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준 문학상(소설 분야) 당선작]

섬사람들

이민지(철학 · 17)

레몬 사탕을 만드는 레몬씨는 레몬색 집, 박하사탕을 만드는 박하 씨는 민트색 집에서 살았습니다. 커피 사탕을 만드는 커피 씨는 커피색 집에서 살았고 체리 사탕을 만드는 체리 씨는 체리색 집에서 살았습니다. 이 섬에서 생산되는 모든 사탕은 고유의 표식이 찍혀 뭍에서 비싼 값에 팔렸습니다. 도합해서 20종류가 좀 넘는 다양한 맛의 사탕들이 집의 지붕과 섬사람의 이름을 알록달록하게 물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레이가 섬사람이 아니라는 건 그의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그래도 나는 그가 이곳으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립니다. 그가 내게 약속을 했으니까요.

 

나는 라임입니다. 라임씨는 이름처럼 라임 사탕을 만들었고 나는 라임씨를 돕는 견습생이었습니다. 라임씨는 라임색 집에서 살았고, 나는 올해 열세 살이 됩니다. 그리고 나는 매일같이 바닷가에 나가 그레이를 기다립니다. 혼자 맞는 바닷바람은 소금 냄새가 진하게 나고, 기분 나쁠 정도로 축축하고, 무엇보다 겁이 날 만큼 세찹니다. 그건 어쩐지 그레이를 연상시킵니다. 그는 메마른 황야 같은 사람이었으니까요.

 

난 황야에 가본 적은 없습니다. 내가 내 13년의 삶에서 기억하는 장소는 오직 두 군데 뿐이고, 둘 중 하나는 바로 이 섬입니다. 그래도 나는 바다를 황야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하늘부터 수면까지 넓은 공간을 온통 무섭게 이는 바람이 채우고 있습니다. 대기는 히스 냄새 대신 짙은 소금기를 머금고 있습니다. 흐린 날엔 하늘과 바다의 경계도 구분되지 않습니다. 뒤돌아서면 섬의 알록달록한 지붕들이 보이는데, 이 섬을 둘러싼 끝을 알 수 없는 회색 공간과 대비되어 꼭 퇴락한 유원지를 보는 것 같기도 합니다. 물론 실제로 유원지를 본 적은 없지만... 아무튼 그 풍경이 이 섬 같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름답지만 어쩐지 쓸쓸한 곳. 사람이 살지 않는 황야 한가운데에 유원지를 짓는다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요?

 

그레이를 처음 만난 날도 날씨가 이렇게 흐렸습니다. 그는 회색 바다 저편에서 왔습니다. 그는 섬과 뭍을 잇는 유일한 연락책이었습니다. 그러니 나를 이 섬으로 데려온 것도 분명 그레이였을 테지만, 그때 내가 너무 어렸기 때문인지 내가 그레이를 처음 만난 건 섬에서의 일로 기억됩니다. 뭍과 섬을 오가며 섬에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는 것이 그레이의 일이었지만, 섬사람들은 그를 그닥 달가워하는 기색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섬에서 그레이에게 호의적인 사람이라고 해 봐야 초코 씨 정도였습니다. 섬사람들이 그레이를 꺼리긴 해도 그에게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지는 않았던 건, 유별나게 따뜻한 성품을 지닌 초코씨가 그를 좀 감싸 준 탓이 크지 않았을까 합니다. 누가 뭐래도 섬에서 초코 씨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었으니까요. 잠시 초코씨를 소개하자면, 초코 씨는 섬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어른이었습니다. 대다수의 섬사람들이 젊은이들인 가운데, 이제 일흔 살도 더 되는 초코씨는 늘 섬 전체의 일이라면 누구보다 먼저 앞장섰습니다. 사실 초코씨의 나이는 한 번도 문제가 된 적이 없는데, 초코 씨는 견습생도 두지 않고 혼자서 한 집 몫의 일을 했습니다.

 

세월은 아무래도 초코 씨에게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했거나, 오히려 초코씨를 더 강하게 만들어 놓은 것 같았습니다. 초코 씨의 나이나 강인한 얼굴 선 때문에 무뚝뚝하다고 느끼거나 겁을 먹는 사람도 있을 법했지만, 초코 씨가 알고보면 따뜻한 분이라는 걸 섬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습니다. 전혀 권위적이지도 않았고, 오히려 옆집 할아버지처럼 친근한 분이라서 섬사람들은 초코 씨를 잘 따랐습니다. 하지만 그런 초코 씨도 그레이에 대한 인상을 아예 좋은 쪽으로 바꾸는 데는 끝내 실패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레이는 키는 멀대처럼 크면서 어딘지 모르게 음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얼굴은 큰 흉터로 일그러져 있었는데, 그건 마스크나 안경 따위로 가릴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음울한 분위기가 전적으로 그 흉터에서 기인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목소리도 음산하게 밑으로 깔리는 저음이었고, 옷은 늘 긴 소매의 회색 셔츠를 고집했습니다. 심지어 한여름에도 그는 그걸 벗거나 다른 옷으로 갈아입기는커녕 소매조차 걷지 않았습니다. 그뿐이 아니라 그가 입은 바지 역시 회색이었고, 회색 모자를 쓰고 다녔으며 양말마저 회색 양말을 신었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회색인 그의 옷차림을 본 섬사람들은 아마 그의 속옷까지 회색이 아닐까 수군대곤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알록달록한 이 섬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의 방문은 섬사람들에게는 마치 일종의 침입 같다고도 느껴졌습니다.

 

그런 그레이가 섬에 위협이 될지도 모른다고 다들 막연히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그 판단이 옳았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어쨌거나 그때 그레이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뭐 하러 여기 오냐는 우리 견습생들의 장난 섞인 질문에도 침묵이나 냉소로 일관할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며칠 머물다 도로 뭍으로 돌아갔습니다. 섬에서 만든 사탕 따위를 싣고서. 또 우리 견습생들은 그에게 편지를 맡기곤 했습니다. 처음 편지의 내용은 보통 우리의 소소한 일상을 담은 것이었는데, 사탕을 만드는 공정 따위를 소개하곤 했습니다. 당시 우리가 쓴 편지의 내용을 재현한다면, 대충 이런 식이었을 것입니다.

 

ㅡ사탕을 만드는 데에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아닌 세심한 불 조절이에요, 가마솥에 처음 설탕을 넣어 중불로 녹일 때는 절대로 저어서는 안 되구요, 액상시럽을 넣은 뒤 솥의 가장자리로부터 기포가 올라오기 시작하면 바로 그때 각양각색의 향료나 과즙을 (저의 경우에는 라임을) 넣어야 해요. 사탕의 맛은 이 시점에서 대충 결정이 되지만, 가장 중요한 건 그 다음부터입니다. 가마솥이 더 뜨거워지기를 기다렸다가, 중심부가 팔팔 끓기 시작하면 정확히 3분 후에 솥을 불 위에서 옮겨야 해요. 너무 일러도 못 쓰게 되고, 너무 늦어도 솥이 끓어넘치기 때문에 주의해야 합니다.

 

사탕의 모양을 성형하는 과정은 너무 어린 견습생들에게는 돕는 것이 허락되어 있지 않지만, 그래도 우리는 열심히 배우고 있어요. 제 집주인인 라임 씨는 사탕의 모양에 있어서 늘 새로운 시도를 하는 혁신가입니다. 라임 씨의 손에서 만들어지는 사탕은 늘 독특한 구석이 있어요. 깨물면 안쪽에 무늬가 나타나는 과일 모양 사탕 만드는 법을 섬에서 처음으로 개발한 것도 라임 씨고, (지금은 섬의 주요 생산품 중 하나인)과일 퓨레가 들어있는 다크 초콜릿을 만들자고 초코 씨에게 처음 제안한 것도 라임 씨였습니다. 라임 씨가 방금 불에서 꺼낸 사탕으로 여러 가지 형상을 능숙하게 만들어 내는 걸 보면, 항상 감탄을 금할 수가 없어요.

 

아, 모든 공정의 끝엔 늘 로제 슈가 반 스푼이 첨가됩니다. 이것도 불 조절에 못지 않게 중요한 부분인데 하마터면 빠뜨릴 뻔했네요. 섬에서 생산하는 사탕이 외부의 흔한 수제 사탕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뭐냐고 묻는다면, 로제 슈가의 첨가 여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로제 슈가는 섬의 사탕을 섬의 사탕으로 만드는 핵심적 요소예요. 로제 슈가를 아주 소량만 첨가해도 사탕의 색을 선명하게 낼 수 있습니다. 예컨대 연노랑색 오렌지 사탕에 로제 슈가가 들어가면 아주 강렬한 주황빛으로 변하는데, 이 과정에서 별도의 착색료가 필요치 않다는 점은 정말이지 놀라운 사실이지요.

 

로제 슈가는 보통 설탕보다 냄새는 훨씬 달콤한데, 맛은 강하지 않습니다. 사탕에 들어가는 재료 중 견습생들이 마음대로 먹어도 되는 유일한 재료이기도 했는데, 단맛이 강하지 않아 많이 먹어도 부담스럽지 않아요. 사실 오히려 안 먹은 날에 몸이 더 축 처지는 기분입니다. 그건 로제 슈가를 먹으면 피곤이 가시는 효과가 있기 때문인데, 집주인들도 그런 이유로 로제 슈가를 종종 차에 타 먹곤 합니다. 로제 슈가의 이런 효능 탓에 섬에서 만드는 사탕이 그토록 특별한 것이랍니다, 한 번이라도 섬의 사탕을 맛본 사람이라면 절대로 다른 사탕 생각은 하지 않게 되지요...ㅡ

 

섬 생활은 단조롭고, 하루는 사탕 만드는 것으로 시작해 사탕 만드는 걸로 끝납니다. 일이 끝나면 저녁이고, 어두워지면 섬 사람들은 좀처럼 집 밖을 나가지도 않습니다.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따라서 편지에 쓸 것도 이렇게 판에 박힌 듯 다 정해져 있게 마련이었습니다. 이런 내용 말고는 쓸 게 그다지 없다 보니, 오렌지나 박하, 커피처럼 나이가 어느 정도 든 견습생들은 편지를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와 레몬처럼 어린애들은 꼬박꼬박 뭍에 계실 부모님께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내 바로 다음으로 이 섬에 온 다섯 살 체리는 너무 어려 내가 편지를 대신 써줬습니다.

 

답장이 오지 않는 편지에 가장 일찍 흥미를 잃어버린 것도 체리였습니다. 이제 막 열다섯 살이 되어 아직 집주인이라기보단 견습생 언니처럼 느껴지는 체리 씨는, 친동생의 머리를 만져주듯이 늘 체리의 머리를 양갈래로 묶어주곤 했습니다. 양갈래 머리를 한 체리가 얼마나 귀여웠는지는 정말 말로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 체리가 어느 날부턴가 뾰로통한 얼굴로 편지 쓰기를 거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애초부터 체리가 편지를 쓰는 건 내가 그렇게 하라고 시켰기 때문이 커서 나는 더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그 후로 얼마 지나지 않아 버터와 레몬도 편지 쓰기를 그만뒀고, 나는 섬에서 유일하게 편지 봉투를 들고 그레이를 따라다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레이는 가까워지기 어려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섬사람들과는 사무적인 관계 이상으로 대화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나와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래서 어느 날 내가 언제나처럼 편지를 건넬 때 그가 내게 던진 냉소는 화가 난다기보단 도리어 뜻밖이었습니다.

 

넌 왜 아직도 편지를 쓰지?

무슨 말이에요?

저 애들은 이제 편지를 안 쓰지.

그야 답장이 없으니까요.

너희 부모님은 다를 거라고 생각해?

네?

어차피 널 버린 놈들이야. 그런 놈들한테 답장을 기대하나?

 

그레이가 툭툭 내뱉은 말의 내용들은 다분히 시비조였지만, 나는 그의 말투에서 어쩐지 지울 수 없는 서글픔 같은 게 묻어나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부드럽게 대꾸했습니다.

 

부모님이 읽고 안 읽고는 중요하지 않아요. 어차피 난 그분들이 기억나지 않아요. 이 편지는 그냥 내가... 섬 밖에 대해 생각하는 방법일 뿐이에요. 봐요.

 

나는 편지 봉투를 뜯어 그레이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거기에는 이 조그만 섬에서 결코 겪어 볼 수 없는 내용들만이 가득 적혀 있었습니다. 그날은 황야의 달빛, 세찬 바람소리, 공기중을 맴도는 히스의 냄새. 말을 타고 질주하는 이야기. 그 이야기에선 더이상 섬의 냄새, 아침부터 저녁까지 눌어붙은 설탕 끓이는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고, 그가 놀란 듯이 나를 쳐다보자 나는 나직하게 말을 이었습니다.

 

내가 섬 밖에 대해 기억할 수 있는 건 부모님도, 우리 집도 아니고, 오직 병원의 하얀 천장과 독한 소독약 냄새뿐이에요.  나는 황야가 저 바다와 비슷한 곳일 거라고 상상하곤 해요... 그래도 가볼 수 있다면 한번 가보고 싶어요. 가본 적이 없으니까 그렇단 거예요.

 

그레이는 내 눈을 한참 빤히 바라보더니 말없이 배로 갔습니다. 다음에 그가 섬에 왔을 때 그는 황야를 촬영한 슬라이드를 양손에 든 채 라임색 집으로 왔습니다. 그는 약간 지친 듯이 보였는데, 나중에 말하길 내가 어느 집에 사는지를 몰라서 한참을 헤맸다고 했습니다. 숨을 몰아쉬며 문가에 서 있는 그를 본 라임씨는 그레이가 먼저 제발로 누굴 찾다니 별 희한한 일이 다 있다는 듯 쳐다봤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레이에게 달려가 그를 두 팔로 껴안았습니다. 그레이는 어쩔 줄 모르고 어정쩡하게 서 있다가, 슬라이드를 내려놓고 어색하게 내 등을 토닥였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그레이와 나는 눈에 띄게 가까워졌습니다. 그레이가 섬에 올 때면, 하루 일과가 끝난 뒤 저녁을 그레이와 함께 보냈습니다. 라임 씨는 내가 해 진 뒤 침대에 눕는 대신 나돌아다니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새로운 것을 잘 받아들이는 라임씨 답게 금세 익숙해졌습니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저녁마다 외출할 정도로 그레이와 가까워졌다고는 해도 우리가 많은 대화를 나눴던 건 아닙니다.

 

그레이는 원래가 소심하고 별로 말이 없는 성격이어서, 그 점은 친해졌다고 달라지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나와 있을 때 그는 종종 웃었습니다. 사람들 보는 앞에서 좀체 웃질 않는 사람이었는데, 아마도 웃을 때마다 흉하게 말려올라가는 일그러진 입매 탓이었으리라고 나는 짐작했습니다. 사실 얼굴의 기형이 섬에선 큰 흉이 못 됐는데, 섬사람들 중에도 더러 얼굴에 심한 화상 자국 같은 게 있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버터 씨는 이마에서 턱까지 가로지르는 흉터가 있고, 오렌지 씨도 얼굴 반쪽 전체의 피부가 완전히 상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그들의 얼굴이 흉측하다고 그들을 꺼리진 않았습니다. 물론 이제 막 스무 살이 되는 오렌지 씨는 종종 얼굴에 대해 불평불만을 늘어놓곤 했습니다. 오렌지 씨는 약간 통통하지만 고양이처럼 날렵한 구석이 있는 매력적인 사람이었는데, 외모에도 곧잘 신경을 썼던 그녀는 여자가 제일 아름답고 사랑스러워야 할 나이에 얼굴이 이게 무슨 꼴이냐면서 종종 투덜거리곤 했습니다만 뭐 그것도 완전히 진심은 아니었습니다. 오렌지 씨는 기본적으로 쾌활함을 잃지 않는, 그녀가 만드는 오렌지 사탕처럼 싱그러운 사람이었습니다. 얼굴 반쪽이 일그러진 게 아니라 아예 없다 하더라도 오렌지 씨는 우리의 사랑스러운 오렌지 씨였습니다.

 

하지만 그레이가 얼굴의 흉터에 예민한 것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닙니다. 오렌지 씨나 버터 씨가 얼굴은 그래도 정말은 착한 사람이라는 걸 섬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잘 알았지만, 뭍에서도 모두가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건 아니었으니까요. 그레이는 어쨌거나 섬의 방문자였고, 따라서 그는 뭍에서 머무는 시간이 더 길었습니다. 그는 뭍의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야 할 뭍의 사람이었습니다.

 

천성이 순하고 조용한 그레이가 내게 불같이 화를 낸 건 딱 두 번 뿐인데, 그중 한 번이 내가 얼굴은 왜 그렇게 되었냐고 물었을 때였습니다. 그는 대답하고 싶지 않아했는데, 나는 그가 거리끼는 걸 미처 눈치채지 못한 채 집요하게 캐묻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나는 무심결에 그레이도 이 섬에서 나랑 같이 살면 좋을 텐데, 하고 중얼거렸습니다.

 

방금 뭐라고 했어.

그레이도 같이 여기서 살아요. 섬사람들도 그레이가 여기서 같이 산다고 하면 그땐 그레이를 이상하게 안 볼 거예요.  게다가 여기 사람들은 그레이의 흉터, 무섭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뭍 사람들은 어떤지 몰라도, 그레이가 여기 남으면...

 

...닥쳐!

 

그때 그는 끓어넘치는 사탕 솥 같았습니다. 그의 분노는 폭발적이고 순식간이어서, 금세 사그라들었지만 나는 그때 그가 나를 거의 때릴 뻔했다는 걸 기억합니다. 다신... 다신 그런 말 입 밖으로 꺼내지 마. 알았어? 그는 말까지 더듬으며 그런 경고를 했습니다. 나는 알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나는 그레이가 그 후로 나를 전처럼 대해주지 않을까 봐 걱정했지만, 괜한 일이었습니다. 다음날 그는 아무렇지 않게 나를 대했습니다. 전날 있었던 일에 대해 입도 뻥긋하지 않는 태도는 그 자체로 수수께끼였지만, 나는 감히 더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내가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면, 그가 이상할 정도로 섬을 싫어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섬의 어른들이 그레이를 꺼리는 것 이상으로 싫어했습니다. 그는 무뚝뚝한 구석이 있긴 해도 날 대하는 태도를 보아 결코 차가운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는 섬에 대해서라면 숫제 냉소만을 보였습니다. 그레이가 섬에 대해 품은 감정이 거의 증오에 가깝단 사실을 나는 머잖아 깨닫게 되었지만, 그 증오의 연원은 한동안 알지 못했습니다.

 

영원히 알지 못했더라면 어땠을까... 지금은 생각합니다.

 

섬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기묘하다는 걸 깨닫기 시작한 건, 내가 섬에 온 후로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였습니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부터 사탕 만드는 작업을 배우는 데에만 온 정신을 쏟은 나머지, 뭔가 조금씩 어긋나 있다는 느낌은 거의 받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내가 처음 섬에 도착했을 당시에 라임 씨는 설탕 비율을 줄인 대신 과육이 씹히는 라임 사탕, 즉 신제품 개발을 막 하던 찰나였기 때문에 나도 덩달아 눈코 뜰 새 없이 일이 바빴습니다.

 

나는 사탕의 시제품이 나올 때마다 그걸 레몬 씨에게 매번 갖다주어야 했습니다. 레몬색 집은 내가 사는 라임 지붕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는데, 섬의 집들은 모두 가까이 있는 집들끼리 파이프 같은 것으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일종의 비상 연락 수단인 셈인데, 파이프 입구 뚜껑을 열어두면 신기하게도 서로의 집에서 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건 보통 아주 큰 배에서 조타실과 망루 간에 서로 연락을 하기 위해 쓰는 방식이라고 언젠가 그레이가 나에게 가르쳐 준 적이 있습니다. 어쨌거나 라임 씨가 소리 파이프를 통해 내가 간다고 저쪽에 미리 알리면, 나는 시제품 사탕을 들고 레몬씨에게 심부름을 갔습니다.

 

레몬 씨는 덩치가 크고 수염을 덥수룩하게 길렀지만 눈매가 순하고 조용한 아저씨였는데, 그 온순한 성격 탓인지 레몬 씨가 만드는 사탕들은 모두 레몬사탕이라기보다는 그냥 레몬 향이 은은하게 나는 설탕덩어리에 가깝다고 해도 좋을 법한 달달한 맛이 났습니다. 그러니 설탕 비율을 줄이고 새콤한 과즙량을 늘린 그 시제품이 레몬씨의 입맛에 맞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는 매번 시큼하다는 평가로 라임 씨를 실망시키곤 했습니다. 그의 그런 평가에 악의는 전혀 없었지만, 라임 씨는 자기도 레몬사탕이나 만드는 처지에 시큼하다는 말이나 하다니 말이 되냐며 내게 푸념을 늘어놓곤 했습니다.

 

섬의 견습생 중 나와 가장 친했던 사람은 레몬이었는데, 바로 이런 류의 방문을 여러 차례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이었습니다. 나보다 두 살 가량 어린 레몬은 유난히 섬 생활을 힘들어했습니다. 처음 편지를 쓸 때 가장 열의를 불태웠던 것도, 사탕 만드는 건 지긋지긋하고 집에 빨리 돌아가고 싶다던 레몬이었습니다. 레몬 씨가 그를 정말 아들처럼 대해줬음에도 불구하고, 그애가 섬에서 진짜로 따르고 의지하는 단 한 사람은 다름아닌 나였습니다. 그애가 나한테 기대어 울먹일 때, 빡빡 깎인 그애의 뒤통수를 쓰다듬어 줄 때면 나도 그애가 마치 진짜 남동생인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레몬이 어느날부턴가 보이질 않았습니다. 물론 그애는 줄곧 섬에서 도망간다고 말해 왔지만, 실제로 그럴 수 있을 리는 만무했습니다. 섬을 둘러싼 바다는 파도가 하도 높아서, 웬만한 뱃사람은 접근할 엄두도 못 낸다는 게 그레이 씨의 설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린애 혼자서 배도 없이 그 바다를 건너갈 수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정말 이상한 건, 나 말고는 아무도 레몬의 실종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그 애가 처음부터 이 섬에 존재하지 않기라도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섬에 들어올 때 우리는 손목에 표식을 남깁니다. 이 표식은 우리가 만드는 사탕에 붙는 고유의 표식과 같은 종류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섬에 들어올 때 우리의 이름을 버립니다. 사실 내가 처음 섬에 들어올 때의 정황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땐 너무 어렸고, 또 경황이 없어서... 그러나 지금까지도 하나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나의 본래 이름입니다. 물론 손목에 라임 색 표식을 새길 때 느꼈던 살이 타는 듯한 감각도 똑똑히 기억합니다만, 내 원래 이름은 그보다도 더 또렷하게 머릿속에 새겨져 있습니다. 하지만 섬에 들어와서 난 때때로 라임이라는 이름이, 그 색깔이, 뭍 사람이었던 나의 본명을 서서히 지워 버리는 것 같다고 느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은 그 자체로도 너무나 쉽게 지워져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레몬은 그렇게 사라졌고 난 그 애의 본래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그는 지워져 버렸으니 영영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직후 그레이가 방문했을 때, 그는 초코 씨의 전서구를 통해 연락이라도 받은 모양인지 새로운 견습생을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그 애 이름도 레몬이었지만, 나의 레몬과는 키도 생김새도 목소리도 전혀 딴판이었습니다. 손목에 찍힌 연노랑색의 낙인만이 그가 틀림없는 레몬이라는 걸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나는 갑자기 눈물이 솟구쳐 올랐지만, 그 자리엔 섬의 대표인 초코 씨나 새 견습생을 맞는 레몬 씨는 물론 온 섬사람들이 다 나와 있었습니다. 심지어 좀처럼 이런 자리에 얼굴을 비칠 줄 모르던 커피 씨와 박하까지도 오랜만에 들어오는 새 견습생을 보러 참석했습니다. 모두가 모여 한마음으로 새 견습생을 환영해주는 자리에서 차마 울 수 없어 나는 입술을 깨물고 눈물을 꾹 참았습니다. 새 레몬은 그런 내가 이상하다는 듯이 잠깐 눈길을 주더니, 이내 무심하게 시선을 거두곤 집주인을 따라 레몬 색 집으로 가 버렸습니다. 그날 저녁 나는 아무에게도 어디 간다는 말 없이 그레이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그레이가 죽은 레몬, 내 동생 같았던 레몬, 시체가 되어 축 늘어져 있는 레몬을 팔에 안은 채 배에 싣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사탕 꾸러미나 다른 짐짝을 싣는 것처럼. 나는 그때 놀라서 아무 행동도 취할 수 없었고 뭐라 소리칠 수도 없었습니다. 충격이 너무 커서 그레이를 만나 해명을 요구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레이가 다음 번 방문할 때까지 나는 줄곧 그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섬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무섭고 의심스럽게 느껴졌습니다. 그레이의 다음 방문을 기다리는 시간은 정말 끔찍했습니다.

 

그레이를 기다리는 동안, 미심쩍은 일은 계속 생겨났습니다. 늘 명랑하고 쾌활하던 오렌지 씨가, 갑자기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예민해진 것입니다. 견습생들이 일을 잘 못했을 때 가끔 맞는 일이 있긴 하지만, 나는 오렌지가 맞아서 우는 건 그때 처음 봤습니다. 오렌지 씨는 점점 잠이 많아지고, 사탕에 들어가는 과즙과 설탕의 비율 조절에도 실패할 때가 잦아서 오렌지는 한동안 사탕의 맛을 수습하느라 애를 먹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반쪽 얼굴이 추하다며 매일같이 울어 댔는데, 그 울음을 누구도 그치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 가진 않았습니다.

 

오렌지 씨는 문득 실종되었고, 오렌지가 주황색 지붕 집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나이가 열세 살밖에 안 되는 오렌지를 우리는 이제 오렌지 씨라고 불러야 했습니다. 기분이 이상했습니다. 오렌지는 오렌지대로 자기 견습생이 생기게 되어 한껏 들떴습니다. 전서구 편으로 몇 장의 사진이 왔습니다. 아마도 뭍에서 그레이가 보내 주었을 그 사진들에는 견습생 후보들이 어색하게 웃는 얼굴로 찍혀 있었습니다. 오렌지는 사진들을 들고 다니며 만나는 사람마다 누굴 뽑는 게 좋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나에게도 한 번 물어본 적이 있는데, 그는 즐거워 보였지만 나는 대답을 제대로 해주지 못했습니다.

