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권일, 능력주의에 가린 ‘불평등 불감증’ 꺼내다

‘공정’이 다시금 화두다. 정권이 바뀌고 근 5년간 공정이 달라붙는 굵직한 사건들이 일어났다. 공정 담론은 몸집을 키웠다. 누가 어떤 공정을 말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도 달라졌다. 까다로우면서도 정제되지 않은 공정 논의가 지속됐다.

박권일 사회비평가‧작가는 이러한 공정 담론의 기저에 ‘능력주의’가 도사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능력주의는 기본적으로 공정에 대한 이야기다. 능력주의에서는 불공정을 이야기하지, 불평등을 이야기하진 않는다” 지난 9월 출간한 『한국의 능력주의』에 드러나는 관심사는 단연 ‘능력주의’다. 그는 능력주의 자체도 문제가 있거니와, 불공정에 민감하되 불평등에 무감한 ‘K-능력주의’를 함께 꼬집었다. 서대문구의 한 카페에서 그를 140분가량 만났다.

 

▶▶한국의 능력주의를 분석한 박권일 사회비평가‧작가
▶▶한국의 능력주의를 분석한 박권일 사회비평가‧작가

 

Q. 능력주의 담론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A. 소위 ‘넷우익’이라 불리는 이들이 온라인 커뮤니티에 모여 어떻게 극우 담론을 생산하는지 4~5년 정도 관찰한 적 있다. 이들이 일삼는 혐오 발언에는 일관된 논리가 숨어 있었다. 사회적 소수자, 약자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공격할 때 넷우익은 일관되게 능력주의적이었다.

가령 ‘다문화반대카페’의 이주 노동자 혐오나 ‘일베(일간베스트저장소)’에서 사용하는 ‘된장녀’ ‘김치녀’ 같은 여성혐오 용어를 살펴보면 공통적으로 능력주의 논리가 깔려 있었다. 능력주의를 직접 발화하진 않았지만 ‘무임승차’라는 말로 이미 능력주의를 말했던 것이다. 혐오의 기저에 능력주의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능력주의적 제도와 문화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Q. 능력주의의 문제가 뭐라고 보나.

A. 능력주의는 능력과 노력을 기준으로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다. 이때 능력과 노력의 단위는 개인이다. 능력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타고난 인지적 지능과 성실성이다. 이 두 가지가 능력을 형성한다. 능력주의는 사회의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려 구조적 불평등을 보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능력주의의 어원인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는 영국의 사회학자 마이클 영의 SF소설 『능력주의(The Rise of Meritocracy)』에서 처음 등장했다. 그는 지위 세습이 불가능하고 개인의 IQ와 노력에 의해서만 자원이 분배되는 영국 사회를 소설로 그려냈다. 이를 통해 합리적이고 이상적으로 보이는 이 사회가 실제로는 굉장히 끔찍하다는 점을 비판하고자 했다. 가령 머리가 나쁘게 태어났거나 노력할 수 없는 위치에 놓인 사람들은 멸시와 모멸을 받지만 이를 불평하지 않는다.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부당함에 도전할 의지조차 가질 수 없는 것이다.

 

Q. 개인의 노력과 능력은 어떻게 측정할 수 있나.

A. 노력은 측정하기 애매하다. 가령 컨베이어 벨트를 돌리는 공장에서 공산품을 찍어내는 노동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땐 노동 시간을 기준으로 노력을 측정할 수 있다. 그러나 추상적인 노동에서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때 혹자는 ‘너는 노력을 안 했어. 더 할 수 있는데 안 한 거야’라고 할 수 있다. 그 사람이 어느 정도의 노력을 투여했는지는 본인만 안다. 노력을 측정하는 것 자체가 난감한 일이다.

타고난 능력도 마찬가지다. ‘출생 추첨’이라는 말이 있듯, 능력은 굉장히 우연적으로 분배돼 있다. 우리가 한국에 태어나거나, 미국에 태어나거나 아니면 극빈국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는 건 모두 운에 따라 결정된다. 이 우연을 보상과 분배의 자격으로 보는 게 과연 정당한가. 존 롤스, 마이클 샌델과 같은 사회철학자들의 공통된 결론은 ‘그렇지 않다’다. 본인의 노력도 있겠지만 그 노력보다 훨씬 더 큰 것이 바로 운이다. 운에 따라 그들이 벌어들이는 천문학적인 보상이 정당화될 순 없다.

