 그럼에도 다른 위치에서 다르게 싸우는 두 운동이 어떤 식으로든 조우해야 한다고 믿는다. 어느 쪽이든 배우고 기록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 그를 지난 3월 22일 우리신문사 편집국에서 만났다. 4시간에 걸친 인터뷰는 여태껏 그가 만나 온 존재들에 대한 존경과 감탄으로 가득했다. 그가 새로운 세계에서 마주한 이야기와 이를 기록하는 글쓰기 작업에 대해 들었다.
 

▶▶지난 2009년 시설에서 뛰쳐나온 8명의 중증장애인과 탈시설 농성을 하던 때. 홍은전은 장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노들야학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장애인은 차별받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차별에 저항하고 세상을 바꾸는 존재임을 깨달았다. 홍은전 제공
▶▶지난 2009년 시설에서 뛰쳐나온 8명의 중증장애인과 탈시설 농성을 하던 때. 홍은전은 장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노들야학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장애인은 차별받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차별에 저항하고 세상을 바꾸는 존재임을 깨달았다. 홍은전 제공

 

사랑할 수밖에 없는 노들야학

 

Q. 노들야학 교사를 하며 장애에 대해 처음 배우셨다고요.

A. 처음엔 우연히 노들야학을 찾았지만, 그래도 1년간 뭐라도 배우고 공부할 수 있는 곳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왠지 그런 곳일 것 같았거든요. 노들야학엔 저처럼 방황하고 바깥과 불화하는 사람들이 많이 와요(웃음). 물론 굉장히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어요. 장애에 대한 고민을 갖고 이곳에 도움이 되고 싶어서 오거나, 목적의식을 갖고 장애 운동을 하러 들어오기도 해요. 저는 책보다는 사람들 속에서 장애를 배운 것 같아요.

 

Q. 생각하던 곳이 맞으셨나요.

A. 아, 빨리 발을 빼야겠다 싶었어요(웃음). 싫어서가 아니라, 더 좋아하면 안 될 정도로 매력적이라서요. 버스 점거 시위 영상을 보자마자 너무 좋았거든요. 당시 노들야학 교장이었던 박경석이 손목에 찬 사슬을 핸들에 묶어서 버스가 전진하지 못하게 막고 있고, 밖에는 장애인들이 비장애인들과 함께 온몸으로 버스를 에워싸고 있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장애인들의 모습이었어요. 제가 가지고 있던 장애에 대한 막연한 생각이 모조리 깨져버린 거죠.

 

Q. 장애에 대한 편견이요?

A. 그렇죠. ‘노들야학에 가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될 거야’, ‘거기엔 어떤 사람이 있을 거야’ 이렇게 구체적인 문장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편견이 머릿속에 있었던 거니까요. 그게 전부 다 깨진 거예요. 그렇게 ‘노들야학 너무 멋있다’ 생각하면서 첫눈에 반해버렸어요.

 

Q. 노들야학을 정말 사랑하신 것 같아요(웃음). 뭐가 그렇게 좋으셨나요?

A. 이유가 참 많은데,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을 듯이 싸우는 게 그렇게 좋았어요(웃음). 밖에서 보면 되게 아름다운 곳인데, 안에서는 ‘수업이 중요하다’ 파와 ‘데모가 중요하다’ 파가 너무 무섭게 싸우는 거예요. 우리의 한정된 에너지를 더 좋은 수업을 만드는 데 쓸지, 나가서 구호를 외치는 데 쓸지 논쟁하는 거죠. 학생들의 삶에서 출발한 문제의식을 존중하면서도, 서로 다른 방향에서 치열하게 싸울 수 있다는 사실이 저는 굉장히 놀라웠어요. 

