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착취로 봐야 보인다…‘위안부’를 여성으로 읽는 방법

지난 91일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은 평화의 소녀상을 둘러싼 인파로 북적였다.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제1507차 정기 수요시위는 릴레이 1인 시위 형태로 1시간 동안 이어졌다. 시위를 주관한 한살림서울소비자생활협동조합 한인숙 이사는 일본은 전쟁범죄에 응당한 책임을 지고 피해자에게 사죄와 배상을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의기억연대(아래 정의연) 이나영 이사장은 “91일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인권선언문을 기념하는 여권통문(女權通文)의 날이라며 오늘을 여성 인권의 중요성을 환기하고 실천하는 날로 삼아 우리 사회의 구조적 성차별과 여성혐오를 뿌리 뽑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9월 1일 종로구 일본대사관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이뤄진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 정의기억연대 이나영 이사장이 기자회견에서 주간보고를 하고 있다.
▶▶지난 9월 1일 종로구 일본대사관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이뤄진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 정의기억연대 이나영 이사장이 기자회견에서 주간보고를 하고 있다.

 

민족의 아픔 안에서도
위안부여성 인권 문제

 

지난 199118일부터 이어진 수요시위는 일본군 위안부문제를 사회적으로 공론화하는 데 기여했다. 이 이사장은 수요시위는 지난 30년간 시민들이 함께 쌓아 올린 역사이자 여성의 관점에서 평화와 인권을 지향하려는 노력이라 설명했다. 1990년대는 37개 여성단체가 합심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아래 정대협)를 발족하고 고() 김학순 할머니가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임을 증언한 시기이기도 하다. 동북아역사재단 박정애 연구위원은 당시 김 할머니의 증언은 일본군 위안부문제가 민족 차별과 여성 차별 속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환기했다“1990년대 이후 여성의 시선으로 위안부문제를 재구성해야 한다는 인식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여성의 시선에서 일본군 위안부문제를 바라보려는 시도는 여러 차례 굴곡을 겪었다. 민족 차별을 강조하는 동안 여성 차별이라는 맥락을 놓쳤다는 비판이 나왔다. 성노동, 성매매가 아니라 성착취를 저술한 박혜정 연구가는 정의연의 전신인 정대협을 비롯한 그동안의 운동은 일본군 위안부문제가 유엔과 국제 법정에서 다뤄지도록 이끌었다면서도 일본의 사과와 배상을 받는 데 집중되다 보니 논의가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으로 흐르며 여성 인권 문제로 접근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여성문화이론연구소 배상미 연구위원은 논문 위안부 담론의 페미니즘적 전환의 필요성에서 한국의 위안부담론 지형에서는 다양한 위안부의 경험이 논의되지 못하고 일본 제국주의 피해자로서의 표상만이 강화됐다고 주장했다.

일본군 위안부운동에 다층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정의연에서 활동한 백시진 연구가는 민족주의가 단순히 일본을 비난하거나 피해자를 단편적으로 재현하는 방식으로 해석되는 점은 문제라면서도 당시 일본 제국이 인종과 민족에 따라 점령지를 분류하고 차별했다는 점에서 민족주의적 맥락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이 이사장은 운동 초기부터 여성의 관점에서 일본군 위안부문제를 바라봐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해서 제기됐지만, 우리 사회가 이를 간과한 채 여성계의 노력을 민족주의적으로 해석한 부분이 있다고 지적했다.

성착취와 제국주의적 폭력이라는 맥락이 복잡하게 얽힌 일본군 위안부운동은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전문가들은 일본군 위안부운동의 여성주의적 복원이 새로운 논의의 틀을 제시할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이 이사장은 논문 일본군 위안부운동: 포스트식민국가의 역사적 현재성에서 “‘위안부운동은 역사 속에 묻혀 있던 여성의 경험을 여성의 관점에서 재구성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박 연구위원은 “1990년대 이후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음에도 주류 독해는 여전히 일본군 위안부문제를 여성의 관점에서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여성의 삶을 치열하게 분석한 역사적 지식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공창이냐 아니냐여성없는 논쟁
자발이냐 아니냐역사적 상상력 부족

 