 

Q. 개인이 타고난 부분도 있지만 사회가 특별히 선호하는 능력이 있지 않나.

A. 그렇다. 특정 분야의 재능에 대해서만 보상하는 게 바로 능력주의다. 주변에 굉장한 예술적 재능을 가졌지만 대중들이 좋아할 만한 예술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훨씬 못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 대중적으로 인정받는 한편, 그는 뛰어난 예술가임에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 학문적 재능 역시 마찬가지다. 그 학문이 특정 산업과 결합해 큰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면 학자는 각광을 받으며 큰 명예와 돈을 얻을 것이다. 반면 순수 학문에서 뛰어난 성취를 보이는 학자의 경우 평생 가난하게 고통받다 세상을 떠나는 사례도 많다. 이렇듯 능력주의는 자본 친화적인 가치를 생산하는 재능과 노력에만 보상한다. 능력주의는 선별적이다.

 

Q. 능력주의가 정당화하는 불평등은 어떤 불평등인가.

A. 경제적 불평등이다. 경제적 격차를 발생시키고 착취가 일어나는 자산‧소득 불평등을 가리킨다. 불평등의 양상은 사회마다 다르다. 미국은 세계에서 불평등이 가장 심하다. ‘1대 99’ 혹은 ‘20대 80’ 사회다. 반면 한국은 ‘40대 60’ 혹은 ‘60대 40’ 사회라는 데이터 분석이 많다. 중산층 이상과 이하 사이의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있다는 게 우리나라 불평등의 특징이다. 이러한 불평등은 설명의 여지 없이 나쁘다. 빈곤한 이들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자체로도 불의하다. 

 

Q. 한국에서 능력주의는 어떻게 작동해왔나.

A. 한국은 굉장히 독특한 국가다. 서양보다 훨씬 전부터 능력주의적 제도가 존재했다. 한국, 중국, 베트남의 경우 1천 년도 전에 관료를 능력에 따라 선발하는 과거 제도를 운용했다. 일제강점기와 산업화 과정, 사회 진화론, 입신 출세주의 등 여러 제도적 요인이 맞물려 지금의 능력주의 사회로 이어졌다. 이는 사회 전체의 파이를 키우는 데 효율적일 수 있으나, 그 과정에서 제 몫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의 희생을 강요한다. 한국은 그런 방식으로 사회적 자원을 축적해 왔다.

 

Q. 한국의 능력주의에는 어떤 문제가 있나.

A. 능력주의 아래에서는 불평등을 얘기하지 못한다. 한국에선 수능을 잘 보면 좋은 대학에 갈 수 있고, 좋은 대학에 가면 정규직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게 사회적으로 합의돼 있다. 게다가 시험을 통과했을 때 뒤따르는 보상이 엄청나다. 보상받은 사람과 받지 못한 사람 사이의 격차가 커지는 구조다.

예컨대 명문대와 비명문대 사이의 능력 차이는 사회적으로 딱히 계산된 적도 없고 그렇게 크지도 않다. 그런데도 능력에 따른 보상이 왜 이렇게 큰지 다들 고민하지 않는다.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고만 얘기할 뿐 ‘이게 왜 당연하지’라며 옳고 그름을 따지지 못한다. 그렇게 능력주의는 우리가 불평등을 보지 못한 채 경쟁 자체의 공정함에만 집착하게 만든다. 의미 없이.

 

『한국의 능력주의』는 한국인의 능력주의적 성향을 데이터로 압축해 제시한다. 한국리서치가 주관한 ‘2018 한국 사회 공정성 인식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은 노력과 능력에 따라 보상의 정도를 달리하는 불평등한 분배를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다. 로널드 잉글하트와 크리스찬 웰젤이 주관한 ‘세계 가치관 조사’에 따르면 한국은 다른 선진국에 비해 소득 불평등에 찬성하는 비율(58.7%)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한국인이 불평등에 무심하지만 불공정에 민감한 이유는 차등 분배라는 능력주의 선호와 무관하지 않다.

 

Q. ‘균등한 기회’하에서 능력과 노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A. 한국인들은 ‘형식적’ 기회균등이 능력주의와 동일하다고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 기회균등 원칙은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조건을 고려할 때 기회가 균등하지 않을 수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그 예시로 ‘적극적 시정조치(affirmative action)’가 있다. 여성 할당제, 지역 할당제는 개인의 차이를 상쇄할 정도의 혜택을 주거나 뺏어야 한다는 구체적인 시정조치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이게 역차별이라 주장한다. 이들에게 과도한 특혜를 주는 것이며, 이들이 ‘무임승차’를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다시 형식적 기회균등을 주장한다. 한날한시에 시험을 보는 것을 두고 ‘기회가 똑같다’ 생각한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우사인 볼트와 같은 출발선에서 100m 달리기를 하는 게 기회균등이라 생각한다. 이는 기회균등을 얘기하면서 기회균등 조치를 비판하는 모순에 가깝다. 그게 바로 ‘형식적 공정’이다. 

