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부 복건우 기자​​​​​​​(행정/사회·17)
사회부 복건우 기자(행정/사회·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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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해력, 수리력, 암기력, 추리력
다 좋은데요, 삶의 기본은?
​​​​​​​나와 우리를 살리고 돌보는 힘, 살림력!”

 

지금은 살림력을 키울 시간입니다의 첫 문장을 빌려 삶의 기본을 생각해본다. 취업을 앞둔 대학생인 의 삶은 지금껏 학교라는 테두리 안에서 만들어졌다. 전공 공부에 더해 자격증 준비까지, 입시의 강을 건너 취업의 관문을 향하는 나의 공부는 학업에 더해 진로를 찾아가는 데에 필요한 근육을 단련하는 과정이었다. 문해력, 수리력, 암기력, 추리력은 늘 해오던 공부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그런 나에게 최근 새로운 공부가 주어졌다. 이른바 살림 공부. 신학기에 맞춰 학교 근처 원룸을 계약하면서 처음으로 나만의 공간이 생겼다. 20년 동안 가족의 집에 얹혀살던 나에게 청소와 빨래를 도맡아 하며 삼시 세끼를 스스로 대접하는 일은 혼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터득하는 과정이었다. 이는 나의 일상을 책임지고 나를 더 소중하게 돌보는 일이기도 했다. 오롯이 자취생의 몫이 된 살림이 나에게는 새로운 공부나 다름없었다. 나를 보듬어주는 공부는 삶의 굴곡을 마주해도 쉽게 휘둘리지 않는 일상을 가능하게 했다. 책의 표현을 빌리면 이는 인생의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을 때 더 가뿐하게 회복 탄력성을 얻을 수 있는경험일 테다.

그럼에도 의문이 남는 건, 앞을 향해 달려가는 학업 공부와 현재의 나를 위로하고 돌보는 살림 공부가 만나는 지점을 상상하면서다. 두 가지 모두 나를 위한 공부라는 공통분모가 존재한다. 학업에 매진하고, 자신도 잘 돌보는 사람. 이는 어쩌면 느슨하고 안락한 삶보다 끈질긴 생활력의 캐릭터가 아닌가. 밖으로는 열심히, 안으로는 성실히. 그야말로 삶의 풍파에도 끄떡없는 강철 인간이 등장하는 순간이다. ‘학업 공부살림 공부가 만날 때, 공부는 확장되지 않고 외려 불완전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다. 학업을 향한 도전과 열정을 돌고 돌아, 나를 가꾸는 긍정과 성실로 향하는 공부는 결국 자기 계발의 문법을 벗어나지 못한다. 나로 시작해 나로 끝나는 공부는 세상 안팎으로 온전한 만이 존재한다는 사고 회로에 갇히기 쉽다.

나를 위한 공부에 집중하게 되면 타인의 삶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토드 메이가 품위 있는 삶을 위한 철학에서 무심히 지나치고 싶은 사람을 찬찬히 쳐다보면 그 사람 또한 힘겹게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고 지적하듯, 나의 주거 경험에서 벗어나 살림 공부에 집중할 수 없는 이들을 떠올려봐야 비로소 그들의 삶이 구체화한다. 젖은 벽지와 퀴퀴한 곰팡이, 변기와 부엌이 한 공간에 붙어 있는 방. 이는 시세보다 5~10만 원 남짓 저렴한 방에서 나를 위한 공부를 월세에 양보한 삶의 단면이다. ‘의 자리에 주거 빈곤 청년을 대입하지 못하는 사회는 지옥고’(반지하·옥탑방·고시원)라는 사각지대를 만들었다. 이는 나를 위한 공부가 정작 나만 위할 때나타나는 징후다.

어찌어찌 살 만한 집을 구해도 그 공간에서 나를 돌보는 사이 돌아보지 못한 타인의 삶이 존재한다. 그동안 청소와 빨래에 무심했던 내가 살림 공부중에도 반복해서 놓친 사회의 군상들이 있다. 중앙일보홍상지 기자는 책에서 일상에서 먼지를 크게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왔다면 그건 여러분의 뒤에서 누군가 끊임없이 먼지 닦는 일을 하고 있다는 증거라며 청소 노동의 가치를 환기했다. 청소로 나의 공간을 가꾸는 와중에도 직장과 거리의 노동을 돌아보려는 고민이 얼마나 귀한지는, ‘의 자리에 청소 노동의 가치를 대입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바뀐 거 없어요. 똑같아요”<관련 기사 187510‘“현장으로 더 깊이6411번 버스가 남긴 ‘6411 정신’’>라는 6411번 버스 청소노동자의 소회를 떠올려볼 때 더욱 분명해진다.

나를 잘 돌보며 뿌듯해하는 감정은 섣부른 자찬에 그칠 수 있다. 나를 위한 공부가 아니라 타인을 위한 공부를 생각해야 하는 건 그래서다.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타인의 고통을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인간은 자신이 잘 모르는 고통에는 공감하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한심한 한계다. 경험한 만큼만, 느껴본 만큼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고통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고 늘 생각한다.” 나에게 집중하기도 벅찬 시대, 그럼에도 타인의 고통을 떠올린다. 타인에 이입하는 공부, 타인을 위한 공부를 놓치지 않는 고통의 연대를 거듭 상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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