 

Q. 노들이라는 세계가 참 멋져요. 학생들과 무엇을 함께하셨나요?

A. 학교에 다니지 못한 중증장애인분들이 노들야학에 다니세요. 수업 듣고, 모꼬지도 가고, 한 달에 한 번씩 회의도 하고, 단합 대회도 하고, 가끔 영화도 보러 가고 다 해요. 집회도 많이 나가죠(웃음). 그러니까 여기는 하나의 ‘공동체’예요. 가령 야학을 가려고 200kg이 넘는 전동 휠체어로 지하철 리프트를 타다가 계단을 구르는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데, 노들야학은 이들이 겪는 이동의 문제, 그리고 삶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공동체예요.

 

Q. 와. 삶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학교라니. 무엇을 배우셨는지도 궁금해요.

A. 저한테도 노들야학은 학교였어요. 그곳에서 완전히 다른 교육을 받았어요. 학생들에게 장애가 있다는 것도, 앞으로 이들을 만나게 될 거라는 것도 기존의 교육은 전혀 말해주지 않았으니까요. 이들로부터 새로운 ‘관계’를 배웠어요. 노들야학은 20여 년 동안 집 안에 갇혀서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사람이 집 밖으로 나와 무수한 관계망 속에서 낯선 세계를 감각적으로 배울 수 있는 곳이에요. 세상의 속도와 다른 새로운 관계가 노들야학 공동체에서 맺어진다고 생각해요.

 

Q. 2014년에 노들을 떠나셨어요. 13년간의 교사 생활이 끝난 마음은 어떠셨나요?

A. 노들야학이 계란으로 바위를 치면서 만들어낸 놀라운 변화를 보고 사랑에 빠졌지만, 13년 뒤에 그 사랑이 끝났어요. 그러고 7년이 더 지나서 ‘사랑이 끝났다’는 말을 떠올렸는데, 노들을 떠난 이유가 그제야 명쾌해졌죠. 거리를 두고 노들을 바라보면서 저곳이 얼마나 독특하고 새로운 공동체인지도 알게 됐어요. 노들야학과 장애 운동의 이야기, 이 사회와 다르게 충돌하는 장애인들의 이야기를 쓸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구나, 생각하면서 글을 쓸 용기를 냈죠.

 

▶▶노들야학을 떠난 홍은전이 앞으로의 길을 찾아 헤매던 와중, 인권기록 활동이 그의 삶에 화살표를 그려줬다. 그는 기록 활동가 동료들과 함께 『금요일엔 돌아오렴』, 『숫자가 된 사람들』, 『아무도 내게 꿈을 묻지 않았다』 등을 펴냈다. 홍은전 제공
▶▶노들야학을 떠난 홍은전이 앞으로의 길을 찾아 헤매던 와중, 인권기록 활동이 그의 삶에 화살표를 그려줬다. 그는 기록 활동가 동료들과 함께 『금요일엔 돌아오렴』, 『숫자가 된 사람들』, 『아무도 내게 꿈을 묻지 않았다』 등을 펴냈다. 홍은전 제공

 

차별이 저항이 되는 일이란

 

홍은전은 노들야학을 떠나며 그곳의 20년사를 톺아보는 『노란 들판의 꿈』을 썼다. 노들야학이 청춘의 전부였던 그는 그곳과 분리된 자신의 모습을 종종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앞으로의 길을 찾아 헤매던 와중, 인권기록 활동이 그의 삶에 화살표를 그려줬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이 들 때마다 곁에 사람들이 나타나 주더라고요. 인권기록 활동가들을 지도 삼아 열심히 현장을 따라다녔죠.”

동료들을 좇아 언론이 주목하지 않는 이야기를 기록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 형제복지원‧선감학원 피해 생존자, 화상 경험자들은 용기를 내어 당신들의 인생을 들려줬다. ‘인권기록 활동가’라는 직함을 달고 글을 쓰기 시작하며 동료들과 함께 『금요일엔 돌아오렴』, 『숫자가 된 사람들』, 『아무도 내게 꿈을 묻지 않았다』 등을 펴냈다.