 

그 모든 일련의 사건 끝에 마침내 그레이가 돌아오자, 나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곧장 그레이에게 갔습니다. 먼저 오렌지 씨 이야기를 들려준 뒤, 저번 일을 캐물을 작정이었습니다. 결국 진실을 마주해야만 할 때가 왔습니다. 마음을 굳게 먹었는데도 목소리가 떨려 나왔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는 추운 날씨 탓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그때는 한여름이었으니까요.

 

...사실 나, 저번에, 다 봤어요.

봤다니 뭘?

그레이가 레몬을... 배에 싣는 거요.

무슨 헛소리야. 레몬은 지금 레몬색 집에서 자고 있을걸.

그 레몬 말고.

 

진짜 레몬이요. 물론 그레이가 레몬을 죽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하지만 난 진실을 알아야겠어요. 오렌지 씨도 사라졌어요. 그레이,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말해줘요. 그레이는 알고 있잖아요... 내가 애걸복걸하자 그레이는 어찌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는 저번에 섬에 살지 않겠느냐고 물었을 때처럼 또 벌컥 화를 냈지만, 내가 계속 매달리자 고민하는 눈치였습니다. 아니, 그는 거의 고통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정말로 진실을 알고 싶어?

 

그레이는 한참을 고민하다 입을 열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앞으로 그의 입에서 무슨 끔찍한 말이 흘러나오건, 그 내용을 모르고 있는 것보단 알고 있는 게 낫다고 그땐 생각했습니다.

 

라임, 섬사람들은 모두 죽어 가고 있어.

 

너도 알겠지만 불쌍한 레몬은 이미 죽었어, 하지만 그애 뿐만이 아냐. 다들 머지않아 죽게 돼. 그게 언제가 될 진 몰라도... 아아, 이걸 어디부터 얘기해야 할 지 모르겠다. 그레이는 좀처럼 말의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뭔가 결심한 듯 소매를 걷었습니다. 여지껏 무슨 일이 있어도 걷지 않던 소매를. 그러고는 내게 손목을 내밀었습니다. 거기에는 아직도 선명하게, 녹색의 표식이 찍혀 있었습니다. 내 손목에 있는 것과 위치도 모양도 색도 완벽하게 일치하는 표식이었습니다.

 

내 이름도 라임이었어.

 

네가 뭍에서 기억하는 유일한 장소가 병원이라고 했지? 나도 너만할 때 병원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어. 난 우리 부모님의 골칫거리였어. 치료할 수 없는 병을 앓고 있었는데, 우리 부모님은 돈이 없었어. 그래서 날 여기에 견습생으로 넘긴 거야. 어차피 난 얼마나 더 살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고, 또 내가 계속 병원에 있어봤자 돈만 축내는 셈이 되니까 차라리 그게 낫다고 생각한 거지. 이 섬은 그 병을 앓는 사람들만 모여 있는 곳이니까. 나도 너처럼 그렇게 여기에 왔어.

 

잠깐, 그레이가 걸린... 아니 내가, 아니 우리가 걸린 병이 뭐죠? 나의 다급한 질문에도 그레이는 오히려 침착하게 설명했습니다. 메이플 피버. 단풍이라는 이름은 별거 아니어 보이지만, 실은 만성적인 통증에 시달리는 상당히 고통스러운 병이야. 피부도 화상 입은 것처럼 변하고. 내 얼굴 보이지? 이렇게. 그는 자기의 뒤틀린 입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습니다.

 

그럼 버터 씨나 오렌지 씨도...

맞아. 난 그 사람들 잘 모르지만, 아마 그럴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하나도 와닿지 않았는데, 갑자기 오렌지 씨가 울던 모습이 떠올라 덜컥 겁이 났습니다. 난 한참을 망설이다 겨우 물었습니다.

 

...난 얼마나 살 수 있어요?

그걸 물어볼 줄 알았어.

 

그레이는 잠시 머뭇거렸습니다. 제발 말해줘요, 그렇게 덧붙이는 내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습니다.

 

...발병 후 빠르면 1년 안에 사망해. 안됐지만 죽은 레몬이 그런 경우였지. 그래도 그건 사람마다 천차만별이야. 하지만 별다른 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아무리 늦어도 8년에서 9년 후엔 결국 손쓸 도리 없이 죽음에 이르게 된다고들 해. 물론 더 오래 사는 예외적인 경우도 있겠지만, 결국 고통에 시달리다 생을 마감한다는 점에선 똑같아.

하지만... 난 내가 건강하다고 생각했는데요. 그레이가 아까 말한 그런 통증 같은 것도 없었구요.

 

그건... 아니다. 보여줄게. 직접 네 눈으로 봐. 그는 그렇게 말하곤 나를 그의 배로 데려갔습니다. 여태껏 그레이와 만나면서, 배에 타본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처음 가본 배의 화물칸에는, 엄청난 양의 포대자루가 실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했습니다. 아직 사탕은 싣지도 않았는데 달콤한 냄새가 진동을 했습니다. 향이 너무 진해서 정신이 몽롱할 지경이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냄새죠? 너무... 너무 어지러워요!

너도 알 거야. 익숙할 텐데.

아니, 난 이런 거 몰라...

매일 먹는 거야. 사탕에도 들어가고.

 

순간 깨달음이 내 머릿속을 번갯불처럼 스쳐지나갔습니다.

 

...로제 슈가...!

 

맞아. 여기 포대에 담겨 있는 이것들이 전부 로제 슈가야. 내가 다음에 올 때까지 섬사람들이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양이지. 그레이는 설명을 계속했습니다. 눈치챘겠지만, 로제 슈가는 네가 지금껏 생각한 것처럼 단순한 설탕이 아냐. 일종의 마약 같은 거라고 할까? 메이플 피버를 앓고 있는 섬사람들이 통증을 느끼지 않고 일상생활을 할 수 있는 건 전부 로제 슈가 덕이라고 보면 돼. 그나저나 우선 나가자. 여긴 냄새가 너무 지독하구나. 너도 어지럽지.

 

다시 밖에 나와서, 한참 심호흡을 하고 나서야 나는 다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됐습니다. 그레이, 어른들은 이 사실을 다 알아요? 우리가... 죽는다는 거? 로제 슈가가 마약이라는 거? 묻고 보니 너무 대답이 뻔해서 웃음이 났습니다. 왜 우리한텐 아무것도 말을 안해준 거예요? 왜? 왜 숨겼던 거예요?

 

글쎄... 어느정도 나이가 있는 환자들은 보통 처음부터 다 알고서 섬에 들어오지. 드문 경우지만 가끔 견습생이 주인 자리를 이어받는 대신 뭍에서 새 집주인이 오는 경우가 있지? 그런 사람들은 다 알고서 와. 자기가 병에 걸린 걸 아니까 스스로 섬에 오는 걸 택하는 거지. 견습생들은 보통 그 사실을 모를 때, 자기가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도 모를 나이에, 주변 사람들... 대부분 부모님 손에 섬으로 보내져. 너나 내가 그런 경우였지. 물론 그런 견습생들도, 그들이 집주인이 될 때까지 살아있다면 말이지만... 언젠가는 섬의 진실에 대해서 전해 듣게 돼. 그렇지만 당장 너 같은 애에게, 이걸 대체 뭐라 설명하겠니. 섬에 온 날도 기억하지 못하는 너에게. 난 할 말이 없었습니다.

 

어쨌거나... 나도 지금의 너처럼 우연히 섬의 진실을 알게 됐어. 그것도 너무 일찍. 그 과정은 중요치도 않고 너무 기니까 생략할게. 나는 울고불고 했지만, 어른들은 어차피 시한부인 우리들끼리 이렇게 아름다운 섬에 모여서, 덜 고통스럽고 더 행복하게 살다 가는 게 좋지 않냐고 나를 달랬어. 다들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결국 그게 최선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면서. 하지만 난 그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건... 마취당한 채로 여기 가만히 앉아 죽을 날만 기다리는 것처럼 느껴졌거든. 글쎄, 더 나이를 먹고 알았더라면 다르게 받아들였을까? 그건 모르겠어. 하지만 죽음이 내 뒤를 시시각각 쫓아오고 있는데, 그걸 빤히 알고 있는데, 나는 그저 사탕 솥이나 젓고 있다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어.

 

그래서 난 도망쳤다. 지금은 나만 섬을 오가고 저 배가 이 섬에 있는 유일한 배지만, 그땐 섬에 배가 여러 척이었어. 섬 주인의 배였지. 난 그중 하나를 몰고 바다를 건넜어. 이 근처 해역이 위험하다는 것도 몰랐어. 무작정 나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어. 내가 배를 모는 데 타고난 소질이 없었더라면 아마 그때 난파되어서 죽었을 거야.

 

결국 섬에서 나가려 드는 건 어리석은 일이네요. 그레이, 죽음으로부터 도망칠 순 없잖아요. 난 씁쓸하게 중얼거렸습니다. 내 말을 들은 그레이는 한참을 망설이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습니다. 주저하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하지만 라임, 메이플 피버는 어른들 말처럼 불치병이 아니었어.

 

내가 미심쩍다는 듯 쳐다보자 그는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실어 다시 말했습니다. 완치 방법은 분명 있어. 내가 여기 아직도 숨이 붙어있다는 게 그 증거야. 그레이의 이야기가 계속되었습니다. 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 그의 이야기에 집중했습니다.

 

뭍으로 나가서, 나는 운좋게 자선 단체의 도움을 받아서 치료를 받을 수 있었어. 탈진해 쓰러져 있는 나를 우연히 메이플 피버 환자들을 위한 구호 단체에서 발견했던 거야. 그건 순전히 우연이었지... 난 섬을 빠져나갔어도 죽을 수도 있었어. 메이플 피버에 대한 치료는 보통 시행되지 않거나, 값이 아주 비싸거나 그래, 그게 어떤 이유에선지는 나도 잘 모르지만... 어쨌거나 그러니까 나는 운이 아주 좋았다고도 볼 수 있지.

그렇지만 중요한 건 치료법이 존재한다는 거잖아요!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어.

 

내가 참지 못하고 내뱉은 항변에 그는 얘기가 끝나지 않았으니 잠자코 마저 들으라는 듯 고개를 한번 내젓고는 말을 이어갔습니다. 나는 더이상 뭐라 끼어들지 않고 간간이 고개만 끄덕여 가며 이 충격적인 진실에 대해 들었습니다.

 

완치가 된 후에, 나는 배를 몰고 섬으로 돌아갔어. 이 사실을 섬사람들에게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들도 치료법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완치가 가능하다는걸 안다면, 분명 섬과 사탕과 로제 슈가에 의존해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것보다는, 어렵더라도 뭍으로 나가 치료받을 길을 알아보고 싶어할 거라고 생각했다. 병이 나아서 돌아온 나를 보면 섬사람들의 생각이 바뀔 줄로만 믿었어. 난 내가 섬으로 돌아가는 게 섬사람들을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내가 회복되고 배를 구하자마자 그 길로 그렇게 했어.

 

그리고 이어지는 가장 놀라운 대목.

 

그런데 섬사람들은 내 말을 믿어주지 않았어. 아니, 믿고 싶어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들은 나를 섬 주인에게 끌고 갔어. 내가 거짓말로 그들을... 분열시키려 한다면서. 섬 주인은 나한테 그냥 여기서 일하라고 말했어. 내가 배를 잘 몬다면서. 그리고 나를 협박했어. 쓸데없는 말 말라고. 계속 그런 식으로 입을 놀리면... 죽여 버리겠다고 했어.

 

눈앞에 진실을 빤히 들이미는데도 그렇게 외면해 버릴 수 있다는 것이 난 좀처럼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게다가 외면에서 머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전혀 엉뚱하고 말도 안 되는 거짓말(정말이지, 그레이가 뭣하러 섬을 분열시키려 하겠어요?)을 엉성하게 지어내선 오히려 그게 진짜라고 철썩같이 믿어 버리다니.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 섬에서 엄연히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던 것입니다. 그때 나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너무 놀라서 그 섬 주인이라는 사람은 대체 누군지 묻는 것마저 까먹고 말았습니다. 그레이도 섬 주인이 누군지는 언급하지 않은 채로 이야기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래서 난 섬 주인의 제의에 응했어. 반쯤은 자의로, 반쯤은 어쩔 수 없이. 알겠니, 날... 죽여버리겠다고 했다니까! 글쎄, 물론 그때 그냥 섬을 떠나버릴 수도 있었지만... 그리고 영영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만... 난 결국 남았어.  혹시 그러다 기회를 봐서 다시 진실을 알릴 시도라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지.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섬은 폐쇄적이 되어 갔어. 어느새 나는 섬의 유일한 연락책이 되어 있었어. 이 섬에는 다른 배가 없지...

 

그레이는 괴로운 듯이 말했습니다. 잊으려고 애썼던, 그러나 결코 잊히지는 않았던 기억을 하나씩 끄집어 내는 그의 표정에서, 나는 약간의 후회와 죄책감을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에 대해서인지는 분명했습니다. 그레이는 이제 한탄하듯이 나직하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여긴 마치 섬사람들만의 꿈속 같았고, 난 철저하게 배제된 이방인이었어.

 

뭐 어쩌면 이 섬은 아름다워. 마치 꿈결처럼. 집들도 색색깔에, 사람들도 다 착하고. 밤낮으로 설탕 끓이는 냄새도 향긋하다면 향긋하지. 그런데... 난 이 모든 게 너무 역겨워졌어. 진실이 빤히 눈 앞에서 메아리치고 있는데도 눈 감고 귀 막고, 엉뚱한 소리들만 늘어놓았지. 답답할 노릇이었지만 내가 어쩔 도리는 없었어. 그래서 난 이 섬이 싫어졌어. 전부 다... 합성 착색료 같잖아. 인조적으로 만들어진 섬에서의 삶이 너무 한심했어. 차라리 저 푸른 바다에서 집채만한 파도가 몰려와 섬을 통째로 집어삼켰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다. 그레이는 어스름에 시커멓게 물들어 가는 잿빛 바다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물 밖에서 질식해가고 있었어... 그렇게 지내다보니 뭘 하겠다는 의지도 말라 붙고 종내에는 아예 사라져서, 어느새 난 그냥 섬 주인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연락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어 있었다. 그냥... 기계 인간이 된 거야. 기계 인간. 그레이의 이야기는 그렇게 끝이 났습니다. 그레이의 말을 전부 듣고 나서, 나는 그에게 이제라도 진실을 알려야 하지 않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레이, 난 살고 싶어요. 그리고 섬사람들을 구해야 하는데... 알잖아요, 나 혼자선 안돼요. 그레이가 도와줄 수 있어요. 하지만 그는 말없이 고개를 저을 뿐이었습니다. 나는 계속 매달렸습니다. 그레이는 기계 인간이 아녜요, 난 알아요! 그러니까 나를 봐서라도...

 

제발 도와줘요... 할 수 있잖아요.

아니. 난 못 해.

 

그레이는 화를 내기 시작했고, 그의 낮은 목소리가 위협적으로 으르렁거렸습니다. 내가 왜 해야 하는데? 난 할만큼 했어. 그러니까 그만둬. 네가 우는 소리 하는 것도 지긋지긋해. 애초에 그 장면을 훔쳐본 것도 너고, 알고 싶다고 한 것도 너야. 난 네가 하도 귀찮게 캐물어서 하는 수 없이 대답해준 것 뿐이다. 그러니 이제 그만해. 내가 어떤 대꾸도 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가 쐐기를 박았습니다.

 

다신 나한테 말 걸지 마.

 

알았어! 그레이는 버럭 소리를 지르고 그대로 가버렸습니다. 나는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내가 알았던, 안다고 생각했던 이 섬이, 차츰 금이 가다가 못내 산산이 부서져 버리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레이는 떠나고, 내가 그 자리에 그대로 못박인 채 울고 있는데, 때마침 박하가 그 앞을 지나가다 흐느끼는 나를 발견했습니다. 나는 몰랐던 사실이었는데, 박하도 나처럼 종종 밤에 돌아다니곤 했던가 봅니다. 박하라면 사람 없는 시간인 밤에 하는 산책을 즐길 법도 합니다. 누가 뭐래도 그녀 역시 좀 독특한 면이 있었으니까요.

 

박하는 견습생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았지만, 섬에 온 시기는 나보다 늦은 편이었습니다. 박하는 좀처럼 가까워지기 힘든 사람이었는데, 그건 비단 나이차이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박하가 사는 민트색 집은 소리 파이프로 통해있는 가장 가까운 집과도 좀 멀리 뚝 떨어져 있는 편이었는데, 그런 탓에 안 그래도 남들이 돌아다닐 시간엔 집 밖에 좀처럼 나오지 않는 박하와는 마주칠 일 자체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도 내가 본 바로는, 박하는 의중을 알기 어려운 사람이었고, 매사에 냉철하고 칼같은 구석이 있었습니다. 그런 박하가 울고 있는 나를 달래주는 건 너무나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그만큼 박하와 나는 서먹서먹한 사이였습니다. 내가 그레이에게 들은 비밀도, 보통 때 같으면 박하에게 절대 말하지 않았을 것이고 말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내가 울면서 떠듬떠듬 말한 내용을 용케 알아들은 박하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내게 서툴게나마 위로의 말을 건네는 중이었다는 것도 아예 잊어버린 듯했습니다. 박하는 흥분한 듯 이제 모든 게 맞아 떨어진다고 뭐라뭐라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휙 일어나 가버렸습니다. 그녀의 긴 생머리가 휘날린 자리에는 늘 산뜻한 민트 향이 남았습니다. 그리고 이젠 한 가지 냄새를 더 맡을 수 있었습니다. 너무 온 사방에 만연해서, 오히려 여태 있는지조차 몰랐던, 로제 슈가의 냄새. 그 냄새가 너무 달콤해서 나는 토하고 싶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목구멍에 손가락을 쑤셔 봐도 토할 수가 없었습니다. 내 몸이 그 물질을 너무 좋아하게 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집까지 갔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래도 용케 집에 도착한 나는 곧장 침대 위에 쓰러지듯 몸을 누였습니다. 나는 그날 라임색 지붕 집의 다락방에 누워 밤새도록 생각했습니다. 머리는 피곤하고 몸은 지쳤는데, 정작 잠이 오지를 않았습니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답은 불 보듯 뻔했습니다. 설령 그레이가 도와주지 않더라도, 나 혼자서라도 진실을 알려야 해! 그레이가 나를 도와주지 않겠다며 화를 낸 건 어쩌면 당연했습니다.

 

그는 이미 겪을 대로 겪었으니까, 내게 진실을 알려 준 것만 해도 큰 마음 먹고 한 일인 셈입니다. 그것만으로도 그레이는 충분히 용기를 낸 것이고 나는 그에게 고마워해야 할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다 그가 나를 도와줘야만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건 너무 뻔뻔스럽고 지나친 요구일 터였습니다. 하지만 모든 걸 알게 된 이상, 아무도 날 안 도와준다 해서 그냥 두고만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레이는 모든 걸 알았을 때 홀로 섬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그의 탈출은 반밖에 성공하지 못했고 그는 여전히 섬에 매인 신세였습니다. 나는 그와 달라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 혼자 살길을 모색할 게 아니라 섬사람들 모두를 구해야 한다고 그날 밤 나는 결론지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부터 나는 그레이와 박하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전날 박하는 나를 두고 떠난 뒤 그 길로 곧장 그레이를 찾아간 모양이었습니다. 둘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몰랐지만 박하는 전에 없이 상기되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순전히 좋은 의미에서의 들뜸이 아니라, 어딘가 신경질적이고 불안한 구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레이는 그런 박하를 못마땅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박하가 차근차근 밀항을 준비하고 있단 사실을 나는 다름아닌 박하의 말을 통해 알았습니다. 그레이가 섬을 떠나기 전날 저녁 무렵, 박하는 남들 몰래 나를 바닷가로 불러내어 이렇게 제안했습니다. 라임, 같이 가자. 그레이와도 이미 다 얘기가 됐어. 그가 우리 둘 정도는 빠져나가게 해줄 수 있대. 하지만 나는 망설임없이 대답했습니다.

 

언니, 난 안 가.

뭐라고?

 

잠시동안 박하의 눈이 이건 예상치 못했다는 듯 흔들렸지만, 그 놀라움은 금세 미약한 분노로 바뀌었습니다. 박하는 냉철했지만 의외로 좀 어린애 같은 데가 있어, 일이 자기 계획대로 풀리지 않는 걸 못 참는 성미였습니다. 사실 집주인이 하라는 대로만 하며 묵묵히 사탕 만드는 걸 돕는 건 박하의 성격에 맞지 않았습니다. 섬은, 그리고 섬에 갇혀 매일 똑같은 맛의 사탕을 만드는 생활은 박하에게 갑갑하게 느껴졌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늘 자기 방식을 고집해 일하려던 박하는 박하 씨와 자주 충돌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 그것도 박하가 섬을 나가고 싶어했던 까닭 중 하나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러나 그때 나는 나 자신이 가진 신념 탓에, 박하가 기껏 내민 손을 매몰차게 뿌리쳤습니다.

 

언니, 그건 도망치는 것밖에 안 돼. 그러면 그레이랑 똑같아. 그건 아니야. 언니도 일단 섬에 남아. 진실을 아는 우리가 섬사람들을 구해야 해. 우린 다함께 나갈 수 있어... 나는 박하를 설득하려고 했지만 내가 말을 하면 할수록 박하의 눈에서 튀던 불꽃이 싸늘해졌습니다. 이어서 박하가 한 대답은 다분히 설명조로, 냉랭하고 사무적인 말투였습니다.

 

내가 빠져나가고 나면 사람들이 경계할 거야. 그땐 네가 나오려고 해도 이미 늦어. 난 말없이 혼자 갈 수도 있었는데, 이 모든 게 가능해진 까닭은 네가 나한테 얘길 솔직하게 해줬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어서 굳이 너한테 이렇게 제안하고 있는 거야. 지금 아니면 너한테 기회는 없어. 잘 생각해. 뭐가 네 목숨을 구하는 길인지. 그런 말을 듣고도 내가 반응이 없자 박하는 잠자코 서 있다가 뭣에 홀려 있다가 갑자기 정신을 차린 듯 멍하니 말을 덧붙였습니다.

 

내가 너무 쌀쌀맞게 말했다면 사과할게. 너에게 잔인하게 굴고 싶은 마음은 없었어... 하지만 라임, 사람은 어떨 땐 냉정해져야 해.

 

그렇게 말하는 박하가 변명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고, 그녀가 정말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나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습니다. 알겠다, 그게 네 뜻이구나. 박하는 더 이상 나를 설득할 생각이 없어 보였습니다. 사실 박하에게는 정말이지 그럴 이유도 없었으니까요. 난 박하가 나를 완전히 단념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레이가 출항 직전에 마지막으로 박하를 만났을 때, 박하의 눈빛이 마음에 남습니다. 그때 박하는 눈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정말 같이 안 가니?

 

박하 언니...

그렇게 부르지 마. 내 이름은 율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그저 물건을 툭 떨어뜨리듯 자기 이름을 말해주는 그녀는, 내가 방금 전 봤던 간절한 표정은 이미 수습한 뒤였습니다. 하지만 나는 박하가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을 뿐 마음 속으로는, 그때도 날 포기하지 못했다고 확신합니다. 그녀가 감정을 미처 감추기 전에 그 눈을 봤으니까요. 그러나 나 역시, 겉으로는 박하처럼 아무렇지 않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래...  언닌 이제 섬 사람이 아니니까.

어쨌거나 고마웠다. 다 라임 네 덕분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돌아선 박하는, 아니 율은, 더이상 내 쪽을 보지 않았습니다. 내가 배에서 내리자마자 배는 빠르게 바다 저편으로 멀어져 갔습니다. 섬사람들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박하가 없어졌다는 걸 알아챘지만, 율이 그때쯤 이미 바다 한가운데 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나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율이 떠나고 난 후로, 나는 섬을 구석구석 뒤지고 다녔습니다. 뭔가 도움이 될 만한 증거를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늘 사탕 만들기에 열의를 보였던 내가 일은 뒷전이고 늘상 밖으로만 도니 라임 씨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내겐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집주인이 또 사라졌습니다. 이번엔 레몬 씨였습니다. 레몬은 이제 자연스럽게 레몬 씨로 불렸는데, 내게는 그게 너무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견습생으로 섬에 온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레몬이 집주인이 되어버리다니. 그래서 난 더 조급해졌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섬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섬을 구해낼 방법은 몰랐지만, 섬을 샅샅이 뒤진 수확은 분명 있었습니다. 섬의 집은 모두 남쪽에 위치해 있어서 해가 잘 들고, 섬의 북쪽 사면에는 대체로 숲밖에 없습니다. 그레이가 배를 대는 해안도 남쪽에 있으니 그간 섬의 북쪽에는 갈 일이 도통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섬의 북쪽 사면은 생각도 하지 못했었습니다. 숫제 그런 곳이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으니까요. 섬의 앞뒤를 논한다는 것이 우습다는 것쯤은 나도 알지만 그곳은 충분히 섬의 뒷면이라 부를 만 합니다.

 

섬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나는 차츰 섬의 뒷편까지 내 이동 범위를 넓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섬의 앞면에서 뒷면으로 넘어가는 경계 지점, 약간 뒤편으로 치우친 곳, 하루 중 어느 시간이든 해가 잘 들지 않는 그곳에서 가건물을 하나 발견한 것입니다. 그 건물은 섬의 다른 집들과는 다르게 색이 없었습니다. 칠하지 않은 회색 벽이 그대로 노출된, 집이라기보단 창고 같은 그 건물에는 아마 채광의 용도일 법한 꽤 큰 창문(건물이 워낙 볕이 안 드는 곳에 있어 창문은 아무리 커도 부족했습니다)이 남쪽으로 나 있었지만 창문에는 유리창 대신 굵은 쇠창살이 있었고, 들어가는 문은 커다란 맹꽁이자물쇠로 밖으로부터 잠겨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난 의외의 인물을 만났습니다.

 

라임, 넌 여기 오면 안 돼.

레몬 씨, 그게 무슨 소리예요?

 

자취를 감췄던 레몬 씨가 거기 있었던 겁니다. 황당한 것은 그가 전혀 갇혀 있는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을씨년스러운 창살이 달린 창고 안쪽에 커다란 자물쇠로 감금된 사람이라기에 레몬 씨의 태도는 너무나 초연하고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이게... 이게 다 뭐예요? 누가 이런 짓을... 어쩌다 거기 갇혔어요? 충격을 받아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나에게 레몬 씨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한 번 쉬더니 차분하고 조용하게 말해주었습니다.

 

내가 죽을 때가 되었다는 뜻이란다.

여긴...

혼자서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해주는 공간이지.

그렇지만... 이건 말도 안 돼요!

