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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연세문화상] 나와 나타샤와 흰 밤바다

[오화섭 문학상(희곡 분야) 당선작]

나와 나타샤와 흰 밤바다

이연경(국문·17)

형식: 웹 드라마

1화

[자야오가(子夜吳歌)]

#오프닝(매 화마다)

까만 화면에 자막

‘이 작품은 백석시인과 기생 자야의 실제 사랑 이야기를 각색하여 탄생한 순수 창작물임을 밝힙니다.’

S#1 (자야의 집, 부엌(예시), 1999年)

1999年 11月, 화면 하단에 잠시 떴다가 사라진다.

老자야와 젊은 여자는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다.

여자 (공손하게) 오늘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집까지 초대해 주시 고...

老자야 (살짝 퉁명스럽게) 그건 내가 멀리 가기가 힘들어서야. 거 참, 이 다 늙은 이 에게 뭐 그리 궁금한 게 많다구.

여자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에 궁금함이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잖아요.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아직도 백석 시인을 그리워 하시나요?

老자야 뭘 당연한 걸 묻고 있어.

여자 하하, 그렇다면 혹시, 그가 제일 그리울 때는 언젠가요? 특히 이럴 때 가장 생각난다, 하는 게 있으신지.

老자야 (사이) 사람을 그리워하는데 때가 있나? 그이는 내 모든 시간마다 숨어있다가 불쑥불쑥 나타나고는 하는 걸. 한시도 제대로 잊은 적이 없어. 1)

1) 나이든 자야의 목소리와 젊은 자야의 목소리가 오버랩된다.

카메라는 점점 老자야와 여자에게서 멀어진다.

바깥 풍경을 비춘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올라가서 하늘, 하늘의 모습이 여러번 바뀌는 와중에(시간의 흐름- 회상을 표현하기 위해), 그 위로 자야의 내레이션이 흐른다.

자야 (N)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마지막인줄도 차마 모른 채 떠나보냈던 그 마지 막 장면까지..... 빼곡한 모든 기억이, 아직도 손에 잡힐 듯 생생하다.

S#2 (기차역(함흥역), 낮, 1936년, 가을~)

자야 (N) 여름이 뒷걸음질 치는 계절이었다. 다가오는 가을 바람이 시려 괜스레 눈물이 날 것만 같은, 그런 시절이었다.

자막- 1936年, 초가을, 함흥역. 2초 가량 떴다가 사라지고,

줌이 하늘에서 아래로 내려오면 기차가 꾸물거리며 들어오고 있다.

기차가 멈추면 그곳에서 자야가 내린다. 봇짐을 메고 있다.

그런 장면 위로,

1화

자야오가(子夜吳歌)

자막 뜨고 사라진다. (자막 위치는 알아서 적절한 곳에)

(자야오가는 소제목이기 때문에 다른 자막과는 차이가 있었으면 함. 글씨 크기가 더 크다거나 이런 식의.... 예를들어 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서 소제목이 뜨는 장면을 참고하시면 좋을듯!)

자야 (두리번 거리며) 어느덧 가을이구나. 바람이 제법 선선하네.

세화 얘, 진향아!

자야 (반갑게) 세화야, 날 마중 나온 거야?

세화 그럼, 얼른 가자. 이러다 늦겠어.

세화는 대뜸 자야의 손을 잡고 뛴다. 자야의 봇짐에서, 낡고 얇은 공책 한권이 툭 떨어진다. 자야는 알지 못한 채 멀어진다.

외로이 떨어져있는 공책 한권, 그때, 한 남자가 그것을 줍는다.

백석 ......

(얼굴은 나오지 않는다.)

S#3 (작은 다방)

세화와 자야가 마주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세화 오늘 함흥관에 간다구?

자야 응, 듣기론 영생여고 회식이 열린다는데. 사실 일개 고등학교 교직 중에 그리 권위자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가라니까 별 수가 있나.