 

Q. 기록 활동을 위한 심층 인터뷰를 꾸준히 해 오신 걸로 압니다.

A. 최근엔 사회복지법인 프리웰의 독특한 역사와 그곳에서 운영하는 장애인시설을 나온 발달장애인분들의 생애를 기록하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프리웰이 법인 차원에서 시설을 폐지하고 그곳에 살던 장애인 모두에게 탈시설 지원을 연계했는데, 아주 혁명적인 일이죠.

 

Q. 발달장애인 인터뷰는 기록 활동가로서도 굉장한 도전인 것 같아요.

A. 발달장애인은 비장애인과 언어로 소통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신체장애인에 비해 사회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아요. 내가 몇 살인지, 어디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말하지 않는 사람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건 정말 어려워요. 이게 인터뷰로 될 일인지, 언어를 너무 맹신하는 건 아닌지, 그 사람을 둘러싼 맥락을 총체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하며 다양하게 기록을 시도하고 있어요.

 

Q. 인권기록 활동가로서 기억에 남는 분이 있으신가요?

A. 얼마 전 ‘준영이 엄마’를 만났어요. 세월호 참사로 아들을 잃고 2014년 5월에 대통령을 만나겠다고 청와대를 가려는데 한 전경이 눈물을 글썽이며 “어머니, 저도 준영이에요”라며 다친다고, 물러나라고 애달프게 어머니를 막아섰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그 전경의 이름도 ‘준영이’였던 거예요. 당시 어머니가 그걸 듣고 너무 놀라셨대요.

 

Q. 왜 놀라셨죠.

A. 그만하라는 그 말을 아들 준영이가 당신에게 하는 것 같았대요. 전경을 뚫고 가면 당신 앞의 ‘준영이’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죄책감에 시달려 며칠을 끙끙 앓으셨대요. 이걸 보면 세월호 참사 당시 선내에 흘러나온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 도처에서 굉장히 다양한 얼굴로 우리를 덮쳐 오는 것 같아요.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가로막는 목소리죠. 그럼에도 준영이 엄마는 유가족들을 향한 사회적 비난을 감수하며 광장으로 나갔어요. 어떤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어디에 힘을 실어줘야 하는지 끊임없이 성찰하고 결단하는 사람만이 광장으로 나갈 수 있어요. 준영이 엄마의 이야기에서 ‘계속해서 싸울 수 있는 힘’이 느껴졌던 것 같아요.

 

Q. ‘차별받는 사람’이 계속해서 싸우며 ‘저항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게 놀라워요.

A. 사람들은 차별받는 사람과 저항하는 사람이 같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둘은 완전히 대척점에 있어요. 차별받는 사람이 저항하는 사람이 되려면 ‘공동체’가 필요해요. 차별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공동체를 만들어요. ‘이건 내 잘못이 아니다’, ‘나는 사회적으로 소중하고 가치 있는 사람이다’, ‘내가 차별받은 경험이 차별받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중요한 목소리가 된다’ 이런 걸 공동체 안의 관계를 통해 서로 배워나가요. 그렇게 광장에서 마이크를 잡고 위험을 감수해가며 저항하는 거예요. 그런데 차별받는 사람들끼리 공동체를 만들면 그건 ‘꽃동네’가 돼요.

 

Q. 공동체가 아니라 ‘시설’이 된다는 거죠?

A. 그렇죠. 시설은 그냥 한곳에 몰아넣는 거예요. 관계의 변화에 전혀 관심이 없고, 그들끼리도 잘 모이지 않아요.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왜 계속해서 모이고 싸울 수 있었냐면 그들이 울 때, 계속해서 울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주는 안산 지역 공동체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개인을 바꾸려는 노력보다 더 중요한 건 오래 지속되고 힘이 센 공동체를 함께 만드는 거죠. 차별받은 사람이 광장에 나와 마이크를 잡기까지, 저는 이러한 변신이 늘 놀랍고 아름다워요.