 

나도 모르게 눈물이 터져나왔습니다. 내가 아는 레몬씨는 누구보다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믿음직한 분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이런 식으로, 아무도 모르게, 슬퍼해 줄 사람도 없이 홀로 이런 이상하고 싸늘한 건물에서 죽음을 맞아야 하다니 이건 너무 합당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건 아니라고,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고, 나도 모르는 새 그런 말들이 눈물과 함께 두서없이 흘러내렸습니다. 그리고 오렌지 씨... 오렌지 씨도... 그리고 그 전에 있었던 모든 집주인들도 다 여기서 이렇게 쓸쓸하게 죽었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야말로 끔찍했습니다.

 

규칙이야.

 

라임, 이게 규칙이야. 레몬 씨는 약간 슬픈 듯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건 내가 우는 게 슬프다는 식이었습니다. 레몬 씨가 나를 달래려고 애썼기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졌는데, 나는 그것마저도 너무 충격이었습니다. 지금 갇혀 있는 건 레몬 씨고 곧 죽는 것도 레몬 씨인데 도리어 레몬씨가 나를 위로하다니, 정말이지 스스로가 무력하게만 느껴졌습니다.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레몬 씨는 여전히 특유의 착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계속 울고 있는 날 달랬습니다.

 

라임, 걱정해줘서 고마워. 넌 착한 아이야. 하지만 이러는 건 다 우리 모두를 위해서야. 여기서 본 건 잊고, 라임 씨에게 잘 하도록 해. 난 괜찮다. 네게 이런 식으로 밝히고 싶진 않았는데... 섬사람들 모두 다 언젠가 겪어야 할 일인걸.

 

레몬 씨는 내게 섬의 역할에 대해서 천천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건 그레이에게 들었던 것과 거의 같았지만, 그 색채는 달랐습니다. 레몬 씨가 갇혀있는 이 건물에 대해 그레이가 알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가 섬을 보는 관점은 섬 뒷편에 세워진 이 건물처럼 황량한 잿빛이었습니다.  그러나 레몬 씨가 쓸쓸하지만 따뜻한 톤으로 들려준 이야기는, 내가 여태 알고 있던 알록달록한 섬의 앞면을 닮아 있었던 것입니다. 정말로 레몬 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라임, 난 이 섬에서 그동안 행복했어.

 

그렇다면 너는, 너는 아니야? 이것 말고 달리 어쩔 수가 있지? 레몬 씨의 눈빛은 그렇게 묻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 나는 결국 눈물을 그치지 못한 채 그곳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후로도 레몬 씨를 찾아갔습니다. 비록 사라진 집주인들이 어디로 갔는지에 대한 수수께끼는 풀었지만, 여전히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레몬씨가 언제나처럼 평온하게 날 맞아주는 걸 확인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내가 몇 번 방문하지도 않았을 때부터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져 갔는데, 나한테 찾아오면 안된다고 말은 하면서 그래도 내심 내가 오는 걸 반기는 눈치였습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레몬 씨도, 예전에 오렌지 씨가 그랬던 것처럼 신경질이 많아졌습니다. 내가 가도 몸을 일으키지 않고 방 구석에 놓인 침대에 귀찮다는 듯 드러누워 있기도 했습니다. 나는 직감적으로 레몬 씨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 시점은 그레이의 다음 방문과 겹쳐졌습니다. 레몬 씨가 거의 인사불성 상태에 빠진 바로 그날 아침에 그레이가 왔습니다. 나는 레몬 씨의 상태를 보고 다급히 그레이를 찾았습니다. 사경을 헤매는 레몬 씨를 그저 보고만 있을 순 없는데, 나로서는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었으니까요. 난 아무 설명도 없이 곧장 그레이의 옷소매를 잡고 레몬 씨가 있는 시설로 끌고 갔습니다. 그는 내 손을 몇 번 뿌리치려고 했지만, 내가 너무 완강해서 결국은 내 뒤를 따랐습니다. 우리가 가건물에 도착했을 때, 레몬 씨는 이미 숨이 끊어지기 직전이었습니다.

 

여길 용케 알아냈구나. 결국...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레몬 씨! 저 왔어요, 저 라임이에요! 제 말 들려요? 일어나 보세요! 레몬 씨...

 

나는 창살을 붙들고 그렇게 소리쳤고... 그 다음 펼쳐진 광경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모습을 묘사해보라고 하면 그 장면이 다시 눈앞에 고스란히 펼쳐질 것만 같아 두렵기만 합니다. 나는... 나는 그날, 레몬 씨가 죽어가는 걸 보았습니다. 내 목소리를 듣고 몸을 일으키고 억지로라도 미소를 지으려던 레몬 씨의 눈이 갑자기 놀란 듯이 동그래졌습니다. 그는 내 뒷편에서 뭔가 무서운 걸 본 것처럼 기겁했는데 내가 힐끗 돌아보니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 순간 레몬 씨는 콘크리트 바닥에 털썩 쓰러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레몬 씨의 눈은 마치 무슨 귀신이라도 보는 듯 초점을 잃어버렸고, 시선은 허공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좀전까지만 해도 몸에 힘이 점점 빠져나갈 뿐 그 이상은 없었는데, 지금은 엄청나게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는 고통에서 헤어나오려는 듯 사지를 허우적거렸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습니다. 그 허우적거림은 차츰 의식적인 몸부림이 아닌 경련으로 바뀌었습니다. 그의 표정은 단말마의 고통 탓에 완전히 뒤틀리고 악마처럼 일그러졌습니다. 나는 사람 얼굴이 그렇게 무섭게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레몬씨는 더이상 레몬씨가 아닌 것 같았습니다.

 

놀란 내가 창살을 놓고 주춤 뒤로 물러서자 그레이가 재빨리 내 눈을 가렸지만 소리는 어쩌지 못해서, 레몬씨가 내지르는 처참한 비명 소리는 고스란히 내 귓속으로, 머릿속으로 파고 들었습니다. 그건 아직도 내 머릿속에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비명이 얼마간 지속됐는지 나는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영원처럼 느껴졌으니까요. 하지만 결국 비명은 멎었고, 내가 죽음 같은 침묵 속에서 조심스럽게 눈을 떴을 때,  내 앞에는 정말 죽어버린 레몬 씨가 있었습니다.

 

충격적인 것은, 죽은 레몬씨의 얼굴에 표정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방금 전 얼굴이 무섭도록 일그러진 게 거짓말이었다는 것처럼. 아무런 색도 아무런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무심한 얼굴, 그 모습은 꼭 레몬씨에게서 레몬씨를 모조리 지워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의 삶을 빼앗고 그의 영혼을 빼앗고 그렇게 모든 걸 빼앗아 가놓고선, 더 뺏을 게 없자 그가 마지막으로 겪었던 그 고통마저, 그가 고통과 싸우다 죽었다는 사실마저 강탈해 가는 건... 물론 근육의 경직 탓에 일어난 현상이었겠지만 나에게는 단순한 과학적 현상의 의미 이상으로 처참하다고 느껴졌습니다. 이렇게 아무것도 남겨 주지 않는 죽음이라니.

 

난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온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습니다. 시체를 본 적은 있지만, 사람이 죽는 걸, 그것도 이렇게 끔찍하게 죽어가는 걸 직접 보는 건 정말로 다른 차원의 일이었습니다. 멍하니 앉아 있던 내 귓가에 그레이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건 아주 먼 곳으로부터 들리는 것처럼 현실감 없게 느껴졌습니다. 이 건물에서 죽은 사람들은 많이 봤지만, 죽는 모습은 처음 봐... 곧 죽을 사람들을 굳이 여기 격리해 두는 이유가 이거였어.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데, 아니 생각은 했지만 답을 알 수 없을 테니까 잊어버린 거지, 그런데 그 답이.... 이런 거였다니. 그는 완전히 얼이 빠진 듯한 목소리로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내가 뭐라 말이 없자, 그는 애초에 대답 따위는 바라지도 않았다는 듯, 자기가 뭐라 하는지도 모르는 채 연신 혼잣말을 해댔습니다.

 

그래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모습 보일 순 없었겠지... 물론... 하지만 끔찍해, 끔찍한 일이야... 나는 그때 알아차렸습니다. 끔찍한 일이라면 겪을만큼 겪은 어른인 그도 레몬 씨의 죽음으로 나 못지 않게 충격을 입었다는 것을. 그러자 이상하게 마음이 가라앉았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레이가 섬에 진실을 알리는 걸 도울지도 모른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쯤, 그레이가 내게 물었습니다. 어쩌면 그것 역시 혼잣말이었을지도 몰랐지만, 나 역시도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이 알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거지? 아팠다고는 해도 여태 멀쩡했잖아, 아무런 증세도 통증도 없이... 그런데 왜? 왜 죽을때가 와선 저렇게 고통스러워하지? 진통제는? 로제 슈가는? 효과가 없는 건가? 그 말을 듣는 순간이었습니다. 내 머릿속에 번뜩 스쳐지나가는 바가 있었습니다. 너무 끔찍해서 차라리 틀린 생각이었으면 좋겠다 싶었지만, 어쨌거나 확인은 해야 했습니다. 나는 침착하게 내 추리를 뒷받침할 내용을 그레이에게 물어봤습니다.

 

그레이. 메이플 피버는 정확히 증상이 어때요? 내 말은, 로제 슈가를 섭취하지 않을 경우에...

보통 피부의 변형은 아주 천천히 진행되지만, 치료를 한다면 증상이 더 심하게 발현돼.

 

그레이는 그 말을 하면서 자기 얼굴을 가리켰습니다.

 

...또 고통도 더 심하게 느끼겠지. 하지만 치료를 안 해도 아프긴 매한가지야. 겉으론 멀쩡해도 속이 타들어가거든. 마치 불과 같아. 메이플 피버에 대한 치료는 그 불을 끈다기보단, 최대한 빨리 태워 없애는 과정이지.

아무튼 치료를 안 해도 만성적인 통증이 있단 얘기네요.

그렇다고 봐야지.

 

무서운 추측이 거의 사실로 확인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내 목소리가 심하게 떨려 나왔습니다.

 

그레이, 우리는 지금까지 로제 슈가로 고통을 회피해왔어요. 그런데 만약 그레이 말이 맞다면, 매일매일의 통증이 억제되긴 해도 사라지지 않은 채 그대로 잔존해서, 눈덩이처럼 불어나... 죽기 직전에 한꺼번에 밀려올... 가능성이 있을까요?

 

거기까지 말하자 그레이는 죽은 레몬씨를 향해 시선을 돌렸습니다. 더 말 안해도 충분히 뜻이 전달되었을 텐데, 나는 쥐어짜내듯 힘겹게 말을 이었습니다.

 

마치... 우리가 방금 목격한... 레몬 씨의 경우처럼...

이건... 난 몰랐어.

 

이건 너무 끔찍해! 그레이는 다 큰 어른 답지않게 소리내어 엉엉 울었습니다. 나는 나대로 그레이를 달랠 여력이 없었습니다. 바로 이런 죽음이 섬사람들 모두에게 예비되어 있었습니다. 고통을 없애준다고 생각해서, 혹은 정말 아무 것도 모른 채로 그동안 먹어 왔던 로제 슈가가 결국은 배신을 한 거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로제 슈가가 보장해 줬던 섬에서의 일상적인 생활, 레몬 씨가 말했던 섬에서 그동안 느꼈다는 행복이란 그러니까 순 거짓말이나 속임수에 지나지 않았던 셈입니다. 고통은 하루하루 지연될 뿐 결코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 이런 섬의 뒷편 같은 곳에 차곡차곡 쌓였다가 끝끝내 이렇게...

 

매일 매일의 고통을 제대로 직면해 견디지 않고 그저 무시하면서 모든 걸 로제 슈가가 해결하리라는 기대는 정말로 안일한 생각이었습니다. 안일할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한 그 생각이 결국은 이런 처참한 결과를 부른다는 걸 몰랐다면 모르되, 이렇게 알게 된 이상, 계속 그래왔던 것처럼 진실을 무시하고 두 손 놓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순 없었습니다. 섬의 진실을 알리고 다같이 이곳을 나가자는 내 결심은 더 굳어졌습니다. 달라진 점이라면 이제 그레이도 나처럼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레이.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기 무섭게 그는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습니다. 전에는 내가 매달리며 부탁해도 그렇게 한사코 내뱉기를 거부하던 바로 그 말을.

 

그래, 내가 널 도와줄게.

 

내가, 내가 진작 그랬어야 했는데... 아냐, 이제라도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나는 그레이의 손을 꼭 붙들었습니다. 진실을 알리자, 그렇게 마음을 먹은 우리는 이제 정신을 똑바로 차리기로 했습니다. 더는 슬퍼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1초라도 빨리 행동해야 했기 때문에 우리는 일단, 의학적/법적 조언을 구하기 위해 커피 씨를 찾아가기로 했습니다. 커피 씨가 뭍에 있을 때 약사였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가서 로제 슈가에 대해 더 알아볼 심산이었습니다. 이런 부작용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어떤 문제가 되는지, 그리고 섬에서 지금 행해지는 것과 같은 대량의 유통 방식이 위법이 되진 않는지 물어보기로 했습니다.

 

날이 어둑해질 무렵 우리는 커피색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커피 씨의 집은 초코 씨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습니다. 갈색 집 두 채가 붙어 있기는 하지만, 그 갈색도 종류가 여럿이기 때문에 두 집을 헛갈릴 걱정은 없었습니다. 저녁 어스름 속에서도 초코 씨의 집이 전반적으로 훨씬 더 부드러운 갈색을 띠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크림 섞인 진한 초콜릿 빛깔의 집을 그대로 지나쳐, 짙은 검은색 광택이 도는 갈색 집으로 갔습니다. 문에 노크를 하자, 제대로 찾아왔다는 듯 커피 씨가 나왔습니다. 보아하니 막 잘 채비를 하던 모양이었습니다. 손에는 머그잔이 들려 있었는데, 흰 우유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습니다.

 

라임, 이 시간에 웬일이야? 그리고... 그레이 씨? 대체 나한테 무슨 볼일이...

급한 일이라서... 늦은 시간에 죄송해요.

아냐, 괜찮아. 난 어차피 밤에 잠도 잘 못 자. 들어와.

 

커피 씨는 부스스한 머리를 성가시다는 듯 넘기며 말했습니다. 사실 그건 커피 씨의 습관 같은 거였는데, 그레이보다 좀 젊은 커피 씨는 기본적으로 무뚝뚝하고 신경질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도 나는 그녀가 속으로는 마음이 따뜻할 거라고 지레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나와 그레이는 커피색 집에 들어가 탁자 앞에 앉았습니다. 커피 씨가 컵을 두 개 가져와선 우리 둘 앞에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고는 주전자에서 커피를 따라 주었습니다. 설탕? 나는 커피 씨 손에 들린 로제 슈가 통을 보고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습니다. 커피 씨는 상관없다는 듯이 자기 몫의 우유에 로제 슈가를 크게 세 스푼 푹푹 퍼 넣고는, 돌아서서 설탕 통을 선반에 도로 가져다 놓았습니다. 숱 많은 갈색 머리카락을 대충 모아 아무렇게나 하나로 헐겁게 척 묶어놓은 뒤통수가 보였습니다.

 

급한 일이라니, 뭐야?

커피는 자나요?

어. 걘 허구한 날 커피를 주전자째 퍼마셔도 잘만 자더라. 난 불면증 때문에 죽을 지경인데 말이야.

 

듣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우선 내가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해 말했습니다. 커피씨는 내가 견습생들에겐 비밀로 되어 있는 사안들에 대해 알아낸 것이 의문스럽다는 듯 그레이를 뚫어지게 쳐다보았지만, 이내 내가 알게 된 것에 대해서도 자기와는 상관도 없고 관심도 없다는 듯 심드렁한 표정이 되었습니다. 물론 나는 그때 레몬씨의 죽음에 대해선 일단 언급하지 않았는데, 괜히 커피 씨를 동요시킬 마음은 없어서였습니다. 어쨌거나 대충 설명이 끝나자마자, 나는 로제 슈가에 얽힌 법적 문제를 물어보았습니다. 로제 슈가가 마약성 진통제라면 설령 그 부작용, 고통의 지연 효과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다 하더라도, 분명 어떤 규제가 있을 것이고, 그걸 빌미로 섬에서 일어나는 일을 고발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커피 씨의 대답은 예상과는 딴판이었습니다.

 

뭐 네 말도 일리는 있지. 정부도 바보는 아니니까. 만약에 의료 목적이 아닌 개인이 이만한 양을 구매한다면 그건 위법이야. 그렇지만, 네가 이미 알아냈듯이 섬 사람들은 다 환자가 맞잖아. 섬에서 로제슈가를 사 오는 건 섬사람들 개개인의 명의를 모아서 사는 거거든. 엄연히 환자 명의로 구매하는거니까 법적으론 아무런 하자가 없지. 그러니까 그런 걸 가지고 네가 쓸데없이 골치 썩일 필요는 하나도 없어, 라임. 그렇게 말하는 커피 씨의 말투는 너무나 사무적이고 조용조용했습니다. 아무 문제도 없어. 넌 신경쓰지 말고 네 할일 해. 그녀는 그렇게 말할 만도 했지만 당시 그 말을 들은 나는 좀 어이가 없고 울분이 치밀었는데, 왜냐하면 커피 씨가 아무런 동요 없이, 이 모든 게 나와는 별 상관도 없다는 듯 그렇게 쉽게 말하는 것이 레몬씨의 죽음을 목격한 직후의 나로서는 받아들이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난 초조했고, 그런 나머지 나도 모르게 다음 말을 따지듯이 내뱉었습니다.

 

커피 씨, 그렇지만... 지금 무슨 얘기 하는지 모르시겠어요? 이 물질은...  내가 흥분하자 옆에 앉은 그레이는 내가 무례하게 군다고 생각했는지 말없이 내 소매를 잡아당겼고, 커피 씨도 만사가 귀찮고 짜증스럽다는 듯이 안경을 치켜 올리며 대꾸했습니다. 즉각적인 반응이었습니다. 그래, 나도 잘 알고 있다니까. 지금 로제 슈가 얘기하는 중이잖아, 아니면 네가 나보다 더 잘 안다는 거야? 로제 슈가... 계곡단풍나무 수액에서 추출하는 물질이지... 하긴, 참 묘해. 우리를 죽이고 있는 건 다름아닌 단풍 열병이 아니냔 말야. 그런데 우리를 살리는 것도... 염병할 단풍나무라니. 그녀의 말이 격해졌고 나는 고개를 숙여 내 앞에 놓인 잔에 담긴 커피를 노려보면서 감정을 꾹꾹 억눌렀습니다. 도저히 커피 씨의 눈을 보면서는 얘기할 자신이 안 났지만, 그래도 한 마디씩 또박또박 말했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라임, 무슨 소리야, 그렇지 않다니?

 

커피 씨는 좀 뜸을 들이다가 이내 한쪽 눈썹을 치뜨며 되물었습니다. 커피 씨는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레몬 씨가 겪은, 또 우리 모두가 겪을 그 부작용은 정상적인 상황, 정량을 투약하는 상황에서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녀가 약사라고는 해도 알 턱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그녀에게도 진실을 말 해야 할 시간이었습니다. 그녀도 알아야만 했습니다.

 

커피 씨, 로제 슈가는 우리를 살리고 있는 게 아니었어요.

 

나는 그레이와 내가 목격한 레몬 씨의 죽음에 대해 설명했고, 거기에서 미루어 짐작한 로제슈가의 고통 지연 효과에 대해 말했습니다. 내가 한 마디씩 할때마다 커피 씨의 표정이 굳어졌습니다. 반대로 나는 하면 할수록 말이 저절로 잘 풀려나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나는 고통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저 뒷편 어디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말도 했고, 그것이 섬사람들이 죽기 전에 관례적으로 이루어졌던 격리의 까닭이었다는 대목에 이르자 놀랍도록 쉽게 말할 수가 있었습니다. 커피 씨는 내 얘기가 끝날 때까지 묵묵히 듣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그래서?

네?

그래서 어쩌라는 건데.

 

돌아온 것은 너무나 싸늘한 반응. 그제서야 나는 고개를 들어 커피 씨를 쳐다보았고, 그녀의 갈색 눈과 내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커피 씨가 하는 말은 너무 뜻밖이라 그 의도를 나는 바로 알아채기가 힘들었습니다. 얼떨떨해서 말문이 막힌 나를 보며 커피씨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녀는 움직이면서도 계속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한 채였는데, 얼굴에는 완전히 비웃음 같은 게 어려 있었습니다. 그녀는 곧이어 내게서 시선을 떼고 돌아서서 방 안을 거닐며 혼잣말을 했습니다.

 

그래, 네 말이 맞다고 치자. 그래서 나더러 어쩌라고. 그럼 매일매일 그 지옥같은 고통 속에 살란 말이야? 어? 뒈질 때 어떻게 뒈지는지 내가 몰랐을 거 같아? 하! 지금 나를 충격받게 하려고 이런 얘길 한 모양인데, 그렇게 해서 내가 협조하길 기대했다면 굉장히 큰 착각이야 꼬마 아가씨. 네 말마따나 난 뭍에서 약사였어. 근데 내가 몰랐을 거라고 생각해? 내가! 약품에 대해서라면 이 섬에서 누구보다 잘 아는 내가? 말도 안 되지.

 

커피 씨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녀의 태도가 변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녀가 탁자에서 한 발짝 멀어질 때마다 그녀의 목소리는 공격적이고 신경질적이 되어 갔는데, 마치 여태 억눌렀던 것을 터뜨리는 것 같았습니다. 연극이 끝난 뒤 무대에서 내려와 땅에 발을 딛자마자 돌변하는 배우를 보는 기분이었습니다. 슬쩍 눈치를 보니 그레이도 그 급작스런 태도 변화에 아연해진 듯했습니다. 이윽고 설탕이 놓여 있던 벽걸이 선반에 다다른 커피 씨는 갑자기 내 쪽으로 홱 돌아서더니 성질이 머리 끝까지 치민다는 듯 주먹으로 벽을 세게 한번 쾅 두드리곤 말을 이었습니다. 난 다 알고서 이 섬에 왔어. 네가 지금 말하는 로제 슈가의 지연 효과, 다른 섬사람들은 무식해서 까맣게 모르지만

 

난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다고.

 

!! 뭐라구요! 왜... 나는 왜 다 알면서도 섬에 들어왔는지, 또 어째서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았는지 더듬더듬 물었습니다. 너무 당황스럽고 예상 밖이라 말이 잘 나오지가 않았지만 어쨌거나 내가 힘겹게 던진 질문은 사실 질문이라기보단 질책에 가까웠는데, 커피 씨는 그게 아주 웃기는 물음이라는 듯이 씩 웃으며 말했습니다. 너무 당연해서 대답해 줄 가치도 없지만, 선심 써서 가르쳐 준다는 투였습니다. 그야... 뻔하잖아? 난 이 섬에 좋아서 왔어. 하지만 이런 사실까지 알고 나면, 대체 누가 섬에 남으려 하겠어? 당장 라임 너만 해도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대번에 이런 식으로 나오는데 다른 사람들이라고 퍽이나 달랐겠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로제 슈가의 부작용을 감수하고서라도 정 그걸 쓰고 싶었던 거면... 그렇게 할 거면 혼자 그렇게 하셨어야죠! 저는, 다른 섬사람들은 전혀 몰랐는데... 우리가 어떤 죽음을 맞게 되는지 상상도 못 했고... 커피 씨는 스스로 선택한 길이지만 우린 선택권이 없었는데... 당신은... 당신은 선택의 여지도 없었던 다른 사람들을 구해 줄 수 있었잖아요! 그렇게 할 수 있었는데, 왜...! 나는 계속 따져 묻고 싶었지만 커피 씨가 내 말허리를 뚝 끊고 대꾸했습니다.

 

내가 약사라곤 해도 로제 슈가 같은 진통제는 개인이 구할 수 있는 양에 분명히 한계가 있어. 너도 아까 유통에 법적인 문제가 있지 않느냐고 물었잖아. 네 말이 맞아, 이런 걸 철저하게 관리 안하면 나라 꼴이 어떻게 되겠어. 섬 밖에서는 백방으로 애써봤자 구할 수 있는 양이 터무니없이 적어. 합법적인 방식을 통한다면 더 어렵지. 섬에서 3개월 쓸 양으로 1년을 버텨야 한다고 보면 돼. 하지만 여긴 그런 제약이 없지. 아까도 말했듯이 환자 명의를 통해 로제 슈가를 구매하니까. 지금 섬에 살아있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여태껏 이 섬에 들어왔던 모든 사람들은 죽고 나서도 사망 신고를 하지 않았으니.... 그 명의를 모아둔 덕분에 법에 구애받지 않고 로제 슈가를 얼마든지 사들일 수 있지, 내가 원하는 만큼 투약할 수도 있고... 내겐 이 시스템이 그야말로 완벽해. 나 혼자선 아무것도 안 돼. 나한텐 이 섬이 유지될 필요가 있어.

 

...그리고 너한테도 이젠 다 마찬가지야. 라임, 너는 섬을 떠나면 죽어. 넌 섬밖에서 제대로 살 수 없을 테니까. 섬사람들도 다 마찬가지야. 우리가 어떻게 죽는지는 내 알 바 아냐, 살아있는 한 섬은 유지되어야만 해. 커피 씨는 어느새 좀더 열렬한 투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기가 질려서 뭐라 대꾸도 못하고 그저 듣고만 있었습니다. 커피 씨는 점점 자신의 말에 도취된 듯 말을 이어갔습니다.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언성을 높였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약간... 애원조로도 들렸습니다.

 

라임, 계속 이 색색깔의 예쁜 집들을 보고 싶지 않아? 넌 이 세상이 무채색이 되길 바라? 라임, 그레이를 좀 봐! 그는 절대로 이 섬을 네가 보는 것처럼 보지 못해! 왜냐면 그는 색맹이니까.

 

그렇게 말한 커피 씨는 갑자기 그레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고,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레이를 쳐다보았습니다. 커피 씨는 그가 내 시선을 피하는 걸 확인하고 거 보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고, 나는 그레이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습니다. 듣기 싫은 말들이 계속되었습니다. 애원하는 듯한 느낌은 이제 완전히 사라졌고, 목소리가 워낙 날카로워서 귀에 칼처럼 꽂히는 것 같았습니다. 그게 그가 섬을 나간 댓가야. 어떤 약물이든 장기적으로 복용하다 중간에 뚝 끊어 버리면 금단 증상이 생긴다는 것쯤은 어린애인 너도 알겠지. 로제 슈가의 경우 장복하다가 관두면 감각 기관이 망가져. 네가 섬 밖으로 나가서 맞게 될 운명이란 결국... 저것뿐이야. 아님 저것보다 더 나쁘거나. 장님 될 확률도 거의 반반에 가까운데, 색채 구분은... 십중팔구 못하게 될 게 뻔해.

