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서하 매거진부장(QRM·20)
김서하 매거진부장(QRM·20)

 

기자는 다른 사람의 슬픔을 먹고 사는 존재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던가. 당시 교내 진로 특강을 진행하던 현직 기자가 강연이 끝날 무렵 남긴 말이다. 기자는 타인의 슬픔을 빌려 밥 벌어먹는 존재이니 그에 걸맞은 경각심을 가지라는 의미였겠지. 이 한마디는 기자를 꿈꾸던 내 마음에 콕 박혔다. 약자의 슬픔, 사회의 아픔을 세심히 헤아리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그렇게 부푼 꿈을 안고 우리신문사에 입사한 지 어느덧 4학기째다.

첫 취재의 순간은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 나는 여러 명의 고졸 청년 노동자를 서면으로 인터뷰했다. 일터에서 학력에 따른 차별을 경험했던 사례를 구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의 답변을 처음 읽은 순간, 눈앞이 아찔했다. 그들이 겪은 차별이 너무 심각해서? 그들의 고통에 마음 아파서? 아니다. 그들의 슬픔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졸 청년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존재이니 당연히 불행할 것이라는 내 예상을 완전히 빗나간 순간이었다. “이번 취재 망했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뇌리를 스쳤다.

내가 만난 고졸 청년들은 약자지만 강했다. 자격증을 취득해 미용사의 꿈을 이룬 청년은 남들처럼 대학에 진학하기보다 일찍 취업해서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싶다고 말했다. 특성화고 국제회계정보과 졸업 후 바로 직장에 다니는 청년 또한 스스로 역량을 쌓아 취업에 성공한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들은 자신의 학력을 전혀 부끄럽게, 불행하게 여기지 않았다. 사회적 편견 앞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인생을 꾸려나가고 있었다. 불우한 존재라 여겼던 이들의 의연함이 내겐 참 낯설더라. 왜 나는 정의로운 세상을 염원했음에도 이들의 행복에 안도감이 아닌 이질감을 느꼈을까. 지금 돌이켜보면 참으로 부끄럽다.

약자와 소수자는 당연히 불행할 것이라는 시선. 그 편협함 속에서 이들은 납작하게 재현된다.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에 등장한 현장 실습생 김동준군의 이야기도 이를 보여준다. 지난 2014, CJ제일제당 진천공장에서 일하던 김군은 장시간 노동과 작업장 내 폭력에 시달리다 자살했다. 사람들은 김군이 불우한 가정에서 자란 내성적인 아이일 것이라고 멋대로 재단했다. 사건을 담당한 경찰관은 김군의 어머니에게 애가 우울증이 있고 가정사가 안 좋아 불행하다면서요?”라고 질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군의 부모님과 친구들은 그가 방송반과 열기구 동호회에서 활동할 정도로 활발하고, 꿈과 목표도 확실한 학생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언론에서 호명한 불우한 특성화고생의 모습과는 현저히 다르다.

해당 책을 쓴 은유 작가는 사회적 약자를 그저 불우한 존재로 재현해선 안 된다고 지적한다. 특성화고 학생이 현장 실습생의 죽음과 같은 기사를 통해 반복적으로 호명될수록 그들이 처한 부당한 상황은 그들 삶의 기본값처럼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원래 불우했으니 계속 불우해도 이상할 것 없는 존재로 여겨진다는 의미다. 그 과정에서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의 인격은 지워지고, 그들은 그저 도움이 필요한 존재로만 대상화된다.

타인의 슬픔을 있는 힘껏 포착해내겠다는 나의 다짐은 얄팍한 동정에 불과했다. 타인의 슬픔만을 좇는 순간 그들의 불행은 당연해진다. 낮은 곳을 향하겠다던 내 시선은 어느새 그들을 내리찍고 있었다. 그 시선은 약자와 소수자를 슬픔에 푹 잠겨버린 존재, 불쌍한 존재로 뭉개 버린다. 동정의 언어로 세상에 내놓은 글들은 그들의 인생 속 서사를 일그러뜨리고 짓밟는다. 무관심과 폭력의 구조는 공고해지고, 변화는 멀어진다.

기자는 다른 사람의 슬픔만을 먹고 살아선 안 된다. 이 세상에 당연한 슬픔은 없다. ‘고졸 청년 노동자’, ‘특성화고 학생이라는 분류 코드의 구성원이 아닌 한 사람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들의 희로애락을, 인생의 서사를 입체적으로 조명해야 한다. 동시에 그들의 슬픔을 낯설게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그때야 비로소 그들은 다채로운 형상으로 재현돼 우리와 다름없이 살아 숨 쉬는 존재로 각인될 것이다. 소외된 이들의 웃음을 자연스럽게, 눈물을 새삼스럽게 받아들이려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이것이 내가 기자의 한마디에서 동정 아닌 동행을 말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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