 

Q. 노들을 떠나도 장애 운동을 향한 관심이 꾸준하세요. 최근엔 장애인 운동사를 기록한 『유언을 만난 세계』를 함께 펴냈고, 「비마이너」에 장애해방 운동가들의 생애 기록을 연재하셨어요.

A. 그동안 제가 노들 안에 있었다면, 이젠 밖에서 보이는 것들을 기록하는 중이에요. 이를테면 중증장애인으로 살며 싸워 온 박명애라는 분이 있어요. 47년간 집 안에만 계셨어요. 어렸을 때 밖에 나가려고 하면 아버지가 불같이 화를 내셨대요. 50대가 돼 광장에서 마이크를 잡은 그가 이렇게 말해요. “아빠가 나를 다시 데리고 들어가더라도 그때 나가야 했다. 다치고 싸우고 놀림을 받더라도 그때 나가야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참 아파요. 그의 우주가 딱 방 한 칸일 때, 집회를 하면서 그 작은 인간이 뻥튀기하듯 커질 때를 같이 놓고 보면 공동체라는 게 인간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만들 수 있다는 걸 느끼게 돼요.

 

Q. 기록에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구절이 많아요. 부끄럽다고 감추는 게 아니라, 모르는 만큼 배우고 쓰려는 마음가짐이 느껴졌어요. 부끄러움을 감당하는 힘은 어디서 나오나요?

A. 진짜 부끄러운 건 안 쓰죠(웃음). ‘말해도 괜찮을 거야’, ‘말하면 뭐가 나올 거야’ 싶은 이야기가 있죠. 부끄럽지만 좋았던 경험을 쓰는 거예요. 노들야학 교사 시절, 학생이던 꽃님씨가 자기 침대 밑에 보관하고 있던 현금 2천만 원을 탈시설 운동을 위해 써달라고 저한테 대뜸 건네준 적이 있어요. “조선시대도 아니고 누가 돈을 집에다 보관해요”라고 하니 “통장에 2천만 원 있으면 수급권 탈락해”라고 말해요. 진짜 부끄럽죠. 나를 정말 낯 뜨겁게 한 그가 너무 멋있을 때, 이 뭉뚱그려진 감정을 잘 소화해서 설명하고 싶을 때, 저는 글을 써서 부끄러움의 디테일을 만들어요. 그걸 사람들한테 보여준 뒤에 오는 희열이 진짜 크거든요. 부끄러움이 ‘감당할 가치가 있다’고 느낄 만큼.

 

▶▶홍은전은 지난 2019년 반려묘 카라와 홍시를 입양하며 동물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는 동물들이 ‘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탈(脫)육식을 결심했다. 홍은전 제공
▶▶홍은전은 지난 2019년 반려묘 카라와 홍시를 입양하며 동물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는 동물들이 ‘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탈(脫)육식을 결심했다. 홍은전 제공

 

우리는 모두 동물이다

 

홍은전의 부끄러움은 ‘비인간 동물’로 뻗어나갔다. 그동안 동물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노들야학과 기록단 같은 ‘공동체’에만 속해 있던 그가, 고양이와 ‘일대일 관계’를 맺을 때 느낀 기쁨은 꽤나 생경한 것이었다. 부끄러움은 그의 삶을 바꾸는 에너지가 됐다. 지난 2020년 출간한 『그냥, 사람』의 인세를 노들야학과 동물권단체 디엑스이 코리아(DxE Korea, 아래 디엑스이)에 절반씩 기부한 것도 같은 이유다.

카라와 홍시는 그를 동물의 세계로 안내했다. “고양이는 인간에 대한 보은으로 자신이 사냥한 새나 쥐를 데려다 놓곤 한다는데, 나의 고양이는 매일 내 앞에 동물원에 갇힌 오랑우탄, 수족관에 갇힌 범고래, 위 안에 플라스틱이 가득 찬 앨버트로스 같은 존재들을 데려와 나를 식겁하게 했다.” (홍은전, 『그냥, 사람』) 그렇게 그의 상식과 세계가 통째로 무너져 내렸다.

