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로들의 춤』 「거제, 포로들의 춤」 포로수용소의 오늘

베르너 비쇼프의 흑백 사진 속에서 포로들은 춤을 추고 있다. 허리춤에 손을 얹은 채 가면을 쓰고 추는 춤은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한국전쟁 이후 70여 년이 흐른 지금, 그들의 춤은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 기자들은 거제도에 방문해 거제 포로수용소(아래 포로수용소)의 흔적을 쫓아봤다.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그날의 흔적을 쫓다

 

지금 나는 사진 한 장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다. 1952년의 어느 겨울날,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한 광장에서 포로들이 춤을 추고 있다. 사진 설명으로는 그들이 추는 춤이 스퀘어댄스라고 한다. 뒤쪽으로는 ‘자유의 여신상’이 보인다. 
… 나는 그 사진에 대해 자세히 조사해보고서 알려주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스위스 출신 사진작가 베르너 비쇼프는 사진으로 전쟁의 참상을 기록하는 포토저널리스트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모습을 사진에 담던 그는 지난 1952년 우리나라를 방문해 여러 사진을 남겼다. 그중 거제도에서 찍은 ‘재교육 캠프에서의 스퀘어댄스’는 포로들이 자유의 여신상 앞에서 가면을 쓰고 미국의 민속춤인 ‘스퀘어댄스’를 추는 모습을 담고 있다.

최수철 작가는 비쇼프의 스퀘어댄스 사진을 소재로 「거제, 포로들의 춤」을 구상한다. 실재하는 역사와 사진을 바탕으로 꾸린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의 소설이다. 책 속에서 소설가 ‘나’는 프랑스에서 박물관을 운영하는 친구 크리스 베르티에로부터 사진 한 장이 담긴 메일을 받는다. 바로 스퀘어댄스 사진이다. 크리스 베르티에는 사진 속에 뭔가 복잡한 서사가 담겨 있으리라 추측하고, ‘나’ 역시 사진에 강한 호기심을 느낀다. 하지만 그는 자료를 찾는 작업에 선뜻 나서지 못하고 계속해서 답장을 미룬다.

사진의 배경인 포로수용소는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과 중공군 포로들을 수용하던 곳이다. 지난 1951년 1월부터 거제시 고현동, 수월동 일대에 지어져 같은 해 2월 포로들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포로들이 석방되면서 포로수용소도 폐쇄됐다. 대부분의 시설이 철거됐지만, 일부 포로수용소 잔존유적지(아래 잔존유적지)가 남아 1983년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99호로 지정됐다. 2002년에는 일부 잔존유적지와 관련 자료 및 기록물을 바탕으로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아래 유적공원)이 개관했다.

 

▶▶유적공원 입구의 감시탑. 모형 헌병이 유적공원을 지키고 있다.
▶▶유적공원 입구의 감시탑. 모형 헌병이 유적공원을 지키고 있다.

 

기자들이 직접 유적공원을 방문했다. 고현버스터미널에서 내려 110번 버스를 타고 10분 정도 이동하니, 유적공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형 헌병이 기자들을 맞이했다. 유적공원은 크게 ▲전쟁 ▲포로 ▲복원 ▲평화 구역으로 이뤄져 있다. 복원 구역 한구석에는 과거 PX(Post Exchange, 군대 내 상점), 무도장, 경비대 막사로 쓰인 잔존유적지가 남아 있었다.

 

철조망은 지구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이미 악마의 밧줄 혹은 악마의 모자 끈 같은 섬뜩한 이름으로 불렸다.
… 철조망 울타리는 흔히 투명한 공포를 불러일으킨다고 했다. 
벽이나 말뚝 울타리와는 전혀 달리, 철조망은 사람을 완전히 가둬두면서도 
그 너머를 거의 투명하게 내다볼 수 있게 하기 때문이었다.

 

작가는 허구의 인물인 ‘나’의 입을 빌려 한국전쟁과 포로수용소, 그리고 철조망에 관한 여러 역사적 사실과 생각을 전한다. 사진의 의미를 파헤치는 과정에서 ‘나’는 비쇼프의 사진들 속 철조망에 주목한다. 이후 그는 과거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철조망에 압도됐던 기억을 되새긴다.

포로수용소는 해체됐지만, 잔존유적지 주변에는 철조망이 둘려 접근이 불가능했다. 그 모습을 사진에 온전히 담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포로수용소를 감싸 안은 철조망은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하고 있었다. 철조망 너머에는 고현중학교의 모습이 투명하게 내다보였다. 잔존유적지에서 고현중학교는 보이지만 다가갈 수 없는 곳이었다.

