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의 자기 폐쇄적 나르시시즘에 대한 단상

김시연 (국문·19)
김시연 (국문·19)

 

그때부터 우리는 모두 벽이 되었다.
너랑 이야기하면 벽이랑 대화하는 것 같아.

거미는 자신이 만든 점성의 독방에서 생을 마감한다.
- 신철규, 중에서

 

흔히 벽이랑 대화하는 것 같다는 말을 듣는 상황은 친구, 애인, 혹은 부모님과 길고 피로한 언쟁을 이어갈 때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던 중 며칠 전 한 가지의 시나리오가 더 추가되었다. 온라인 줌(ZOOM)으로 전공 수업을 들을 때. 부끄럽지만 카메라를 끄고 불성실하게 수업을 듣고 있던 나는 교수님의 말씀에 한순간 벽이 되어버렸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아래 코로나19) 국면을 맞이한 지금, 우리는 말 그대로 네모 상자 속에서 사고하고 있다. 수업의 공간은 학우들이 모인 강의실 대신 화면에서 보이는 네모 상자를 토대로 각자의 상상 속에서 재구성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들어버리는 왜곡이 생긴다. 스스로가 만들어낸 관습, 스스로가 만들어낸 네모 상자 속에 갇혀서 사고하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벽이란 단순한 소통의 불능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사면이 벽이 되었을 때 우리는 독방에 갇힌다. 갇혀서 자신만의 세계를 짓고, 나만의 감상과 사상에 빠져들고 고립된다. 결국 타인을 지우고 나 스스로에게만 빠져드는 자기 폐쇄적 나르시시즘의 끝은 스스로 만든 독방에서 생을 마감하는 일이다.

지난 2020년부로 모두가 상실의 감각을 공유하고 있다. 팬데믹으로 인해 우리는 일상을 빼앗겼고 급기야 노멀과 일상을 새롭게 정의해 이에 적응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비대면 학기를 보내며 나는 수업에서 듣고 싶은 이야기만 선택적으로 골라 듣고 있는 나태한 나의 모습을 발견했다. 이견을 가진 학우의 발언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리는 무관심, 그리고 코로나19 끝나면 혹은 잠잠해지면이라는 기약 없는 연기의 자세는 나를 방 안에 가둔 채 자신만의 고민에 천착하게 했다. 읽고 싶은 책만을 쌓아두고, 보고 싶은 사람들만을 마주하며, 말하고 싶은 사람들과만 대화하는 나의 일상은 편리하고 안전했으며 피로감이 덜했다. 하지만 결국 이 모든 것들이 나를 둘러싼 벽이었고 나는 점점 스스로 고립되고 있었다.

언팔로우와 숨기기 기능. SNS에서나 익숙했던 관계 맺기의 방식은 뉴노멀이라는 이름으로 회의와 수업이라는 공적인 교류 속에서도 확대됐다. 공적인 관계 속에서도 누군가를 비가시적인 상태로 숨겨두거나, 나의 카메라를 끄고 음소거를 하는 등 일시적으로 교류를 끊어내는 게 일정 수준으로 가능해진 것이다.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 소셜 딜레마에서는 알고리즘에 의해 개인화된 정보만을 제공받는 사람들이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분극화되어, 사회문제를 놓고 극단적으로 대립하게 된다고 경고한다. 결국 SNS에서 그러하듯 다양한 사람과의 관계를 손쉽게 단절하는 데 익숙해진 나는 독방에 자신을 가두고 나만의 공부와 고민에 빠져 지냈고 현실 세계의 문제에 직면할 때면 종종 손 쓸 수 없이 무력해지고는 했다.

자기 폐쇄적인 나르시시즘은 필연적으로 타인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진다. 본인의 기호에 맞는 사상 혹은 행동 양식을 갖춘 타인과만 교류하며 타인이 나와 같을 것이라 기대하고, 타인에게서 나를 찾고, 그에 기뻐하는 행동. 이는 진정한 공감보다는 공감하는 척하고 온정을 가지는 척하는 나르시시즘에 가깝다. 어떤 자리에서든 나와 입장이 다른 사람을 만나면 열띤 논쟁을 피하고 불편해하는 것, 언팔로우하고 음소거를 하듯 시야에서 간편히 치워 버리는 것, 다른 입장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본인의 것에만 골몰하며 땅을 파고 들어가는 것. 거부당한 경험의 상처에서 비롯된 것일까. 공론장에서 기득권 아닌 자가 기득권인 자와 동일선상에 놓이지 못한다는 데서 오는 방어적인 태도일까. 자기 폐쇄의 버릇이 심해진 나의 모습을 발견할 때면 처참해진다. 건전하고 역동적인 공론장은 진정 불가능한 걸까.

내가 3년째 속해 있는, 올해로 80주년을 맞이한 중앙문예창작동아리 연세문학회의 영문 닉네임은 ‘roompen’이다. 단어 룸펜(lumpen)’은 본래 아무런 직업과 목적 없이 살아가는 부랑자나 실업자 같은 존재, 잉여 인간을 뜻한다. 그러나 우리는 자조적인 말장난으로 스스로를 방구석에서 펜을 들고 글을 쓰는 사람들, ‘roompen’이라 부른다. 어쩌면 ‘roompen’의 속성은 ‘lumpen’의 것과 별 다를 바 없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태까지 지켜본바 문학을 구심점으로 모인 이 공동체는 읽기와 쓰기라는 정적인 행위에 몰두하는 동시에 그 어느 곳보다도 역동적이었다. 대면 활동이 제한된 상황 속에서도 문학에 열정을 가진 학우들이 비둘기처럼 광장에 모여들었고 우리는 줌(ZOOM)에 접속해 해가 뜰 때까지 밤새 서로의 글을 합평하고는 했다. 글에는 삶에 대한 사적인 투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고 글에 대해 논하는 과정에서 세계와 세계가 맞부딪쳤다. 충돌하며 깨지고 또 각자가 가진 세계의 경계가 넓어지기도 했다. 그 충돌은 타인을 지워버리거나 타인의 발화를 부정하는 무관심이 아니라 서로의 세계를 주의 깊게 들여다보려는 상냥함이었다. 합평 문화에서 내가 느낀 것은 문학이라는 공통 관심사에 대한 학우들의 순수하고 진심 어린 애정, 글을 통한 자기 긍정과 소통의 가능성, 그리고 각자의 삶을 견뎌내는 치열함이었다. 그 속에서 나는 ‘lumpen’‘roompen’으로 치환해 볼 수 있는 언어유희를 배웠다.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이 있다.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은 학우들의 안전이기에 지금 당장 노트북을 덮고 캠퍼스에 모이자고 부르짖을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독방이란 단순히 물리적인 의미가 아님을, 우리는 독방에서도 독방에 갇히지 않을 수 있음을 안다. 더는 벽이 되고 싶지 않고, 벽에 둘러싸이고 싶지 않다. 비대면 상황 속에서도 독방에 자신을 가두지 않도록 자유롭고 안전한 공동체가 많아지기를, 그러한 공동체가 어린 지성에게 건전한 공론장의 역할을 하게 되기를, 이를 위해 동아리 사회와 학생사회가 다시금 생명력을 얻기를 간절히 바란다. 우리 마음속의 백양로를 다시금 걸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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