 

색맹이라... 눈이 망가지는 게 전부라면 내가 말을 안 해, 그래, 물론 그가 눈이나 사지나 다른 게 다 망가졌을지언정, 죽지는 않았지! 그는 죽지는 않았어, 하지만 사람이 목숨만 붙어있는 게 다는 아니잖아? 라임, 너한테는 섬을 나선 뒤로 얼마나 비참했는지 그가 말하지 않았지, 자기가 색맹이라는 걸 밝히지 않았듯이! 자신의 선택이 틀렸다고 애 앞에서 인정하기가 싫은 거지? 그레이, 대답해봐! 당신은 애한테 어디까지 말했지? 정말 사실대로 다 털어놨나? 그 말을 들은 그레이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여태 살짝 겁에 질렸을 뿐 별달리 크게 동요하진 않았던 나는, 그레이의 그 표정을 본 순간 비로소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습니다. 나는 그의 손목을 붙들고 세게 흔들며 따져 물었습니다.

 

그레이 저 말이 진짜예요? 커피 씨, 그런 식으로 거짓말하지 마세요! 그레이는 아무 문제 없어, 멀쩡하다구요! 그레이 빨리 나를 봐요, 내 눈동자 색이 무슨 색이죠? 그레이! 대답해요! 지금까지 나를 봐왔잖아요, 알 거 아니에요, 왜 대답을 안해요, 지금 보이는 그대로 말하면 될 거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는 순간, 내 머릿속에 스쳐지나가는 장면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레이가 처음으로 라임색 지붕 집에 찾아온 그날의 장면이, 왜 하필이면 이런 때에... 그리고 이어서 떠오르는 그레이의 말. 사실 한참을 헤맸어, 네가 어디 사는지 몰라서. 그는 분명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섬사람이라면 누구나 레몬 사탕을 만드는 레몬씨는 레몬색 집, 박하사탕을 만드는 박하씨는 민트색 집에서 산다는 것을 압니다. 물론 그레이는 섬사람이 아니지만, 그래도 라임이 라임색 집에 산다는 것 정도는 알았어야 했습니다. 나는 그레이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았습니다. 절박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레이, 아니죠...? 하지만 그는 내 눈을 피하며 이렇게 중얼거릴 뿐이었습니다.

 

....미안해.

 

이제 커피 씨는 완전히 의기양양한 표정이 되었습니다. 하, 네게도 말하지 않은 모양이군. 난 그저 추측해 본 건데...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라임, 그레이는 색을 구분할 수 없어. 로제 슈가의 섭취를 중단하는 게 어떤 결과를 낳는지 이제 알겠지! 희희낙락하며 내게 외친 그녀는 그레이에게 시선을 돌려 그를 몰아붙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레이는 이렇다 할 반박 없이 바닥만 뚫어져라 쳐다볼 뿐이었고, 나는 그 옆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레이! 왜 당신은 얘한테 그런 것들은 말해주지 않았지? 얘한테 진실을 말한다면 제일 먼저 알려줘야 했을 것들은 왜 전부 쏙 빼놓고 얼버무렸어? 뭍 사람들이 당신을, 메이플 피버 환자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그런 건 왜 하나도 말해주지 않았어? 난 뭍에서 아픈 사람들만 보며 일했어. 하긴 굳이 그런 직업이 아니라도 누구나 알다시피, 메이플 피버 환자는 사람 취급도 안 하지, 나도 약국에 그런 사람이 들어오면 종종 차디찬 길바닥으로 내쫓곤 했지! 제발 도와달라고 자비를 구걸하며 울어제끼는 혐오스러운 인간들... 팔다리가 뒤틀리고 얼굴이 반쯤 일그러진 것들... 셀 수 없이 내동댕이 쳤어. 아무 생각도, 아무 감정도 없이, 너무나 당연하게... 내가,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이렇게 그 병에 걸려서 온 몸이 속으로부터 썩어들어가게 될 줄은 모르고, 내가 그 꼴이 될 줄은 까맣게 모르고 말야! 아니, 만약 내가 이렇게 될 줄 미리 알았더라도, 내가 그... 망할 거지들... 버러지 새끼들한테 뭐 다르게 대했을 줄 알아! 내가 그것들을 위해 한 푼이라도 적선했을 줄 알아? 천만에, 난 어쨌거나 똑같이 했을 거라고! 내가 후회할 줄 알아! 난 그저 운이 나빠 감염됐을 뿐이야, 그 벌레들 몇 번 내쫓았다는 이유로 천벌을 받은 게 아니야! 그렇게 따지면 저 뭍의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병에 걸려야 마땅하겠지, 내가 특별히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까 난, 내가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도 똑같이 했을 거야. 그리고 난, 적어도 나는, 그 지경이 되어 뒷골목을 기어다니며 빌빌대진 않았어! 사실 확진을 받은 때, 정확히 말해 직장을 잃고 나서는 죽어 버릴까도 생각했었어. 내가 약국에 들어오는 거지들을 보던 그 눈빛, 그 시선 그대로 사람들이 나를 본다는 건 정말이지 참을 수 없어, 사람들이 내게 침뱉는 것도... 거기에다 그 고통이라는 게... 정말 매 순간 순간마다 뼈마디를 깎이는 그 느낌, 벌레가 점점 내 속살을 파먹는 그 느낌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 지금도 가끔 그때로 돌아가는 악몽을 꿔. 지금은 로제 슈가를 먹고 다시 잠을 청하면 그걸로 그만이지만, 그때는 잠드는 그 한 순간조차도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었어. 온종일 시달리고선 편히 잘 수조차 없었으니, 차마 견딜 수가 없더군. 하지만 결국 나한테는, 자살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도망칠 곳이 있었지. 약국의 납품업체들 건너 건너로부터 들어서 이 섬을 알고 있던 것은 내게 천운이었어.

 

...물론, 병에 걸린 것부터가 따지고 보면 오지게 재수 없는 거지만, 그래도 그나마 이 섬에 오게 된 게 불행 중 다행이었지. 그래도 이 섬엔 하나같이 벌레들만 모여 우글거리잖아, 여기서 난 그 중 하나일 뿐이라 전혀 눈에 띄지 않아... 우습게도 여기서는 속이 썩어 문드러진 벌레인 게 오히려 정상적이고 당연한 것으로 느껴지지, 다들 그 모양이니까! 어쨌거나 그렇게 생각하니까 마음도 더 편해졌어. 게다가 이 섬은, 원래 하수구에서나 뒹굴었어야 할 우리 같은 놈들에게... 너무 과분해. 내가 처음 왔을 땐 글쎄, 여기가, 이 섬이, 생각보다 너무... 아름다워서 놀랐다니까. 그래, 여기서라면 내가 벌레라는 걸 아예 잊어버릴 순 없어도, 병에 걸리기 이전처럼 살 순 없어도, 내가 이미 사람이 아니어도, 그런대로 인간인 척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어. 얼마 안 남은 삶을, 보통의 시한부 인생처럼 잘 보낼 수 있을 것 같았어. 그리고 그렇게 살았어. 여기서는 날 좀먹는 고통 같은 것도 느끼지 않아도 됐어.

 

그런데 뭐, 섬에서 나가자고? 어림없는 소리! 그레이 당신은 라임같은 애한테 왜 그런 헛된 망상이나 심어주고 다니는 거야? 나가면 어쩔 건데? 치료를 받겠다고, 얘는 그 치료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알아? 가능성이 얼마나 낮은지는? 뻔하지, 또 안 알려줬겠지! 라임, 애초에 병을 치료하는 것부터가 확률이 무진장 낮은데, 설령 완치가 된다고 쳐도 사람들에게 우리가 벌레인 사실이 변할 것 같니? 그것까지 치료할 수 있을 것 같아? 어? 뭘 바꿀 수 있을 것 같았어? 천만에, 한 번 벌레는 영원히 벌레일 뿐이야! 그레이, 당신은 어땠는데? 똑바로 말해봐! 그레이 당신이 섬을 나가서 얻은 게 뭐야? 당신에게 돌아온 건 뭐야? 그래, 당신은 아직도 살아있지, 하지만 당신은 거기서 그저 당신이 짓밟아 죽일 버러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을 뿐이잖아.

 

내 생각에, 당신의 그 음침한 회색 옷차림부터가 그걸 증명하고 있어. 난 당신 성격이 처음부터 이랬을 것 같지가 않거든. 분명 그 끔찍한 치료와 뭍 사람들의 당신을 대하는 태도가 당신을 그렇게 만들었겠지. 당신을 갉아먹었겠지. 섬을 떠난 게 당신 눈을 망가뜨렸듯 그렇게 당신을 망가뜨렸겠지. 당신, 그런 식으로 살아있는 게 지긋지긋하지 않아? 당신은 이 섬에 있을 때 그나마 사람일 수 있었지, 곧 죽을지언정 사람으로 남아 죽을 수 있었어. 그러나 섬 밖에서 당신은 끈질기게 숨만 붙어 있는 벌레일 뿐이야, 아무 색깔도 없는... 하기야 나도 다 마찬가지지! 그렇지만, 나는 당신처럼 회색 벌레는 되지 않아, 난 절대, 절대 안 나갈 거니까!

 

그레이가 안쓰럽다는 듯 말하면서도 커피 씨는 그레이를 경멸하듯이, 아니 혐오에 가까운 눈빛으로 바라봤고, 그녀의 말투는 그레이가 자기 아래 있다는 것처럼, 숫제 그가 자기 발밑에서 꿈틀대는 밟아 죽여야 할 벌레라도 된다는 듯이 무시하는 투였습니다. 그녀의 견습생인 커피가 사탕의 불 조절을 잘못해서 솥이 한 번 넘친 적이 있었는데, 그때 크게 사고를 친 커피를 닦아세우던 그녀의 태도보다 그레이를 대하는 지금의 태도가 훨씬 매서웠습니다. 커피 씨는 숨을 몰아쉬곤 말을 이었습니다.

 

당신은 색깔도 잃었고, 당신에게 쏟아진 온갖 멸시와 냉대를 견디지 못해 결국 여기로 다시 기어들어왔지! 벌레가 구멍 속으로 숨어들듯이... 그런 주제에, 당신이 지금 이럴 자격이 있는 거 같아! 당신은 지금 이럴 자격이 없어. 당신이 다른 사람의 색을 뺏을 자격 따윈 없다고! 왜? 당신은 당신 자신의 색도 지켜내지 못했잖아? 간신히 목숨만 붙어 있는 주제에 당신이 나나 저 라임보다, 섬사람들보다 낫다고 생각했어? 당신이 뭍으로 도망간 게, 그리고 라임을 부추겨서 섬사람들이 당신 전철 그대로 밟게 하는 게 무슨 영웅적 행동이라도 되는 거 같아? 왜, 다같이 하면 당신이 했던 병신 짓거리가 좀 덜 멍청해 보일까봐? 꿈 깨. 당신은 그냥 불구자야. 버러지야. 뭍에서 당신을 받아 줬어? 아니잖아. 당신은 섬으로부터도 한 번 등을 돌렸어, 그런데 섬이 이제 와서 당신을 받아줄 것 같아!

 

커피 씨처럼 조용한 사람이 그렇게 호령하듯 말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서 나는 반쯤 얼이 빠져 있었는데, 그때 갑자기 커피 씨가 내 쪽으로 시선을 옮기더니 얼어붙어 있던 내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 순간 그녀의 말투가 갑자기 나긋나긋하게 바뀌었는데, 그런 즉각적인 태도의 변화가 내겐 더 위협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라임, 대답해 보렴. 저 사람이 정말 이 섬의 존재가 나쁘다고 생각한다면, 왜 섬의 운반책을 자처했겠니?

그레이는 때를 봐서 섬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리려고...

 

뭐, 진실을 알려? 커피씨는 내 대답을 듣고선 어이없다는 듯이, 한심해 죽을 지경이라는 듯이 코웃음을 쳤습니다. 애한테 아예 거짓말까지 했군. 제발 솔직해져, 그레이. 당신이 섬의 운반책이 된 건, 그것 말고는 도저히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서야. 그리고 당신도 내심 인정하잖아, 이 섬이 필요하다는 걸? 여기가 벌레들에게는 더 나은 안식처라는 걸 당신도 알잖아, 내 말이 틀려? 이봐 당신, 내 말이 맞으면 맞다 틀리면 틀렸다 대답하라고! 사람이 앞에서 말을 하는데 말이 말 같지가 않나보지? 왜 그렇게 아무 말도 안하고 바닥만 처 보고 있어, 당신 무슨 머저리야? 벙어리야? 아니면 이젠 눈도 모자라 귀까지 먹었나?

 

커피 씨는 바락바락 악을 쓰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는, 어디 한 번 해 보자는 듯이 웃으며 차분하게 말했습니다.

 

뻔뻔하게 안 들리는 척하긴. 말할 생각이 없는 것 같으니까 그냥 내가 대신 말하지. 지금 당신은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야, 당신은 할 말이 없으니까, 그걸 당신도 잘 알고 있잖아? 당신 자신이 제일 잘 알 거야, 당신이 할 일은 지금처럼 입 닥치고 조용히 배나 모는 거지, 멍청한 어린애한테 쓸데없는 헛소리 떠들어서 선동하고 다니는 게 아니라는 걸!

 

커피 씨는 잠깐 말을 멈췄다가, 한마디 반박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는 그레이를 향해 쐐기를 박았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당신이 이러는 건, 초코 씨 뿐만 아니라 나도 절대 용납 못 해.

커피 씨, 제발... 섬사람들을 위해서예요, 그러니까...

 

내가 뒤늦게 애원했지만 커피 씨는 코웃음치며 이렇게 대답할 뿐이었습니다.

 

섬사람들이라! 라임, 여태 뭘 들었어? 그 사람들, 나한테 아무 의미도 없어. 내 몸이 병들었대서 내 정신까지 망가진 건 아니야. 내 비록 몸은 더이상 인간 구실을 못하게 되어버렸지만, 그래서 이 섬에 처박혀 있을 수밖에 없지만, 너희 같은 벌레들과 어울리지 않을 만큼의 사리 분별력은 남아 있어. 그러니 날 너희와 똑같이 취급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라임. 내가 너와 똑같다고 생각하지도 말고. 난 그저... 죽음이라도 사람답게 맞고 싶을 뿐이야. 그러기 위해 내게 중요한 건 섬이지, 섬사람들은 내 알 바 아냐.

 

난 커피 씨가 늘 사람들과 거리를 두었던 까닭을 이제 확실히 알았고, 그녀가 몸이 병든 자신을 인정할 수 없어 결국 마음이 병들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런 마음을 품고 살아야 했던 커피 씨 역시 괴로웠으리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괴롭다 해도 그 마음이 어떻게 변할 수 없다는 것도 알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더 부탁해도 소용없으리라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한번 더 매달려보려고 했는데, 커피 씨는 짐짓 안됐다는 표정을 과장되게 지어 보이며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미안하지만, 이미 늦었어.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그때까지 서 있던 선반 쪽 벽에서 살짝 옆으로 물러났습니다. 선반 아래에는 소리 파이프가 있었는데, 그녀가 비켜 서자 나는 소리 파이프의 입구가 열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난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내내 그게 열려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순간 커피 씨가 왜 그렇게 끊임없이 말을 했는지도 알았습니다. 그녀는 그런 식으로 시간을 끌며 우릴 붙잡아 두곤 누군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커피색 집에서 제일 가까운 집, 저 소리파이프의 끝이 연결된 집은, 우리의 대화를 전부 듣고 있던 사람은 바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젖은 수건 같은 걸로 내 코와 입을 막았고 나는 어지러움을 느끼다 정신을 잃었습니다.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어두컴컴한 곳에 있었습니다. 의자에 앉은 채였는데, 팔이 의자에 묶이고 발은 채 바닥에 닿지 않아 허공에 대롱거리는 탓에 꼼짝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방을 가득 채운 적막을 깨고 어디선가 낑낑대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기묘한 소리는 온통 시커먼 침묵 속에서 선명하게 두드러졌는데, 난 갑자기 좀 오싹해져서 날카롭게 소리쳤습니다. 그레이, 지금 그레이에요? 좀 있다가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그래. 나야.

아... 난 또... 왜 그런 소리를 내요. 무섭게.

 

나는 한시름 놓으며 볼멘 소리를 했습니다. 놀래켜서 미안하다. 결박을 풀어보려던 중이었는데 너무 세게 묶여서 살을 파고들어. 라임 너는, 괜찮니? 다친 덴 없어? 팔이 묶여있지만 그것말곤 괜찮아요. 팔이 묶였다고, 그럼 다리는? 묶여있진 않은데 공중에 떠서 바닥에 안 닿아요. 몸을 흔들어봐, 의자가 넘어지면 발이 닿을지도 몰라. 한참을 고생한 끝에 나는 의자가 하도 무거워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는 말을 그에게 되돌려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긴 아무리 서툴다 해도 그 정도 계산도 해보지 않고 사람을 이렇게 묶어놨을 리는 없었지만, 그는 기대가 부서졌다는 듯이 한숨을 쉬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내가 먼저 정적을 깼습니다.

 

여긴 어딜까요?

나도 모르지. 어딘가 끔찍한 곳이라는 것 말고는.

누가 이렇게 한 걸까요? 설마 초코 씨가... 그레이가 말한 섬의 주인이... 초코 씨였어요?

그래... 진작 말 안해서 미안하다.

 

나는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레이가 처음 섬 주인을 언급했을 때 난 왜 더 캐묻지 않았을까요. 또 그때 왜 섬 주인은 분명 나쁜사람일 거라고 지레 생각해 버렸는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런데 초코 씨라니. 어둠 저편에서는 그레이의 지친 듯한 목소리가 이어졌습니다.

 

내가 다 망쳤어. 커피 씨한테 가는 게 아니었어. 차라리 내가 섬밖에서 따로 더 알아봤어야 했는데.

아니에요. 나도 몰랐어요. 커피씨가 그렇게 나올 줄은...

라임,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커피 씨가 나에 대해 한 말은 사실도 있지만 어떤 부분은 거짓말이야. 다 믿어선 안돼.

나도 알아요. 나 바보 아니에요. 그 사람 말에는 신경 안 써요.

 

내 목소리가 약간 냉랭하게 들리자 그레이는 잠시 침묵하다가 완전히 주눅이 들어 말했습니다.

 

있잖아... 널 속여서 미안해.

그럴 거 없어요. 그레이는 나한테 속인 거 없어요.

아니야, 난... 내가 잘못했어...

그레이, 진짜 왜 그래요? 그레이가 나한테 대체 뭘 잘못했는데요? 색맹인 걸 안 말해 준 거? 치료받는게 어려운 걸 안 말해 준 거? 뭍에서 사는 게 힘들다고 안 말한 거? 그게 뭐가 속인 거예요, 내가 안 물어봤는데!

그래도...

그런 식으로 따지면 나도 미안해야죠, 그레이는 나 때문에 이 일에 휘말려서 지금 거기 묶여 있는 거니까! 그런 식으로 미안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어요, 그런 건 나중에 모든 게 잘 마무리되고 해도 안 늦어요. 지금은 서로 사과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앞으로 어떡할지 궁리해 봐야죠. 또 울 것 같은 목소리가 된 그레이 탓에 나는 정색을 했습니다. 사실 약간 신경질이 난 탓에 나도 모르게 언성을 높인 건 사실이었지만, 어쨌거나 지금은 정말로 우는 소리나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레이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뭐라도 빨리 대책을 세워야 했습니다. 나는 그레이를 다그쳐 앞으로의 계획을 짰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추측에 기반한 작전이나마 있어야 우리에게도 승산이 있었습니다. 그레이와 내가 한참을 얘기한 끝에 최종적으로 결론을 짓고 나서 얼마 안 되어, 멀찍이서 일정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어둠 속으로 빛이 확 들어왔습니다. 랜턴을 든 초코 씨였습니다.

 

나는 빛에 익숙해지려고 눈을 깜빡인 뒤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그레이가 묶여 있는 의자는 어둠 속에서 느낀 것보다 가까이 있었는데, 그는 기진맥진한 걸 빼면 크게 다친 데는 없어 보여 한시름 놓였습니다. 우리가 갇혀 있던 곳은 아마도 초코 씨 집의 지하실인 모양이었습니다. 초코 씨 뒤의 열린 문 너머로 계단이 얼핏 보였습니다. 나는 전에 초콜릿 색 집에 왔던 걸 떠올려 보았습니다.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도 문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렇다면 만약 초코 씨가 우리 결박을 풀어주더래도 뛰어서 달아나는 건 무리일 것이었습니다. 그 문이 잠겨 있으면 꼼짝없이 붙들릴 것이 뻔했으니까요. 문을 부수거나 초코 씨를 제압하는 건 힘에 부친다고 진작에 결론을 냈습니다. 초코 씨가 비록 노인이기는 하나, 원체 건장한 편이고 기력도 전혀 쇠하지 않아서 지금 힘이 다 빠진 그레이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으리라는 계산이었습니다. 일단은 꼼짝없이 초코 씨 말을 듣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바는 아니었습니다. 나는 일부러 눈에 힘을 준 채 초코 씨를 쏘아보았지만 초코 씨는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고 지루하리만치 태연자약하게 입을 열었습니다.

 

일단 사과부터 해야겠군. 이렇게 묶어놔서 미안하네. 나도 별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어, 자네들도 이해를 하겠지만...아니, 이건 자네들이 이해해 줘야 해. 어쨌거나 나한테도 입장이라는 게 있으니까 말이야. 허나 일이 이렇게 됐으니 자네들 입장도 들어는 봐야겠지. 먼저 라임, 뭐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느냐? 있으면 지금 말해 보려무나.

 

초코 씨는 내게 부드럽게 물어보았고, 전혀 죄인을 문책하는 태도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물음에는 어딘지 위협적인 데가 있었습니다. 어쩐지 싸늘한 분위기에 그만 기가 질린 내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자, 초코 씨는 방향을 돌려 그레이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자네는 나한테 할 말 없나?

 

그레이도 나와 비슷한 섬뜩한 느낌을 받았는지, 바닥만 멀거니 내려다 본 채 얼어붙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먼저 운을 뗀 것은 초코 씨였습니다. 자못 심각한 표정이었습니다.

 

일은 벌려놓고 정작 할 말이 하나도 없다니, 유감스럽군 그래.

 

그렇게 말하는 초코 씨의 얼굴은 온화한 평상시의 모습 그대로였으나 한편으로 위압적인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나는 숨을 죽인 채 초코씨가 그레이에게 말하는 것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레이, 자네가...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정말 몰랐네. 이게 배반이라는 건 자네도 알고 있을 텐데? 이렇게 굴어서 곤란해지는 건 오히려 자네일세. 물론 라임이야 아직 어리니까 그럴 수 있다고도 생각하네만, 라임이 그런다고 어른인 자네까지 휘둘려서야 되겠나. 아닌 게 아니라, 섬을 적으로 돌려서 좋을 게 없다는 교훈을, 자네는 이미 여러 차례에 걸친 뼈아픈 경험을 통해 얻었잖나? 난 자네가 이제 그 정도를 이해할 만큼은 컸다고 생각했는데.

 

잠시 사이. 초코 씨는 그레이를 매섭게 노려보는가 싶더니 다시 부드러운 말투로 말을 이었습니다. 자네가 견습생 박하를 빼돌렸다는 걸 알고 있네. 내가 모를 리 없다는 걸 자네도 이미 알 테지. 하지만 난 모르는 척했어. 나는 자네가 스스로 사리분별할 능력이 있다고 판단해서 자네가 하는 행동들을 그간 내버려 두었다네.

 

왜죠? 여지껏 말없이 바닥만 쳐다보고 있던 그레이가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치를 떨며 중얼거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경질적인 물음에도 초코 씨는 평정심을 유지한 채 느긋하게 대꾸했습니다. 그야 자네가 알아서 그만둘 줄 알았으니까.

 

그러기를 기대하며 지켜봤는데... 그레이, 자네는 끝내 나를 실망시키는군.

제가 실망시켜드렸다니 기쁘군요.

 

그레이는 나직한 목소리로 씹어뱉듯이 말했습니다. 초코 씨는 천천히 고개를 내젓고선 말을 이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말해선 안 되네. 자네는 그동안 섬에 꼭 필요한 인물이었어, 비록 자네가 섬사람이 아니었을지는 몰라도 그 점에 대해서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을 텐데. 자네가 없었더라면, 섬을 이렇게 유지하기가 배로 힘들었을 걸세. 내가 자네에게 얼마나 고마워하는지...

 

고마워하지 마십시오! 저는... 저는 하나도 몰랐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이 모든 것들이 섬사람들을 위해서, 섬사람들을 위해서라고 말씀하셨죠. 그런데...

 

그레이는 괴로워하며 레몬씨의 죽음을 목격한 일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정말 섬사람들을 위해서라면 그렇게 내버려두지 마셨어야 합니다! 설마 몰랐다고 발뺌하지는 못하시겠지요! 그러나 초코 씨는 그저 그를 비뚜름히 쳐다볼 뿐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왜 그렇게 힘들게 얘기하는지, 또 왜 그렇게 화를 내는지 의아하다는 투였습니다.

 

좀 이해가 어렵군. 그레이 자네에게 그런 대의가 중요했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나? 난 자네를 알아. 자네가 이 섬에 처음 왔을 때부터, 자네가 지금 옆에 있는 라임만 할 때부터 자네를 봐 왔단 말일세. 자넨 자기 자신 외에는 어떤 것에도 신경을 쓰지 않아. 예컨대 자네는 그간 섬사람들의 시체를 도맡아 처리하지 않았나. 또 섬의 거래도 순전히 자네 몫이었지. 그런 일들 역시 불법적이야,

 

허나 자네가 그런 일들에 언제 반기를 든 적이 있었느냔 말이야. 자네는 여태 내 명령에 고분고분 따라 왔지만, 그 모든 일들이 섬사람들을 위해서라는 내 명분을 진심으로 믿었기 때문에 자네가 그랬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네. 자네가 섬사람들을 위해 그 일을 한 것이 아닌 줄 안단 말일세. 자넨 그저 자네 일신의 안위가 보장되는 일이라면 뭐든 해왔지, 그건 자네다워.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그렇게 괴로워하나? 이 일이 자네한테 뭐가 그리 별다르기에... 이런 식으로 나를 배반하려고까지 드는지 그것이 궁금할 뿐이라네. 정말로 자네에게 섬사람들의 죽음이 그렇게 큰 문제가 되나? 내가 아는 그레이는 그런 일에는 통 관심이 없는데 말이야.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저는 처음 섬에서 달아났을 때부터 노력했습니다! 제가 이곳에 돌아온 것도, 섬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리기 위해...  그레이는 제대로 반박하지 못했습니다. 초코 씨는 네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이 안색 하나 바뀌지 않고 말을 이었는데,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는 그레이와는 정반대였습니다.