세화 영생여고? 그래도 영생여고면, 잘하면 그 분도 볼 수 있겠네!

자야 그 분이라니?

세화 백석 시인! 모르니? 요새 이 일대에서 되게 유명한데. 처음 영어교사로 부임 왔을 때부터 소문이 쫙 났거든. 오죽했으면 우리 기방에까지 흘러왔겠어?

자야 글쎄, 잘은......왜? 어떤 사람이길래.

세화 풍문으로 듣기론…… ‘모던보이’라고 아나?

자야 모던보이?

S#4 (학교 운동장, 상상씬)

백석, 교문을 지나쳐 운동장으로 걸어오고 있다.

곤색 양복을 차려입고, 머리는 올빽으로 넘기고, 구두를 신은 등 세련된 멋쟁이의 모습이다. 백석 위로 세화의 내레이션이 흐른다.

세화 (N) 완전 멋쟁이란 의미지. 처음 등장했을 땐, 여학생들이 단체로 졸도했다지 뭐야. 겨우 미소 한방에 말이야.

백석이 위풍당당한 미소를 짓자, 그를 둘러싼 여학생들이 우수수 쓰러진다.

백석은 아랑곳 않고 시집을 꺼내 읽다가, 우수에 젖은 얼굴로 하늘을 바라본다.

세화 (N) 역시 시인 아니랄까봐, 종종 시집을 읽다가 하늘을 바라보고는 하는 데…… 그 모습이 한 편의 시 자체래. 그렇게 근사할 수가 없다더라.

S#5 (다시 작은 다방)

세화 뿐만 아니라, 부임한지 하루 만에 오십명이 넘는 반 아이들 이름을 모조리 완 전하게 외웠다는 거야. 교사로사의 자질도 아주 훌륭하지?

자야 (끄덕이며) 이름을 기억해준다는 건 다정한 일이지. 잘은 모르겠지만, 대단한 사람인가 봐. 그런데 조금 과장도 섞인 거 아니니?

세화 (장난스럽게 웃으며) 풍문이란 게 원래 그런 것 아니겠어? 아무튼, 보게 되면 이야기 해줘. 실제로도 그럴지 궁금하네.

자야 (옅게 웃으며) 그래. 알겠어.

자야(N) (생각에 잠긴다) 백석 시인이라….

S#6 (함흥관, 2)저녁, 회식)

2) 실제 함흥관은 당시 가장 큰 요릿집이었긴 한데....그냥 해우소로 대체하면 어떨까 싶습니다...각색이니까 이 정도쯤은...옛날 술집 느낌 나면 되지 않나요? 하하.

자야는 비어있는 구석 자리에 홀로 앉아있다.

자야 좀 높으신 분들이 있으려나. 빨리 스승님을 면회해야 하는데.

자야는 두리번거리며, 혼자 술이나 따르려고 하는데, 한 남자가 맞은편에 앉는다.

백석 (미소 지으며) 자작은 외롭잖아요.

자야의 잔에 술을 따라주는 백석.

자야 (당황하며) 감사합니다, 저도 드릴게요.

자야 또한 백석의 잔에 술을 따라준다.

둘은 술잔을 부딪치고, 마신다.

백석 좀 전의 공연은 잘 보았습니다. 춤사위가 무척 훌륭하던데. 유독 눈에 들어왔 어요.

자야 감사합니다. 과찬이셔요.

살짝 적막이 흐른다. 둘은 다시 술이나 마신다.

자야 (정적을 깨고자) 저, 실례지만 성함이…

백석 저는 백기행이라고 합니다. 이곳의 영어 교사지요.

자야 영어 교사? (생각하다) 하긴, 교사가 한둘은 아닐 테니.

백석 (의아해한다)

자야 영어 교사분에 대한 소문을 미리 들어서요. 백석 시인이라고.

백석 (뭔가를 생각하다, 웃음을 참는 듯이) 아, 그럽니까? 어떤 식으로?

