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문학상(시 분야)] 심사평

[윤동주 문학상(시 분야)] 심사평

정명교
우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사태로 인한 장기간의 격리 상황이 문학 창작에도 어떤 영향을 끼친 것일까? 예년에 비해 단순한 감상을 털어놓는 시들이 부쩍 줄어든 반면, 논리적으로 사태를 설명하는 경향이 크게 늘었다. 이러한 경향은, 사적 경험을 그대로 시의 지면으로 끌어오는 최근의 일반적인 추세와 맞물려, 자신의 경험을 세세한 이야기로 풀어내는 능력을 성큼 신장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시가 되기까지에는 아직 가야할 길이 멀다. 관건은 두 개. 하나는 개인적인 사건에서 독자들의 공감을 얻으려면, 그 사건이 모두가 함께 해결해야 할 보편적인 문제로 치환되어야 한다는 것. 이 점이 부족하면 쓰다만 시가 되고 만다. 다른 하나는 이야기가 시의 중요한 바탕 중의 하나임은 분명하지만, 시의 표면에서는 감각들이 반짝여야 한다는 것. 세칭 이야기시에서도 그를 돋보이게 하는 건, 사연이 아니라 표현이라는 점이다.

투고된 92편의 작품 중에,「푸가의 기법」(9), 「관계의 두려움」(32), 「앵무새가 있던」(41), 「자폐적인 시」(48), 「플라밍고는 왜 동물원에서 날지 않을까」(50), 「주일미사」(58), 「눈」(72), 「둥글게, 둥글게」(84), 「어른」(88)을 우선 검토작으로 골랐다.

「푸가의 기법」, 「관계의 두려움」, 「자폐적인 시」는 두 개의 이미지 혹은 같은 사물의 두 현상을 선명히 대비시켜 주목을 끌었다. 관찰을 넘어 성찰에까지 밀고 올라가는 끈기가 부족한 게 아쉬웠다. 「주일미사」와 「어른」은 공정히 풀리지 않는 인생살이에서 배어나오는 애환과 절망과 물음을 차분히 반추하는 장점이 있다. 이런 감회를 번득이는 이미지로 톺아내면 그 고민과 물음이 만인의 화두로 떠오를 수 있을 것이다. 「앵무새가 있던」과 「눈」은 상식을 뒤집는 통찰이 있고, 「플라밍고는 왜 동물원에서 날지 않을까」와 「둥글게, 둥글게」는 현실의 고통과 맞서는 끈기가 있다. 「눈」은 삶의 표면 밑에 잠복된 전복의 힘을 선명한 영상으로 환기시키는 데에는 성공하였으나, 이미지들 간의 조응이 충분치 않았다. 「둥글게, 둥글게」는 세상에 대해 사람들이 부여하는 상징적인 의미와 기만적인 현실 사이의 어긋남을 화자의 삶에 입혀서 진솔한 질문의 집요한 운동을 밀고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지가 단순해서 감각적인 강렬함을 주기에는 부족했다. 「플라밍고...」는 동물원의 화려한 모습을 감옥의 이미지로 반전시켜 독자를 삶에 대한 근본적인 의혹 속으로 집어넣었다. 다만 이 디스토피아 안에 현실의 다채로움이 잘 용해되지 않아서 이미지의 찌꺼기가 남는 흠이 있었다. 「앵무새가 있던」은 상식의 반전, 끈질긴 사색, 투쟁의 의지가 모두 힘차게 작동한 시다. 굴종 속에서 저항을 길어내고 고난의 상황들을 연료로 사용할 줄 알며, 분출하는 의지들을 사건으로 엮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시의 길이가 긴 것은 때로는 시인의 잠재력을 암시하기도 한다. 당선작으로 선뜻 뽑은 이유가 여럿 있다. 축하를 보내며 정진을 바란다. 후보작의 주인공들도 자신의 재능을 시험한 만큼 분발하길 바란다.

 