 

Q. 고양이, 오랑우탄, 범고래, 앨버트로스. 멀리 떨어져 있는 것들처럼 보여요. 어떻게 고양이를 통해 다른 동물의 존재에 눈을 뜨게 되셨나요?

A. 그 세계가 한 번에 오진 않았어요. 일단 너무 사나운 고양이거든요(웃음). 보자마자 사랑에 빠진 게 아니라, 공부도 하고 거리랑 힘 조절하는 법을 익히는 시간을 가졌어요. 언어를 쓰지 않는 존재, 소리로 말하는 존재를 내가 알아가는 만큼 이 친구도 같이 변해 가더라고요. ‘가족이 꼭 인간이어야 할 필요가 없구나’라는 걸 느꼈고, 그렇게 전혀 상상해보지 못한 세계에 들어오게 됐어요.

 

Q. 동물권의 세계에서는 무엇을 알게 되셨어요?

A. 동물들이 ‘살고 싶어 한다’는 거요. ‘비건이 되자’는 의미에서 탈(脫)육식을 시작하겠다고 칼럼에 썼어요. 그런데 디엑스이의 직접행동 영상을 보고 입이 떡 벌어졌어요. 도살장에 찾아가 소와 돼지한테 물을 주고, 롯데리아와 배스킨라빈스 옆에서 “음식이 아니라 폭력”이라 외치고, 젖소들의 고통에 연대하기 위해 광화문 광장에서 웃통을 벗고 시위하고. 대중에게 말을 건네는 동시에 싸움을 거는 방식이잖아요. 인간 중심적 질서에 들이받고 도전하려는 또 하나의 시도를 보면서 새로운 감각이 크게 열렸던 것 같아요.

 

Q. 와. 엄청난 확장이네요. 저는 비건이라고 하니 ‘동물’보단 ‘채식주의’가 먼저 생각나더라고요.

A. 디엑스이가 내건 ‘우리는 모두 동물’이라는 구호는 고기를 먹을지 채소를 먹을지가 아니라, 동물을 향한 폭력이 문제라고 말하는 거예요. ‘비건이 되자’는 구호로는 시민들이 이 문제를 인간 중심적, 식탁 중심적, 음식 중심적으로 협소하게 바라보게 된다면서요. 비건이 된다는 게 정치적으로 올바른 ‘식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실은 그때 살아있는 ‘동물’의 존재가 가려진다는 지적이 있어요. 저는 동물들을 더 많이 보여주고 이야기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Q. 동물이 어떤 존재라 보시는지 궁금해요. 마찬가지로 ‘저항하는 존재’일까요?

A. 그럼요. 탈육식을 한 지 2년이 다 돼 가는데 의심의 여지 없이 동물은 ‘저항하는 존재’예요. 도살장으로 가는 트럭에서 도망친 동물이 도심을 활보하고 있다는 뉴스가 심심찮게 나와요. 처음 봤을 땐 ‘와, 놀랍다’ 정도였는데, 지금은 너무 마음이 아파요. 형제복지원에서 도망친 피해 생존자들이 죄 없이 다시 잡혀 들어가 착취당하고 폭력에 시달리는 이야기가, 도살장에서 도망쳤다가 다시 잡혀 들어간 돼지와 소의 이야기와 너무 똑같은 거예요. 이 동물들이 울고 있는 게 ‘저항의 언어’가 아닐 이유가 하나도 없죠. 우리가 못 들을 뿐이에요.