 

Q. 한국의 능력주의가 갖는 특징이 있나.

A. 첫째는 고시로 대표되는 지대 추구적 시험이다. 지대 추구는 생산성의 향상 없이 소유권만으로 계속해서 이득을 취하는 것이다. 미국도 마찬가지지만 한국만큼 심하진 않다. 특히 우리나라는 변호사를 비롯한 몇몇 자격증에 대한 보상이 지나치게 크게 설정돼있다. 시험 한 번으로 각종 특권과 지배가 허용되는 구조다.

둘째는 혐오 표현이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인데 주로 인종, 젠더 등 개인이 바꿀 수 없는 정체성과 관련돼 있다. 한국은 거기에 더해 사회경제적 혐오 표현, 계급 차별적 혐오 표현이 세계에서 유례없이 노골적이고 강하다. 아파트에 살지 않는 ‘빌거(빌라 거지)’, 휴먼시아 임대 아파트에 사는 ‘휴거(휴먼시아 거지)’, 200만 원 이하의 돈을 번다고 해서 ‘이백충’. 경제적 지위에 관한 혐오 표현이 만연해 있다. 모두 능력주의에서 비롯되는 한국 사회의 특징이다.

 

Q. 시험을 통한 지대 추구가 문제라면 시험을 없애야 하나.

A. 시험을 없앤다고 지대 추구 자체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시험주의는 능력주의의 원인이라기보단 최종 형태에 가깝다. 한국인들도 시험의 폐해를 알고 있기에 시험 제도를 여러 방식으로 바꿔왔다. 그런데 경쟁이 격화될 뿐 근본적인 문제 자체는 없어지지 않았다. 경쟁의 방식을 아무리 바꿔봐야 보상 자체가 엄청나게 크기 때문이다. 결국 특권을 둘러싼 불평등한 보상 체계를 바꿔야 하는 문제다.

 

Q. 그럼에도 고시는 ‘공정한 경쟁’이라 불리지 않나.

A. 여전히 많은 사람이 ‘사법시험을 부활해야 한다’는 등 고시제도가 소위 ‘개천용’을 만들어내는 공정한 경쟁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고시가 공정하다는 건 큰 착각이다. 고시는 불공정한 경쟁이다. 일단 고시 합격자 중 가난한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다. 우리는 가난하지만 고시를 통해 입지전적인 출세를 한 인물을 많이 떠올리는데 그런 사람들은 전체 고시 합격자 중에도 극소수다. 1950년부터 30년간 변호사로 등록된 여성은 딱 한 명이었다. 여성들은 고시 진입 자체가 차단돼 있었는데, 그것부터 사실 공정한 경쟁이 아니다.

마치 본인만 열심히 공부하면 고시에 합격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기도 하는데, 고시 준비에는 수천만 원의 비용이 들어간다. 경제적인 지원 없이는 합격이 불가능하다. 10~20년 준비하다가 고시에서 탈락한 ‘사시 폐인’ ‘고시 낭인’이 수없이 많은데, 사람들은 합격자들의 성공 사례만 바라본다. 성공한 사람만 고려 대상으로 삼는 ‘생존 편향’이 발생하는 것이다. 고시에 합격한 사람들도, 고시를 준비하는 사람들도 편향에 빠지게 된다. 우리 사회가 그동안 고시라는 제도를 통해 극소수의 합격자들을 만들어내기 위해 낭비한 사회적 비용을 돌아봐야 한다.

 

Q. 교육 제도는 어떤가. 공교육의 공정성 확보가 특히 중요한데.

A. ‘교육 현장’이라 쓰고 ‘입시 현장’이라 읽는다. 입시는 학벌‧학력을 쟁취하려는 경쟁이다. 얼마나 효율적으로 쟁취하느냐가 초미의 관심사다. 학벌‧학력주의가 공고해질 수밖에 없다. 학교에서 “능력주의는 잘못된 거야” “모든 사람은 평등해”라며 학벌주의가 잘못됐다고 가르칠 수는 있다. 그러나 학교라는 시스템 자체가 능력주의를 재생산하고 있다. 교사들은 말과 달리 공부 잘하는 학생만 감싸고, 공부 못하는 학생은 찬밥 취급한다.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데 아이들이 모르겠는가. 다 안다.

