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시트콤 드라마 『굿 플레이스』

 

당신이 생각하는 사후세계는 어떤 모습인가. 완벽한 선이 존재하고, 영원한 삶이 보장되는 유토피아는 과연 이상적일까.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굿 플레이스는 사후세계에 관한 흥미로운 상상을 철학적으로 풀어냈다.

 

선과 악 사이,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굿 플레이스의 사후세계는 굿 플레이스배드 플레이스로 나뉜다. 주인공 엘레너는 생전 사기꾼이며 이기적이었지만, 죽은 후 좋은 사람만이 갈 수 있는 굿 플레이스로 가게 된다. 자신이 착오로 인해 굿 플레이스에 왔다는 것을 알아차린 엘레너는 끔찍한 배드 플레이스를 피해서 이곳에 남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소울메이트인 윤리학 교수 치디의 수업을 들으며 진짜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굿 플레이스에 의문의 오류가 발생한다. 굿 플레이스의 설계자인 줄 알았던 마이클은 사실 악마였으며, 그가 굿 플레이스를 가장한 배드 플레이스를 설계해 주인공을 정신적으로 고문하려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엘레너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며 마이클의 새로운 배드 플레이스는 실패한다.

마이클의 배드 플레이스에서 오류가 발생한 이유는 설계 시에 인간의 발전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악하다는 마이클의 믿음과 달리, 엘레너는 마이클이 설계한 세계에서 숱한 오류를 겪으며 과거를 반성하고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했다. 이를 계기로 마이클은 인간이 노력을 통해 선해질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이후 두 사람은 인간의 발전 가능성을 토대로 사후세계를 결정하는 점수 체계를 바꾼다. 기존의 점수 체계는 살아생전의 행동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해 굿 포인트와 배드 포인트를 부여하고, 굿 포인트가 많으면 굿 플레이스에 가도록 설계돼있었다. 그러나 최근 500년 동안 단 한 명도 굿 플레이스에 가지 못했다. 기존의 체계는 현대의 복잡성과 고정되지 않은 도덕성을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령 과거엔 토마토 한 개를 사도 큰 점수 변동이 없었지만, 현대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유해 살충제 사용, 노동착취, 지구온난화에 기여한 셈이 돼 배드 포인트를 받는다. 이에 두 사람은 기존의 점수 체계에 재평가 시스템을 도입한다. 내세에 대한 평가만으로 죽음 이후의 운명을 결정하지 않고, 마이클의 가짜 굿 플레이스를 활용해 스스로 나아질 기회를 주는 방식이다.

 

그렇지만 그 그래프가 보여주지 않는 것이 딱 하나 있습니다.
과연 저 사람이 내일은 어떤 사람이 됐을까?”

 

인간의 선과 악이 고정돼있는 존재인가. 이 철학적 질문에 굿 플레이스는 인간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발전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다원화된 현대사회에서 구성원들은 복잡하게 얽혀 있고, 관계의 양상들도 다양하다. 선한 의지에서 비롯된 행동이더라도 타인에게는 해가 될 수 있는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선악의 개념은 모호해진다. 굿 플레이스에서는 사후세계에서의 재평가를 제안한다. 현실 세계의 복잡성을 배제함으로써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발전 가능성을 평가하는 것이다.

오늘의 우린 어제와 다른 사람이다. 어제의 내가 잘못된 선택을 했더라도 오늘의 나는 잘못을 바로잡고, 역경 속에서 성장할 수 있다. 엘레너를 비롯한 네 명의 인간과 악마 마이클, 로봇 제닛도 고난을 마주하며 함께 반성하고 성장한다. 굿 플레이스에서는 ()’어제보다 더 나아질 수 있는 가능성이라 정의한다.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과 또 한 번의 기회가 있다면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다고 응원하면서 말이다.

 

죽음은 우리 삶을 특별하게 한다

 

새로운 평가 제도를 통해 세상을 구했다는 공로로 엘레너와 마이클은 진짜 굿 플레이스에 가게 된다. 그러나 꿈에 그렸던 그곳에는 또 다른 허점이 존재했다. 영원한 완벽 속에서 모두는 감정을 잃어버린 좀비처럼 공허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모든 것이 가능한 곳에서의 영원한 삶은 결코 특별하지도, 의미 있지도 않았다. 엘레너는 누구나 꿈꾸던 유토피아도 영원한 시간 앞에선 행복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무기력해진다. 결국 그녀는 사람들에게 무()로 돌아갈 수 있는 선택권을 주며 문제를 해결한 후 영겁의 세월을 살고 나서 자의로 소멸한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알고 있기 때문에 조금 슬픔을 가지고 살아간다
하지만 그것을 알기 때문에 인생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영원한 행복 앞에서 엘레너와 주인공들은 목표를 잃고 방황하며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렸다. 엘레너는 이 위기의 해답을 실존주의* 철학에서 찾는다. 실존주의의 대표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인간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언젠가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자각하고 자신의 죽음을 직시할 때 비로소 본래적인 실존을 찾을 수 있다고 역설한다. 엘레너가 무한함을 얻은 순간 끝에 대한 불안과 삶의 목표가 사라지고, 결국 삶의 의미까지 잃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죽음이란 선택지는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형성하고 삶의 방향을 자각할 수 있는 기회다.

현실 세계에서 죽음이란 우리가 어찌할 도리가 없는 필연적인 사건이다. 모순적이게도 우리는 삶의 종말을 통해 삶의 의미를 얻는다. 죽음은 우리의 삶이 특별한 이유다. 이를 자각하는 순간 굿 플레이스의 의미는 새로워진다. 『굿 플레이스』의 결말은 완벽한 선이 존재하며, 영원히 살 수 있는 유토피아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린다. 동시에 인간은 유한한 시간 안에서 발전하고 성장해나가기에 행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치디는 그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할 충분한 시간을 갖는 것이 이상적인 굿 플레이스의 모습이라고 이야기했다. 어쩌면 지금 우리는 굿 플레이스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드라마를 끝까지 보기 전까진 누구나 굿 포인트를 쌓아 천국에 가고 싶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굿 플레이스는 모든 것이 이뤄지는 유토피아적 공간이 아니다. 인간은 완전하지 않다. 선과 악이 공존하는 불완전한 존재다. 그럼에도 더 나은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이를 토대로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발전해나간다. 엘레너와 함께 선과 악, 삶과 죽음에 관한 질문에 답하며 당신만의 굿 플레이스를 상상해보는 건 어떨까.

 

*실존주의: 19세기의 합리주의적 관념론이나 실증주의에 반대하며 개인으로서의 인간의 주체적 존재성을 강조하는 철학

 

글 홍지혜 기자
gh4784@yonsei.ac.kr

<자료사진 IMDb 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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