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수 매거진부장(정외19)
이연수 매거진부장 (정외·19)

 

어떤 어른이 되고 싶은가. 지난날 나는 이 질문에 하나의 단어로 답을 일관했다. 얼마 전 방을 정리하다 고등학교 시절 정리해둔 생활기록부를 찾았다. 삼 년간 적어온 진로 희망란이 눈에 들어왔다. 모두 언론인이라고 적혀있었다. 대입에 필요한 자기소개서를 그럴싸하게 포장하기 위해 쓴 것이 아니었다. 어떤 어른이 되고 싶으냐는 질문에 나는 진심으로 기자가 되고 싶다고 답했다.

내 꿈은 제법 확고했다. 칼을 뽑았으면 무를 썰어 깍두기라도 담가야 하는 성격도 한몫했다. 그렇게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했고, 우리신문사에 들어왔다. 두 가지 선택 모두 주변의 만류가 상당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식으로 곧잘 결정을 피하곤 하지만 나는 이런 측면에선 고집이 굉장히 세다.

그러나 우리신문사 기자로 일 년 반을 보낸 지금, 나에게 다시 어떤 어른이 되고 싶은지 묻는다면 기자라고 답하지 않을 것이다. 막연한 그림을 그렸을 때와 달리 기자 생활을 경험하면서 기자의 무게와 나의 부족함을 많이 느낀 탓도 있다. 발제의 압박과 마감의 중압감에 눌려 사는 삶이 쉽지만은 않다고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는 기자라는 직업으로 내가 되고자 하는 어른의 모습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송도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던 새내기 시절이었다. 3일간 현장을 관찰하는 어느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새내기들의 기숙사 생활을 촬영하러 왔다. 언제나처럼 친구들과 도서관 지하에서 점심을 먹고 나와 긴 나무 벤치에 앉아있었다. 점심시간의 풍경을 촬영 중이던 피디가 우리에게 다가왔고 인터뷰가 시작됐다. 새내기 생활은 어떤지, 무슨 동아리를 하는지 등을 물었다. 연극 동아리를 하고 있다는 나의 대답에 피디는 기숙사의 자유로움을 즉흥 연기로 표현해달라고 했다. 당황보다는 황당했고 즉흥 연기는 하지 않았다.

취재원을 만날 때마다 즉흥 연기를 해달라는 피디가 된 기분이었다. 즉흥 연기만큼 무리한 부탁은 아니지만, 공개적으로 생각과 입장을 표하라는 요구가 부담되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만난 취재원들은 모두 성심껏 인터뷰 요구에 응했다. 그 바탕에는 오랜 고민으로 쌓아온 단단함이 있었고, 자신이 생각하는 옳고 그름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용기가 있었다.

누구든 인터뷰를 하고 돌아오는 길이면 존경심이 들거나 감탄하곤 했다. 재즈에 대한 기사를 준비하면서 재즈평론가 취재원의 집을 방문했다. 음반들과 책들이 벽장에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얄팍한 지식을 숨길 수 없는 질문들에 이 음반, 저 음반 꺼내시며 음악을 들려주셨다. 평론가님의 모든 한 마디에는 재즈에 대한 진심과 자신감이 묻어났다. 그는 재즈의 매력을 나누고자 했고 어려운 음악이라는 편견을 깨고자 했다.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을 맞아 무지개 깃발을 들었던 신학대 취재원도 생각난다. 취재를 요청한 건 한 분이었고 공교롭게도 휴일에 인터뷰하게 됐지만 세 분이나 기꺼이 편집국을 찾았다. 여전히 압박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임에도 그들은 또다시 용기를 내 이야기를 들려줬다. 교단과 다른 목소리를 내도 신학의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다시 나에게 어떤 어른이 되고 싶으냐고 묻는다면, ‘기자대신 다른 대답을 할 것이다. 나는 내가 만났던 취재원들 같은 어른이 되고 싶다. 어떤 일을 하든지 그냥’, ‘어쩌다 보니하고 있다고 얼버무리고 싶지 않다. 내 말과 글과 행동에 이유가 명확했으면 한다. 그리고 그 이유에 진심이고 싶다. 단단함을 바탕으로 내가 생각하는 옳고 그름을 말할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 내가 만났던 취재원들처럼 말이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이 글을 다시 볼 내가 단단한 어른이 돼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어른 스케치에 참조가 돼 준 모든 취재원께 감사의 인사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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