 

그래... 자네가 그 얘길 꺼낼 줄 알았어. 그러나 자넨 결국 어떻게 했지? 그것이 자네의 진심이었더라면 지금껏 자네가 내 일을 도맡아 한 건 뭐라고 설명할 텐가? 그것도 자네의 의지에 반하는 일이었다고 할 겐가? 그게 궤변이라는 것쯤은 여기 꼬마 라임도 알겠네. 자넨 의지가 없는 사람이야. 그러니 내 심부름을 하는 건 자네의 의지에서 나온 일이 물론 아니겠지. 그러나 그것은 자네의 의지에 반해서 하는 행동이지도 않았어, 그 점은 확실히 해 두자고. 의지 자체가 없는 사람이 어떻게 의지에 반해 행동한다는 건가?

그 말뜻은 결국 제가 비겁해서 이렇게 되었다는 거지요. 이게 다 제 탓이라고 말씀하시는 거죠!

 

당신은 제가 비겁한 놈이라고 생각하고 계시죠.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놈, 이용해 먹기 좋은 놈이라고 생각하시니까... 그러니까 지금도 이렇게... 당신이 나의 행동을 뭐라 평가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신이! 하지만 이젠 다릅니다! 제가 비겁했을지는 모릅니다, 이제까지 일어난 일은 제 잘못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건 인정하지만... 더이상 그런 놈으로 살지 않을 겁니다! 이제 그 잘못을 제 손으로 바로잡을 겁니다! 그레이는 화가 나서 거의 쏘아붙이듯 말했습니다. 내 생각보다 그레이는 훨씬 말을 잘 했습니다. 하도 평소에 말수가 적고 길게 말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보니 중간중간 말을 더듬긴 했지만, 어쨌거나 아까보다는 훨씬 나았습니다. 초코 씨도 약간 의외라는 듯 그레이를 빤히 쳐다보았습니다.

 

뭔가 착각하고 있나 본데, 나는 지금 자넬 비겁하다고 책망하는 게 아닐세. 지금 이 불유쾌한 회합은... 자네의 죄과를 논하는 자리가 아니란 말이야. 내 분명히 말하건대, 그때 자네의 선택은 어쩔 수 없는 거였어.

그렇게 말하셔도 다 마찬가집니다. 저는 그러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아니, 계속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있군! 자네가 그때 선택을 잘한 거야. 동기야 어찌 되었든, 자네가 그때 했던 선택은 옳아. 어떤 일이든 결과가 더 중요한 법이지, 한동안 자네는 나와 함께 잘해오지 않았나. 그런데 지금 자네가 하려는 짓이란... 섬사람들에게 진실을 말해 주겠다고... 진실이라, 그게 저들에게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나? 자네는 진심으로 나보다 자네가 섬사람들을 위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나?

 

다시 한 번 반복하자면 나는 이 섬과 섬사람들을 나 자신보다도 더 아꼈다네. 그리고 자네도 마찬가지로 아꼈어... 자넨 그걸 알아야 해. 난 매순간 육체를 파먹는 죽음을 의식하며 살아가지 않아도 되는 공간을 마련해주고 싶었을 뿐이야. 환자들도 사람일세, 그정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할 권리야. 그러나 저 뭍에서는 그런 당연한 권리마저도 지켜지지를 않지. 그래서 나는 섬을 만들었어. 이 섬은 환자들이 당연히 받았어야 했는데도 받지 못한 것을 제공해 주지, 그게 환자들에게 구원일 수 있다는 걸 정말 이해하지 못한다는 건가? 나를 구원자라고 부를 건 없어. 아무리 의도가 좋은 거짓말이라 해도 사기는 사기야. 내가 사기꾼일지도 모른다는 걸 나도 알고 있다네, 그러니 나도 내가 구원자라고 불리기를 바라진 않아. 그런 이름으로 불리길 바란다면 내 욕심이 너무 지나친 걸세. 그러나 날 그렇게 부르지는 않더라도, 이 섬이 구원이라는 건 인정해야지.

 

하지만! 그레이가 소리쳤지만 초코 씨는 손짓으로 그의 말을 제지하고 자기 얘기를 계속했습니다. 그레이, 그렇게 소리지르지 말게... 그러잖아도 다 들리니까. 내 비록 늙었지만 청력은 여전하다네. 그렇게 악쓸 필요가 없어... 정말이지, 내가 그때 자넬 살려놓은건 이러라고 그런 게 아닐세. 상기해보게. 난 그때 자넬 죽일 수도 있었어. 그래도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나로서는 말이야, 자네가 참 은혜를 모른다고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다네.

 

차라리 그때 저를 죽이지 그러셨습니까! 그때 이후로 저는 살아있되 죽은 사람처럼 살았습니다. 저 자신의 의지도 없이, 아무 것도 모른 채 그냥 기계처럼 시키는 일만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 일이 얼마나 더러운 일인지도 모르고... 제가 미리 알았더라면... 아니, 이 모든 걸 알기 전에 죽는 게 차라리 나았을 겁니다! 당신이 나를 이런 비겁한 놈으로 전락시키기 전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래도 당신이 한 모든 일이 섬사람들을 위해서라고 변명하실 셈입니까? 거짓말 마십시오! 그런거면 왜 그들이 그렇게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도록 내버려 두신 겁니까? 왜 안락사라도 시켜주지 않은 겁니까!

 

그레이는 이제 아주 말문이 트인 것처럼 사납게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진심어린 분노가 그의 혀를 저절로 움직이고 있는 듯했습니다. 구원자라니... 그 사람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당신도 보셨을 텐데, 잘도 스스로 구원자라고 주장하시는군요! 아무것도 모르는 그 사람들이 그렇게 죽도록 내버려뒀으면서 구원 운운하십니까? 그런 주장을 하고 싶으셨으면 적어도 그 사람들에게 사실을 미리 알려주셨어야 했습니다. 그들이 그런 식으로 죽기전에 안락사라도 시켜줬어야 한단 말입니다! 당신이 한 것은 결국 그 사람들이 지옥 같은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도록 방치한 것이 다가 아니냔 말입니다, 그런 짓을 해놓고선 말만 그렇게 하시면 그걸 누가 어떻게 믿겠느냐고요! 도대체 왜 그러신 겁니까? 안락사라도 시켰더라면...

 

그레이, 모든 비밀이 유지되는 데에는 그만한 댓가가 필요하다네. 생각해보게, 만약 시체 머리에 총알구멍이라도 있었다면 그레이 자네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지 못했겠나? 자네가 아무리 무심해도, 그 정도로 일이 커진다면 분명 작은 의문이라도 품었을 거란 말일세. 그럼 자네는 나를 돕지 않았겠지. 그렇게 되어서는 영 곤란해져. 게다가 꼭 자네만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종종 전혀 이성적이지 못하다네. 사람들에게 로제 슈가의 지연 효과나 안락사에 대해서 미리 고지를 했다면, 섬사람들의 일상이 어떻게 바뀔지 생각해보게. 섬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울걸세. 만약 내가 섬사람들에게 미리 결말을 예고했더라면, 많은 사람들이 섬에 오지 않으려 했을 거야. 또 오더라도, 늘 자신이 죽게 되리라는 것을 통렬하게 의식하고 자각하며 살아야 했을 걸세. 언젠가 안락사를 당해야 한다는 그 말 한마디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 죽음과 함께 살아갈 필요가 없어. 그건 너무 무거운 짐이야. 난 그걸 덜어주고 싶었네. 곧 죽는다는 걸 굳이 그런 식의 언급으로 상기시킬 필요는 없어.

 

자네는 내가 뭣 때문에 섬사람들에게 새 이름을 지어주고 손목에 낙인을 찍는다고 생각하나? 그건 실질적으로는 전혀 필요없는 절차일세. 왜 내가 전혀 불필요한 연극 나부랭이를 한다고 생각하나? 그것도 다 같은 맥락이야. 섬이 정말 구원이 되려면, 섬사람들은 뭍에서와는 전혀 달라져야 해. 아까 나는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에 대해 말했지, 그러나 뭍에서는 환자들이 인간일 수 없다네. 인간답게 살기 위해 그들은 섬사람으로 거듭나야 해. 이 섬에 소속감을 가지고, 또 자신을 괴롭히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다가오는 죽음을 잊어야만 한다고. 내가 섬을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얼마니 애썼는지 자넨 모르겠지. 난 자네들이 이 섬에 애착을 가지기를 바라며 저 색색깔의 집들을 지었어. 뭍의 어디에 가더라도 이보다 아름다운 풍경은 볼 수 없을 걸세. 정말이야.

 

섬은 뭍과는 다른 새로운 현실, 그 자체만으로 완전한 독립된 현실이 될 필요가 있어. 그리고 난 그렇게 되도록 노력했네. 뭍에서의 흔적을 섬사람들에게서 최대한 지웠어. 이름도 지웠고, 고통도 지웠고, 또 언젠가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지웠지. 그렇게 했기에 종내에는 그들 자신이 환자라는 사실마저 거의 지우는 데 성공한 거란 말일세. 그런데 자네는 지금 안락사를 말하고 있군. 그것도 죽음이기는 매한가지야.  안락사라니!  죽음을 입에 올리는 순간 섬의 현실을 분리하려는 모든 노력은 허망하게 수포로 돌아가고 말걸세! 섬의 현실에 크게 균열이 난단 말일세. 나더러 그 꼴을 두고 보란 말인가? 자네들이 나를 원망하도록 내버려 두란 말인가? 그것도 진실을 말해줬다는 이유로!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이야. 나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네. 자네에게 충분한 답이 되었는지 모르겠군.

 

그레이에게 그 말은 전혀 충분한 대답이 된 것 같지 않았지만, 거기에 아랑곳하지 않은 초코 씨는 이제 내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라임, 네가 뭘 오해했는지 알겠다. 그러나 나는 옳은 일을 하고 있는 거란다. 너는 영리한 아이야, 그러니까 이런 의문을 품었던 거겠지. 하지만 또 너의 그 영리함이라면 틀림없이 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내게 설명할 기회를 주지 않겠느냐?

 

...듣고 싶지 않다고 대답해도 어차피 설명하실 거잖아요.

허, 그도 그렇군. 맹랑한 소리긴 하지만 맞는 말이구나, 라임. 그러니 잘 들어보거라. 여태껏 계속 내 입장을 들었으니 이제 감이 잡히기 시작할 텐데, 섬은 네 생각과는 많이 다른 곳이다. 네가 진실을 알기 전까지 생각해 온 것과도 다르지만, 진실을 알고 나서 네가 생각했듯이 도망치고 벗어나야만 하는 그런 장소인 것도 아니야. 네가 그렇게 여긴다면 그건 굉장히 부당한 판단이지. 중요한 사실은, 섬이 나쁜 곳이 아니라는 거야. 네가 진실을 알든 모르든 그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레몬 씨가 죽는 걸 봤다고 했지. 그건 분명 끔찍한 죽음이고, 지켜보기 힘든 광경이지만, 어차피 모든 죽음은 끔찍한 거야. 라임, 레몬 씨가 어떻게 죽었든, 그것이 레몬 씨가 섬에서 행복하지 못했다는 뜻이 될 순 없다. 레몬 씨는 섬에서 행복했어. 다른 섬사람들도 마찬가지야. 라임 아무리 너라도 이걸 부정하지는 못해.

그 행복은 기만이었어요.

기만이라니 당치 않아. 하지만 그래, 네 말대로 기만이라고 치자. 그러나 기만으로 행복하면 왜 안된다는 거냐?

안 될 이유는 없어요, 만약에 초코 씨가 우릴 끝까지 제대로 속였다면 우린 행복했겠지요. 하지만 거짓말은 그렇게 완벽할 수 없어요. 언젠간 들통이 난단 말이에요. 지금 저랑 그레이는 전혀 행복하지 않아요, 왜냐면 진실을 알기 때문이죠. 기만으로 얻는 행복도 행복이기는 하지만, 그건 너무 불완전해요. 거짓말로 진실을 언제까지나 덮어둘 수 있다면, 정말 완벽하게 거짓말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거짓말도 나쁘지 않겠지요. 그러나 그건 불가능해요. 아니, 이미 불가능했지요. 지금 우리가 이러고 있는 게 바로 그 증거예요.

 

말을 참 잘하는구나. 그런데 라임, 너무 이상적인 걸 바란다고 생각하지는 않느냐? 물론 넌 행복하고 싶지. 그러나 그 댓가로 거짓말을 하는 데에는 반대야. 하지만 라임 네가 간과한 게 있는데, 아무런 값을 치르지 않고서 얻을 수 있는 건 아무 값어치 없는 것밖에 없단다. 너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 얻는 행복이야말로 진짜 행복이라는 식으로 말하고 있지만, 실상 거짓말을 그만두면 행복 비슷한 것도 얻을 수 없어. 섬을 나가겠다고, 그게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는 이미 커피 씨에게 충분히 들었을 것 같구나. 너는 이 섬이 기만덩어리이기 때문에 없어져야 한다는 것처럼 생각하지. 그러나 만약에 이 섬이 없다면 커피 씨가 어떻게 되었을지 너는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나는 대답해야 했지만, 아까부터 레몬 씨가 죽기 전에 한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아 마땅한 대답을 찾기가 힘들었습니다. 나는 이 섬에서 행복했어 라임. 나를 보던 그 눈빛, 너는 아니냐고 묻는 듯한 그 눈빛을 애써 떨쳐내며 나는 겨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대답하면서도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섬에서 절대 나가지 않겠다며 몇 번이고 다짐하던 커피씨의 모습이 떠올라 좀처럼 확신이 서질 않았습니다.

 

커피 씨는 여기서도 행복하지 않아요.

 

나도 안다. 커피 씨는 행복 같은 건 바라지 않는 사람이야. 네가 아까 말한 그 완전한 행복이라면 더더욱이 꿈도 꾸지 않지. 그런 게 없는 줄을 알거든. 그래서 그녀는 차선을 찾았다. 바로 이 섬이 차선이지. 물론 그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야. 그러나 그것이 그녀에게는 제일 나았지. 그게 그녀 자신의 최선이었단 말이다. 그런데 넌 그녀에게 그만큼의 행복, 그녀가 누릴 수 있는 일말의 행복조차도 허락하지 않으려 드는구나. 그게 네 기준을 충족하는 행복이 아니라는 이유로 말이야. 그러나 대체 어디에서 네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단 말이냐? 더군다나 라임, 뭍에 나간다고 일이 잘 풀리는 것도 아니다. 가장 낙관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네가 치료를 받을 수 있는 확률은 절반도 안 돼. 그런데 섬사람들 전부를 그 확률에 내맡기는 게 네가 말하는 그 행복이냐? 나는 잘 모르겠구나.

 

그 말은 여러번 들었어요, 하지만 꼭 치료를 받으려고 섬을 나가야 한다는 것만이 아니에요!

그럼 뭘 원하느냐?

 

뭘? 뭘 원하느냐고? 그 질문에 선뜻 답할 수가 없어 혼란스러웠습니다. 사실 꼭 치료를 받으러 나가는 것이 아니라는 대답이 입에서 저절로 튀어나온 데에는 나 자신도 깜짝 놀랐습니다. 뭍에 나가 치료를 받으려고 이런 일을 벌인 게 아니라면 난 무엇을 바라 여기까지 온 것일까, 나는 스스로도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치료를 받으려고 나가는 것이 아니에요, 그저 사람답게... 사람답게? 커피 씨가 그렇게 역설하고 초코 씨가 몇 번이고 강조했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섬 밖에서 네가 사람답게 살 수 있을 거 같아? 섬에서 더 사람답게 살 수 있다면, 레몬씨처럼 죽는게 최선이라면, 정말 나는 그동안 뭘 한 거지? 그냥... 가만히 있을수는 없었어, 하지만 그게 이유가 될까? 그게 다른 섬사람들을 섬 밖으로 끌어낼 이유가 될 수 있을까? 만약 그것이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없다면,

 

나는 지금까지 뭘 한거지? 나는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는데, 초코씨는 집요하게 대답을 요구했습니다. 라임, 그렇다면 네가 원하는 게 뭐냐? 행복해지길 바라는 것도, 치료를 하길 바라는 것도 아니라면, 섬 밖으로 나가면서까지 네가 얻고 싶은 건 대체 무엇이냐? 말해보거라. 넌 그동안 뭘 한 거지? 입이 떨어지질 않았습니다. 목구멍이 꽉 막힌 것처럼 조여들었습니다. 결국 내가 입을 열었을 때 거기서는 대답 대신 울음이 튀어나왔습니다. 한번 눈물이 터지자 걷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럴듯한 대답을 해도 모자랄 판에, 나는 초코 씨 앞에서 그만 흐느껴 울고 말았습니다. 초코 씨는 울고 있는 내게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그저 묵묵히 내려다보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있는데, 여태 잠자코 있던 그레이가 느닷없이 입을 열었습니다.

 

초코 씨, 애한테 거짓말 마십시오.

 

무슨 뜻이지, 그레이?

당신은 섬사람들을 위해 이 섬을 만들었다고 말하지만, 그건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허울 좋은 말로 포장해서 눈속임하셔도 소용없습니다. 당신은 그냥 섬사람들을 이용하고 있을 뿐이지 않습니까.

이용한다고!

그렇습니다. 돈벌이에 이용했지요.

그래? 하면 내가 뭣 때문에 그런다는 겐가?

당신 아들.

 

새로운 국면. 이런 이야기는 일전에 들은 바가 없었습니다. 그레이는 완전히 자신감이 붙은 듯한 말투였습니다. 그래서 난 가까스로 울음을 그쳤습니다. 레몬 씨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떠올리는 게 마음을 다잡는 데 도움이 됐습니다. 간신히 눈물이 멎자,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레이는 내가 우는 걸 멈추는 걸 확인하고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라임, 저 사람 말에 넘어가서 흔들릴 필요 없어. 저 사람 말, 모조리 거짓말이야. 섬을 섬사람들을 위해 만들었다고? 웃기는 소리! 라임, 내가 섬과 뭍을 오가며 했던 일에는 물자 조달만 있었던 게 아니야. 사탕을 내다 팔고 로제 슈가와 식료품을 들여오는 일 말고도, 초코 씨는 내게 한 가지 임무를 더 맡겼어.

 

초코 씨, 그게 뭔지 라임에게 본인 입으로 직접 설명해 보시죠! 표정이 약간 굳어진 초코 씨는 묵묵부답이었습니다. 그레이는 말을 이어갔습니다. 말이 빨라서 약간 초조하게 들리긴 했지만 이제 태도는 꽤 여유로워졌습니다.

 

초코 씨는 날 어떤 병원으로 보냈어. 그런데 거긴 보통 병원이 아니었지. 라임, 메이플 피버를 치료하는 병원이 얼마 없다는 얘긴 수도 없이 들었지? 그래도 그냥 치료만 해주는 병원이라면 어떻게든 찾을 순 있어, 구호 단체도 있고 말이야... 정말 찾기가 어려운 건, 완치 가망이 거의 없는 환자가 계속 숨이 붙어있도록 만들어주는 병원이야. 무슨 뜻인지 알겠니?

아, 연명 치료요.

그래. 난 어릴 때 병원을 전전하며 살았지만, 그런 걸 해주는 병원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고. 그런데 초코 씨가 나를 보낸 병원에선 바로 그런 치료를 하고 있었단 말이야.

 

초코 씨가 나에게 부탁한 건, 어떤 환자의 병원비를 매달 꼬박꼬박 납부하라는 거였어. 처음에 나는 이게 무슨 치료인지도 몰랐고 그냥 대금만 치렀지. 그런데 치료비가 어마어마한 거액이더군. 라임, 로제 슈가를 사고 섬사람들의 생필품을 사는 돈은 사탕을 팔아서 번 돈의 삼분의 일도 안 돼. 나머지 돈은 그대로 병원비로 들어간단 말이야. 그래서 대관절 무슨 치료를 받기에 이렇게 돈이 많이 드나 싶었지.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바로 메이플 피버 환자의 연명 치료더군.

 

내가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난 자연히 왜 이런 치료가 정말 돈이 많이 들고, 거의 행해지지 않는지에 대해서도 깨달았어. 왜냐하면, 나 어쩌다가, 치료받는 환자를 봤거든, 사실상 이게 무슨 치료인지도 환자를 우연히 보게 되어 알 수 있었던 거야. 초코 씨가 병원비를 대주던 환자는 내 나이 또래의 남자였어. 그런데... 그레이는 잠시 말을 멈추고 초코 씨의 안색을 살폈습니다. 다음 말을 꺼내기가 망설여진다는 투였습니다.

 

...정말 사람 꼴이 아니더군. 생각해봐 라임, 메이플 피버는 그냥 치료를 위한 치료도 정말 장난이 아니게 고통스러워. 그런데 그 상태로 계속 억지로 숨이 붙어있게끔 한다고 생각해봐... 환자 본인에게도, 의료진에게도, 서로 못할 짓 아니겠어? 난 어쩌다 잠깐 봤는데도 내가 치료받던 때가 생각나서 등골이 오싹해져서 눈 뜨고 보기가 힘들더라고. 배를 타고 섬에 들어오면서도 환자가 비명을 지르던 게 계속 생각났어. 난 섬에 오자마자 초코 씨에게 따졌지. 도대체 또 무슨 꿍꿍이로 저런 일에 돈을 대고 있느냐고.

 

물론 그때 초코 씨는 내게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았어. 다만 내게 이렇게 부탁할 뿐이었지. 기왕 환자에 대해 알게 된 거, 매번 병원에 갈 때마다 어떻게 지내는지 차도는 좀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말이야. 그런데 그 부탁을 하는 초코 씨의 태도가 정말 이상했어, 아주 간곡하게 부탁했거든. 그래서 난 그걸 거절하지 못했어... 이상하게 거절할 수가 없더라고. 그래서 한달에 한번씩 병원에 들를 때마다, 난 차마 못볼 장면들을 보았어. 환자가 치료를 너무 괴로워했는데, 신체적 고통이 커서 정말 아무 생각도 못하고 있는 것 같았어. 심지어는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마저도 못하는 것 같았어.

 

난 초코 씨가 왜 그렇게까지 해서 저 환자를, 나을 가망도 거의 없어 보이는 저 남자를 살려놓고 싶어하는지 의아했다. 그래서 혼자 생각해 봤어. 혹시 그가 초코 씨의 아들은 아닐까, 하고. 충분히 가능성 있는 추측인데, 그 남자는 혹독한 치료 탓에 겉늙어 보이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내 나이 또래로 보였어. 그럼 연배가 딱 맞잖아. 그래서 지금도, 정말 그가 초코 씨 아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아들이겠거니 하는 거야. 그냥 미루어 짐작한 것이긴 해도, 그렇게 생각하면 말이 맞잖아. 초코 씨가 이 섬을 만든 까닭은, 사탕을 만들어 번 돈으로 자기 아들을 살려놓기 위해서지, 절대 섬사람들을 위하거나 그런 게 아니야. 그레이는 말을 끝맺고는 초코 씨를 노려보았습니다.

 

제 말이 어디 틀립니까, 초코 씨?

그건 분명 일정 부분 사실이네.

 

초코 씨는 그레이의 말에 의외로 순순히 수긍했습니다. 예상 밖의 반응에 그레이는 눈을 치켜떴지만, 초코 씨는 여전히 평정심을 잃지 않은 채 천천히 긴 이야길 시작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지금껏 누구에게도 한 적이 없지만... 자네와 우리 라임을 납득시키기 위해선 들려줄 필요가 있을 것 같구먼. 물론 나는 이 얘길 굳이 하지 않고 그냥 자네들을 내가 처음 생각해 둔 방식대로 처리할 수도 있네. 그러나 그건 우선 내 이야기를 들은 후로 미뤄도 확실히 늦지 않아. 이야기가 좀 두서없더라도 양해하고 끝까지 들어주게, 말했지만 한번도 입 밖에 내본 적 없는 이야기라서 말이야.

 

자네 추측대로, 그 불쌍한 아이는 내 아들일세. 그 아이가 이 몹쓸 병에 걸리기 전에, 나는 큰 배의 선원이었다네. 그레이 자네가 뭐 어디 나무랄 데 없이 배를 잘 몰긴 하지만, 아마도 그때의 내가 자네보다도 뛰어났을 거야. 배를 타면서 돈도 꽤 많이 모았지, 내로라하는 뱃사람인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곳이 없었거든. 항구 마을에서는 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드물 정도였어. 그때 모은 돈으로 집은 물론이거니와 작은 배까지 한 척 장만할 수 있었다네.

 

어쨌거나 나는 가족과 보내는 시간보다 바다 위에서 지내는 시간이 훨씬 길었어. 항해는 나에게 운명과도 같았지. 일이 없을 때도 종종 내 배를 타고 바다를 누비곤 했네. 가족이 기다리고 있는 집보다는 바다가 더 편하게 느껴진다고 생각한 적도, 인정하기 싫지만 자주 있었다네. 이런 건 말로 해서는 도저히 어떻게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지만 그레이 자네는 알 테지? 섬에도 육지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물 위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는 법이지...  잔잔하고도 광막한 바다 위에 떠있는 배의 갑판에 홀로 서서 뭐라 형언할 수 없는 해방감을 느낀 적이 자네에게도 있을 테니까.

 

그레이는 공감이 간다는 듯 끄덕이려다 말고 의식적으로 고개를 저었습니다. 제가 원한 일이 아닙니다, 저는 제가 원해서 배를 몰게 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초코 씨는 그레이의 항변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습니다.

 

그래도 마찬가지야. 자네도 배의 키를 잡을 때만큼은 이런저런 문제들로부터 도망칠 수 있었지 않았나. 자네의 문제를 나도 잘 알지. 허나 내가 그때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는지는 나조차도 모르겠단 말이야... 어쨌거나 지금의 나는 이 섬에 매인 몸이야. 떠날 수가 없다네. 가끔은 바다가 그리워. 하지만 결국 나는 바다만 사랑하고 다른 것들을 소홀히 한 댓가로 이런 벌을 받고 있는 셈이지. 내가 바다를 멀리하고 이 섬에 갇히게 된 것도 다 그런 탓이야. 어느날 긴 항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내 아들은 이미 메이플 피버에 걸려 있었네. 내가 떠날 때까지만해도 건강했던 아이가 그렇게 된 걸 나는 믿을 수 없었어. 하지만 이미 그렇게 되어버린 걸 어떻게 바꿀 수는 없었다네.