[박영준 문학상(소설 분야)] 심사평

이석구
우리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2021년도 연세문화상 소설 부문 응모작 총 14편 중 <만화경 눈의 아가씨>, <유리로 만든 집>, 그리고 <섬사람들> 세 편이 눈에 띕니다. <만화경 눈의 아가씨>는 독자에게서 판타지 소설인가 하는 의구심을 지속적으로 불러일으킴으로써, 즉 사실주의와 판타지 간의 장르적 모호성을 유지함으로써, 독자의 관심을 붙잡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한 작품입니다. 또한 흥미로운 반전을 결말에 예비함으로써 독자의 기대에 부응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비록 분량은 중편에 가깝지만, 단편소설의 형식에 충실한 편입니다. 반면, 작품이 형상화하는 주제 의식은 이 작품의 짧지 않은 지면에 담기에는 약해 보입니다. <유리로 만든 집>은 그런 점에서 비교가 됩니다. 이 단편소설은 미래에 대하여 밝은 전망을 가질 수 없는 곤궁한 동시대 청년세대의 일상, 그의 사랑, 우정, 경제적 현실을 적확한 언어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언어가 상당히 유려하다는 것도 이 단편의 장점입니다. 무엇보다도, 가진 것 없는 청년들의 우울한 일상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데 그치지 않고, 허세가 심한 허풍선이 친구를 들여옴으로써 삭막한 현실 세계에 (블랙) 유머를 더하는 솜씨가 큰 장점입니다. 반면, 플롯 구성력이나 작품의 종결감이 약하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섬사람들>은 앞의 두 작품이 보여주는 문제를 어느 정도 극복한 중편 소설입니다. 이 작품의 문제부터 지적하자면, 이 소설은 초입 부분에서부터 우의적인 성격, 즉 알레고리를 투박하게 강조함으로써 독자의 몰입감을 떨어뜨리는 감이 있습니다. 또한 등장인물들의 생동감이 다소 떨어진다는 점도 이 작품의 단점입니다. 이 문제는 작품의 우의적인 성격에 기인하는 바이기도 하지만, 사실 우의적인 작품이라고 해서 반드시 등장인물의 개성까지 희생하라는 법은 없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첫 십여 쪽을 포기하지 않고 잘 넘기는 독자만이 이 작품이 중간쯤부터 예비해 놓고 있는 사변적(思辨)인 성찬(盛饌), 즉 진리와 고통, 거짓과 행복이라는 언뜻 보아 어울리지 않는 두 쌍의 개념들을 축으로 펼쳐지는 형이상학적 드라마에 초대를 받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진리가 개인을 자유롭게 하고, 진정한 행복은 진리를 소유하게 된 다음에야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혹은,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도록 교육받았습니다. 문명사회가 만약 그 반대로 가르쳐왔다면 인간 사회는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일 것입니다. <섬사람들>의 작가는 이러한 도덕적, 종교적 정언에 질문하는 사유를 보여줍니다. 그는 우리에게, 진실을 알게 됨으로써 치르는 대가는 고통인데 이러한 고통을 감내하는 삶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기만을 당하는 대신 행복을 누리는 것이 옳은 것인지에 대한 화두를 제기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가볍지 않은 철학적 주제와 씨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유를 전개함에 있어 <섬사람들>이 처음은 아니라는 말은 반드시 해두어야 할 듯합니다. 상황은 다소 다르지만 엄격한 계급적 차별과 사회적 통제라는 끔찍한 진실을 “소마”라는 마약의 힘을 빌려 위장하는 미래의 디스토피아를 올더스 헉슬리가 <놀라운 신세계>(1932)에서 그려낸 바 있기 때문입니다. <섬사람들>에서는 “로제 슈가”가 진실을 숨기는 소마의 역할을 합니다. 대중이 진실을 알 자격이 있는지, 다시 물어, 진실을 모르는 편이 대중에게 유익한 것이 아닌지 하는 질문은 김은국이 영어로 출판하여 무려 20주간 <뉴욕타임스>의 베스트셀러에 오르게 될 뿐만 아니라 노벨문학상 후보에도 올랐고, 작가가 우리말로도 출판하였던 데뷔소설 <순교자>(1964)의 중요한 화두이기도 합니다. <섬사람들>의 주인공은 인간의 가치를 옹호하는 휴머니즘의 대변인 역할을 톡톡히 해내기도 합니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가치를 두는 이 사유는 20세기 초 중엽 유럽의 지성인들에게서 유행하였던 실존주의를 공명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일찍이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BC 429)에서 신의 노리개로 전락한 주인공이 이를 비극적으로 극화해 보인 바 있습니다. 자신의 운명은 아폴로의 신탁(神託)에서 이미 결정이 되어 있었지만, 자신의 두 눈을 찌른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손이라는 오이디푸스의 외침이 그 사례입니다. 종합하자면, 알레고리의 투박함과 입체적이지 못한 등장인물의 면면이 이 작품을 음미하는데 장애가 되는 반면, 철학적인 주제를 큰 무리 없이 극화해내고, 대의명분과 사적인 욕망이 반드시 깨끗하게 분리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유, 인간성의 밑바닥에 대한 통찰 등을 나름대로 잘 소화해서 독자에게 서비스하고 있다는 점이 <섬사람들>의 미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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