 

Q. ‘저항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겹쳐지네요. 장애 운동과 동물 운동이 교차하는 지점은 어떻게 보시나요?

A. 우리가 어떤 존재를 가둔다는 건 엄청난 폭력이잖아요. 사회적으로 가둘 수 있다고 여겨지는 존재가 바로 장애인과 동물이에요. 그런데 장애 운동의 구호는 그동안 ‘우리는 짐승이 아니다’였어요. 동물권 운동가들은 그 지점을 넘어서려 해요. 인권은 ‘인간은 동물과 다르다’는 생각에서 출발하는 거라 동물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거든요. 우선 동물이 ‘억압받는 존재’라는 게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져야 해요. 기존 인권 운동의 언어에서 여성, 노동자, 장애인의 자리에 동물을 넣는 것. 인간의 자리에 동물을 넣는 것. 어려워 보이지만 이거면 충분하다고 봐요.

 

Q. ‘인권기록 활동가’ 옆에 ‘동물권기록 활동가’라는 직함이 추가됐어요. 또 어디로 나아가게 될까요(웃음)?

A. 잘 모르겠지만, 기대가 돼요(웃음). 사랑하는 존재들을 만나고 그들이 저한테 ‘새로운 세계가 있어’라고 말해주는 게 마치 20년 전 노들야학을 만났을 때처럼 기쁘거든요. 동물 운동과 함께 탄 배가 어디로 향할지, 20년 뒤 이 운동이 우리 사회를 어떻게 바꿔놓을지, 우리의 상식은 어떻게 바뀌어 있을지, 나는 그 안에서 무엇이 돼 있을지, 이런 것들이 계속해서 궁금해요.

 

▶▶홍은전은 저항하는 존재들을 기록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이들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있다.
▶▶홍은전은 저항하는 존재들을 기록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이들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있다.

 

왜, 무엇을, 어떻게 쓰는가

 

홍은전의 글쓰기는 “엄청난 노동이 집약된 결과물”인 동시에 “사랑했던 것들을 불멸화하는 노력”이다. 고되고 지치는 노동이 9할이지만, 나머지 1할의 기쁨을 맛본 이상 글쓰기를 멈출 수 없다고 그는 말한다. 100페이지가 넘는 생애사를 편집하고 재구성한 뒤에 얻는 찰나의 희열. “글쓰기는 언제나 두려운 일이지만 내가 쓴 글이 나를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줄 거라는 기대 때문에 계속 쓸 수 있었다.” (홍은전, 『그냥, 사람』)

 

Q. 왜 글을 쓰시는지 궁금했어요.

A. 싸우는 사람들, 그들이 싸우는 이유가 궁금하거든요. 싸우려고 목소리를 낸다는 건 정말 두려운 일인데,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잘 싸울까’ 하는 궁금함이 늘 있어요. 세상엔 싸우지 않을 이유가 참 많거든요. 그래서 타협하지 않고 싸우는 사람들은 멋있어요. 제가 나서지 못하고 포기했던 순간들을 알기에 그들이 계속 잘 싸워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는 것 같아요.

 

Q. 최근엔 동물의 이야기를 많이 쓰고 계세요.

A. 고양이랑 앞으로 20년을 같이 살 텐데, 이변이 없으면 이 고양이는 제가 만들어 놓은 집 안에서 평생을 살다 떠날 거예요. ‘20년 동안 집 안에서만 살겠구나’ 생각하면 가끔은 잠이 안 와요. 내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는 존재이자 가족인데. 내가 이 친구를 가두고 있다는 걸 정당화하고 싶지 않거든요. 동물권에 대한 인식이 높아질수록 이건 분명한 폭력이에요. 그래서 글쓰기는 제가 동물에게 느끼는 부채감을 해소하고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기도 해요.