자야 동료니 당연히 아시겠네요. 그냥 모던보이고, 되게 근사하다고…….

백석 거, 소문이 제대로 났나 보네요.

자야 (멋쩍게) 술을 좀 더 할까요?

두 사람은 간단한 대화를 나누며 술을 주고받는다. (음향을 깔아서 대화는 안 들리게끔 처리하면 될 듯합니다.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고)

어느새 얼굴이 제법 붉어진 두 사람.

자야 그런데, 제 이름은 왜 안 물어보시나요?

백석 (장난기 있게 웃으며) 알려주고 싶은 건가?

자야 (조금 부끄러워하며) 그야, 통성명은 제대로 이뤄져야 하니까....

백석 영한.

자야 네?

백석 그대 이름, 김영한.

자야 어떻게……. 독심술이라도 하시나요?

백석 (웃으며) 이름을 흘리고 가셨기에, 주인을 찾고 있었지요.

자야 네? 그게 무슨....

백석 (공책을 내민다)

자야 어머, 이게 왜 여기에...!

백석 낮에 함흥역에서 두고 간 걸 주웠습니다. 실례지만, 앞의 몇 쪽은 호기심에 열어보았어요. 저토록 아름다운 여자는 과연 무슨 글을 쓸까, 궁금함이 들었 기에.

자야 (조금 설레서, 괜히 술을 마신다) 글이라 하기엔 죄다 부끄러운 것인데요.

백석 부끄러운 글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람의 진심을 담은 글은 모두 떳떳한 글이 지요. (같이 술을 마신다)

백석 (바라보며) 아름다웠습니다, 외양만큼이나.

자야 (조금 설레서) 그렇게 말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고작 기생의 글인 지라.

백석 기생의 글이라 하여, ‘고작’이라고 불릴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자야 (조금 감동해서) …아무튼, 그 이름을 듣는 건 꽤 오랜만이어요. 대부분은 저 를 ‘진향’이라고 불러요. 그게 제 기명이지요. 두 개의 이름으로 사는 셈 이에 요. 그래도 속풀이를 하는 곳에는 본래 이름을 적고 싶어서...(술을 마신다)

백석 (가만히 듣다가, 자야와 함께 술을 마신다) (사이) 그건 나도 마찬가진데.

자야 ?

백석 내게도 이름 하나가 더 있거든.

백석은 자야의 옆으로 가 앉는다.

자야 (조금 당황하지만, 싫지 않다) 무엇인데요?

백석 (공책을 검지로 톡톡 두드리며) 두 음절만 자리해도 될까?

자야 (고개를 끄덕인다)

백석 (공책을 열어 빈 곳에, 펜을 꺼내 무어라 적는다)

화면에 백석이 적은 ‘白石’이 클로즈업.

자야 (놀라며) 당신이 그 백석 시인…?

백석 (고개를 끄덕이며, 장난스럽게) 그토록 근사하다던.

자야 (샐쭉하게) 뭐예요, 왜 저를 놀리셨나요?

백석 음, 다양한 표정을 알고 싶어서?

자야 ……왜 제 맞은편에 앉으셨나요? 주인을 찾아주려고?

백석 반은 맞고 반은 틀렸지. 그보다는, 당신 얼굴을 단번에 볼 수 있어서.

자야 그런데 왜 지금은 제 옆자리로 옮기셨나요? 이름을 적어주려고?

백석 또 반만 맞췄네. 그보다는, 당신 얼굴이 더욱 가까워질 수 있어서.

자야는 얼굴이 붉어지고, 당황하여 횡설수설한다.

자야 무슨 의민가요?

백석 무슨 의미 같나?

자야 그, 그야, 별다른 의미가 있을 리가 없지요. 단지 제가 기생이라 이러시는 거 지요? 고작 하룻밤이 필요하여서?

