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석우 교수(한국외대 우크라이나어과)
홍석우 교수(한국외대 우크라이나어과)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으로 예측했던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전쟁에서 전 세계는 우크라이나인들의 용맹스러움과 저항정신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48시간에서 72시간 내에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가 푸틴의 손아귀에 들어갈 것이라는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우크라이나 군인과 시민들은 목숨을 걸고 저항하고 있다. 과연 이들의 결사항전의 정신과 용기는 어디서 나오는 것이며, 무엇을 지키려 하는 것일까?

1991년 소련의 해체와 함께 우크라이나는 갑작스러운 독립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독립에 대한 우크라이나인들의 요구는 이미 17세기 코자크 시대에 시작됐다. 50대 이상의 국민이라면 율 브린너가 나오는 용맹스러운 코자크 영화 『타라스 불바』를 모두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Scalp lock”, 즉 민머리에 한줌의 머리털만을 남긴 강인한 인상의 용맹스러운 코자크는 우크라이나인들의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다.

폴란드로부터 코자크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실현하기 위해 헤트만(지도자) 보흐단 흐멜니쯔키는 1654년 모스크바의 차르와 페레야슬라브 조약을 맺게 되는데, 이를 계기로 러시아는 오히려 폴란드와 전쟁을 시작하고, 1667년 우크라이나를 점령하게 됐다. 이때부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불행한 관계가 시작됐다. 러시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코자크의 헤트만 마제파는 스웨덴 왕 카알 12세를 설득해 우크라이나 폴타바에서 러시아 차르에 대항해 전투를 수행했다. 그러나 스웨덴과 코자크의 연합세력은 러시아 표트르 대제에게 패배하게 된다. 폴타바전투에서 승리한 러시아는 발트지역 영토와 해상로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시켰을 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전역에 대한 통제권 및 동유럽의 헤게모니를 장악해 나가면서 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됐다. 이에 반해 우크라이나의 코자크들은 독립과 자치의 기회를 상실한 채 고난의 시대로 접어들게 됐다.

마제파의 뒤를 이은 필립 오를릭은 비록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배했지만, 자신들이 추구하는 정치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1710년 우크라이나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최초의 헌법을 수립했다. 오를릭 헌법은 분명하게 전제정치(autocracy)를 반대하고 있으며, 이를 방지하기 위해 정치권력의 분리를 강조하고 있다. 권력을 집행부, 입법부, 사법부로 나누는 필요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특히 행정부 내에서 헤트만의 참모들은 그의 권력을 제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몽테스키외가 법의 정신(The Spirit of the Laws, 1748)에서 삼권분리를 주장한 바 있는데, 이보다 40년 앞서 이미 오를릭의 헌법이 이와 같은 주장을 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러시아로부터의 분리, 저항 사상은 19세기에 더욱 체계화 됐다. 19세기 초 타라스 쉐브첸코, 미콜라 코스토마로브 등의 지식인들은 우크라이나 최초의 정치조직인 키릴과 메토디우스 형제단을 구성해 우크라이나 민족과 민족주의 개념 정립에 기여했으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정체성의 차이를 설명하고 우크라이나가 슬라브 연방주의 체제 내에서 중심국가가 돼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1870년대 러시아 및 우크라이나 지역의 인텐리겐찌야들 사이에서 급진적 사회주의 사상이 출현하면서 민족의 구별이 사라지고 세계 사회주의 사회가 탄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결국 민족의 중요성과 민족국가설립에 대한 입장의 차이로 인해 사회주의자와 우크라이나주의자들 사이에 대립과 결별이 발생하게 됐다. 우크라이나 초기 마르크스주의자였던 경제학자 미콜라 지베르와 미하일로 드라호마노우는 급진적 혁명보다는 점진적 사회발전을 추구할 것을 주장했으며, 우크라이나 민족의 해방과 자유획득을 중요시 여겼다. 이러한 점은 러시아의 급진적 사회주의와 분명히 구분 되는 우크라이나 사회주의의 특징이었다.

20세기에 접어 들어 러시아로부터 우크라이나의 완전한 분리와 독립에 대한 정치주장이 처음으로 구체화됐는데, 미콜라 미흐노브스키는 ‘우크라이나 혁명당’을 위해 제작한 ‘독립 우크라이나’라는 제목의 브로셔에서 우크라이나인들은 법적으로 독립된 국가를 형성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게 됐다.

1917년 두 번의 러시아혁명으로 제정러시아가 붕괴되면서 우크라이나의 독립은 현실로 다가왔고 미하일로 흐루쉐브스키는 우크라이나 중앙라다의 대표로서 유니버설이라는 정치선언문을 발표해 우크라이나 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천명했다. 제4차 유니버설을 통해 선포된 독립선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크라이나인) 여러분의 힘과 의지로 우크라이나 땅에 자유로운 민족공화국이 탄생했습니다. 고생하는 대중들의 자유와 권리를 옹호하고자 했던 조상들의 오랜 꿈이 실현됐습니다 ... 지금부터 우크라이나 민족공화국은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독립적이고 자유로우며 주권을 가진 우크라이나 국민의 국가입니다. 우리는 러시아, 폴란드, 오스트리아, 루마니아, 터키 등 모든 이웃 국가들과 평화롭고 우호적인 삶을 살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독립한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삶을 방해할 권리가 없습니다. 권력은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만 속할 것 (입니다)...“

비록 계속되는 내전과 볼셰비키와의 전쟁, 폴란드를 비롯한 주변 국가들의 압력으로 어렵게 탄생한 우크라이나 민족공화국은 1918년 단명하게 되지만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는 민주주의와 분리-독립에 대한 정치사상적 전통과 열망은 사라지지 않고 70년간의 소비에트 시기에도 지속됐다. 결국 1991년 소비에트 사회주의체제의 붕괴와 우크라이나의 독립요구는 우연적이며 새롭게 발생한 것이 아니라, 1710년 오릴릭 헌법과 1918년 우크라이나 민족공화국건립에서 표현된 우크라이나인들의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정치적 열망과 목표가 완수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2022년 러시아의 전쟁에 맞서 우크라이나의 대통령 젤렌스키와 그의 국민이 온 몸을 불사르며 지키고자 하는 것은 오랜 세월동안 우크라이나인들이 지향해온 자유와 민주주의, 민족의 독립과 주권보장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며, 우리는 이들의 저항에 지지의 박수를 보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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