 

내가 돌아온 뒤 얼마 안 되어 아내가 떠났지. 그럴 만도 했어, 난 결혼생활 내내 그녀가 바다에 나가 있는 나를 기다리면서 살게 했네. 온종일 칭얼대는 애를 돌보면서 혹시 폭풍이라도 불진 않을까 배가 침몰하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살게 했으니... 그것만으로도 이미 끔찍했을 걸세. 그런데 아이까지 병에 걸리고 말았으니, 그것도 누구나 한번쯤 걸리는 감기나 수두도 아니고 메이플 피버에 걸렸으니, 더 견딜 수 없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지. 누가 그녀를 탓할 수 있겠나? 어쨌거나 그 후로 나는 더이상 배를 탈 수 없었어, 가족 중에 메이플 피버 환자가 있다는 이유였지. 어떤 선주도 나를 고용하려 들지 않았네. 어차피 아내가 떠나고 나서 아이를 돌볼 사람이 필요했으니 어찌되었건 배를 탈 수 없었을걸세.

 

알겠지만 메이플 피버 환자의 치료를 선뜻 맡는 의사는 없네. 봐 주는 병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임시적 조치도 제대로 못 하는데다, 근본적 치료는 아예 해 주지를 않아. 못 하는 것이기도 하고... 자네는 운이 억세게 좋아 자선단체의 도움으로 병이 깨끗이 나았으니 이런 어려움이 자네에겐 영 와닿지 않을지도 모르겠군. 그러나 그건 자네의 운일 뿐이지,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운이 좋을 순 없다네. 보통은 병원도 못 찾을 뿐더러 받아주는 곳이 없어 길바닥에서 숨을 거두는 일이 비일비재하단 말일세.

 

그렇다고 메이플 피버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병원이 없는 건 또 아냐, 있기는 있지. 병마가 빈부에 차별을 두지는 않으니까 말이야, 그러니까, 저기 대저택에 사는 귀족 나으리의 첫째 아들이 메이플 피버에 걸린다고 생각해 보게. 그 경우 상속이니 뭐니 온갖 복잡한 문제가 걸려 있는데, 애가 죽도록 그냥 내버려 둘 순 없지 않겠나? 그런 경우가 얼마든지 있으니, 메이플 피버 치료도 수요가 아예 없는 건 아니란 말일세. 게다가 그 수요층은 치료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부르는 대로 값을 지불할 사람들이니, 그걸 하려는 병원이 하나쯤 없겠나? 아닌 게 아니라, 나도 수소문 끝에 그런 병원을 하나 찾았다네. 하지만 한낱 실직한 뱃놈 주제에 어떻게 계속 치료비를 댈 수 있었겠나? 가격이 엄청나게 고가에 형성되어 있는데 말이야.

 

아이가 죽는 걸 두 손 놓고 지켜볼 수만은 없었으니, 나는 어떻게든 돈을 마련할 방법을 강구해야 했네. 그러자면 뭔가 특수한 방법이 필요했어. 내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마련할 수 있는 돈에는 한계가 있었으니 말일세. 그런데 마침, 기가 막힌 생각이 하나 떠오르더군. 나는 긴 시간 바다에 머물면서, 다른 사람들은 가볼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풍랑이 심한 바다도 여러 번 탐사했네. 그러다 어느 날, 아무도 접근할 수 없을 법하지만 사람은 좋이 살만한 크기의 무인도를 하나 발견했어. 해도에도 그려지지 않은 섬을 처음으로 발견한 것이 뿌듯하긴 했지만 무슨 쓸모는 없었으니 오래간 잊고 지냈는데, 갑자기 그 섬을 어떻게 이용하면 충분히 돈을 벌 수 있겠다 싶었다네. 가정을 버려두고 바다를 떠돌던 게 아주 헛된 일은 아니었던 셈이지. 결국 그때의 경험이 돌파구를 만들어 준 거나 마찬가지니까.

 

나는 수중에 남은 돈을 탈탈 털어 섬에 인부들을 실어 날라 기본적인 시설을 지었다네. 공사는 비밀리에 이루어졌어. 내겐 아주 획기적인 사업안이 있었고, 그건 결국 그야말로 대성공했지. 지금 이 섬이 그 결과물이니까. 처음엔 아들의 병원비를 벌겠다는 절박한 마음에서 시작한 일이었지만, 돈 문제가 해결되자 나는 섬에 대해서도 애착을 갖기 시작했다네. 더 많은 사람들이 섬에 오도록 했고, 그에 따라 섬사람들의 편리를 위해 시설도 계속 증축했어, 그렇게 해서 섬의 지금 모습이 차차 만들어진 걸세...

 

잠깐, 지금 사탕을 만들어 팔아서 갑자기 그 많은 돈을 마련했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건 이해가 잘 안 가는데요... 물론 섬사람들이 따로 임금을 받진 않으니 그런 점에서는 지출이 줄겠지만, 그래도 섬 하나를, 그것도 비밀리에 하나의 거대한 사업장으로 만든다는 것은 여전히 돈도 많이 들고 번잡한 일이잖아요.

 

나는 초코 씨의 이야기에 어쩐지 석연치 않은 지점이 많은 것 같아 중간에 끼어들어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초코 씨의 대답을 보아하니, 초코 씨는 내가 바로 그 부분을 지적하길 바라며 극적 효과를 노리고 부러 이야기를 빠뜨리고 한 듯했습니다.

 

라임, 섬에서 만든 사탕이 왜 그렇게 고가에 팔린다고 생각하느냐? 왜 섬의 사탕을 한번이라도 맛본 사람은 값비싼 돈을 주고서라도 반드시 섬의 표식이 붙은 사탕만을 구매할까? 무엇이 섬의 사탕을 그토록 특별하게 만들지?

 

넌 영리하니까, 지금쯤 충분히 눈치를 챘을 것 같구나. 그렇게 덧붙이는 초코 씨는 정말로 내가 직접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맞추기를 채근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내 입으로 그 답을 말했습니다.

 

우리는 사탕에 로제 슈가를 집어넣었지요...

 

내가 대답하자마자 초코 씨는 기다렸다는 듯이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그래, 너도 알겠지만 로제 슈가는 마약성 진통제야. 중독성도 아주 강하단다. 그래서 나라에서도 아주 관리가 철저해, 구매 절차가 아주 복잡해서 의료 목적임을 증명하지 못하면 구하기가 거의 불가능하지. 난 로제 슈가를 아이의 고통을 덜어 줄 방법을 찾다가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게 돈벌이 수단이 될 거라는 생각이 퍼뜩 들더구나. 만약에 이걸 이용해 사업을 한다면? 예컨대 사탕에 넣어서 판다면? 그 사탕을 한번이라도 먹은 사람들은, 다시 똑같은 사탕을 구하려고 혈안이 되지 않겠느냐 말이야. 그런 이들은 사탕을 아무리 비싼 값에 팔더라도 결국 지갑을 열 것 아니겠느냐? 물론 이런 사업은 불법이니까, 당연히 극비리에 할 수밖에 없지.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외딴 섬 같은 곳에서요?

그래. 난 메이플 피버 환자들을 모아서, 그들의 명의를 통해 로제 슈가를 대량으로 구매할 수 있었단다. 그리고 오갈 곳 없고 고통에 시달리는 그들을, 로제 슈가를 필요한 만큼 제공하는 댓가로 사탕 만드는 일을 돕게끔 했지. 사람들을 모으는 건 어렵지 않았어. 이것이 서로에게 좋은 일이었기 때문에... 절대로 네 생각처럼 일방적인 일은 아니었다.

그 사람들은 로제 슈가의 지연 효과를 알고 있었나요?

아마 대부분 몰랐을 게다.

그럼 한번이라도 그걸 말씀해 주셨나요?

하지만 라임, 아까도 말했듯이...

그래요, 그 알량한 이유 때문에 말하지 못하셨겠죠! 게다가 그것만 문제가 아니에요. 지금까지 우린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마약 유통에 가담해온 셈이라고요, 사탕인 것처럼 속여서요! 여기에 대해서도 일언반구도 안하셨죠!

 

나는 이제 정말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내가 묶여 있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초코 씨에게 계속 따져 물었습니다. 초코 씨도 내 태도가 신경에 거슬렸는지, 능히 무시할 수도 있는데도 불구하고 일일이 응수했습니다. 나는 상황을 까맣게 잊어버린 채로 한참을 초코 씨에게 소리질렀습니다.

 

...어쨌거나 결국 마약을 팔아서 돈을 번 거잖아요! 마약상하고 다를 게 없으면서,

라임, 그냥 장사 수완이 좋다고 해줄 순 없겠느냐?

 

초코 씨, 집어치우십시오! 언제까지 이런 궤변을 늘어놓으실 겁니까! 들을 만큼 들었습니다. 요점을 말씀하시죠! 초코 씨와 내가 옥신각신 하는 것을 보다 못한 그레이가 큰소리를 냈습니다. 그제서야 초코 씨는 퍼뜩 정신을 차린 듯 본래의 냉정하고 거리를 두는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래. 얘기가 길어졌군. 어쨌거나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처음에 섬이 왜 만들어졌고 어떤 방식으로 유지되었든 간에, 섬이 좋은 곳이라는 사실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다는 거야.  그레이, 자네 지적은 틀리진 않았어, 그 점은 내 겸허하게 인정하는 바이네. 처음에 내가 섬을 만든 것은 분명 내 아들의 치료비를 벌기 위해서였으니까. 그러나 나는 섬사람들을 분명히 중요하게 여겼네. 무슨 수단으로만 대한 적은 한 번도 없어. 나는 병에 걸려 죽을 운명은 아니지만, 결국 우리는 같은 병에 걸린 거나 마찬가지니까. 동병상련의 처지란 말일세. 내가 섬사람들에게 느끼는 감정은 절대로 거짓되지 않았어. 난 그들과 이미 같은 배를 탄 사람이야. 난 내가 그들에게 마련해 준 이 섬이, 최선의 장소라고 굳게 믿는다네. 자네들도 그래. 자네들이 끝까지 진실을 몰랐더라면 이 섬은 더 좋은 곳이었겠지만, 이렇게 진실을 모두 깨끗이 밝힌 지금도, 이곳이 자네들에게 가장 나은 곳이라고 나는 확신해.

 

그래요? 그렇다면 아드님도 이 섬에 살도록 하시지 그러셨습니까! 왜 아드님은 섬에 없는 겁니까? 저는 그간 계속 아드님이 병원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지켜봐왔습니다. 저도 물론 아드님이 받는 그 치료를 겪어 봤습니다만, 저는 치료 끝에 다 나았습니다. 그러나 아드님은... 그냥 목숨만 붙여놓는 치료 아닙니까? 완치될 가망도 없는 부질없는 치료를 왜 시키셨습니까? 그건 단지 당신의 집착과 욕심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닙니까? 저는 그 치료가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러운지 여기 있는 누구보다도 잘 압니다, 제가 그것을 견뎌 낼 수 있었던 건 단지 그 기간이 짧았기 때문입니다! 그게 계속 이어지면... 그건... 그건 고문에 지나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그럼 그레이 자네야말로 그 치료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겪은 게 있고 본 게 있는데, 라임에게는 그걸 제대로 일러주지도 않았잖은가. 그렇게 고통스럽다면서 그걸 라임이나 섬사람들이 고스란히 겪게 할 셈인가? 섬을 나가서 치료받는 게 정말 좋은 일이라 생각하나?

 

그레이의 말에 초코 씨는 곧바로 반박했습니다. 그러나 더이상 초코 씨의 말에 전혀 굴하지 않는 그레이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계속 이상하게 말 돌리지 마십시오.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치료를 받는 게 좋은 것도, 섬에 남는 게 좋은 것도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되는 게 아닌 줄 이제 알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선택권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하는 것입니다. 당신 아들은 치료받길 원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치료를 받았지요. 또 대다수의 섬사람들은 치료받길 원치 않아서 섬에 이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치료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습니다. 초코 씨, 우린 우리의 의지대로 선택하기를 원합니다. 제가 처음 섬을 탈출했을 때 그것은 저의 의지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는 그것이 옳은 줄을 확실히 알겠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렇게  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선택입니다. 당신은 그런 변명을 늘어놓아 우리를 설득하려고 시도할 수 있겠지만, 결국 선택은 우리 몫입니다.

 

초코 씨는 입을 열어 뭐라 말하려고 했지만, 그레이가 선수를 쳤습니다. 초코 씨, 제발 변명은 이쯤 해 두시죠! 그 치졸한 변명 더는 듣고 싶지 않습니다!

 

섬사람들을 위해서라느니 어쨌다느니 해도 결국 당신은 그냥 당신이 옳았다고 생각하고 싶을 뿐입니다. 이제 와 당신이 지금껏 이룬 모든 게 틀렸다는 얘길 받아들일 수 없는 것뿐이라고요. 당신이 결국 한 게 뭡니까? 한 무리의 불쌍한 환자들을 반쪽짜리 진실로 현혹해 모아다가, 치료 받을 가망조차 없도록 외딴 섬에 가둬놓고, 범죄에 가담시키고, 노동을 착취하고, 그렇게 번 돈으로 당신 아들을 죽도록 고문했을 뿐이지 않습니까. 그래, 분명 처음에는 스스로 잘 하고 있다고 믿으셨을 겁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렇지 않다는 느낌이 드셨을 테지요. 잘못은 깨달으면 됩니다, 돌이킬 순 없겠지만 적어도 멈출 수는 있으니까요. 그런데 당신은 깨닫기는커녕 오히려 그 잘못으로부터 달아났습니다, 당신 아들로부터 달아나 이 섬에 숨은 것과 대체 뭐가 다릅니까? 섬은 섬사람들을 위한 도피처는 아니었습니다, 그냥 당신의 도피처일 뿐이었지요. 지금이라도 합리화는 그만두고 현실을 직시하십시오. 저는 제 잘못을 깨닫고 이제 섬에서 완전히 벗어나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당신도, 당신이 틀렸다는 걸 깨닫고 우리를 놔 주셔야만 합니다. 하고 싶은 말을 다 쏟아낸 그레이는 그제서야 숨을 몰아쉬었습니다. 초코 씨는 그레이가 숨을 다 고를 때까지 기다리는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그레이의 호흡이 정상적으로 돌아가자, 지하실에는 잠시 완전한 정적이 맴돌았습니다. 초코 씨는 나와 그레이를 찬찬히 뜯어보았고, 나는 초코 씨를 쏘아보았습니다. 시선 사이에는 무겁고 견고한 침묵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 침묵에 균열을 낸 것은, 느닷없는 금속성의 철컥 소리였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지 살필 새도 없이, 초코 씨의 말이 바로 뒤따랐습니다. 보아하니, 자네는 마음을 바꾸지 않을 모양이군. 뭐, 상관없어. 웬만하면 말로 설득하려고 지금까지 기껏 길게 얘기했는데, 그 시간이 좀 아깝기는 하네만... 마음이 안 바뀐다면 좋아.

 

난 자네를 죽이면 그뿐이니까.

 

초코 씨는 그렇게 말하며 뒷짐 지고 있던 손을 앞으로 내밀었는데, 그제서야 나는 방금 전 철컥 소리의 정체를 깨달았습니다. 초코씨의 손에는 방금 공이치기가 제껴졌으니 언제든 격발이 가능할 권총이 들려 있었습니다. 총구는 그레이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언뜻 보니 그레이는 놀라서 얼굴이 사색이 됐습니다. 나는 상황 파악이 되자마자 반사적으로 소리쳤습니다.

 

초코 씨, 안 돼요!

왜 안된다는 거냐, 라임?

 

그레이가 죽으면 배는 누가 몰죠? 나는 안 돌아가는 머리를 애써 굴려서 아무 까닭이나 댔고, 역시나 초코 씨는 미리 준비라도 해온 것처럼 간단하게 반박했습니다.

 

그런 거라면 걱정 말아라. 내가 몰면 되니까. 내 비록 한참을 섬에 묶여 살았지만, 난 누구보다도 바다를 잘 알아. 그 정도는 아직 문제 없다. 라임, 나로서도 누굴 죽여서 이 일을 해결하는 건 그다지 달갑지 않아. 이렇게 되지 않기를 나도 바랐단다. 내 너를 굳이 죽이지는 않겠다, 라임. 어차피 너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아니까. 그러나 그레이는 다르지... 그레이의 배신은 꽤 위협적이야. 그건 나에게만 위협적인 게 아니라 섬 전체에 큰 위협이다. 그레이는 이미 여러 번 나를 배신했어. 난 번번이 그를 다시 신뢰했고 한동안 그레이도 별일을 꾸미지 않았지만, 이번 일을 통해 난 확실히 알았다. 그레이는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라임, 그레이가 언제 또 나를 배신할지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그냥 둘 수 있겠느냐? 넌 그레이를 죽이지 말라고 하지만, 나더러 위험을 무릅쓰란 말이냐?

 

초코 씨는 총구로 그레이의 이마를 겨누며 말했습니다. 동작에 망설임이 없어 나는 겁이 덜컥 났습니다. 어두운 랜턴 불빛 아래 보이는 초코 씨의 옆얼굴 선은 산전수전 다 겪은 강인한 뱃사람의 그것이었는데,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레이가 당장이라도 죽을 수 있다는 게, 초코 씨가 냉혹한 사람이라는 게 실감이 났습니다. 그레이, 자네가 죽고 나면 라임은 내가 직접 뭍에 데려다 주겠네. 라임이 또 이것저것 들쑤시고 다니면 괜히 성가시고 서로 피곤해져. 초코 씨는 아무렇지 않게 그런 말을 하고선 여전히 그레이를 겨눈 상태 그대로 다시 내게 시선만 돌려 물었습니다.

 

라임, 그렇게 되어도 좋으냐?

 

나는 뭐라 대답도 못하고 제대로 숨도 못 쉬고 얼어붙은 것처럼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초코 씨는 내가 말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고, 처음부터 내 대답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말을 이었습니다.

 

당연히 아니겠지. 그럼 어떻게 타협을 보아야 좋을까? 내가 보기에 해결책은 딱 하나다. 그레이를 죽이지 않고 끝낼 수 있는 방법은 정말로 딱 하나뿐이야.

 

뭡니까, 그게? 그레이가 다급하게 묻자 초코 씨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꾸했습니다.

 

라임이 섬에 남는 거지.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겠다고 나와 약속을 하는 거야. 라임이 여기 남아 있는 한 그레이 자네는 계속 내 말을 들을 수밖에 없겠지? 결국 자네가 이런 일을 꾸미고 내게 반기를 든 것도, 전부 라임을... 다른 이들과 다르게, 중요하게 생각해서가 아닌가? 물론 라임은 이런 해결책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겠지. 하지만 내 생각에, 라임은 아마도 자기 때문에 자네가 죽는 걸 더 싫어할 것 같다네.

...라임을 인질로 여기 잡아두시겠다는 겁니까.

굳이 인질이라는 단어를 쓸 것 없네. 난 그냥 라임을 그애가 있어야 할 곳에 있도록 하겠다는 거니까. 그러나 자네가 그런 표현을 원한다면 뭐, 좋네. 인질이라고 해 두지. 하지만 그건 좀 부당한 표현이야. 난 라임에게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을 거니까. 라임이 자넬 죽도록 내버려 둔다면 그게 내 탓은 아니지.

 

초코 씨는 다시 내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라임, 이것만 알아 두렴. 나는 너를 진심으로 걱정한단다. 네가 섬밖에 나가 비참한 고생을 하길 바라지 않아. 그리고 난 그레이를 잃고 싶지도 않고. 하지만 이건 내게 선택권이 없다. 선택은 네가 하는 거야. 아까 저 친구는 선택권이 중요하다고 했지. 라임 네게 선택권을 주겠다. 네가 정하는 거야, 그레이를 죽일지, 아니면 살릴지. 난 어느 쪽이어도 상관 없다. 물론 그레이도 살고 너도 이곳에 남았으면 좋겠지만, 그걸 내 멋대로 결정할 순 없잖니? 난 너의 결정을 존중하겠다.

 

다시 숨이 막힐 것 같은 무시무시한 정적. 또 내가 대답할 시간이었습니다. 나는 해야만 하는 대답을 하기 전에, 깊고 오랜 잠수를 준비하는 사람처럼 한번 크게 숨을 들이쉬었습니다. 결심은 예전에 섰는데도 불구하고,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난 그레이를 한 번 쳐다보았습니다. 그레이의 표정을 보고, 그레이 얼굴 바로 앞에 있는 총을 보고, 마지막으로 초코 씨를 본 뒤에서야 나는 입을 열 수 있었습니다.

 

...제가 남을게요. 그레이를 풀어 주세요.

그래야지.

 

그래야 영리한 선택이지. 초코 씨는 그제서야 평상시처럼 인자하게 웃었습니다. 그 웃음이 나를 향한 것이라는 걸 알았지만 난 고개를 돌려 버렸습니다. 초코 씨는 그럴 것 같았다는 듯이 내게서 시선을 돌렸습니다. 그레이와 눈이 마주친 초코 씨는 딱하다는 것처럼 말했습니다. 왜 이걸 아직도 모르느냐는 것처럼. 그레이, 이것 보게. 기실 자네들에겐 한 번도 선택권이 필요 없었어. 어차피 선택이란 다 이런 거라네. 가장 나은 답은 늘 정해져 있어. 그 외의 것들을 선택한다면 그건 어리석음이나 실수에 지나지 않아. 라임은 섬에 남는 게 최선이야. 그러니 그렇게 할 걸세. 그러나 그레이는 그 말을 다 듣고도 기가 죽는 대신,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힘주어 말했습니다.

 

아니, 이 애는 결국 여기에서 나갈 겁니다.

 

초코 씨는 두고 보겠지만 기대는 별로 되지 않는다는 듯 어깨만 한번 으쓱할 뿐이었습니다. 그레이, 이제 어서 가보게. 자네가 있을 자리로. 초코 씨가 재촉했지만, 그레이는 명령에 아랑곳하지 않고 멈춰서서 나를 한참 쳐다보았습니다. 그리고 초코 씨가 어이없어하건 말건 시종일관 진지한 태도를 유지한 채 내게 약속했습니다.

 

라임, 내가 널 꼭 데리고 나갈게.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레이는 나를 뒤로하고 지하실의 계단을 올라갔습니다. 초코 씨는 그레이가 나가고 시간이 충분히 흐른 뒤에야 나를 의자에서 풀어 주었습니다. 초코 씨는 나더러 피곤할 테니 이제 얌전히 집에 가서 자라고 했지만, 난 기어이 바닷가에 나가 수평선을 향해 나아가는 그레이의 배를 동틀 녘까지 지켜보았습니다. 어쨌거나 그 기나긴 하루는 그렇게 끝났고, 그레이가 섬을 나설 때 나 대신 꼬마 체리를 데리고 나갔다는 건 다음 날이 아주 밝고서야 알게 된 일이었습니다. 그건 내겐 마치 약속을 꼭 지키겠다는 담보물의 의미처럼 받아들여졌습니다. 체리가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섬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소처럼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적어도 한동안은 그랬습니다.

 

초코 씨는 그레이가 한 달 뒤 여느때처럼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나, 라임이 이 섬에 붙들려 있는 한 그레이는 결국 여태껏 그래왔던 것처럼 초코씨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을 거라고 계산한 셈입니다. 그러나 일은 초코 씨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레이는 몇 달이 지나도록 섬에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레이가 나와 약속을 했기 때문입니다. 초코 씨는 알지 못했겠지만, 그레이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뭍의 사람들에게 진상을 알리고 로제슈가에 중독된 섬사람들 전부를 구하겠다고 이미 초코 씨가 지하실에 들어오기 전에 내게 맹세했습니다. 그리고 그건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레이는 더이상 초코 씨의 계획대로 움직이는 기계가 아니었습니다. 그레이는 벌써 섬에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고 그것은 그를 투사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이제 힘 없는 나를 대신해 맞서 싸우기로 했고, 반드시 승리해서 그때 우리를 데리러 오겠다고 했습니다. 만약 초코 씨의 방해로 둘이 함께 섬을 나갈 수 없게 된다면, 그레이가 뭍에서 진실을 밝히는 동안 나는 섬에서 그를 믿고 기다리겠다는 것이 그날 내가 지하실에서 했던 약속이었습니다. 어려운 싸움이 될 테니까, 설령 늦어지더라도 이해해줘. 라임,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 그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1년이 지나도 섬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가 발길을 끊은 지 1년이 넘자 섬의 상황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물론 변하지 않는 것도 있었습니다. 더이상 사탕을 팔 수 없으니 그럴 필요는 사라졌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사람들은 계속 사탕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다만 사람들이 하나둘씩 죽는데도 새 견습생은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만들 수 있는 사탕 종류는 날로 줄어들어 갔습니다.

 

더 큰 문제는 외부로부터 물건을 들여올 수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섬에서 자체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것들엔 한계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남아 있는 로제슈가의 양이 한정되어 있다는 게 가장 큰 두려움이었습니다. 섬사람들도 다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걸 알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배도 없었고, 있다 해도 바닷길이 험해서 그레이가 아니고서야 뭍까지 무사히 항해할 가능성도 거의 없었으니까요. 섬사람들은 뒤에서 초코 씨를 원망했는데, 늘 섬의 문제를 도맡아 해결하던 분이 상황이 심각한데도 손 놓고 집에만 들어앉아 있다는 것이 그 원망의 까닭이었습니다.

 

급기야 초콜릿 색 집에 누군가 불을 지르기까지 했습니다. 화재가 발생한 다음날, 초코 씨는 섬을 떠났습니다. 숨겨놓았던 배를 띄웠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 사실을 아는 까닭은, 결국 초코 씨가 섬을 나가는 데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해변에 떠밀려 온 난파한 배의 잔해물 속에서 초코 씨의 시신을 발견했습니다. 과연 섬 주변의 풍랑이 심하다는 그레이의 말엔 한 치의 과장도 없었던 것입니다. 수십 년을 섬에만 머무른 초코 씨는 더이상 솜씨 좋은 선원이 아니었습니다. 섬사람들은 초코 씨가 섬사람들을 배신하고 혼자 살겠다고 배를 띄웠다고 수군거렸습니다.