백석 (웃음기를 거두고) 이번에는 조금도 맞추지 못하였소. 기생인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고작 하룻밤 따위에 비할 게 못 되지. 나는 당신을 허구한 날 보고 싶은 거야.

자야 (사이) 어째서요?

백석 함흥 역에서 당신을 문득 보았을 때부터, 마치 운명처럼 다시 만나게 된 지금 이 순간까지…… 첫눈에 반했소. 줄곧 첫눈이었소.

자야 (더 당황하여) 시인이란 원래 그런가요? 이렇게 갑작스럽고, 저돌적이고, 속절 없이 들이닥치고……

백석 사랑이란 원래 그런 거지. 당신은 내가 별론가?

자야 (잠시 말이 없다, 싫진 않은 느낌으로) 정말, 이상한 사람.

백석 그 이상한 사람과 오붓하게 가을바람 쐐보는 건 어떠한가?

자야 (못 말리겠다는 듯 웃으며) 좋습니다.

S#7 (밤길)3)

3) 밤에 야촬이 힘들면 저녁 시간대여도 괜찮음

두 사람은 조금 떨어져서 밤길을 걷는다. 백석은 자야의 손을 잡고 싶은 눈치다.

그녀의 손을 흘깃 본다.

자야 왜 갑자기 나오자고 하셨어요?

백석 오붓하게 둘만 있고 싶어서. 저곳은 너무 시끄러워.

자야 맞아요, 조선은 어딜 가나 시끄러워서…… 조용하게 머물 곳이 있으면 좋을 텐데.

백석 나와 있으면 그럴 수가 있지. 세상의 불필요한 소음 같은 건 다 막아줄 수 있 거든. 물론, 마음이야 다소 법석이겠지만.

자야 마음은 왜?

백석 (천연덕스럽게) 떨려서?

자야 (장난으로) 음? 떨릴 게 있나요?

백석 (살짝 울컥해 자야의 손을 잡으며) 이래도?

자야 !!

백석 (자야의 손을 보며) 손도 조막만 하네.

자야 (샐쭉하게) 제가 거절하면 어쩌시려구, 자꾸 이러세요?

백석 (조금 기죽어서) 정말? 거절할 건가…?

자야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요.

백석 뭐? (웃으며) 농담도 할 줄 아나?

자야 아니면, 좀 더 시간을 두고 지켜볼 수도 있고.

백석 그 정도는 나도 양보할 수 있지만, 아마 시간 낭비일 거오.

자야 네?

백석 어찌 됐든 결국 당신도 나를 애정하게 될 터인데, 굳이 미룰 필요가 없다는 거지. 곧바로 연애를 시작하는 게 서로에게 좋은 일 아니겠소?

자야 (멍하다가, 소리 내 웃으며) 하하, 정말 재밌으신 분이네요. 특이하고…. (부 드럽게) 하긴, 기생인 제게 경어체를 써주실 때부터 알아봤습니다.

백석 (담담하게) 초면의 예의를 갖췄을 뿐인데.

자야 (궁금해서) 그러다 왜 도중에는 말을 놓으셨나요? 벌써 구면이 된 건 아닐텐 데.

백석 그건… 글쎄. 갑자기 취기가 올랐나, 용기가 샘솟았나....실은 내가 술을 잘 못 해. 그런데 당신은 아주 잘 마시던데.

자야 (놀라고, 미안해하며) 정말요? 몰랐어요. 저 때문에 괜히 무리하신 거군요.

백석 그쯤이야 백번이고 천 번이고 할 수 있지.

자야 (귀여워서) 누가 시인 아니시랄까 봐, 과장은.

백석 과장이라니, 압축이었소.

자야 (고민하다) 그렇다면 이건, (백석과 맞잡은 손을 들어 보이며) 암시고 함축이 지요?

백석 (어리둥절하여) 응?

자야 제 대답 말이에요. 여태 손을 빼지 않는다는 건…… 아이참, 제 입으로 설명 해야 하나요? 시인이시면서!

