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세기가 지나서 '10월 유신과 연세 독수리 상 사건'을 글로 쓰자니 만시지탄의 감이 든다.  1969년 삼선개헌으로 민주공화당은 힘들게 정권을 유지했으나, 집권당의 권력 유지는 매우 불안했다.  1970년 초부터 소문으로만 들리던 정권의 영구 집권 계획은 19711017일 갑자기 발표된 유신 계엄으로 현실이 됐다

유신 계엄령을 발표함과 동시에 1017일 우리대학에 공수 부대가 주둔했고, 계엄 당국의 지시에 따라 우리대학, 고려대, 서울대에 주둔한 계엄군은 타 대학보다 개학이 2주일이나 늦어졌다대학 축구장에 진을 치던 계엄군은 1110일 새벽에 철수했다. 학원 주둔 계엄군이 철수를 발표한 119일 밤, 정외과 도서실 '화백실'에서는 정외과 3학년 당시 YBS국장이던 한정식 시인, 전 대한항공 LA 지사장이자 현재는 소천한 함종설, 전 행정 안전부 장관 맹형규, 이환송, 최용선 학우 등이 모여 열 띄게 시국 토론을 했다.

대학 내 주둔군이 철수하는 날 새벽, 캠퍼스에 설치했던 계엄군 막사가 해체되고 계엄군은 대학 운동장에서 조용히 철수했다. 화백실에서 밤새 토론을 마친 학우들은 무거운 마음으로 새벽에 백양로로 내려왔다. 계엄 휴교와 함께 약 3주간 동안 군화가 상아탑을 누비고 다녔다고 생각하니, 그날따라 더욱 차가워진 가을 새벽 기온과 함께 마음이 더욱 비감해 졌다.

독수리 상 앞에 다다르자 최용선 학우는 둘둘 말은 런닝 셔츠를 검은 잉크에 적셔 '대학은 죽었는가'라고 통탄의 글을 독수리 상 흰 기둥에 썼다. 연이어 각 단과 대학으로 뛰어 가서, 유신 반대, 자유 민주주의 수호, 대학의 자유, 군대의 캠퍼스 진주를 규탄하는 자보를 붙였다.  

이 사건은 사정 당국, 문교부, 청와대에 긴급히 전해지게 됐다. 계엄군이 캠퍼스를 떠난 새벽, 대학도 대학 당국이나 정보 당국의 학원 사찰 팀(서대문 경찰서, 치안국, 보안사, 중앙정보부)도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대형 사건이 발생된 것이었다. 허가 찔린 문교 당국은 완전 패닉 상태에 빠졌고학원에 출입하던 정보원들은 정보 수집 경쟁으로 볼썽 사납게 대학 내를 헤집고 다녔다. 문교부는 대학이 가담한 학생들을 즉시 제적하고 처리 결과를 신속히 보고할 것을 대학에 재촉했다.

대학은 사태 수습을 위해, 학원 사찰 팀의 감시망을 피해, 긴급히 아침 830분에 언더우드 동상 앞 정원에서 박대선 총장, 이기택 교수가 학생 대표와 같이 수습책을 숙의 했다.  당시 문교부는 계엄 하에 학원 소요 건으로 관여되는 학생에게 '제'을 원칙으로 적용한다고 했고, 새벽에 허를 찔린 문교부는 매우 분개해, 대학 당국과 어떤 논의도 거부했다당일 거사에 가담한 학우들의 구제 가능성은 암담했다그러나 대학은 해당 학생들 구제를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대학은 지혜로운 안으로 학생 대표와 최고 권력인 청와대 실권자와 만나 대화하자고 제안 했다. 청와대도 학원 문제를 정보 기관의 여과 없이 직접 듣고 싶었든 것 같았다.  홍종철 사정 특보는 학생 대표와의 면담 요청 제안을 즉시 받아 들였고, 당일 오전 1030분 사정 그의 집무실에서 청와대와 학생 대표가 전광석화 같이 만나게 됐다

홍 특보는 학생 대표를 대하자, 당시 동북아시아 정세와 한국의 위치를 설명하며 유신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그는 유신 발표 후 박 대통령이 전국 대학에 학원 소요 관련 학생 명단을 집무실 테이블에 놓고 직접 확인하고 있다고 전해주었다.