 

하지만 나는 초코 씨가 배를 탄 진짜 이유를 압니다. 초코 씨가 죽고 나서, 난 반쯤 타버린 갈색 집에 혼자 가봤습니다. 거기서 난, 아마도 초코 씨가 전서구를 통해 받았을 편지를 한 통 발견했습니다. 병원에서 온 편지였습니다. 거기에는 초코 씨의 아들이 이미 예전에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이 적혀 있었습니다. 병원의 남자가 초코 씨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눈치챈 그레이는 남자가 죽고 나서도 차마 그 사실을 초코 씨에게 알릴 수 없어서 사실을 숨겨 왔는데, 이제 그레이가 병원 측과 1년이 넘게 연락이 끊기자 병원에서 초코 씨에게 직접 비둘기를 보내 사실을 통지했던 것입니다.

 

언제나 섬을 지키느라 이곳에 머물던 초코 씨는 이제서야 아들 곁으로 갔습니다. 나는 초코 씨가 배를 띄우며, 뭍으로 가길 기대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다를 잘 아는 분이었고, 따라서 자신의 녹슬은 실력으로 무사히 항해를 마칠 수 있을 리가 없다는 것도 알았을 분이었습니다. 만약 초코 씨가 배를 몰아 뭍을 오갈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면, 섬사람들을 위해 그레이를 대신해 그렇게 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초코 씨가 혼자 몰래 바다로 나선 것은, 아마도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에 절망한 나머지 어쩔 줄 몰라서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은 초코 씨의 실력엔 문제가 없었는데, 그 절망 때문에 배가 난파했는지도 모르지요.

 

어쨌거나 우리는 해변에 떠밀려 온 초코 씨의 시신을 수습해 묻어 주었습니다. 섬사람들이 죽으면 그레이는 시체에 추를 매달아 인근 바다에 버렸습니다. 섬 주변의 바다까지 포함해서, 섬은 섬사람들이 결코 떠날 수 없는 하나의 큰 무덤과도 같았습니다. 초코 씨도 결국은 섬에 묻혀, 섬사람 중 하나로 남았습니다. 우리는 초코 씨를 섬의 북쪽 사면에 있는 숲 속에 묻었습니다. 남쪽은 온통 초코 씨가 만들어 놓은 것들로 가득했습니다. 나는 초코 씨가 죽어서 이 섬을 떠나지는 못하더라도, 손수 세운 후로 언제나 자기 어깨 위의 책임이었던, 그 알록달록한 지붕 집들로부터는 적어도 벗어나길 바랐습니다.

 

초코 씨의 장례를 간단하게 치른 후, 섬사람들은 앞으로 어떻게 할 지 대책을 논의했습니다. 그레이가 다시 올 때까지 버티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우리는 누가 무슨 일을 할지 각자의 몫을 분배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로제 슈가는 일전에 사탕을 보관하던 창고 하나에 모아 두고 다같이 관리하기로 했습니다. 각자 가지고 있으면 무분별하게 써버릴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매일 아침 일정한 양을 각자에게 배급하는 방식을 통하면, 보다 아껴쓸 수 있을 뿐더러 얼만큼 남았는지 정확하게 계산해내기도 쉬워질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배급이 순조롭게 이뤄지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곧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배급제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어쩐지 계산보다 많은 양이 줄어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나는 곧장 몰래 창고를 감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짚이는 바가 있었지만, 일단 어른들에겐 아무 말 않았습니다. 그것이 옳은 추측인지 아닌지 몰랐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만약 옳았을 경우에도 다른 어른들이 그것을 알길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 컸습니다.

 

아주 직감에 불과했고 어떤 증거도 없었던, 그래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그 추측은 밤마다 보초를 선 지 며칠만에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창고 자물쇠를 능숙하게 따고 들어가서 어색한 자세로 로제 슈가를 작은 통에 옮겨담고 있던 커피 씨는, 내가 어깨를 톡톡 치자 소스라치며 뒤를 돌아봤습니다. 뭐야, 라임? 네가 왜 여기에... 나는 큰소리 내지 말라는 신호로 검지를 입술에 갖다대며 속삭였습니다.

 

커피 씨, 나 다른사람들에게는 말하지 않을게요. 대신에 다시는 이런 일 없어야 돼요. 그때는 어쩔 수 없이 어른들한테도 알릴 거고, 아마도 난 그때도 용서하자고 말하겠지만 그게 통할지 아닐지는 모르니까...

뭐, 용서?  이 쪼끄만 계집애가 정말 보자보자 하니까...

 

커피 씨는 화를 내려고 했지만, 분을 이기지 못해 말이 잘 나오지 않자 급기야 내 앞에 털썩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커피 씨가, 그 자존심 세고 냉정하던 커피 씨가, 내 앞에서 눈물을 감추려는 시도도 않은 채 서럽게 흐느끼고 있다니 정말 너무 의외였습니다. 내가 보는 앞에서 무력한 어린애처럼 엉엉 울고 있는 이 사람이, 그때 나를 비웃고 섬사람들을 우습게 알던 그 여자와 같은 사람이라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였습니다. 커피씨는 울면서 드문드문 조리에 닿지 않는 말을 했는데, 대충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너... 대체 네가 뭔데 날 용서한다 어쩐다를 논해? 애초에 내가 왜 여기서 도둑질이나 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게 다 너 때문이잖아? 그런데 용서라니? 그게 무슨 건방진 소리야? 용서? 이런 젠장, 도리어 내가 용서 못하겠다... 용서... 그래 난 그 작자도 용서가 안 돼, 내가 처음 여기 올 때 그자가 약속한 건 이런 게 아닌데... 이런 미래를 약속하지 않았다고! 난 속은 거야... 불을 지른 건 정말 홧김에 그런 거지만, 배를 숨겨 놨을 줄이야! 그래 생각이 있는 놈이라면 누구라도 당연히 그랬을 텐데, 나도 그걸 알았어야 했는데! 제기랄, 내가 어리석었지! 혹시 한 척 숨겼는데 두 척은 못 숨겨 놨을까 싶어 섬을 샅샅이 뒤졌지만 염병! 진짜로 딱 한척만 숨겨 놓다니, 이런 염병할...! 하지만 이렇게 된 건 내 탓이 아니야, 이건 네 탓이지! 너 때문에 빌어먹을 그레이 놈이 로제 슈가를 갖다주러 오질 않잖아! 로제 슈가... 로제 슈가는 점점 줄어들고있어... 난 오직 이것 때문에 섬에 온건데, 로제 슈가는 언제 없어질지 모르고, 오도가도 못하게 되기까지 했어.

 

정말 로제 슈가는 언제 없어질지 몰라... 그것때문에 난 악몽에 시달려 라임. 난 진짜 무서워 죽겠어. 죽는 게 무섭지는 않아, 그런데 로제 슈가가 없다고 생각하면 정말 끔찍하게 무섭다고. 무서워서 죽을 지경이야, 아무나 붙잡고 울고 싶을 지경이라고! 나한텐 이 망할 약이 꼭 필요한데! 그런데 라임 넌 어떻게 했지? 섬을 이 지경이 되도록 만들어 놓고는, 내가 무슨 어설픈 도둑년마냥 이렇게 슬그머니 로제 슈가를 빼돌려야만 하게 만들어 놓고는, 이젠 내가 이것 좀 갖다 쓴다는 이유로 날 용서하네 마네 비난까지 하는군! 내가 이런 어린애한테 붙들려서 도둑년 소리까지 들어가며, 그 앞에서 한번만 용서해달라고 설설 기며 살아야 해? 야 라임, 넌 참 편하겠다, 너는 네가 옳은 일을 한다고 생각하니까? 혼자 힘으로 도둑도 잡고, 거참 기특하네! 근데 똑똑히 들어 둬, 이 망할 계집애야. 너 때문에, 바로 너 때문에 결국 다들 고통스럽게 뒈질 거야. 언제까지나 네 책임이 아니라고는 못할걸, 왜냐면 결국 다들 널 원망할 테니까... 난 이렇게 분명하게 말해 두지만, 다른 사람들은 말은 안해도 다들 널 원망하고 있다고!

 

커피 씨는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씩씩거리며 뛰어가 버렸습니다. 여전히 눈물을 그치지 않은 채였습니다. 난 커피 씨가 울지 말았으면 했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커피 씨는 내게 말하면서도 대답은 전혀 기대하지 않는 것 같았고, 따라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커피 씨를 따라갈지 말지 망설이고 있는데, 커피 씨가 소란을 피운 탓에 잠에서 깬 몇몇 어른들이 창고 주변으로 왔습니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질문들에 나는 그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만 저었습니다. 내 완강한 태도를 보고는 어른들도 더 캐묻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어른들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느 정도 짐작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어쨌거나 아무도 그 이상의 언급은 하지 않았습니다. 난 그날 새벽 라임색 집에 돌아가서도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부터 창고의 로제 슈가는 다시 정상적인 양 만큼 줄어들었습니다, 하지만 커피 씨는 늘 반쯤 넋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녀는 아무하고도 말하려 들지 않았고 아침마다 꼬박꼬박 로제 슈가를 받으러 오는 것 외에는 숫제 집 밖으로 나오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커피씨가 일하지 않는 것에 대해 뭐라고 하지 말자고 얘기를 했고 섬사람들은 다행히도 다들 기꺼이 그러자고 했습니다. 어쩌다 아침에 창고 근처에서 커피 씨를 마주치기도 했지만, 커피 씨는 나를 분명 보고도 아예 못 본 사람처럼 그냥 지나쳐 갔습니다.

 

로제 슈가는 그레이가 섬을 떠난 지 1년하고도 여섯 달이 지나던 때 완전히 바닥나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철저히 관리해도 결국 언젠가는 다 써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나마 그만큼 아껴서 썼기에 1년 반이나 버틸 수 있었다고 보아야 옳을 것입니다. 커피 씨는 더이상 로제슈가가 남아있지 않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곧장 자기 집 부엌에서 밧줄로 목을 매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커피가 이미 예전에 병으로 숨을 거둔 탓에 커피 씨는 혼자 살고 있었는데, 때문에 아무도 그녀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막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아직 살아남은 섬사람들은 곧 커피 씨의 선택을 따라하지는 못할지언정 확실히 이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커피 씨가 무엇으로부터 도망쳤는지를 몸으로 직접 체험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엄습해오는 고통은 정말로 참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죽음보다 무서운 것에 대해선 긴 말 않겠습니다.

 

나는 지치고 힘든 와중에도 겨를이 날 때마다 그레이에게 편지를 써 초코 씨 집의 비둘기 장에 있던 비둘기 편으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매번 답신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전에 섬의 견습생들이 부모님께 편지 보내는 걸 그만뒀을 때도 끝까지 편지를 쓰고 또 썼던 나는, 오지 않는 답장에 굴하지 않고 비둘기가 한 마리도 남지 않을 때까지 계속해서 편지를 썼습니다. 그레이, 잘 되어 가요? 언제쯤 올 수 있어요? 그레이, 연락 한 번 해줘요... 결국 그레이로부터는 답장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레이에 대한 내 믿음이 흔들린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레이에게도 편지를 보낼 수 없는 무슨 이유가 있었을 테니까요.

 

내가 여러 차례에 걸쳐 그레이에게 전하려고 애썼던 소식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로제슈가가 바닥나고 나서, 아직껏 죽지 않았던 섬사람들도 한 명씩 색맹이 되었고, 몸을 갉아먹는 병에 몸부림 쳤고, 또 이젠 너무 많이 봐서 익숙해질 법도 한 그 끔찍한 방식으로 죽어갔습니다. 대부분이 한 해를 채 못 버티고 죽었고, 커피 씨가 죽은 뒤 1년 4개월 정도가 되자 섬에는 딱 둘만 남게 되었습니다.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은 나와 버터 씨였습니다. 버터 씨의 이마에서 턱까지 가로지르고 있는 흉터는 더이상 흉터가 아니라 진행형의 상처가 되어 점점 크게 번져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건 다가오는 죽음을 예고하는 신호 같았고, 우린 그 잘 보이는 자리에 떡하니 자리한 상처를 무시하느라 무진 애를 썼습니다.

 

우리는 저장고에 남은 재료들로 먹지도 않을 버터스카치를 만들며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고 하며 지냈지만 아무렇지 않을 순 없었습니다. 결국 버터 씨도 끝내 그레이가 오는 걸 보지 못하고 나를 떠났습니다. 그게 벌써 두 달 전의 일입니다. 나는 혼자서 그의 임종을 지켰습니다. 버터 씨는 보고 싶지 않다면 나가 있어도 된다고 했지만 나는 그를 혼자 둘 수 없었습니다. 나는 그가 죽어가는 표정을 멀거니 지켜봤습니다. 너무 많이 본 그 표정은 도저히 익숙해지질 않았습니다. 버터 씨가 내지른 단말마의 비명은 내게 이렇게 묻는 것 같았습니다. 왜 이렇게 된 거지? 우리가 왜 이렇게 된 거야? 버터 씨의 얼굴에서 표정이 완전히 지워진 후로도,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이 섬에서는 더이상 사탕을 만들지 않습니다. 섬에 남은 사람은 나밖에 없습니다. 나는 계속 버텼습니다. 이제는 몸이 괴로워 움직이는 것도 힘겨웠고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습니다. 새벽에 눈을 뜨면 바닷가로 나갔습니다. 아침에는 라임 색 집으로 돌아와 아침을 먹었습니다. 뭘 먹는지도 모른채 뱃속에 밀어 넣고 나면 다시 바닷가로 내려가 우두커니 서 있었습니다. 한낮에는 말을 잘 안 듣는 몸을 질질 끌고 먹을 걸 구하러 온 섬을 돌아다녔습니다. 저녁에는 저녁을 먹고 다시 해변으로 향했습니다. 밤에 라임색 집의 침대에 누워도 아파서 잠이 오질 않았습니다. 뒤척이다 간신히 잠이 들면 곧 다시 새벽이 되어 눈을 떴습니다. 그럼 다시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고... 그렇게 버텼습니다. 그레이가 올 거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버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레이는 결국 약속을 지켰습니다. 늘 텅 비어있던 수평선 저쪽에서 작은 배 한 척이 보인 것은 오늘 아침의 일입니다. 조그맣게 보이던 배는 점점 커다래지고 이윽고 섬에 정박했습니다. 그레이가 늘 배를 대던 바로 그 자리였습니다. 그리고 배에서 내린 것은, 당연히 그레이입니다. 저편에서 그레이가 걸어오는 게 어렴풋이 보입니다. 그는 온통 회색이라 바다를 등졌을 때는 배경과 잘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잿빛 바다와 하나된 듯한 저 형체는 틀림없이 그레이입니다. 그레이! 나 여기 있어요!! 나는 그의 이름을 외치며 손을 마구 흔들다가 옆구리를 찌르는 듯한 통증에 그만뒀습니다.

 

그레이!

 

그가 점점 내 쪽으로 다가옵니다. 나는 힘겹게 그를 향해 발걸음을 뗐습니다. 그레이가 황야를 찍은 사진 슬라이드를 들고 처음으로 라임 지붕 집에 왔던 그 날처럼, 그의 품에 꼭 안기고 싶었습니다. 그걸로 그동안 섬에서 있었던 그 모든 일들로부터 벗어나, 악몽에서 깨어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 꿈에서 깨어나면, 그레이와 함께 섬을 떠나 진짜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나는 그거 하나 믿고 지금까지 버텨왔습니다. 그레이와 나는 이 지겨운 섬을, 회색 바다를 떠나 유원지에도 가보고, 함께 황야를 보기로 약속했습니다. 황야의 달빛, 소금기 없는 세찬 바람, 공기중을 맴도는 히스의 냄새. 말을 타고 끝없이 펼쳐진 공간 속을 자유롭게 질주하는 우리 둘... 나는 내가 한때 되풀이하고 되풀이하던, 답장 오지 않을 편지에 써서 보내던 그 이야기를 믿었습니다. 그를 믿었습니다.

 

그러나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은 그레이가 아니었습니다.

 

세상에, 라임... 이게 무슨... 어떻게 된 거야! 내게 말을 거는 목소리는 내게 익숙한 그레이의 저음이 아닌 웬 여자의 것이었습니다. 어디서 들어본 것 같다 싶은 그 목소리가 누구인지 나는 곧 생각해 낼 수 있었습니다.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아닌 박하였습니다. 박하가 왜 여기에? 그리고 어째서 이런 색으로... 나는 이상함을 느끼다가 무심코 뒤를 돌아봅니다. 거기엔 완전히 무채색으로 변해버린 섬이 있습니다. 나는 눈을 비볐습니다. 분명 건물들은 아까전까지만 해도, 그러니까 내가 바닷가로 내려올 때만 해도, 먼지만 좀 뒤집어썼을 뿐 제 색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젠, 이제는 전부 회색으로 빛이 바래 있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건물 외벽의 문제 같은 것이 아니라, 기어이....

 

율. 나는 박하의 본명을 부릅니다. 내 목소리가 다소 멍하게 들렸습니다. 아주 멀리서 들리는 것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내가 기억하던 것과 좀 달라져 있었습니다. 내 눈이 고장나버린 탓에 회색으로 변해버렸다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율은 분명 그녀가 박하였던 때와는 달랐습니다. 길게 늘어뜨렸던 머리카락이 남자처럼 싹둑 잘려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머리를 잘랐을 뿐 얼굴 생김새는 예전 그대로인 율은 얼핏 보면 잘생긴 소년 같습니다. 머리가 그렇게 짧아졌으니, 색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 나로서는 그녀를 멀찍이서 보고는 정말이지 그녀가 그레이인 줄로 잘못 알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박하가 그레이와 비슷하다면 그건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 드물다는 점에서였는데, 지금 율은 얼굴 표정에 경악이 드러나는 걸 잘 숨기지 못했습니다. 이게 무슨... 라임, 다들 어떻게 됐어?

 

너만... 너만 남은 거야? 나는 박하가 떠난 후 섬에서 벌어졌던 일들의 자초지종을 간략하게 설명했습니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율의 얼굴에서는 서서히 경악이 지워졌습니다. 이야기를 끝맺을 즈음엔 마치 다 알고 있었다는 표정이 되었지만, 경악이 있던 자리를 이제 분노가 채운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녀는 씹어뱉듯이 혼잣말을 했습니다. 젠장, 그레이 당신은 대체 무슨 짓을... 나는 율에게 왜 그레이가 오지 않았는지, 무슨 일이 있어 그레이가 아니라 그녀가 여기 왔는지, 그레이는 언제 오는지 두서없이 물었고, 율은 기가 차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습니다.

 

...정말 모르겠어? 그레이는 실패했어.

 

나는 맥이 탁 풀렸습니다. 일이 이렇게 된 건 다 그 작자 탓이야, 애초부터... 애초부터 그는 그러지 말았어야 했어. 너한테... 이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 이건 다 그레이 잘못이야, 그놈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거야!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거라고! 그렇게 뇌까리는 율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것 같았고, 아니야, 내가 나지막이 중얼거리자 율은 한층 더 사납게 쏘아붙였습니다. 목소리가 싸늘했습니다.

 

라임, 정신 차려. 넌 그레이를 미워하고 원망해야 할 입장이야. 섬사람들을 이런 고립된 곳에서 죽어가도록 방치한 거나, 널 이렇게 만든 거, 전부 다 이론의 여지없이 그레이 책임이야. 그런데 그는 어떻게 했지? 그 책임을 피하고 도망쳤어! 그래 그는 모든 걸 내버리고 도망치는 거 하난 잘하지, 너만한 어린애일 때부터 그가 해왔던 게 바로 그런 거니까, 그가 할 줄 아는 거라곤 오로지 당장 눈앞에 닥친 것들로부터 도망 다니는 것뿐이니까!  라임, 그레이는 비겁한 놈이야. 섬사람들의 목숨을, 아니 너 자신의 목숨을 그런 비열한 놈한테 맡기다니 난 정말이지 믿을 수가...

 

그를 그렇게 말하지 마!

 

...그레이를 그렇게 말하지 마. 박하는 원래가 좀 냉정한 구석이 있었는데 율이라고 다를 리 없었습니다. 나는 율이 그런 식으로 매몰차게 말하는 걸 더는 듣고 싶지 않아서 그녀의 말을 끊었습니다. 의도치 않았는데 내 목소리가 약간 화난 것처럼 들렸습니다. 율의 눈이 놀란 것처럼 동그래졌습니다. 나는 목소리를 차분하게 가다듬고 최대한 침착하게 들리려 애쓰면서 말을 이었습니다.

 

율, 내가 그레이여도 똑같이 했을거야.

 

난 알아. 그레이는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어. 언니는 몰라, 그레이는 날 버리고 달아난 게 아냐! 그레이가 계속 도망치며 살았다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그는 이제 더이상 도망치지 않아, 맞서 싸우기로 했단 말이야. 나와 그렇게 약속했어. 나는 여기 남고, 그레이는 진실을 알리는 데 성공하면 우릴 구하러 오기로. 난 그렇게 하자고 했고 그는 그렇게 하기로 했어. 그래, 그레이는 그래서 그랬던 거야... 설령 언니 말대로 그레이가 결국 실패했어도, 그래서 다시 여기로 돌아오지 못했다 해도, 나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어도, 그건 그레이의 잘못이 아냐.

 

나 그레이를 원망하지 않아. 내가 단숨에 말을 마치자 율은 할 말을 잃어버렸는지 한동안 나를 물끄러미 쳐다만 봤습니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 그녀는 뭐라고 더 하려는 듯이 입을 열었다가, 고개를 내젓고는 한숨만 푹 쉬었습니다. 그레이를 더 욕하고 싶지만 나를 봐서 참는다는 투였습니다. 나는 고맙다는 뜻에서 힘없이 웃었습니다. 그녀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당겨 마주 웃으려고 했지만, 표정이 일그러지는 걸 감추지는 못했습니다. 어쨌거나, 일이 이렇게 된 건... 슬픈 일이야, 슬픈... 그래도 라임, 이제는 섬을 나갈 때가 됐어. 이번에는 그렇게 고집부리지 못할 테지, 거절하지 않을 거지? 율은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습니다.

 

내가 그때 널 억지로라도 데리고 나갈 걸 그랬지.

이제 와 그렇게 생각할 것 없어. 난 안 갔을 거야.

...그랬겠지. 나도 알아.

 

율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율을 원망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율이 미안해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 내가 아무리 이 모든 게 그레이나 율의 잘못이 아니었다고 말해봤자, 그녀가 그렇게 생각할수는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난 뭐라고 하는 대신 율이 먼저 말을 잇기를 가만히 기다렸습니다.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던 율은 뭐가 떠올랐는지 희미하게 웃으며 중얼거렸습니다. 넌 심지어 우리가 헤어질 때 넌 네 이름도 알려주지 않았어... 게다가 아직도. 이젠... 뭍에서도 라임이라고 부를 순 없잖아.

 

내 이름은 세랑이야.

 

난 이제 아무래도 좋았기 때문에 어깨를 한번 으쓱하며 말했습니다. 세랑. 오랜만에 발음하는 이름입니다. 하지만 나는 더이상 이 이름이 불릴 일이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율은 몰랐겠지만, 내 몸상태는 그녀와 대화를 하는 중에도 계속 급격하게 나빠지고 있었습니다. 난 내 상태가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내가 섬 밖으로 나갈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더는 버텨내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자, 퍼뜩 떠오르는 게 있었습니다. 막상 꼭 대답을 들어야 하는 질문을 잊고 있었다니, 이제라도 생각을 했기에 망정이지... 나는 잘 안 나오는 목소리를 쥐어짜내 다급하게 물었습니다.

 

체리는? 어떻게 됐어?

 

박하는 잠깐 머뭇거리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내 대답을 했습니다. 박하가 망설이는 시간은 내게 영원 같았습니다. 꼭  들어야만 하는 대답을 못 듣게 될까봐, 혹시 다른 대답이 나올까봐 초조했습니다. 대체 왜, 뭣 때문에 머뭇거리는 거야! 그러나 내가 그렇게 다그치기 전에 그녀는 입을 열었습니다.

 

...다 나았대.

눈은, 눈은 괜찮대..?

 

어쩌면 체리는 로제 슈가를 그렇게 오래 복용하지 않았으니까, 그 끔찍한 약을 나보단 빨리 중단했으니까, 나와 같은 금단증상이 그애에겐 없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 실낱 같은 그 희망이 나를 문자 그대로 괴롭혔습니다. 대답을 듣기가 두렵습니다. 두 번째 질문엔 박하가 서슴없이 대꾸를 했습니다.

 

그럼. 자기 집, 스스로 찾아갈 수 있을 거래.

 

체리는 언제나 자기가 살고 있는 체리 씨 집의 체리색 지붕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빨간색도 분홍색도 아닌 그 색은 정말 체리색이라고밖에는 부를 방법이 없는 신비로운 색이었습니다. 언제나 집주인이 되는 날을 꿈꾸던 체리. 자기 집이 섬에서 가장 예쁘다고 체리는 말하곤 했습니다. 나는 더이상 그 색을 볼 수 없습니다.  물론 섬을 떠난 체리 역시 다신 그 집을 볼 수 없겠지만, 앞으로 그 애 앞에 펼쳐진 세상은 그보다 훨씬 아름답고 찬란한 색깔들로 가득할 것입니다. 그런 대답을 들은 걸로, 그걸로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다행이다.

 

나는 희미하게 중얼거렸습니다. 내 입에서 나온 말인데, 이상하게도 내 귀에는 먼 데서 나는 소리처럼 느껴졌습니다. 시야가 간유리를 끼운 것처럼 흐려졌습니다. 내 바로 앞에 서 있던 박하가 점차 멀어져 갔습니다. 회색 바다도, 모래사장도, 경계를 알 수 없는 하늘도, 이 섬 자체도 점점 내게서 끝없이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나의 기억은 여기까지입니다.

 

 

*

 

*

 

*

 

 

율이 그레이를 찾아간 건 여러 이유가 있지만, 살기 힘들었던 까닭이 가장 컸다.

 

율은 그레이에게 다시 섬에 돌아가 보자고 했지만, 그레이는 더이상 그 섬에 관계된 일에는 연루되기 싫다고 딱 잘라 말했다. 율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그녀 역시 섬을 떠난 뒤로 섬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그레이도 율도 섬 밖에서는 불구자였다. 그레이는 선천적으로 뛰어난 뱃사람이었기 때문에, 팔다리가 불편한데도 그는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지만 거기서도 그는 괴물 취급을 받았다. 율의 경우는 더 심했다. 누구도 율을 고용해 주지 않았다.