백석 (뒤늦게 이해하고) 하하!

자야 (창피하여 괜히 아무 말을 늘어놓는) 감히 선생님과 비할 바는 못 되겠지만, 저도 시에 대해 조금 소양이 있는 터라, 시의 성질은 대개 암시적이고 함축 적이라 하여

백석 (맞잡은 자야의 손을 끌어당긴다)

자야 (말을 멈추며) !!

백석 (양손으로 자야의 손을 잡고, 어루만지며) 오늘부터 당신은 영원한 내 마누라 야, 죽기 전까지 우리 사이에 이 별은 없어요.

자야 (부끄러워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S#8 (길거리, 낮, 겨울)

손을 잡은 채로, 걷고 있는 두 사람. 자야는 책이 든 작은 봉투를 들고 있다.

그때 백석의 옆으로 한 여자가 지나간다.

고개를 휙 돌려 자야를 보는 백석.

자야 왜 갑자기 고개를 돌리셨나요?

백석 난 당신 말고 다른 여자는 쳐다보기도 싫어.

자야 (어이없고 좋아서) 뭐예요, 그게!

백석 (자야가 든 봉투를 바라보며)그런데 무슨 책을 산건가?

자야 (책을 꺼내 자랑하듯이 조잘대며)아, ‘자야오가’라는 당시선집인데, 왜인지 이 제목이 너무 낭만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홀린 듯 구매하고 말았지 뭐예요.

백석 그래? 좀 살펴봐도 될까?

자야 (책을 건네며) 당연하지요.

백석은 말없이 책을 한참 뒤적이며 들여다본다.

백석 (돌연 자야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나, 당신에게 아호를 하나 지 어주고 싶어졌어.

자야 무엇인데요?

백석 자야. 이제부터 당신은 자야라고 합시다.

자야 자야요?

백석 어때? 별론가?

자야 그럴 리가요. 누가 지어주신 이름인데…… 세 번째 이름이자, 단 하나뿐인 아 호네요.

백석 우리 자야는 말도 참 사랑스럽게 하는군.

자야 (수줍게 웃는다)

백석 자야, 나와 벚꽃 구경 갈까? 그대가 이미 꽃이라서, 조금 시시하려나.

자야 참, 또 그러신다. 좋아요. 얼른 가요.

두 사람은 뭐가 그리 좋은지 웃으며 걷는다. 둘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진다.

자야 (N)이때만 해도 나는 알지 못했다. 당신이 지어주신 ‘자야오가’가, 우리 둘의 처절한 숙명을 예고하는 복선이 될 줄은.

S#9

(백석의 집, 오후, 초여름~)

자야 (N)그 첫 번째 비극은 성큼성큼 찾아왔다.

자야 여보, 있으세요?

인기척이 없는 집안, 자야는 백석의 집으로 들어간다.

자야 어딜 잠깐 가셨나보네, 어라.

책상에 서찰이 놓여있다.

자야 이건 무엇이지? 경성에서 날아온 것인데.

서찰을 들고 읽는 자야, 표정이 점점 어두워진다.

그때 백석이 들어온다.

표정이 좋지 않다.

자야 (서찰을 숨기고, 아무렇지 않은 체 하며) 무슨 일이 있으세요?

백석 (당황하며)응?

자야 요새 얼굴이 영 좋지 않으세요. 오늘은 특히나.

백석 모르는 게 없구나. 자야는.

자야 척 보면 알 수 있지요. 무슨 상심이라도…?

백석 으음, 별 것 아니야. 본가에서 갑자기 내려오라고 성화를 부리지 뭐야.

자야 본가라면…… 경성?

백석 그래. 그치만 못 들은 체 하면 그만이오.

자야 .....(덩달아 표정이 어두워진다) 부모님이 저와의 연애 사실을 아시면....탐탁 지않아 하시겠지요? 저는 고작 기생이고…….