일본군 위안부피해자의 삶을 여성의 시선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위안부제도와 공창제*의 관계를 묻는 것에서 출발한다. 박 연구위원은 논문 일본군 위안부문제의 강제동원과 성노예에서 공창과 위안부의 관계는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자유롭게 논하기 힘든 주제라며 일본 우익 세력이 ‘‘위안부는 공창이라 자발이라는 프레임을 내걸면 한국 사회는 ‘‘위안부는 공창이 아니라 강제라는 전문가의 발언을 보도해 여론을 형성했다고 주장했다. 일본군 위안부문제가 공창=자발’, ‘비공창=강제라는 이분법 안에서 다뤄졌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공창제에 따라붙는 자발성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박 연구위원은 본인의 의사에 반해 동원된 여성이 피해자라면, 스스로 선택한 사람은 피해자가 아닌 셈인데, 당시 아시아 태평양 식민지 여성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구성할 수 있었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자발성을 따지는 건 여성의 삶에 대한 상상력이 너무나도 부족한 것이라며 논문에서 강제동원이 아니어서, 돈을 받은 사례가 있어서 일본군 위안부가 성노예가 아니라는 주장은 국제법상 노예제 개념에 어긋난다고 부연했다. 백 연구가는 공창제를 자세히 검토할 만한 공론장이 부족한 상황에서 공창이냐 아니냐를 묻는 건 일본군 위안부문제의 책임을 피해자 개인에게 돌리는 것이라며 이러한 이분법은 동원 방식에 내재한 폭력과 모순을 논의에서 지워버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공창제는 흔히 합법적인 성매매를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박 연구위원은 일본군 위안부제도와 공창제의 관계를 보려면 가부장제와 인신매매라는 시대상을 총체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논문에서 공창제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 풍기 단속과 성병 예방을 위해 국가가 성매매를 관리하는 시스템이라 설명했다. 여성학자 야마시타 영애는 저서 내셔널리즘의 틈새에서에서 근대 일본의 공창제는 유곽(遊廓)을 설치해 영업 허가를 받은 여성에게 매춘과 장소를 제공하는 대좌부업자(포주)의 영업을 인정하는 형태였다공창제에는 남성의 매춘을 당연한 것으로 보고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간주하는 남성 중심적 성관념이 자리 잡고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군 위안부제도와 공창제는 국가가 여성의 몸을 통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박 연구위원은 공창제는 공권력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성매매를 관리하려고 시행한 제도라며 남성 노동자와 군인들의 성병을 관리해 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점에서 위안부제도와의 연속성을 갖는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연속성은 일본군 위안부의 피해자성을 자발성 여부로 판단하는 이분법에 질문을 던진다. 박 연구가는 일본군 위안부제도는 일본이 당시 본토에서 확립해 조선에 들여온 공창제 유곽을 원형으로 하고 있다유곽에서 성착취를 당하던 여성들이 가장 먼저 위안소로 팔려 갔으며, 조선에서 동원된 위안부중에는 유곽을 거치지 않고 바로 끌려간 여성들도 있지만 유곽으로 팔렸다가 재인신매매된 여성들도 많았다고 설명했다. ‘팔려 간여성과 끌려간여성 모두 국가의 통제 아래 일본군 위안부가 될 수 있었다는 지적이다.

이때 일본군 위안부제도와 공창제는 여성에 대한 성착취를 전제한다. 박 연구가는 위안부는 여자다에서 강제된 성착취와 그렇지 않은 성매매가 있다는 관념을 버려야 한다남성 지배 체제에서 여성이 성적으로 동원되고 이용되는 구조를 직시해야 일본군 위안부제도를 역사의 흐름 속에서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다시함께상담센터 김민영 소장은 성매매는 모든 성착취의 집약체이자 가장 극단적인 모델이라며 여성들을 기망해 성착취 산업에 발을 들이게 하는 구조에서 여성 개인에게 어떻게 자발과 비자발을 물을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성착취라는 렌즈로 당시 여성의 삶을 바라보면 남성 중심 사회에서 일본 제국과 협력한 성착취 산업 전반에 책임을 물을 수 있다. 멜버른공과대 국제도시사회학부 캐롤라인 노마(Caroline Norma) 교수는 저서 위안부는 여자다에서 전쟁이 깊어지며 일본군은 민간 성착취 산업으로부터 운송망, 기반시설, 사업 노하우를 받아 직접 위안소를 세우고 운영했다“1930년부터 일본 본토의 성착취 산업이 전시 동원됐던 건 역사적으로 포주와 일본군이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기 때문이라 지적했다. 박 연구가는 성착취는 남성 중심 사회가 여성을 지배하고 취약하게 만드는 구조에서 발생한다이는 여성 인권과 여성 폭력 문제로 연결된다고 덧붙였다.