 

▶▶미군이 사용했던 무도장은 잔존했지만 접근하기 어려웠다. 철조망은 70여년 전부터 무도장을 다가갈 수 없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미군이 사용했던 무도장은 잔존했지만 접근하기 어려웠다. 철조망은 70여년 전부터 무도장을 다가갈 수 없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전시실에서 연출된 아픔

 

“한국의 거제도, 1952년.” 
… 그 밑에는 비쇼프가 직접 쓴 사진에 대한 설명이 붙어 있었다. “거제도에서는 모든 것이 조작됐다. 모든 사람들에게 지시가 내려졌고, 
사진을 찍는 우리들 앞으로는 그럴듯한 사람들만이 지나가도록 계획됐다. 
이 사람들은 ‘보도 사진’에 찍히기 위해 포즈를 취했다. 나는 이게 진정으로 수용소에서의 생활인지 끊임없이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메일을 받고 3년이 지났다. ‘나’는 ‘매그넘 사진전’에서 우연히 스퀘어댄스 사진을 다시금 마주하게 된다. ‘매그넘 사진전’은 비쇼프가 속했던 사진작가 그룹 ‘매그넘 포토스’의 사진전이었다. 스퀘어댄스 사진이 지극히 연출된 것이라는 비쇼프의 설명을 본 후 사진에 대한 ‘나’의 관심은 되살아난다.

포로수용소는 이념전쟁의 축소판이었다. 중공군과 북한군, 그리고 인민군에 의해 강제 징집된 남한 출신 의용군까지, 포로들의 다양한 출신만큼이나 그들의 이념도 분화됐다. 지난 1951년 7월 시작된 정전 협정을 기점으로 본국 송환을 요구하는 친공포로와 이를 거부하는 반공포로 간의 대립은 격렬해졌다.

정전 협정의 최대 변수 중 하나는 포로 송환 문제였다. 유엔군은 포로들의 의사를 존중하자는 입장이었고, 북한군과 중국군은 본국 송환을 원칙으로 내세웠다. 군사적 승리가 요원한 상황에 이념 우위를 점하기 위한 협상과 갈등이 심화했다. 친공·반공포로를 분산 수용하고 그들의 송환 의사를 확인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전쟁이었다. 친공포로가 득세한 수용동에서는 분류 심사 자체를 거부했다. 반공포로가 친공포로의 몸에 강제로 ‘멸공’, ‘대한민국 만세’ 등의 문신을 새기기도 했다. 많은 수용동에서 자체 심사와 인민재판이 진행돼 적대시되는 이념을 가진 포로들이 제거됐다. 포로 송환 관련 쟁점은 1년 6개월의 시간을 거쳐 겨우 마무리됐다.

포로수용소는 자유주의 이념의 선전 장소이기도 했다. 지난 1951년 6월부터 모든 포로를 대상으로 반공주의 재교육 프로그램인 ‘배신자 프로그램’이 시행됐다. 본국으로 돌아갈 포로들을 미국식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설파자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친공포로들은 심하게 반발했다. 재교육 프로그램은 포로 분류 심사와 함께 포로들 간 갈등의 기폭제로 작용했다. 제77수용동에서는 친공포로가 해방동맹을 결성했고, 제83수용동에서는 반공포로가 대한반공청년당을 조직했다. 이러한 갈등은 포로 분산 수용이 마무리되는 1952년 중순까지 이어졌다.

 

▶▶포로수용소에는 반공포로, 친공포로 모두 존재했다. 포로수용소 이면엔 포로들 간의 대립과 이념전쟁이 존재했다.
▶▶포로수용소에는 반공포로, 친공포로 모두 존재했다. 포로수용소 이면엔 포로들 간의 대립과 이념전쟁이 존재했다.

 

그러나 분류작업이 몇 달 동안 더 계속된 점을 감안한다면, 
대략 1년 반 동안 반공포로들과 친공포로들 사이에 밤낮으로 목숨을 건 싸움이 벌어졌다고 볼 수 있다. 
… 비쇼프가 찍은 ‘스퀘어댄스’ 사진은 그 대립의 한 단면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는 것이다. 

 

수용소 당국의 정책을 둘러싼 반공포로와 친공포로의 대립. ‘나’는 포로들의 대립과 수많은 죽음 속에 스퀘어댄스 사진이 갖는 의미를 탐구한다. 이내 당시의 극렬한 분위기가 담기지 않은 스퀘어댄스 사진을 보고 의아해한다. 포로수용소가 이념 선전의 장소로 활용됐듯이, 스퀘어댄스 사진은 수용소 당국에 의해 연출된 것이지 않을까. 모순적이게도, 당국에 의해 평화롭게 꾸며진 사진은 이면에 숨겨진 이념 대립을 암시한다. ‘나’는 사진의 진실을 파헤치는 인물이었다.

유적공원은 포로들의 과거를 어떻게 재구성하고 있을까. 전시실도 포로들의 대립과 아픔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했다. 포로수용소 유적박물관 전시실에는 ‘캠프 넘버 원, 거제도 포로의 일상’ 전시(아래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다. 전시는 ‘6.25전쟁은 ‘포로의 대우에 관한 제네바협약’이 적용된 첫 사례’라며 ‘포로들은 철조망 속에서 보다 자유롭고 편안한 생활을 누렸다’고 설명한다. 포로들의 갈등과 죽음은 포로수용소의 물적 풍요 아래 행해진 ‘폭동’으로 거칠게 연출됐다. 전시실을 떠나기 전, 벽에 적힌 「내가 겪은 포로 생활」의 한 구절이 눈길을 끌었다.

