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 대한 예의』 「동트는 새벽」 속 구로

찬란했던 1987년의 6월 속에도 분명 어둠이 드리웠을 것이다. 다만 우리가 그 어둠을 쉬이 인식하지 못할 뿐. 직선제 개헌 이후 노동자들의 파동과 삶을 위한 분투는 어둠 속에 기록됐다. 공지영 작가는 동트는 새벽을 통해 노동자가 역사의 주인임을 비췄다. 기자는 그 흔적을 좇기 위해 구로로 나섰다.

 

닭장, 공순이, 멍청하게

 

1987년 가을, 용광로처럼 달아올랐던 여름의 투쟁들이 안으로 다져지기 시작했을 때, 정화는 현장에 가려는 결심을 굳혔고, 설마 하는 부모님들에게 쪽지 한 장을 남겨놓고 집을 나왔다.

 

아카시아 꽃향기가 진동하던 일학년 봄날, 주인공 정화는 세상의 추악한 민낯을 마주했다. 매캐한 최루탄 연기가 가득한 교정에서 처음 맛본 세상의 고통과 분열은 정화를 공단으로 이끌었다. 조국을 위해 가장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가장 버림받고 있는 그곳에서 새로운 삶이 펼쳐졌다.

 

▶▶구로공단 노동자들은 좁은 쪽방에서 생활했다. 우리나라의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끈 주역인 노동자들의 삶의 터전은 허름했다.
▶▶구로공단 노동자들은 좁은 쪽방에서 생활했다. 우리나라의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끈 주역인 노동자들의 삶의 터전은 허름했다.


기자가 발걸음을 옮긴 곳은 금천구에 있는 구로공단 노동자생활체험관 순이의 집이었다. 그곳에는 일명 공순이라며 괄시받던 정화를 비롯한 여공들이 지내던 쪽방이 재현돼 있었다. 기자 한 명이 들어가기도 벅찬 좁은 공간에서 노동자 4~5명이 부대끼며 생활해야 했다. 서울역사편찬원이 발간한 서울 동()의 역사(구로·금천구편)에 따르면 당시 방세는 월 5만 원으로 입사 3년 차 숙련공의 월급과 맞먹는 금액이었기 때문이다. 겨우 머리 하나 누일 수 있는 이곳은 노동자들의 삶과 애환이 켜켜이 쌓인 유일한 보금자리였다.

벌집또는 닭장집으로 불리던 쪽방촌은 구로공단을 중심으로 형성됐다. 구로공단은 지난 1964수출산업공업단지개발조성법개정 이후 조성된 최초의 공업단지다. 구로 1공단에 설립된 한국수출산업공단을 필두로 구로 2, 3공단이 연이어 들어서면서 금천구와 구로구 일대에 구로공단이 조성됐다. 그리고 1977, 우리나라는 수출 100억 불 달성이라는 눈부신 경제성장을 일궈냈다. 19641억 불의 실적을 기록한 지 겨우 13년 만이었다. ‘수출 대국이라는 화려한 이름 뒤에는 구로공단의 노동자들이 있었다.

 

정화야, 너 눈 커다랗게 뜨고 쏘아보지 마. 너무 똑똑해 보여.”
(중략)
그렇게 하루를 허탕 치고 들른 마지막 공장에서 정화는 정말 기운이 빠져 고개를 숙이고 그저 멍청히 앉아 있었다.
(중략)
드디어 드디어 취직이다! 그러나 공장 정문을 나서면서 정화는 씁쓸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저들은…… 노동자들이 똑똑하지 않기를 바라는구나.

 

정화는 20세의 박혜순으로 신분을 위장해 공단을 헤매어 다녔지만, 그의 눈빛을 마주한 공장 수위들은 매번 고개를 저었다. 계속되는 구직활동에 지친 정화가 멍한 눈빛으로 앉아 있자 비로소 면접관은 웃음을 보이며 내일부터 출근하라고 전했다. 대부분 회사는 똑똑하고 까다로운 노동자보단 열악한 환경에서도 묵묵히 착취당할 수 있는 이를 선호했다. 미심쩍은 노동자보다 기계를 놀리는 것이 더 경제적이라는 계산 탓이었다.

당시 정화와 같이 위장취업을 하는 학생들을 학출이라 일컬었다. 구로공단은 학출들의 중심지였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집결한 구로공단은 노동의 추악한 이면을 담아낸 자화상인 동시에 노동 운동의 태동지였다. 노동자와 연대하기 위해 전국의 학출들이 구로로 모여들었다. 지난 19856월 구로 지역의 노동자들이 연대해 벌인 구로동맹파업의 숨은 조력자 역시 학출들이었다. 비록 파업이 시작된 지 6일 만에 해산됐으나 연대의 힘을 보여준 역사적인 신호탄이었다.

 

가장 보통의 시위

 

▶▶1987년, 구로구청에서 부정선거 항의 점거 농성이 일어났다. 투표함은 꼭 지켜야 한다고 목놓아 외치는 시민들과 그들을 향해 최루탄을 발사하는 사복경찰관 백골단이 대립했다.
▶▶1987년, 구로구청에서 부정선거 항의 점거 농성이 일어났다. 투표함은 꼭 지켜야 한다고 목놓아 외치는 시민들과 그들을 향해 최루탄을 발사하는 사복경찰관 백골단이 대립했다.