일본군 위안부문제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성착취 구조와 무관하지 않다. 박 연구가는 일본군 위안부제도는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20세기 동아시아 민간 성착취 제도에 큰 영향을 미쳤다한국은 625전쟁을 거치며 한국군 위안부와 미군 위안부를 조직했으며 미군기지 중심의 기지촌은 한국의 성착취 집결지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백 연구가는 역사적으로 성착취는 성을 매개로 여성을 인신매매하거나 노예화하는 등 여성의 권리를 제약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이는 일본 제국이 실시한 공창제와 일본군 위안부문제가 결합해 1970년대 기지촌을 거쳐 여전히 한국 사회에 남아있는 문제라 지적했다.

 

위안부와 공창 잇는 성착취
역사의 문제, 폭력의 문제

 

일본군 위안부제도와 공창제의 관계를 신중히 논의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백 연구가는 공창제가 위안부제도와 연관돼있고, 민간에서 위안소를 운영해 관리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순 없다면서도 단순히 공창제를 강조하는 맥락은 성착취를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는 동시에 일본 제국이 위안소를 관리감독한 책임을 논의에서 지울 우려가 있어 더욱 섬세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논문 일본군 위안부문제의 탈진실 정치에서 일본 정부는 공창제 이용에 따른 요금과 시간을 정했고 그 규정은 위안소와 유사했다면서도 상하이에서 위안소와 공창을 분리하고, 총동원체제에서 위안처기능 여부를 판별한 사실을 고려하면 위안부제도와 공창제를 가볍게 동일시할 수는 없다 부연했다.

그럼에도 일본군 위안부제도와 공창제를 성착취라는 맥락에서 함께 논의할 때 군과 국가의 책임은 더욱 커진다는 게 중론이다. 박 연구위원은 논문에서 공창제와 위안부제도의 관계에서 우리가 질문해야 할 대상은 성을 제공하는 위치에 놓인 여성이 아니라 공창위안부제도를 뒀던 공권력이라 지적했다. 노마 교수는 책에서 피해자들이 위안소로 인신매매되기 전 민간 성노예제를 경험했다는 사실은 일본군과 관료의 역사적 책임을 오히려 가중한다고 주장했다.

일본군 위안부문제를 성착취라는 틀 안에서 논의할 때 여성 연대의 방향은 분명해진다. 이 이사장은 논문에서 “‘위안부운동의 비전은 역사의 장막에 가려진 다양한 주체들이 세상의 터부와 장벽을 깨고 나와 숨겨진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는 것이라 말했다. 그는 일제강점기 당시 여성들이 성착취를 당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해 세계의 수많은 약자와 연대하고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게 위안부운동의 방향이라 강조했다. 배 연구위원 역시 논문에서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된 경험을 가진 여러 국가의 위안부여성들과 시민단체가 모여 서로 다른 경험을 나누며 해결 방안을 고민할 수 있는 건 그들이 위안부문제를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라 덧붙였다.

이는 일본에 전쟁범죄의 책임을 묻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 사회에 뿌리내린 성착취 문화를 환기한다. 박 연구가는 “‘위안부제도는 정부와 군대, 민간이 함께 키운 제도인 만큼 사회 전반이 성착취를 근절하고자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 연구위원은 피해자의 삶으로부터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끄집어내는 게 바로 피해자 중심주의라며 피해자의 기억과 경험을 중심으로 역사를 생각했을 때 우리의 삶과 연결되는 지점들을 치열하게 사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성의 삶에 대한 상상력은 성착취 피해자를 다양한 여성의 서사로 복원하는 데서 출발한다. 박 연구위원은 일본군 위안부피해자는 조선인, 일본인, 식민지 여성, 점령지 여성 등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고 동원 방식도 모두 달랐다고 설명했다. 여성주의로 들여다본 역사 위에서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논의의 장이 조금씩 열리고 있다.


*공창제: 일본이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까지 제국 일본의 영역 안에서 실시했던 성매매 관리제도

 
글 박경민 기자 
lightmiin@yonsei.ac.kr
복건우 기자 
geonu_20@yonsei.ac.kr
사진 김다영 기자 
dy3835@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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