 

사람들은 한때 메이플 피버를 앓았던 사람들의 말은 들어주지도 않았다. 그건 그레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그레이가 섬의 진실을 알릴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섬사람들이 나가지 못하도록 강제하던 초코 씨가 이해되는 부분이었다. 자유는 무겁고, 사탕처럼 달콤하지도 않았다. 율은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었다. 어떤 자선 기구에서 율의 치료를 주선했다. 아무래도 싸구려 치료법이었기 때문에 완치는 거의 기대할 수 없는 수준이었지만 율은 결국 다 나았다. 로제 슈가도 일찍 끊은 편이라, 비록 색맹이 되었지만 시력을 아예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었다. 팔도 그런대로 한 쪽은 정상적으로 쓸 수 있었다. 온몸을 뒤덮은 흉터도 얼굴만은 피해 갔다. 어느 모로 보나 운 좋은 케이스였다.

 

물론 치료 과정은 죽을만큼 고통스러워서 매일매일 뼈가 깎여나가고 혈관이 불타는 지옥 속에 살았지만, 그것도 사실 날수로 따지면 기껏해야 한 달 남짓이었다. 겪을 때는 정말로 영원 같았지만, 시간이 흘러 보니 그냥 한 달은 한 달이라는 걸 율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가끔은 꿈속에서 그 감각이 생생하게 재현될 때가 있었지만 불에 데이는 것처럼 강렬하던 그 감각도 잿빛 세월 속에 차츰 흐려졌다. 먹고사는 게 더 걱정이었다. 메이플 피버를 앓았던 사람은 사창가에서도 받아주지 않았다. 예쁜 얼굴도 별 쓸모가 없었다.

 

그런 열악한 상황에서 메이플 피버 환자들을 위한 자선 기구나 구호 단체가 존재한다는 것은 율이 보기에는 좀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 힘들고 어려운 활동, 사회적으로 무슨 인정을 받지도 못할 활동을 뭣하러 시간과 생돈을 들여가면서까지 하는지, 율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율은 늘 자기 앞가림 하기에도 바빴는데, 그들은 어떻게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을 위해 그런 번거로움을 감수할까?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이득도 없는데 말이다. 하지만 굳이 더 따져 물을 생각은 없었다. 어쨌거나 율이 치료를 받아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건 그들 덕분이었으니까.

 

율은 달아난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달아나길 잘했다는 생각도 해본 적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 버텨나가는 삶이었다. 박하로서의 삶과 율로서의 삶 중 뭐가 더 낫다거나 나쁘다거나 하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율은 그저 자신의 행운, 초라하게만 느껴지는 그 행운에 감사했다. 감사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율은 자신이 회색이 되어가고 있다고 느꼈다. 그것이 설령 인조적인 것일지언정 어쨌거나 섬에 있던 시절 그녀는 민트빛이었다. 그녀의 집도, 옷도, 머리핀도, 성격도, 이름도. 박하. 그 애는 열일곱 살에 죽었다. 남아 있는 건 율 뿐이었다. 실제로는 스무 살이었지만, 죽음 같은 고통과 싸운 그 한 달이 그녀에게는 영원과 같은 것이었기에 측정할 수 없을 만큼의  나이를 먹어버린 여자. 그래서 회색으로 빛바래버린 여자. 박하와는 달리 율이라는 이름엔 색깔도 냄새도 없었다.

 

자신이 그레이를 닮아간다는 것, 아니 자신이 그레이를 닮았다는 것을 깨달은 율은 곧바로 그레이를 찾아 그가 있을 법한 항구 마을을 수소문했다.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실제로 그레이는 섬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을 꽤 했었기 때문에, 그것이 섬사람들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을지언정 그를 이상한 말이나 하고 다니는 정신병자라고 온 바닷가 마을에 소문 나게 했기 때문이다.

 

그레이는 율을 만나자마자 변명부터 주워섬겼다. 율이 그를 탓할 것은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랬다. 율이 그레이를 만났을 때 그는 완전히 질려 있었다. 정신병자 취급에도, 괴물 취급에도, 그는 완전히 자포자기한 상태였다. 사실 율이 보기에 그는 실제로도 약간 돌아 있었다. 전에 섬에서 그를 봤을 때도 그녀는 약간 그런 생각을 했었지만, 그때는 이 정도로 심하지는 않았다.

 

체리는 율이나 그레이처럼 운이 좋지 못했다. 그 아이의 어린 생명은 가혹한 치료를 버텨 내지 못하고 가늘게 떨리다가 결국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뚝 멎어 버렸다.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건 고스란히 그레이의 몫이었다. 치료가 실패한 게 그레이 탓은 아니었다. 하지만 율은 그레이가 실은 스스로를 탓하고 있다는 게, 속으로는 미안해서 죽을 지경이라는 게 느껴졌다. 아닌 척 하고 관심없는 척해도 그런 감정은 도저히 지워지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묻어났다.

 

사실 율이 보기에도 그레이가 노력을 안 한 것은 아니었다. 또 율은 그가 섬을 다시 찾지 않은 것 역시 안 했다기보단 못한 것에 가깝다는 사실을 그레이의 변명을 들으며 알게 되었다. 체리가 치료 도중에 죽고 나서 얼마 후, 계속 진실을 알리려고 시도하던 그레이를 누가 당국에 신고했다. 미친 소리를 하고 돌아다닌다는 것이 그 이유였는데, 덕분에 그는 꼼짝없이 정신병원에까지 갔다 왔던 것이다. 그는 메이플 피버를 앓고 있거나 앓았던 환자들이 대부분 그렇듯 어떤 사법적 보호도 받지 못했다. 당연히 활동은 자유로울 수 없었고 배는 차압당했다.

 

잠깐, 그럼 지금 당신 배는 뭐야?

다시 찾았지.

무슨 돈으로? 선원 월급으로? 거, 뱃놈 주제에 돈 잘 버네.

당연히 아니지. 사실은...

 

그레이는 율에게 자신이 초코 씨 아들의 병원비를 납부했던 일, 그리고 그가 죽었을 때 그 사실을 초코 씨에게 알리지 않았던 일에 대하여 자초지종을 말해주었다. 그가 죽고 난 후 더이상 낼 필요가 없어진 병원비는 어떻게 처치할 수가 없었다. 초코 씨는 사실을 모르니까 초코 씨한테 다시 가져다 줄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 돈을 어쩌지 못해 자기가 일단 챙겨 두었다는 게 그레이의 설명이었지만, 율이 보기엔 영락없이 중간에서 돈을 착복한 것처럼 보였다.

 

...정신병원 들어가기 전에 믿을만한 사람한테 간신히 맡겨 뒀다가 얼마 전에 다시 받은 거야. 율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 그 큰돈을 말도 없이 빼돌려놓고 그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굴다니. 율의 시선에 경멸이 어려 있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그레이는 제 발 저린 도둑처럼 또다시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렇게 쳐다보지 마,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니까. 난 초코 씨한테 아들이 죽었다는 말을 차마 내 입으로 할 수가 없어서 감췄던 것 뿐이야, 넌 내 입장에 처해보지 않아서 몰라.

변명도 잘 하네.

변명 아니야. 그리고 넌 내가 그 돈으로 무슨 부당한 이득이라도 취한 것처럼 나를 탓하는데... 체리가 무슨 돈으로 병원 다녔다고 생각해? 똑똑히 알아 둬, 체리도 그 돈으로 치료를 받았다고! 게다가 배를 되찾고 남은 돈은 전부 예전에 나를 도와줬던 구호단체에 줘 버렸어, 나머지는 전부 다 줘 버렸단 말이야!

정말? 나머지 다?

 

그래! 뭐... 다는 아니지만... 거의 다. 그레이는 멋쩍어하며 덧붙였다. 하여간 그랬어. 그리고 율, 너라도 그렇게 했을 거야.  그레이의 뻔뻔함에 기가 막히기는 했지만 율도 그 말은 내심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수중에 돈이 급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에게 그런 식으로 돈이 들어온다면 율은 물론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연히, 심지어는 기쁜 마음으로 챙겨 두었으리라. 그레이도 이 모든 일을 겪었으니 그정도의 돈은 마음대로 쓸 자격이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지 않을까? 율은 자신이 그레이를 이해한다는 게 싫었다. 애당초 그레이를 찾아온 까닭도, 스스로가 그레이처럼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지 않았던가.

 

어쨌거나 그레이가 배를 다시 찾은 건 고작 6개월 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배를 다시 찾은 그 순간, 더이상 그 알량한 정의감 때문에 섬의 일에 관여하는 것을 아예 관두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그 모든 것에 완전히 넌덜머리가 났고, 그야말로 학을 뗐던 것인데, 사실 이전부터, 그러니까 그가 처음 섬을 탈출할 그 시절부터 그가 이미 그래왔었다는 걸 감안할 때 그다지 놀라운 일도 아니라고 율은 생각했다. 오히려 그 애, 라임에게 그런 그레이를 잠시나마 움직이게 할 만한 저력이 있었다는 게 더 믿기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율은 그레이가 혐오스럽게 느껴졌다. 율은 라임에게 어떤 감정도 없었지만, 어쨌거나 라임이 안됐다. 이런 작자를 믿고 기다리다니.

 

라임이 어리석었다. 율은 자신이 탈출할 때 라임도 탈출해야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 자신이 더 강경하게 말했어도 별로 소용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라임은 그때 자기 생각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으니까. 물론 그 생각이란 정말이지 얼토당토 않은 계획이었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보이는 허점이 너무 많았다. 다함께 섬을 나가자니, 그야말로 꿈 같은 소리였다. 만약 라임이 진실을 알리는 데 성공을 했다 한들, 섬사람들이 모두 뭍으로 와서 치료받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율이나 그레이가 완치된 건 순전히 운이 좋은 탓이었고,  치료를 받더라도 불쌍한 꼬마 체리처럼 고통은 고통대로 받고 결국 죽어버리기가 쉬웠을 터였다. 아니, 숫제 치료를 받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훨씬 컸다.

 

라임은 그런 건 하나도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이 알게 된 작은 진실에만 몰두한 나머지 그 외의 다른 부분들은 깡그리 무시해 버린 채 조금도 계산에 넣지 않았던 것이다. 어린애다운 계획. 어차피 실패로 끝날 계획. 그러니까 라임의 그 어리석음은 아마도 그녀의 나이 어림에서 기인했을 것이었다. 그레이가 배신한 것이 그런 어린애였다는 게 율은 화가 났다. 라임은 어린애라고 쳐도, 그레이는 어른이 아닌가. 어른이 되어서 그렇게 행동해선 안 됐다. 라임의 생각이야 짧다 하더라도 같이 짧게 생각해선 안 됐다.

 

그레이는 라임에게 처음부터 아무 얘기도 해주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면 괜스레 헛된 희망을 주지 말고 라임을 깨끗이 단념을 시켰어야 했다. 아니, 어쩌면 그레이 역시 그 한 가닥 희망을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라임의 어리석음을 좋은 말로 부르자면 순수함이었다. 그레이가 그 순수를 원했다면 좋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율도 생각했다. 자기가 실패했던 일을 라임이 대신 해내길 바랐을 수 있다. 자신이 어린 시절 잃어버린 걸 라임이 되찾아 주리라고 믿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레이는 끝까지 라임을 버려선 안 됐다. 뻔히 실패로 끝날 계획이어도 실패하게 놔둬선 안 됐다. 끝까지, 둘이서 함께 해냈어야 했다. 실패할 계획이어도 성공시켰어야만 했다. 그런데 그레이는 그 중 어느 것도 하지 않았다.

 

그레이, 결국 당신은 그 어린애를 저버렸어.

넌 아니야?

...섬에 갈 거야.

아니, 넌 못할걸.

 

율은 맞다고도 아니라고도 대답할 수 없는 질문에 대답 대신 다른 소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처음부터 하려고 했던 말이기도 했다. 율의 말에 그레이는 기가 차다는 듯이 섬에 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그 어려움의 대부분은 율도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처음엔 냉정한 거절에 그쳤던 그레이는 자기 입장을 고수하는 율에게 종내에는 몹시 화를 냈고, 나가라고 고래고래 소리도 쳤다. 하지만 율은 나가지 않았고, 그 모든 소란 끝에 그레이는 결국 율에게 배를 내줬다.

 

율은 그레이가 처음부터 배를 빌려줄 심산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율이 아무리 매달려봤자 소용없었을 것이었다. 그레이는 배를 빌려 주었다. 그럴 거였으면서도 그는 한참을 소리지르고 소리질렀다. 이 자는 라임에게 나쁜 짓은 나쁜 짓대로 했으면서, 이제는 할 수 있는 게 나한테 가짜로 화내는 것밖에는 남지 않았구나. 율은 위악을 떠는 그레이가 우스우면서도 안쓰럽게 여겨졌다. 그레이가 꼭 자신을 겨냥해서 소리를 지른 것 같진 않아 더 그랬다.

 

내가 배를 침몰시킬 수도 있을 텐데. 그렇게 말하며 율은 씁쓸하게 웃었다. 배는 그레이의 전 재산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무사히 돌아와. 정말 같이 안 가? 못 가지, 내가 그 애 얼굴을 어떻게 봐. 율은 라임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지적을 굳이 하진 않았다. 그리고 그게 전부 그레이 탓이라는 말 역시 하지 않았다.

 

섬에 가는 항로를 율에게 알려주고 배까지 빌려준 것은 아마도 그레이의 마지막 남은 양심일 것이라고 율은 생각했다. 그녀는 바다가 겁나지 않았다. 언제나 운이 좋았던 율이었다. 그레이가 동행했더라면 더 안전했겠지만, 어쨌거나 자신의 운이라면 최소한 난파하지는 않을 거라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율은 자신의 운에 고마워하지는 않았지만 그걸 믿었다. 실은 물에 빠져 죽더라도 아쉽지 않을 것 같았다. 죽고 싶지 않아 섬을 나온 게 아니었어? 율은 기억해낼 수가 없었다. 그런 결정을 내린 건 박하였는데 율은 더이상 박하가 아니었으니까.

 

섬에 다시 발을 디뎌도 율이 다시 박하가 될 순 없었다. 처참한 몰골로 바닷가에 혼자 서 있던 라임은 율을 박하라고 부르는 대신 그레이라고 불렀다. 율은 자신이 그 이름으로 불렸다는 데에 까닭 모를 혐오감과 섬뜩함을 느꼈다. 그래서, 라임이 색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 탓에 자신을 그레이로 착각했단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녀는 마음 한 구석에서 안도했다. 섬사람들이 모두 죽었으리라는 건 배 타고 오면서도 어느정도 예상했던 바였다. 외려 라임이 여지껏 살아남아 버티고 있었다는 것이 더 놀라웠고, 놀라운 만큼 그녀의 끈질긴 기다림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율은 라임에게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다.

 

라임은 자초지종을 간략하게 설명했지만 그건 아예 생략했더라도 하등 상관이 없었을 수준이었다. 율은 처음부터 질문할 필요조차 없었는데, 사실 섬에서 있었던 일이란 너무 뻔한 수순이라 굳이 뭔가 덧붙일 내용조차 없었던 것이다. 라임의 짤막한 설명은 그저 율의 가슴속에서 뭔가가 울컥 치밀어 오르게 했을 뿐이었다. 설명을 다 하고 나서 라임은 그레이가 언제 오냐고 물었다. 마치 아직도, 아직까지도 그가 올 것을 믿고 기다린다는 투였다. 기다렸던 그레이는 오지 않고 율이 온 걸 뻔히 보고서도 여전히 그레이를 굳게 믿고 있다는 양, 아무것도 잘못되지 않았고 그저 아직 때가 되지 않았을 뿐이라는 양 구는 라임의 태도에, 율은 자기 몸속을 태우는 듯한 불길 같은 그 감정을 분노라고 불러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누구를 향해야 하는지는 알기가 어려웠다. 허공으로 쏘아진 화살이 어딘가에 꽂혀야 멈추듯 분노도 그랬다. 대상 없는 분노는 갈길을 잃고 공중을 떠돌다 결국 자신을 향할 뿐이라는 사실을 율은 잘 알았다. 율은 더이상 화살에 맞는 일이 지긋지긋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레이를 욕했다. 사실 율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잘 몰랐다. 그저 쏟아낼 뿐이었다. 터진 눈물을 중간에 멈출 수 없는 것처럼. 하지만 결국 그녀의 말을 멎게 한 것은 라임의 한 마디였다. 율, 내가 그레이여도 똑같이 했을거야.

 

나 그레이를 원망하지 않아.

 

율은 기가 찼다. 어떻게 널 이렇게 만든 사람 편을 들 수가 있어? 너는 어떻게 그런 말을 해? 넌 어떻게 그런 놈을 용서해? 아니 그를 미워한 적이 있기는 있어? 어떻게? 같은 대답을 묻는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수없이 이어졌다. 율이 그 중 하나를 입 밖에 내려던 찰나, 율은 불현듯 라임이 그레이를 미워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라임은 그레이를 미워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라임은 그레이를 미워하지 못했다, 그레이를 미워했다면 라임은 오래전에 죽었을 것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율은 결국 라임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어쩌면 이 경우에도 못했다는 말이 더 적합한지도 몰랐다. 율은 고개를 젓고 말았다. 라임이 그런 율을 보자 고맙다는 듯이 희미하게 웃었다. 율도 억지 웃음을 지어 보려고 했지만 스스로도 부자연스럽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 불편했다. 율은 이제 너무 후회가 됐다. 네가 그레이를 원망하지 않는다면, 이건 다 누구 잘못일까? 난 어쩌면 여기 좀더 일찍 와봤어야 했어, 내가 몇 달만 일렀어도.... 아니, 난 내가 섬에서 처음 떠나던 그때 널 데려갔었어야 했어... 그랬더라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라임 네가 어떻게 됐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섬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야.

 

라임이 여기 없었다면 이렇게는 안 됐겠지, 그건 사실이야... 하지만 섬이 이렇게 된 게 라임의 책임이라고 말하는 건 너무 가혹해, 그렇지만 이게 누군가의 책임이기는 할 것 아니야. 섬이 만들어진 것부터가 잘못이었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섬사람들 대부분은 여기서 더 잘 지냈어! 나만 해도 여기를 나가서 더 나아진 게 없잖아. 섬을 나서도 섬을 떠날 순 없어. 살아 남았어도 섬을 떠날 수 없었지만, 여기 남아 죽음을 맞은 사람들 역시 아직도 섬을 떠나지 못했어... 어떻게 해야 했을까? 난 끝내 답을 모를 거야, 하지만 이게 처음부터 정답이 있는 문제이기는 했을까? 분명한 건 이거 하나야. 그렇게나 섬을 떠나고 싶어했던 라임을 여기 내버려 둔 건 전적으로 내 잘못이야. 내가 그때 널

 

억지로라도 데리고 나갈 걸 그랬지.

 

그렇게 생각할 것 없다는 라임의 대꾸가 율에게는 비수처럼 꽂혔다. 그래, 어차피 난 네 마음을 돌릴 수 없었을 거야, 그랬겠지. 그랬을 거라고 나도 생각해. 그때도 그렇게 생각해서 널 붙잡지 않았던 거니까. 하지만... 그러면 내 마음이 편해질까? 네가 나를 원망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때 내가 하지 않은 일이 후회되지 않는 건 아니야. 네가 정말 그랬을까? 내가 끝끝내 붙들었다면 넌 어쩔 수 없이 나와 함께 배에 오르지 않았을까? 내가 좀더 나를 굽히고 애원했어도 정말로 네가 안 가겠다 우겼을까? 난 확신할 수가 없어, 하지만 이건 아무리 의심해봤자 검증해 볼 수는 없는 일이지, 이미 지나가 버렸잖아. 율은 라임이 뭐라도 말해 줬으면 했다. 하지만 라임은 별로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였고, 하는 수 없이 율이 먼저 말을 걸어야 했다.

 

너무 늦었지만, 이제라도 라임은 섬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어쩌면 라임도 억세게 운이 좋을지도 몰라, 그래서 자기 삶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이제 라임이란 이름은 더 부르고 싶지도 않아! 섬 밖에서도 난 박하라는 이름을 떠올리곤 했지, 이미 죽어버린 박하에 대해 생각하곤 했어. 어쩌면 그것 때문에 내가 섬에서 놓여나지 못하는 건지도 몰라, 아직도 그레이의 본명은 아무도 알지 못하지. 왜냐하면 그에게는 더이상 본명이랄 게 없으니까. 그레이는 정말 그 이름대로 되어버린 거야. 하지만 혹시 알아? 라임은 다를지도 몰라. 라임이란 이름을 깨끗이 버리고 다시 제 이름으로 살 수 있을지도 몰라. 이 지긋지긋한 병으로부터 벗어나, 섬으로부터 벗어나서. 라임 너는 우리가 헤어질 때 네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지... 그때 넌 아직 섬사람이었으니까. 이제 정말 섬에서 나갈 때가 됐으니까 말해 주렴. 네 진짜 이름.

 

뭍에서도 라임이라고 부를 순 없잖아.

내 이름은 세랑이야.

 

세랑... 율은 그 이름을 속으로 되뇌이며 잠시동안 그녀가 정말로 그 이름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하지만 율의 눈앞엔 이미 너무 쇠약해진 라임이 있을 뿐이었다. 율이 보기에도 라임은 간신히 버티고 서 있었다. 세랑 역시 이제 한계가 왔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달았는지, 그녀는 온 힘을 다해서 율에게 체리의 안부를 물었다. 체리. 체리가 어떻게 되었냐고. 율은 잠시 생각했다. 그래... 체리는 라임의 마지막 남은 희망이겠지. 그래서 지금, 죽음을 눈앞에 둔 네가 체리의 안부를 내게 묻는 거야. 난 대답을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어. 대답을 하더라도 진실을 말할 수도 있고, 거짓말을 할 수도 있어... 하지만 내가 어느 쪽을 택하든...

 

아, 이런 식으론 결정할 수가 없어. 하지만... 이건 아까 네가 네 입으로 말한 거야. 라임, 네가 그레이였다 하더라도... 그와 똑같이 했을 거라고. 그럼 나는? 그 길로 생각을 마친 율은 천천히, 느릿느릿, 거짓말을 했다. 체리는, 다 나았대... 놀랍게도 전혀 티가 나지 않는 거짓말이었다. 눈도 잘 보인대... 박하는 원래 감정을 잘 숨기는 편이었다.

 

다행이다.

 

율은 라임의 얼굴에 안도감이 번지는 것을 보았다. 율이 거짓말을 하면서 간절히 보고 싶었던 바로 그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 표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율이 무슨 말을 더 하려던 찰나, 라임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져 버리고 말았다. 율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곧장 눈치챘지만, 그래봤자 율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라임은 괴성을 지르며 몸부림을 치다가 일순간 몸이 탁 꺾어져서는 모래바닥에 쓰러졌다. 라임의 조그만 몸뚱어리는 쓰러진 채로도 경련을 멈추지 않았다. 율이 뒷걸음질 친 것은 순전히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겁먹은 표정의 율을 향해 라임이 기어왔다. 라임은 마구 떨리는 손으로 율의 발목을 잡았다. 율은 깜짝 놀랐다. 라임에게 그런 힘이 대체 어디서 생기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라임의 말을, 율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다 너 때문이야. 그때 혼자 도망친 너 때문에! 너도 섬에 남았어야했어그래서너도이렇게아팠어야했어너도이섬에서나처럼이렇게죽었어야했어다른섬사람들처럼죽었어야했어이렇게온몸이타들어가면서고통에몸부림치다비참하게죽었어야했어나쁜년다너때문이야너때문에이렇게된거야난이렇게돼선안됐는데난살았어야했는데다너때문에이렇게된거야너도그레이하고똑같은년이야넌살자격이없어넌배신자야배신자배신자배신자...

 

그녀가 율에게 퍼부은 말은 말이라기보단 저주에 가까웠고, 사실에 가깝게 말하자면 그녀가 뭐라고 말을 했다기보다는 악을 썼다고 하는 게 훨씬 정확했다. 붙박인 듯이 서 있던 율은, 문득 발치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라임과 눈이 마주쳤다. 그 눈빛은 마치... 몸을 관통하는 듯한 그 느낌은 마치... 순간 율은 오싹해져서 자신의 발목을 붙잡은 손을 떼어내고는 배를 향해 냅다 뛰었다. 모래톱에 쓰러져 발작하는 라임은 여전히 욕설을 퍼붓고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지만 율은 개의치 않았다.

 

율은 배를 띄우면서도, 자신이 결코 회색으로 빛이 바랜 섬으로부터, 처참한 죽음을 맞은 어린 라임으로부터, 이 모든 것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저것이 그레이를 탓하지 않는다던,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던 라임의 본심일까? 아니면 그저 타는 듯한 고통 탓에 아무 말이나 주워섬긴 것에 불과할까? 어느 쪽이 옳건 간에, 저 끔찍한 비명은 앞으로 어딜 가든 나를 따라다닐 거야, 세랑이라는 이름이 평생 내 주위를 떠돌 거야, 내가 죽는 그 순간까지! 저주나 유령처럼, 섬사람들의 손목에 새겼던 낙인처럼, 단풍 열병을 치료하면서 온몸에 남은 흉터처럼!

 

해안선이 멀찍이 보이도록 라임의 비명이 귓가에서 생생하게 들렸다. 율은 거기에 맞서 같이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목이 찢어질 때까지. 귓속에서 끝없이 메아리치는 소리에 고막이 불에 타는 것처럼 아팠다. 비참했다. 뭐하러 여기 다시 왔을까. 차라리 여기서 죽어버리면 이 소리도 사라질지 몰라. 사방에는 파도가 거셌지만 배는 좀처럼 침몰할 것 같지가 않았다. 율은 늘 운이 좋았다.

 

배신자! 배신자! 배신자! 라임이 질러대는 비명에 귀가 먹먹했지만, 한편으로 율은 열일곱 살이 되던 그해 여름, 함께 섬에 남자고 제안하는 라임을 두고 혼자서 도망치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건 섬을 떠난 뒤로 처음 드는 확신이었다. 확신이 들자, 비록 귀에서 울리는 소리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정신은 한층 맑아졌다. 율은 멀쩡한 쪽 손을 귓가에 가져가다가, 이내 배의 방향키를 더 세게 움켜잡았다. 하도 경황이 없어 배를 아무렇게나 몬 탓에,  이미 그레이가 알려준 항로를 한참 벗어나 있었다. 풍랑이 점점 거세지는 것 같았지만 율은 침착하게 배를 몰며 생각했다.

 

내게 한번 더 그놈의 행운이 따라줘서, 내가 이 바다를 무사히 벗어나게 된다면, 불에 데이는 것 같은 이 감각이 흐려지는 날이 있을까. 아마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라임, 없다 해도 난 상관없어! 난 상관 안 하니까... 이미 색맹이 되어버린 율의 눈앞에, 집채만한 파도가 시퍼렇게 넘실대고 있었다. 율이 뒤로 한 섬을 아예 집어삼킬 수도 있을 만큼 큰 파도였다. 율은 아직 살아있었다. 여전히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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