 

Q. 글에 나오는 존재들로부터 무엇을 기록하고자 하셨나요?

A. 저는 저항하는 행위가 굉장히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그 아름다움을 글로 남기고 싶은 마음도 크고요. 저항에는 한 사람의 생애와 엄청난 노력이 필요해요. 집회에 나온 장애인을 보고 사람들은 ‘절규’라고 하는데, 아니에요. 그건 ‘저항’이에요. 절규는 집에서 해요. 광장에서 용기를 가지고 하는 게 저항이에요. 제 글에 나오는 사람들은 그냥 인터뷰이가 아니라 긴 시간 속에서 제가 오래 봐 온 사람들이에요. 수십 년의 생애를 들여다보며 나만 알고 있는 아름다움을 잘 기록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어요. 저항은 되게 신나고 멋진 일이란 걸(웃음).

 

Q. 나름의 글쓰기 원칙이 있으신지 궁금해요.

A. 원칙보다는 경험을 따라가면서 글을 써요. 여태껏 내 마음을 흔든 사람들, 나를 불편하거나 부끄럽게 만든 일들을 중심으로요. 이때 구체적으로 알고 싶은 ‘감정’에 대해 쓰는 것 같아요. 감정이라는 건 되게 모호해서, 이걸 붙들고 글을 쓴다는 건 마감이 정해진 칼럼 같은 경우 되게 위험하죠. 감정이 제대로 담기지 않으면 ‘이거 뭐지’ 싶은 글이 나올 수도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그 사람을 정말 좋아하는 마음이 느껴지는, 온도가 묻어나는 글이어야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읽게 되는 것 같아요. 가장 최근엔 프리웰 이사장이자 탈시설화를 선언한 김정하에 대한 글을 썼어요. 팬심을 가득 담아서요(웃음).

 

Q. 네, 봤어요(웃음).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해’라는 제목의 칼럼이요.

A. 저는 그 글을 통해 분명히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었어요. 김정하라는 한 사람이 평생을 걸 만큼 탈시설과 시설 폐지라는 게 왜 그렇게 중요한가, 라는 말을 하고 싶었죠. 물론 김정하를 좋아하는 제 마음이 담긴 글이에요. 그를 유심히 보고 쓰다 보면 훗날 그런 메시지가 드러나는 거죠.

 

Q. 그런 메시지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게 글쓰기의 힘인 것 같아요. 어떻게 해야 세상이 바뀐다고 보세요?

A. 세상은 싸우는 만큼 바뀌어요. 딱 싸우는 만큼만 바뀌고, 싸움을 멈추면 다시 퇴행하고. 저는 세상이 변한다는 걸 온몸으로 알아요. 노들야학과 함께한 시간이 저한테 가르쳐줬어요. 저는 그들이 가리키는 미래를 믿은 게 아니라, 그 미래를 말하는 존재들을 믿거든요. 그들과 함께 외치고 싸우다 보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믿기지 않던 그 미래에 제가 살고 있더라고요. 저는 경험적으로 그들을 믿어요. 그래서 그들과 함께하는 데 나의 글쓰기가 도움이 되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해요.

 

Q. 혹시 글쓰기를 그만둔다면 뭐가 하고 싶으세요?

A. 음, 동물권 운동이요. 저는 지금도 하고 싶거든요(웃음). 이제 본격적으로 그 주변을 배회해볼까 해요.

 

홍은전은 말했다. “세계를 한 방에 무너뜨리는 앎이 찾아올 때, 그것이 보여주는 놀라운 순간에 그저 몸을 한 번 맡기고 따라가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라 생각해요.” 그는 덧붙였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날 좋은 존재”를 위해 우리 곁에 넉넉한 마음을 준비해두자고. 이때 필요한 건 대단한 신념이나 굉장한 가치가 아니다. 낯설지만 아름다운 세계에 가닿으려는 용기만 있다면, 우리의 연약한 우주가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다. 노들야학과 그의 첫 만남처럼 강렬하고 눈부시게.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가 어딘가에서 밀려오고 있다.

 

 

글 복건우 기자
geonu_20@yonsei.ac.kr

사진 서예원 기자
harry214yw@yonsei.ac.kr

저작권자 © 연세춘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