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영 편집국장​​​​​​​(경제·18)
박준영 편집국장(경제·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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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난관은 이거였다. 어디까지 의견이고 어디부터 욕설인가. 이런 건 편집국장 이월서에 없었다. 학기 초 발행한 기사와 사설에는 말 그대로 욕설과 공격이 섞인 댓글이 달렸다. 한참 고민하다 결국 삭제 버튼을 눌렀다.

소속변경 제도는 내가 입학하던 지난 2018년부터 화두였다. 총장의 ‘One university, Multi campus’ 메일이 도화선이었다. 동기를 만나거나 에브리타임에 들어가면 온통 그 얘기였다. 표현의 수위는 달랐지만, 내용은 비슷했다. 어떻게 급이 다른 집단을 하나로 묶느냐는 불만이었다. 거센 표현 이면에는 억울함이 담겨있었다. ‘연세는 학창 시절 노력한 자만이 거머쥘 수 있는 타이틀이며, 노력에 대한 차등 대우는 정당하다는 것이다. 함께 거론된 키워드는 실력’, ‘보상’, ‘공정등이다.

공정은 최근 몇 년간 화제의 키워드였다. 공정성 담론은 하버드대 정치학과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 교수의 공정하다는 착각발간 이후 정점을 찍었다. 그런데 내가 이 단어에 관심을 가진 건 최근이 아니다. 중학교 때 본 한 다큐멘터리는 공정한 세상의 오류(Just-world fallacy)’ 이론을 소개했다. 이는 사회심리학자 멜빈 러너(Melvin Lerner)가 정립한 대표적인 인지 편향 이론이다. 그에 따르면 사람들은 자신의 노력이나 행동에 따라 결과와 보상이 주어진다고 믿는다. 바꿔 말해 결과가 좋지 않다면 그 원인은 오롯이 개인에 있다. 게으르고 무능력하니까 가난하지, 밤늦게 돌아다니니까 험한 일을 당하지 등. 모두 개인이 통제 가능한 요인만으로 결과가 산출된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이 믿음은 환상인 동시에 오류다. 세상은 공정하지 않다. 노력과 실력 외에도 운, 재능, 부모의 경제력, 거주지, 시대적 배경, 사회 시스템 등 다양한 외적 변수가 존재한다. 이런 상황에선 안타깝게도 비례적 정의나 과정의 공정이 효과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오히려 과정을 거듭할수록 격차에 가속이 붙는다. 우리 사회에서 부모의 경제·사회적 지위가 자녀의 교육 시장에서의 입지로 이전되는 경향은 우리가 익히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학력은 유독 노력으로 설명되고, 때로 차별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학력을 둘러싼 혐오 표현에는 특정한 패턴이 보인다. ‘따위가’, ‘감히’, ‘수준과 같은 위계적 언어는 교실에서부터 시작된다. 돌이켜보면 교실은 학생들을 줄 세우고 구분 짓는 공간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성적에 따라 분반 수업을 듣고, 학원에선 레벨이 정해졌다. 고등학교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당시 우리 학교에는 상위권만 들어갈 수 있는 심화반이 있었는데, 짝꿍은 내가 심화반인 사실을 몰랐다. 그래서 내가 심화반 친구와 공부로 티격태격하자 이렇게 말했다. “, 쟨 심화반이야. 우리 같은 애들이랑 달라.” ‘우리 같은 애들이라. 정확한 의미야 어쨌건, 너는 저 친구를 뭐라 할 자격이 없다는 뜻이었다. 매달 숫자로 등급이 매겨지고, 석차로 우열반이 갈리는 곳에서 자연스러운 사고방식인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평가 당하는 과정에서 평가하는 법을 익힌다. 오만과 자조는 수년에 걸쳐 천천히, 깊숙이 체화된다.

혐오를 변호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다만 혐오에는 그것을 가능케 하는 배경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혐오는 문제의 발원이 아니라 발현이다. 학벌을 둘러싸고 터져 나오는 발언 이면에는 입시 경쟁, 구조적 차별, 능력주의 신화 등 사회적 맥락이 존재한다. 이것이 온라인 공간의 익명성과 맞물리면 비방이나 조롱으로 표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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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웹페이지 개편과 함께 문구도 수정됐다. 여전히 권리침해, 욕설의 경계는 흐릿하다. 그리고 이러한 고민이 한동안 지속하리란 예감이 든다. 댓글과 달리 혐오의 맥락은 클릭 한 번으로 삭제할 수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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