입시 문제가 나아지지 않는 이유도 명문대를 가는 순간 발생하는 지대가 엄청나게 크기 때문이다. 지방에서 대학을 다니거나 대학을 다니지 못한 사람들이 봤을 때 이건 상당한 특권이다. 이들은 대학이 주는 메리트가 얼마나 큰지 매일같이 느낀다. 그러나 괜찮은 대학 출신은 그런 걸 잘 느끼지 못한다. “이게 무슨 메리트야? 나도 살기 힘든데”라 말한다. 결국 자기 주변이 준거 집단이 되는 까닭에 그런 부분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Q. 청년 세대가 능력주의와 공정에 특히 민감하다고 보나.

A. 강연하다 보면 20대들에게 ‘당신들이 능력주의의 괴물이 됐다고들 얘기하는 데 동의하느냐’고 물어볼 때가 있다. 일부는 동의하지 않는다며 반발하고, 또 일부는 사람을 성적과 스펙으로 평가하는 기제가 청년들에게 내면화돼 있다며 긍정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안심해라. 당신들만 괴물인 게 아니다. 한국인 모두가 괴물이다’라고 답변한다(웃음). 능력주의, 공정성에 대한 집착, 불평등에 대한 선호. 이러한 특성들은 한국 청년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청년 세대는 능력주의적이다’ ‘청년 세대는 괴물이다’는 식으로 얘기하는 건 문제의 단면만 부각할 뿐이다. 한국인이 어떻게 괴물이 돼 왔는지, 그게 어떤 폐단을 낳고 있는지 역사적‧담론적으로 추적해봐야 하는, 한국인의 특성에 관한 이야기다.

 

Q. 청년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보는 이유는.

A. 가령 학벌‧학력주의는 예전부터 존재했다. 수능 성적으로 사람들을 서열화한다는 비판이 있지만, 이는 청년 세대뿐 아니라 한국 사회의 유구한 전통이다. 1990년대 초 학교 다닐 당시 급훈이 ‘4시간 자면 마누라 얼굴이 바뀐다’였다. 전형적인 학벌‧학력주의적 사고방식이다. 공부를 잘하면 어떤 식으로든 큰 보상이 주어진다는 능력주의적 사고방식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는 특정 개인이 가지고 있는 여러 자질 중 시험을 잘 보는 데 필요한 인지적 우월성에 특별한 가중치를 두고 있다. 시험 성적에 따른 차별은 유전자에 새겨져 있다 싶을 정도로 우리 사회에 뿌리 깊게 박혀 있다. 그럼에도 학벌‧학력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능력주의에 대해 비판하지 않거나 외려 능력주의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학벌‧학력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는 경우도 다반사다. “공부 잘해서 좋은 학교 가는 거 아니냐” “학벌 좋은 애들이 일도 잘한다”는 식이다. 이런 부분에 대해 우리 사회가 조금 더 민감하고 구체적인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

 

불평등은 문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능력주의의 대안을 발전시키지 못했다. 박 작가는 한국에서 작동하는 분배 방식이 ‘지위 세습’ ‘능력주의’ 둘뿐이라 지적했다. 세습으로 인한 입시 비리나 특혜 논란이 일면 능력주의적 요구가 확 커진다. “일종의 풍선효과다. 세습으로 인한 반칙과 편법이 문제가 되면 유일한 반대급부인 능력주의가 튀어나오는 것이다”

능력주의 말고 다른 분배 체계를 상상해볼 순 없나. 능력주의를 비판하는 것에 그치기보단, 불평등을 해소할 다양한 분배 정의가 필요하다. 이를 고민하고 실천하는 건, 결국 정치의 문제다. 능력주의의 틈새는 제도권 정치와 시민사회를 포괄하는, 보다 넓은 정치의 공간을 연다. 그가 강조하듯 불평등과 능력주의를 극복하려는 ‘과정’이 중요한 기획이다.

 

Q. 능력주의를 비판하는 것으로 충분할까.

A.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은 문제 해결의 충분조건이지 필요조건은 아니다. 한국인은 추상적인 차원에서 평등한 사회가 좋다는 데 대부분 동의한다. 평등을 아름다운 가치나 생각 정도로 받아들이지 당장 본인의 일로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평등이 무엇인지 상상해봐야 하는 이유다.

