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문학상(시 분야) 당선작]

앵무새가 있던

이민지(철학 · 17)

 

그때는

어디에나 있다

 

외부인의 발걸음은 떠받쳐 주지 않는 정글

태고의 숲 깊숙이서 인디언 주술사들은

피어오르는 모닥불 주변에 둘러앉아

담뱃대를 돌렸다 아마도 무슨 영혼들이 사는

다른 세상을 보기 위해서

 

해질녘 너와 함께 걷던 거리

우리는 파이프도 나눠 피웠고

매캐하고 자욱한 연기 너머로 우리가 사는 이 도시는

걸핏하면 제 모습을 잃어버리고

나는 너와 같은 환각 속에서

 

녹색으로 반짝이는 만화경 속에서

아열대의 바람은 불어와 너의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단단하던 걸음이 허공에 붕 떠오르는데 거짓말처럼

불안하지는 않다 너가 떠올라서

콘크리트 나무를 기어오르는 울창한 식물 덩굴들

무성하게 우거진 나뭇잎 사이로 저물어가는 오렌지 하늘

사방에서 플래시처럼 색색의 꽃송이는 터지고

우리가 걷는 걸음마다 하나 둘씩 켜지기 시작하던

약간 이른 네온 사인이나 가로등처럼

자동차의 백라이트나

헤드라이트처럼 빛나던 정글에서

 

영혼은 한 마리 앵무새처럼 너의 어깨 위에 앉아 있었다

 

내 말이라면 어김없이 대답하던 앵무새

앵무새의 구강 구조가 나랑 비슷하다 그래서

그래서라고 과학자들이 말했다 나는 듣지 않았다

그들은 삭막한 도시에서 살고 어딜 가든 차를 몰며

주술이나 영혼 같은 건 없다고 실험을 통해 단정짓고

정글에 가본 적도 없는 파이프는 더더욱 피워본 적 없는

그들은 너를 알지도 못한다

어쨌거나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면

앵무새는 사랑한다고 답했다 그건 사실 그래서

 

내가 안녕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앵무새도 그렇게 말하지 않아서

 

앵무새가 너의 어깨 위에 앉아 있었다 날개를 잘린 채

저 멀리 날아가지 못하도록 깃털을 자르는데 그 깃털은

가장 크고 길며 부드럽고 피처럼 붉다

깃털이 다시 자랄 때마다 나는 가위로 그걸 자른다

하지만 피는 한 방울도 흐르지 않는다

가위를 댈 때마다 화려한 깃털은 툭

시들기도 전에 목이 잘린 붉은 꽃송이처럼

사실 나는 그 깃털을 매번 빠짐없이 전부

주워 모았다 아닌 척 하면서

 

하지만 정글에선 모든 게 꽃이며 덩굴이라

전깃줄 있어야 할 자리에는 나무 줄기만 무성하고

활짝 핀 시계꽃에는 실제로 작동하는 시계침이 없었다

깃털이 자라는지 마는지 그저 시간이 멈춘 줄로 알았다

무성한 덩굴은 가위의 날을 휘감아 잎새로 뒤덮었고

난 가위의 사용법을 잊어버려서

 

날아가는 앵무새를 보고 싶었는지도 모르지만

녹색 파란색 빨간색 마치 신호등처럼 거기서

멈춰 있으라고 경고하는 듯 화려하게 반짝이는 깃털

정글의 일몰 풍경은 내겐 마치 떠나가는 앵무새 같고

수다스럽던 노란 부리 어느새 다물어져 있다

마치 어느 순간부터 너의 입매가 그랬던 것처럼 실은

네게 날개가 자란다 해도 날아가지 않을 거라 생각해서

 

정글에선 모든 게 원래보다 크고 빨리 자라며

실제보다 가까워 보인다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으니 주의

도시의 자동차 백미러는 경고했지만

그런 충고는 정글에선 전혀 도움이 안됐다

착각하기 쉬운 정글 안에서 길을 잃고

내 시야를 일그러뜨리는 환각 너머 너는

내게 보였던 것보다 훨씬 멀리서

 

뭣하러 해적들은 늘 앵무새를 어깨에 얹고 다니는지

어쩌다 정글 한복판에서 엉뚱하게 해적을 만났는지

보물이 있는 곳이라면 해적은 있기 마련인지

잎사귀들만이 파도치고 너의 눈동자 금화처럼 빛나던

정글 한복판에서

 