 

한 걸음이라도 좋으니 철장 밖에 나가 보았으면! 
이것이 포로들의 24시간을 통하여 잊히지 않는 몸에 박힌 염원이요 기도였다. 

 

글귀는 포로수용소의 한 단면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우리,
탈출하기 위해

 

우리는 여전히 철조망이 둘러쳐진 수용소 속에 살고 있으니, 우리가 어찌 정상적일 수 있겠는가. … 우리는 지금도 거제도 포로수용소 속에 들어 있었다. … 단지 잠깐 동안의 소강상태가 있을 뿐, 전쟁은 매 순간 계속되고 있었다. 

 

포로들을 비롯한 한국전쟁의 피해자들이 사라지는 사이 철조망은 살아남았다. 정전 협상에서 철조망 제거가 명문화돼 철조망은 사라지는 듯했다. 그러나 지난 1966년 남한을 공산주의 이념으로부터 방어한다는 명분으로 유엔사령부가 철조망을 다시 세우기 시작했다. 철조망은 한국전쟁이 끝나지 않았음을 상징함과 동시에, 이념 대립이 끝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이념 갈등이 없었다면 철조망 역시도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념을 위해 존재하던 철조망은 이제 이념 그 자체가 됐다.

소강상태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은 철조망의 존재를 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념 대립의 산물은 여전히 잔존한다. 외국인들은 우리나라가 전시상황에 놓여 있다며 매우 위험하다고 하지만, 정작 우리 국민들은 별다른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한다. 북한이 미사일을 쏠 때도 외국인만 걱정하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저녁 메뉴를 걱정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대립으로 범벅된 사회에 오랫동안 노출되며 피로감조차 익숙해진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수용소에 갇혀있는 것을 알고 있을까. 너무 오래 포로 생활을 하다 보니, 이제는 어떤 자극에도 반응하지 못하는 장기수가 돼버렸다. 

 

▶▶포로수용소의 보급 창고로 이용됐던 장소다. 포로수용소가 해체된 지 70여 년의 시간이 지났으나 거제의 여러 장소에서 포로수용소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포로수용소의 보급 창고로 이용됐던 장소다. 포로수용소가 해체된 지 70여 년의 시간이 지났으나 거제의 여러 장소에서 포로수용소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나와 팔과 팔로 연결되어 있는 이 남자는 결코 기만이 아니다. 그에게서 체온과 체취가 느껴진다. 이 냄새와 열기가 나와 그가 인간임을 일깨워준다. … 적대감을 가질 때 인간들은 서로에게 치명적인 철조망이 된다. … 그러나 그 철조망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끌어안을 수밖에 없다. 
담요도 누비옷도 없이 맨몸으로 끌어안아야 한다.

 

소설가인 ‘나’는 비쇼프의 스퀘어댄스 사진을 토대로 소설을 쓴다. 소설의 주인공은 비쇼프의 사진 속 인물이다. 그는 스퀘어댄스를 추게 된 과정을 서술한다. 주인공은 포로수용소에 홀로 서 있다. 반공세력으로 낙인찍혀 친공세력에게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었고, 미국의 간첩 제안을 거절한 탓에 더 이상의 보호를 기대하기 힘들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주인공은 친하게 지내던 장 목사와 함께 포로들의 ‘스퀘어댄스’를 기획한다. 그는 불안, 아픔, 이념 대립을 춤으로 승화시킨다.

이념 갈등에서 온전히 해방되기 위해 어떤 방식을 취해야 할까. 소설은 ‘나와 연결돼 있는 체온과 체취’를 제시한다. 총 쏘는 것이 서툴렀던 ‘나’의 소설 속 주인공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다른 북한군이 철조망을 넘을 수 있도록 누비옷을 입고 철조망 위에 눕는 것뿐이었다. 포로 간 갈등이 최고조에 달해 이념의 철조망이 살을 파고드는 상황에서도 그는 춤을 추며 이겨낸다. 사람들과 함께 스퀘어댄스를 추며 서로의 체온을 느끼고, 철조망을 극복한다. 춤으로 이념 갈등을 넘어서는 과정은 현대인에게 시사점을 제공한다. 결국, 이념의 철조망을 넘기 위해선 누비옷을 내려두고 맨몸으로 끌어안아 체온을 나눠야 한다. 

 

우리는 그날의 춤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그날의 춤은 지금도 거제도 곳곳에 남아 있다. 도심과 유적공원에 흩어진 철조망은 이념 대립의 아픔을 상기시킨다. 과거의 아픔을 온전히 끌어안으려면 진실을 똑바로 마주해야 한다. 상처를 끌어안는 춤만이 우리를 수용소 밖으로 이끌어줄 것이다.

 

글 여근호 기자
khyeo1123@yonsei.ac.kr

최준성 기자
jschoi0609@yonsei.ac.kr

사진 김대한 기자
3.18h@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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