사실 ‘현실적 능력주의’뿐 아니라 ‘이상적 능력주의’를 함께 비판해야 한다. 현실적 능력주의는 겉보기엔 능력주의처럼 보이나 세습 지위에 의해 불공정한 경쟁이 일어나는 ‘위장된 세습 신분제’다. 정유라씨, 조민씨가 특혜를 받은 사례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상적 능력주의는 마이클 영이 말한 가상의 영국 사회처럼 순전히 개인의 IQ와 노력만으로 경쟁한 결과에 따라 자원이 배분되는 사회다. 현실적 능력주의의 세습 신분제적인 요소에 대해선 누구나 쉽게 비판한다. 문제는 ‘그렇기에 진정한 능력주의 사회로 가야 한다’며 이상적 능력주의를 목표로 상정한다는 점이다.

이상적 능력주의는 어떻게 보면 더 위험하다. 사람들은 이걸 굉장히 긍정적으로 여기는데, 사실 불평등 문제에 있어서는 훨씬 치명적이다. 불평등을 정당화할 뿐 아니라 불평등에 저항할 수 없게끔 만든다. 이상적 능력주의를 얘기하다 보면 능력주의라는 분배 프레임에만 갇혀 대안적인 분배 정의를 상상하기 어려워진다.

 

Q. 어떤 방식의 분배 정의가 필요하다고 보나.

A. 하나의 완벽한 정의론은 없다. 정의에 대한 단일한 합의가 가능하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이 말한 ‘다원적 정의’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는 사회마다 가지고 있는 역사와 문화가 다른 만큼 단일한 정의 원칙을 모든 사회에 강요할 순 없다고 말한다. 대신 다양한 분배 정의를 고려해야 한다며 ‘세 아이와 피리 한 개’라는 사례를 들었다.

세 아이 중 한 명인 칼라는 피리를 손수 깎아 만들었다며 자기가 피리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앤은 자신이 피리를 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며 피리의 소유권을 요구한다. 밥은 자신이 가장 가난해서 피리가 유일한 장난감이기에 피리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때 우리는 누구한테 피리를 줘야 하나. 센은 상황과 맥락에 따라 피리의 주인이 달라질 수 있다며 정의 원칙을 결정하는 건 사회적 논의에 달려 있다고 봤다. 어떤 사회인지에 따라 누구에게 피리를 줄 것인지도 달라진다. 우리도 단일 정의론보다 조금 느슨하더라도 각 사회와 문화와 제도에 맞는 다원적인 분배 정의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Q. 다원적 정의, 어떻게 시작할 수 있나.

A. 각자가 생각하는 정의는 모두 다르다. 중요한 건 정치적인 논의의 장에서 각자의 정의를 가지고 서로 각축하고 경쟁하는 일이다. 가령 롤스의 정의론이 정합적이고 뛰어나다고 해서 모두에게 이 원칙을 강요할 순 없다. 중요한 건 우리 사회에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이 더 옳고 윤리적인지 견줘보며 각자의 공정과 정의가 경합하는 과정 자체에 있다.

 

Q. 정치의 영역에서 능력주의를 해소하는 게 중요하다는 건가.

A. 넓은 의미의 정치는 ‘소셜 임파워먼트’다. 능력주의를 해소하려면 사회력을 키우고 정당 정치의 대표성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다만 현실 정치에서 벌어지는 테크니컬한 접근에 더해, 정치는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을 아울러야 한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가시화하는 것, 몫이 없는 자들의 몫을 생각하는 것. 그게 정치의 본령이다.

 

Q. 모두를 위한 정치, 어떻게 만들어가야 하나.

A. 결국 대중이 바뀌어야 한다. 일방적인 피해자는 극소수다. 능력주의에서 대중은 피해자이자 가해자다. 을이 갑에게 갑질을 당하지만, 병에게 다시 갑질을 하는 식이다. 엘리트를 욕하는 대중들 역시 엘리트가 만들어낸 세상에 편승하며 그 속에서 자기 잇속을 챙긴다. 따라서 사람들이 스스로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 엘리트가 관철하고 있는 질서를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다. 본인도 그런 부분들을 어떻게 실천해나갈 것인지를 숙제로 갖고 있다.

 

능력주의는 '마음의 화석 연료'다. 박 작가는 능력주의가 “과거에는 열심히 노력할 수 있게끔 하는 일종의 에너지원이었다”면서도 “지금은 패자 부활의 기회를 없애고 고통만 안겨주는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지적했다. 이건 단번에 극복할 수 없다. 그는 능력주의와 함께 살아가며 새로운 연료를 찾아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같이 조금씩, 조금씩 능력주의를 어떻게 버려 나갈지를 함께 고민했으면 좋겠습니다”

 

글 김예서 기자
kimyeseo1@yonsei.ac.kr

복건우 기자 
geonu_20@yonsei.ac.kr

사진 한승아 기자 
seungah_han@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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