도시의 중심에서

앵무새는 날아가 버렸다

 

이글거리는 정글의 태양에 낮 동안 데워진 아스팔트

그 위로 아지랑이만 조용히 피어오르던

신기루 같던 도시 이윽고 어둠에 완전히 잠기고

까맣게 불씨가 꺼진 파이프에서도

더이상 마법적인 연기는 피어나지 않는데

나는 여전히 걷고 있다 도시의 땅은 고맙게도

혼자 걷는 이의 발걸음을 떠받쳐 준다 슬프게도

꽃송이 떨어진 자리에 가로등만 환한데

매연 섞인 미지근한 바람 나를 스쳐 지나가고

천박하게 번쩍거리는 도시의 소음 속에서

 

날더라도 정글의 오렌지 해를 향해 날았어야 했던

앵무새는 스모그 낀 하늘로 날아가 영영 사라졌는데

그리고 다신 돌아오지 않는데

개미 떼처럼 도로를 가득 메운 자동차 불빛

잠들지 않은 빌딩 창문마다 켜져 있는 형광등

저 무수한 불빛 불빛들은 꽃처럼 보이지가 않는데

이 도시 어딘가에 아직도 너가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언뜻 보면 참 정글 같은 이 도시

 

그 앵무새가 너의 영혼이 맞기는 했을까

어쩐지 내 말만 줄곧 따라하던 그 앵무새

앵무새가 제 목소리로 울 때는 늘

찢어지는 소리로 울었다

 

그 소리에 정글의 공기가 갈라졌고 그 틈새로 나는 늘

도심의 메마른 풍경을 볼 수 있었다 거기에는

시들 꽃 같은 것도 아예 처음부터 없고

회색 콘크리트 벽면에 비치는 불투명한 노을

우리가 걷고 있는 곳이 정말은 정글이 아니란 게

너무나도 분명했지만

그저 불빛만이 휘황했지만

앵무새가 너의 어깨 위에 앉아 있던 그 때

파이프 연기 나눠 마시던 그때는 도시의 그 빛이

살짝 열린 보물상자 틈으로 새어 나오는

오래 전 해적들이 꼭꼭 숨겨 둔 금화의 빛과 같아

그 도시가 정글이라 해도 믿을 것처럼

환하게 핀 꽃이라고 말해도 믿을 것처럼

그 불빛들이 아름답다고 느껴져서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추한 불빛들을 바라보며

앵무새가 있는 때를 되새긴다 오직 그것만 달랐던 그때

커다란 꽃들은 활짝 폈을 땐 너의 얼굴마저 완전히

가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건 좀 기형적으로 컸다

살아있는 꽃이 그렇게 크게 자랄 리 없었다

자연의 색은 그렇게 촌스러운 원색일 수 없었다

그게 조화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이제서야 한다

아무련 향기도 없고 며칠만 방치해도 먼지가 쌓이고

금세 칙칙한 색깔로 변해 버려서

누구나 가짜라는 걸 알아볼 법한 싸구려 조화

생명이 없는 플라스틱으로 꽃을 만드는 과학자들

마치 잘라 낸 깃털들처럼

 

나는 깃털을 둥글게 모아 꽃처럼 만들어 본다

그 꽃은 유리 조각 대신 플라스틱만 들어간 만화경처럼

조악하고 조잡했다 사진 촬영을 위한 정글 세트처럼

정글엔 못 가도 기념사진을 찍어야겠다는 과학자를 위한

세트장처럼 덩굴 무늬 벽지와 알록달록한 가짜 꽃들과

뜨겁지 않은 모닥불과 불 없는 파이프는 그렇다 쳐도

도대체 정글이라면서 엉뚱하게 놓인 해적 보물상자 소품

그리고 방부 처리된 깃털과 유리눈 박힌

박제 앵무새로 꾸며진 세트장을 보고

나는 정말 아름답다고 마치 진짜 정글에 간 과학자처럼

혼잣말을 지껄이고 있었다 자기가 뭐라 말하는지 모르는

앵무새처럼 해 저무는 도시에서

 

땅거미 진 거리 불빛으로 환하다

그 불빛들

앵무새 하나 있다고 별반 달라질 것도 없었던

 

그때가

어디에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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