학생 대표의 머리 속에는 그 날 아침 학우들 구제만을 고심했다. 학생과 청와대의 일대일 면담은 전례가 없었고, 혹시라도 잘못돼 해당 학생이 제적되면, 그 책임을 학생대표에게 돌릴 수도 있는 분위기라서 무척 부담이 되는 만남이었다. 학생 대표는 효과 있는 면담 결과를 위해 거두절미하고 당일 아침 우리대학 독수리상 사건과 이에 가담한 학우 문제를 바로 꺼냈다.

학내 군사 훈련의 부작용과 대학의 민주화를 강변했다.  또한 학생 운동 가담자에 대한 무자비한 처벌도 반드시 시정돼야 한다고 항변했다그날 새벽에 발생된 우리대학 독수리상 사건 가담자의 경우는 모두가 평소 학업에만 전념하는 학구파이므로, 무차별한 처벌이 발생될 경우 새로운 형태로 사태가 확산될 수 있다고 했다만일 문교 당국이 강경 일변도로 처리 할 경우에는, 대다수의 학생들을 자극하게 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상황이었다. 그렇게 되면 부득이 우리대학 학생회가 전면에 나서서 조직적 학원 민주화 운동을 할 수 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홍 특보는 유신 계엄의 획일적인 대 학원 강경책이 우리대학에 적용될 경우 학원을 크게 자극 시킬 수 있음을 예견하고, 그 자리에서 민관식 문교부장관에게 전화로 "당일 발생된 연세대 소요 사건을 학생 대표와 직접 만나 대화 한 바, 교육 당국이 정한 강경 방침은 조정이 필요할 것 같다"고 했다, 우리대학에 강압적인 처벌 원칙을 적용하지 말자는 뜻 이었다.  청와대와 일대일 면담 후 온 대학을 긴장하게 했던 독수리상 사건에 관련된 학우의 처벌 문제는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

더불어 밝히고 싶은 아름다운 추억이 있다. 청와대에서 홍 특보와 면담을 마치고 백양로로 들어오니, 박대선 총장은 청와대로 간 학생 대표가 기쁜 소식을 가지고 돌아오기를 학생회관 주위를 거니며 기다리고 계셨다.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아나선 목자의 마음이 가슴에 와 닿았고, 연세 울타리의 따뜻한 체온을 느낄 수 있었다.  

반 세기가 지난 지금, 일부 후배 운동권들의 흐려진 판단으로 개악의 부끄러운 소식들이 대한민국 사회 전반에 들려온다.  당시 '독수리 상 사건'을 주도했던 한정식 학우는 민주주의의 탈을 쓰고 자신의 영달과 소속 집단의 탐욕에 빠진 부패한 현 정권을 보며, "우리가 이 꼴을 보려고 절규했는가? 자괴감을 느낀다."하고 개탄하고 있다

모든 것이 움츠러진 유신 계엄 벽두에 연세 독수리들은 진리와 자유의 양 날개를 펼치고, 가을 새벽 하늘 높이 비상했다.  50년 전 유신 계엄으로 인해 비밀리에 감추어졌던 들끓는 젊은 가슴으로 행한 독수리상 거사가 반 세기가 지나서 나마 연세사에 기억되기를 바란다.

한편, 10월 유신도 오늘의 잣대로 역사화 하기에는 아직도 어려운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모든 역사에는 이유와 필연이 있다.  감정을 내려놓고 좌우 이념의 벽이 없이 순수하고 균형적인 감각으로 연구되는 세월의 산맥을 넘어야 만 역사로서 자리를 잡을 것 같다.

그 후에 박 대선 총장은 유신 반대로 해직된 김동길교수, 김찬국교수를  복직시키고, 학생 운동으로 제적된 학생들을 전원 복교 시키고 나서,  스스로 총장직을 사임하셨다박 총장은 자신의 시신을 의과대에 해부용으로 기증하시고 소천하셨다. 몸소 실천하신 살신성인의 스승이었다.

김기성 동문 73년 당시 정법대학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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