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독립서적, 『그냥, 사람』

 

북적이는 출근 시간, 이동권 보장을 외치는 장애인들의 모습은 불편하다. 그러나 한평생을 참아야 했던 이들에게 우리는 또다시 배려를 강요하고 있지는 않을까.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같은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이들 사이의 거리는 멀기만 하다. 『그냥, 사람』의 작가는 우리가 다수의 편의를 위해 소수자와 약자를 희생시키는 것은 아닌지, 이들을 사회 구성원으로서 거부하고 있지는 않은지, 오늘 우리의 ‘시선’에 대해 묻는다. 

 

우물 안 개구리가 바라본 세상

 

『그냥, 사람』의 작가는 임용고시를 앞두고 우연히 방문했던 노들 야학에서 13년간 교사로 일했다. 그는 20년 넘게 방안에만 갇혀 살아가는 이들을 야학에 부르기 위해 노력했고, 야학 학생들의 평범한 삶을 위해 함께 투쟁했다. 그가 야학에서 마주했던 21세기의 한국 사회는 우리가 아는 세상과 달랐다. 야학만으로는 충분한 교육을 받을 수 없었던 장애인에게 배움에 대한 결핍은 한이 됐다. 가족들의 무관심으로 빈소 없이 떠날 뻔한 사람도 있었고 스무 살에 처음 스스로 주민등록을 한 이도 있었다. 

작가는 오랫동안 몸담고 있던 야학을 떠났다. 집 근처 도서관에서 신문으로 접한 이야기들은 그가 작은 야학을 떠나 세상 밖으로 나왔다는 쾌감을 줬다. 그러나 장애인, 형제복지원 피해자, 세월호 참사 피해자 등 그가 야학 안팎에서 마주해왔던 이들의 목소리는 신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도서관 특강은 건축 과정을 지켜보며 흉물스럽다고 여겨왔던 동대문디자인플라자의 예술적 가치를 일깨웠지만, 삶의 터전을 잃은 청계천 노점상들의 이야기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냥, 사람』의 작가와 도서관 특강 강사는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확연히 달랐다. 야학을 떠나기 전 그는 차별에 저항하기 위해서 우물 밖 세상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작가는 결국 우리 모두 각자의 우물에서 살아가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차별이 사라져 노들 야학이 필요 없는 세상이 돼야 한다는 어설픈 위로를 거부하고, 차별에 저항하는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시설’이라는 감옥

 

그는 ‘시설’의 기능에 대해 묻는다. 보호를 명목으로 세워진 장애인 시설은 서대문 형무소의 벽관과 같다. 장애인들은 종일 침대에 누워 퇴소만을 기다리지만, 가족들의 강요에 한 평생을 시설에 갇혀 생을 마감한다. 이들은 10년간의 투쟁 끝에 탈시설 권리를 얻어냈지만, 이를 뒷받침할만한 사회적 환경이 열악해 여전히 사회에서 격리되어 있다.

그가 야학 밖에서 만난 국가 권력 시설의 피해자들은 어떨까. 선감학원*은 부랑아 감화 목적의 소년 수용소다. 이곳에 감금된 소년들은 형제복지원, 삼청교육대와 같은 시설로 끌려가 각종 노역과 폭력에 노출됐다. 보육원을 전전하다 선감학원과 형제복지원에서 한평생을 보낸 피해자는 몸에 밴 트라우마와 누군가를 해치고 싶은 충동으로 날마다 고통 받았다. 선감학원 시절 겪었던 폭력으로 허리와 다리의 고질적 통증을 안고 사는 이는 대인기피증으로 술을 달고 살다 세상을 떠났다. 이들은 국가 권력 시설 아래에서 청춘과 삶을 잃었다.

 

그냥, 사람이고 싶은 이들

 

이 외에도 그는 용산참사, 세월호, 에이즈, 동물 학대 등 다양한 사회 문제들을 『그냥, 사람』에 담았다. 소외되는 이들의 삶은 우리 사회의 민낯을 보여준다. 그가 목격한 남겨진 이들의 삶은 고달팠다. 그러나 무관심 속에도 이들은 사회의 거대한 침묵에 묵묵히 맞서고 있다. 그런 이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어떤가. 우리의 시선은 여전히 차갑기만 하다. 언론은 화제성이 부족하고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들을 외면한다. 언론은 소수자들을 약자로 구분 짓고 다른 존재로 인식하기도 한다. 이들의 존재를 외면하는 우리의 시선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작가는 우리에게 유별나고 다르게 보이는 이들도 “그냥, 사람”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말한다. 다수의 기준에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게 베푼 배려를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다수의 편의를 위해 사회의 약자들을 시설에 가두는 것이 우리가 도모해야 할 복지일까. 우리 사회 전체가 이들을 위한 시설이 될 수는 없을까. 다수를 위해 소수가 희생해야 하는 사회, 누군가의 편의를 위해 다른 누군가는 쥐 죽은 듯이 숨만 쉬어야 하는 사회. 이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발전과 편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 정당한 것인지 묻고 싶다. 보호라는 핑계 속 가려진 차별은 여전히 남아있다.

 

인간은 각자의 우물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다. 더 거대하고 소중한 우물은 없다. 그저 다른 우물이 있을 뿐이다. 작가의 말처럼 각자의 우물에서 벗어나 타인의 우물을 들여다보는 것은 어떨까.

 

 

글 서지안 기자
forjinuss@yonsei.ac.kr

<자료사진 알라딘>

 

* 선감학원: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감동의 섬인 선감도에 위치했던 소년 수용소. 원생들에게 구타, 가혹행위, 성폭행, 살인, 강제노동이 자행됐던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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