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유신 사진영상부장(글창융국문·21)
허유신 사진영상부장(글창융국문·21)

 

활기차게 웃으며 하교하는 재활학교 학생과 선생님의 모습을 담아주세요

 

부기자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내가 받은 사진 요청서에 적혀있던 문구다. 언제나 그랬듯 편집국에 들러 카메라와 sd카드를 챙기고 기자증을 매고 취재 현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사진을 찍으러 가기 전 항상 내가 마주할 현장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이런 모습이 내 앞에 있겠지?’, ‘그럼 나는 이런 모습을 앵글에 담아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고 촬영지로 나섰다.

처음 취재 현장에 발을 들인 그 순간을 난 잊을 수 없었다. 엄숙한 분위기, 소곤대는 학부모와 카메라를 든 나를 경계하는 시선들. 내가 본 재활학교의 모습은 나의 상상과는 정반대였다. 그곳에는 웃으며 하교하는 학생도, 마음 편히 아이들을 하교시키는 선생님도 없었다. 당장 내 눈앞에 마주한 학생들은 몸이 편치 않아 고통을 호소했다. 고개를 돌리면 선생님들께서 약을 먹고 잠든 학생의 휠체어를 끌고 하교를 돕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 모습들이 내가 그날 본 현장의 전부였다.

쉽사리 카메라를 들 수 없었다. 좋은 사진을 찍고 싶어 취재마다 300번 이상의 셔터를 누르던 나는 이날 정확히 16번의 셔터를 누르고 카메라를 내렸다. 감히 내 앵글에 취재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아픔을 담을 수 있을 것인가 생각했다. 이내 감동 포르노라는 단어가 내 머릿속을 스쳤다. 이 단어를 어디서 처음 접했는진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하지만 저 단어를 듣고 내가 처음 했던 다짐은 정확히 기억한다.

타인의 슬픔을 왜곡하지 않겠다. 내 화면에 조정된 이미지는 담지 않겠다는 무언의 다짐을 했다. 하지만 기사와 함께 보도된 사진은 전체의 작은 조각이었다. 기사의 내용과는 상관 없었다. 적어도 재단된 내 사진은 내가 본 현장과 달리 장애 학생들도 이렇게 활기차고 열심히 학교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도 열심히 살아가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조정된 이미지를 통한 메시지 전달은 곧 대중매체에 대한 우려로 이어졌다. 현재 뉴미디어 플랫폼은 이용자가 급증하며 다양한 형태의 콘텐츠가 제공되고 있다. 콘텐츠 중 적지 않은 수가 재단된 현장을 전달하고 있다. 일례로 사회실험콘텐츠는 사회실험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만큼 감동을 위한, 감동에 의한 하나의 콘텐츠가 돼 버렸다. 제작자들은 실제 모습과 다르게 사회적 약자를 대상화하고 우상화해 만족과 위안 그리고 거짓된 감동을 만들어내 대중들에게 선보인다.

수많은 콘텐츠 제작자는 사회적 약자라는 플롯을 극적 감동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다. 그들이 만든 왜곡된 인식은 사회적 약자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고스란히 사회적 약자에게 돌아갔다. 사회적 약자는 그들이 만든 인식 속에서 한 번 더 약자의 위치에 서야만 했다.

사회적 약자를 통해 왜곡된 동기부여와 감동을 선사하는 것은 사회실험이 아닌 감동 포르노에 불과하다. 그들은 누군가의 동기부여와 감동이 아닌 그들 자체로 한 명의 사람이다. 사회적 약자의 암담한 현실과 극복 과정. 그리고 그 끝의 성취 중 그 무엇도 미디어에 의해 대중의 감동을 위한 플롯으로 쓰여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나만의 다짐을 해본다. 누구에게도 슬픔이 되지 않는 콘텐츠를 만들겠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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