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 ‘모르쇠’ 하는 방송사 불공정 관행 타파해야

지난 7월 개최된 2020 도쿄 올림픽은 전 국민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다. 선수들의 열정과 노력이 담긴 경기에 모두가 환호성을 지르는 동안 설움을 토로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목소리는 묻혀만 갔다. 불합리한 방송국의 관행에 따라 열정페이를 강요당하며 차갑게 식어만 가는 미디어 산업 근로자들의 실태를 살펴봤다.

 

올림픽의 환호성
노동자의 비명

 

2020 도쿄 올림픽 기간 방송국은 기존과 다른 프로그램 편성에 나섰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프로그램 결방으로 인해 임금을 지급받지 못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있었다. 더불어사는희망연대노동조합 방송스태프지부(아래 스태프지부)가 지난 71일부터 11일까지 방송계 비정규직 노동자 381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전원이 결방에 따라 일을 해도 임금을 지급받지 못한 적이 있으며, 그중 73.5%월드컵, 올림픽 등 스포츠 이벤트 때 임금 미지급을 경험한 적 있다고 답했다. 방송사가 프리랜서·무급계약 등의 형태로 고용 관계를 맺고, 제작이 아닌 방영을 기준으로 임금을 지급하는 탓이다. 실제로 응답자 중 89%가 방송 편당 임금을 받고 있었으며, 이 중 93.5%가 결방 시 임금을 받지 못한다고 응답했다. 반면 월급제 노동자 중 60.9%는 결방 시에도 임금 전액을 지급받았다. 스태프지부 김기영 지부장은 대부분 방송사는 방송 후 대금 지급을 조건으로 제작사 및 프리랜서들과 편당 계약한다결방 시 방송사는 임금을 지급하지 않아도 되는 체제라고 설명했다.

실제 방송계에는 프로그램을 제작했지만, 방영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노동자에게 임금을 지급하지 않는 관행이 존재한다. 그러나 결방 시에도 특별편성이나 스톡이라 부르는 예비용 프로그램을 제작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 업무량에는 큰 변화가 없다. 앞선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63%'프로그램이 결방돼도 평소와 다름없이 일한다'고 답했다. 시의성이 중요한 프로그램이 결방되는 경우 해당 편을 폐기하고 다시 제작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사실상 두 번 일한 셈이지만 방송된 1회분 임금만 지급받는다. 김 지부장은 내부적으로 취소가 결정돼도 제작진에게는 직전에야 전달되는 일이 많다결방 사실을 알더라도 다음 편 스톡을 제작해놓기 위해 무임금으로 일하는 경우가 잦다고 전했다.

이에 스태프지부는 미디어 비정규직 노동자에 정당한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 720일 스태프지부는 KBS·MBC·SBS·JTBC 등 주요 방송사에 프로그램 결방으로 미지급된 임금을 정상적으로 지급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보장할 것을 촉구했다. 스태프지부는 726일까지 회신을 요구했지만 825일까지 아무런 답변을 받지 못했다.

 

 

표준에 속하지 못하는 미디어 비정규직

 

미디어 산업 내 만연한 비정규직 고용 형태가 임금 미지급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지목된다. 미디어 산업 내 많은 노동자가 1인 도급자, 플랫폼 노동자, 프리랜서 등인 상황이다. 지난 2020129일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발표한 방송사 비정규직과 프리랜서 실태-공공부문 방송사 프리랜서 인력활용보고서에 따르면, 공공부문 방송사 50여 곳의 불안정 노동자 비율은 전체 인원 대비 42%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 중 비정규직 비율은 17.4%, 프리랜서 비율은 15.9%였다.

문제는 이들이 인 방송사를 상대로 조직적으로 움직이거나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기 힘들다는 점이다. 불공정 계약 직군별 파편화 등은 비정규직 조직화에 큰 걸림돌로 작용한다.

비정규직 노동자들 대다수는 문화체육관광부에서 권장하는 표준근로계약서 대신 용역 계약이나 턴키 계약* 혹은 구두 계약을 맺는다. 돌꽃노동법률사무소 김유경 노무사는 본래 계약서와 실제 일한 내용을 종합적으로 살펴본 후 근로자성을 판단하는 것이 법적으로 옳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형식에 불과한 계약서를 근거로 방송사는 법적 책임을 일체 회피하고 있다. 김 노무사는 계약서 내용을 내세워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족쇄를 채우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다른 업계에 비해 노동자가 분산된 것도 문제로 제기된다. 음향, 촬영, CG 등 다양한 직군이 존재해 업무 동질성이 확보되지 않고 동일 업무 내에서도 프로그램별로 노동자가 파편화돼 조직화가 어렵다는 것이다.