 

……저기, 구로구청 앞에 사람들이 많던데 구경가볼까?”
(중략)
사람들이 나와서 구로구청 개표의 부정사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정화가 공장에 들어간 지 한 달쯤 됐을 때 13대 대통령선거가 있었다. 6월 민주 항쟁 이후 9차 개헌에 따라 무려 16년 만에 치러진 직선제 선거였다. 선거 다음 날, 정화는 순영과 함께 우연히 구로구청 앞을 지나면서 부정 개표 시위를 마주한다. 본디 순영은 이런 일에 관심이 없었다. 16년 만의 대통령선거마저도 아침 일찍부터 닦달하는 동생의 등쌀에 밀려 겨우 참여했을 정도였다. 동생네 회사에서 노조를 꾸려 파업한 덕에 월급이 조금 올랐다고 하지만,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순영은 노조’, ‘항거와는 아무런 연이 없었다. 하지만 구로구청에서의 그날은 무슨 일인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서울 온 지 사 년 좀 안 됐는데 이런 곳은 처음이야. 저 사람들 모두 거짓말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

 

어느새 순영과 정화의 손엔 김밥이 들려있었고, 눈앞에는 시민들의 장기자랑과 소견발표가 펼쳐졌다.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이야기였다. 경찰의 방송도 시민들의 열띤 함성에 묻히고, 어두운 하늘을 밝히는 횃불은 밝아올 미래를 보여주는 듯했다. 하지만 이내 죽음의 공포가 드리웠다. 끊임없이 내리꽂히는 몽둥이질과 폐부에 들어찬 최루가스에 허리를 펼 수조차 없었다. 포로처럼 체포돼 호송 버스에 처박혔고, 두 평 남짓한 공간에 스무 명이 옹송그려야 했다.

정화와 순영이 참여했던 시위는 지난 19871216, 구로구에서 일어난 점거농성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23일간 이어진 이 투쟁은 우연히 한 시민이 선거 투표함이 밀반출되는 것을 포착해 투표함을 사수하는 것에서 시작됐다. 구로구청 선거관리위원회 사무실에서 용도를 알 수 없는 1506매의 백지 투표용지와 인주 70매가 추가로 발견되자 분노한 시민들은 투표함을 지키자는 항의 농성을 시작했다. 그러나 5천여 명의 군경이 투입돼 진압한 결과 정화, 순영과 같은 노동자를 비롯한 시민 1304명이 연행됐고 그중 208명이 구속됐다.

기자가 발걸음을 돌린 구로구청은 지난 3월부터 새 단장 중이었다. 때문인지 구로구청 부정선거 항의 점거 농성이 일어났던 지난날의 모습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정화와 순영은 이곳 잔디밭에 앉아 자신들에게 닥칠 미래를 상상치도 못한 채 민중의 일원이 됐다.

 

그런데 순영은 난생처음 와보는 숨 막히는 취조실에서 당당하게 그리고 또박또박 외친 것이다.

-나는 이 부정선거와 싸우겠다!

 

시위에서 연행됐던 사람들 대부분은 취조에 응했다. 순순히 의지를 접고 경찰의 조사에 성실히 답변했다. 하지만 순영은 거부했다. 부정한 것을 부정하다고 정확히 말했다. 아무것도 모를 것 같았던 그냥 20대 여자 공순이순영은 항거의 주역이었다.

 

노동과 근로
오만과 편견

 

정화는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순영이를 믿지 않았다. 노동자들과 그들의 건강한 힘. 정화는 혹시 자신이 믿고 있던 것이, 사실은 제 머릿속의 얄팍한 관념뿐이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정화는 내심 현장에서 일하는 순영에게 큰 기대를 품지 않았다. 순영이 그저 일이나 하고, 떡볶이나 먹으러 가고, 월급을 쪼개어 화장품 살 생각이나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순영은 부정선거에 끝까지 항거하고자 했다. 정화가 은연중에 품고 있던 선입견은 비단 정화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무의식중에 내포된 노동에 대한 편견은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육체적으로 고된 일을 속된 말로 막노동이라 일컫지만 막근로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노동자를 위한 날이지만 근로자의 날이라 명명한다. 그러나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근로부지런히 일함, ‘노동몸을 움직여 일을 함을 의미해 큰 차이가 없다.

 

▶▶ 정화를 비롯한 노동자들이 일했던 구로공단은 현재 ‘구로디지털단지’로 변했다. 고층 빌딩만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
▶▶ 정화를 비롯한 노동자들이 일했던 구로공단은 현재 ‘구로디지털단지’로 변했다. 고층 빌딩만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

 

70~80년대 구로공단은 노동과 발전의 상징이었다. 대한민국의 비약적인 성장은 공단과 그 안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기자가 발걸음을 돌린 옛 구로공단 터에서는 더 이상 노동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현대식 고층 빌딩만이 즐비할 뿐이었다. 지난 2000년 첨단화라는 시류에 발맞춰 구로공단이 구로디지털단지로 탈바꿈한 탓이다. 어느덧 노동의 현장은 사라지고 근로라는 단어에 걸맞은 장소로 변모해 있었다.

 

 

생산하는 민중이 역사의 주인임을 알고 있었지만 아직 그 민중이 되지 못한 얼치기와, 스스로가 역사의 주인이면서 그걸 모르는 바보가 만난 것이다.

 

정화는 생산하는 민중을 역사의 주인이라 말한다. 정화도, 순영도, 우리도 모두 역사의 주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자각하지 못한 채 노동자가 아니라며 선을 긋는다. “스스로가 역사의 주인이면서 그걸 모르는 바보는 어쩌면 순영이 아닌 우리에게 건네는 말이 아니었을까.

 
글 김예서 기자
kimyeseo1@yonsei.ac.kr
박경민 기자
lightmiin@yonsei.ac.kr
사진 김지훤 기자
kimzlight@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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