나아가 불공정 계약 속 손해배상 관련 조항 겸업 금지 및 퇴사 후 장기간 동종 업계 종사 금지 조항 결방 시 보수 일부 삭감 조항 등이 노동자들에게 실질적인 불이익으로 작용할 수 있다. 김 노무사는 고압적이고 일방적인 조항에 위축된 노동자들은 법률 대응을 어려워한다고 덧붙였다.

가장 큰 문제는 비정규직 인력 현황과 노동 실태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례로 앞선 보고서에는 KBS·MBC 내 프리랜서 인력 현황을 보여주는 자료가 부재하다. 특히 신뢰할 수 있는 정부 기관 차원의 일괄적인 조사가 부족한 상황이다. 노동 실태 역시 공식적으로 조직된 기관이 없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규모를 밝히라는 요구가 이어져 왔지만, 방송사 측은 비정규직 채용 및 관리가 부서별로 이뤄지는 탓에 정확한 파악이 어렵다는 입장이다. 김 노무사는 비정규직의 현황 및 규모를 파악해야 하지만 방송사들은 매번 무책임한 답변만 반복 중이라며 이는 방송사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임의로 사용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설명했다.

 

미디어 비정규직의 태동
변화의 바람 불어올까

 

문제를 해결하고자 일각에서는 새로운 움직임이 일고 있다. 먼저 미디어 비정규직의 법적 노동자성을 인정하는 행정처분이 잇따랐다. 지난 3월 중앙노동위원회가 MBC 보도국 방송작가 두 명의 근로자 지위를 인정하면서 방송작가의 법적 노동자성이 처음으로 인정됐다. 또한, 부당해고 된 CJB 청주방송 고 이재학 PD의 사망 이후 고용노동부가 실시한 특별근로감독 및 실태조사 결과 비정규직·프리랜서 21명 중 12명이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인정됐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근로 실태를 개선하라는 방송통신위원회(아래 방통위)의 압박 역시 이어졌다. 지난 202012월 방통위는 21개사 162개 방송국의 재허가를 심의·의결하는 과정에서 비정규직 인력 현황 및 근로 실태 자료 제출을 공통조건으로 부가했다. 방통위 지상파방송정책과 A씨는 재허가 이전부터 방송사 비정규직 처우 개선에 대한 논의는 있었다방송사 내 비정규직 현황이 파악돼야 하므로 최초로 재허가 조건으로 부가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방통위는 지난 1방송시장 활성화 정책 방안을 발표하며 방송 현장 근로환경 개선을 주요 과제로 상정했다. 공정한 프로그램 거래 정착을 위한 제도 개선 및 방송시장 근로환경 개선 추진 작가·스태프 등 방송사 내 제작 관계자들의 표준계약서 사용 등을 내세우며 근로환경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비정규직 노동자 당사자들의 움직임도 시작되고 있다. 부당한 근로환경에 맞설 수 있도록 조직화에 나선 것이다. 지난 5월 전국언론노동조합(아래 언론노조)과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전태일재단 등 여러 시민 사회단체가 미디어 업계 비정규직 노조 설립을 장기적 과제로 두고 미디어비정규직공동사업단’(아래 사업단)을 설립했다. 사업단은 노동조합의 문턱을 낮춰 비정규직 조직화를 이루겠다는 입장이다. 언론노조 전략조직실 이기범 실장은 미디어노동공제회를 통해 다양한 사업장과 직군 내 비정규직을 품을 수 있는 노동조합을 꾸리려 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 실장은 의료, 교육, 법률 지원, 소액 대출 등 다양한 복지 사업을 전개할 예정이라며 구성원이 납부하는 공제회비에 더해 시민 단체, 정부 부처, 기업 등에 지원을 받아 재정 규모를 키울 생각이라고 밝혔다.

 

이 실장은 근로환경 개선을 위해선 당사자가 목소리를 내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미디어 산업 미조직·비정규 노동자 전략조직사업 전면화는 언론노조 핵심 추진과제 중 하나다. 미디어 비정규직 조직화를 필두로 노동자의 처우가 개선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턴키(turn-key) 계약: 건축학 용어로 자금 조달에서 기획, 설계, 시공까지 일괄하여 건물과 시설을 인도하는 공사계약 방식으로 일괄 수주 계약을 말한다. 방송업계에서는 팀 단위 도급계약을 의미한다.

 
글 김예서 기자
kimyeseo1@yonsei.ac.kr
여근호 기자
khyeo1123@yonsei.ac.kr
그림 민예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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