백석 자야, 그런 표현은 쓰지 말라니깐. 고작이라니, 나한텐 무엇보다 대단하고 값 진 사람이 바로 당신인데.

자야 ……얼른 가셔야죠, 부모님이 기다리시겠어요.

백석 (살짝 서운해서) 왜 가라고 하는 거지? 당신과 이천리나 떨어지는 건 내게 너무 가혹한데.

자야 무슨, 상태를 보아하니 꽤 전부터 호출하신 듯한데, 부모님을 뵙는 건 자식의 당연한 도리잖아요. 어서 가셔요.

백석 그런 얼굴을 하고선… 자꾸 그러면 나, 경성역에 내렸다가도 당신 생각에 되 짚어 올지도 몰라.

자야 제 얼굴이 뭐 어때서요. (조금 풀려서) 그래도 가셔요. 자꾸 그러면 더욱 안 좋게 생각하실 텐데.

백석 (생각하다) 알겠어. (조심스레) 배웅 해 줄 수 있나? 조금이라도 같이 있고 싶 은데.

자야 (끄덕이며) 가요. 역으로.

S#10 (함흥역)

앉아있는 두 사람.

자야는 계속 표정이 좋지 않다. 백석은 그녀의 눈치를 본다.

백석 당신과는 한시도 떨어지기 싫은데…….

자야 저는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말고, 잘 다녀오세요.

백석 (기차표를 만지작거리며, 혼잣말로) 안 괜찮은 듯한데...

자야 (못 듣고) 저는 이만 가볼게요.

백석 벌써? 아직 기차가 오려면 꽤 남았는데.

자야 (애써 미소 지으며) 막상 뒷모습을 보자니 슬퍼질 것 같아서....미안해요.

백석 자야...

자야는 뒤돌아 나온다.

S#11-1 (길거리, 달이 뜬 후)

자야 그래, 그동안이 꿈결이었던 거지.

발걸음이 무겁다. 눈물이 날 것 같은.

자야 왜 이렇게 마음이 저린 걸까. 당연히 인정받을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으면 서도.

자야는 힘없이 터덜터덜 걷는다.

내레이션이 흐르고, 자막이 깔린다.

자야 (N) 장안도 한밤에 달은 밝은데

집집이 들리는 다듬이 소리 처량도 하구나

가을바람은 불어서 그치지를 않으니

이 모두가 옥관의 정을 일깨우노나

언제쯤 오랑캐를 평정하고

원정 끝낸 그이가 돌아오실까

-자야오가(子夜吳歌) 中

그때,

백석 자야!

성큼성큼 걸어와 뒤에서 자야의 허리를 끌어안는 백석.

놀란 얼굴의 자야 클로즈업,

엔딩.

2화

[바다]

S#11-2 (길거리, 달이 뜬 후)

백석 자야!

자야 여보……? 여보가 맞나요? 어째서…

백석 당신의 그 울적한 얼굴을 보고 도무지 발을 뗄 수가 있어야지. 표를 내일로 미루고 다시 왔어.

자야 네? (놀라지만, 내심 기뻐서) 그렇게 막무가내면 어떡합니까!

백석 그럼 어떡해. 그 잠시를 못 봤다고 발에 가시가 돋아서, 도무지 걸음 할 수가 없던 걸? 자야, 얼굴 좀 보여줘.

자야 놔주셔야 뒤를 돌죠.

백석 (자야의 허리를 놔준다) 이런, 내가 잠시 돌았었군.

자야 (뒤를 돌아 백석과 마주본다) 정말이지, 뭐예요? 차표는 어찌하구.

백석 차표? 일본인 역장에게 원고를 깜박 잊고 왔다 둘러댔지. 집에 들렀다가 내일 떠나야겠다고 호소하니 결국 표를 바꿔주더군.

자야 정말, 그런 임기응변은 또 어디서 배우셨대.

백석 너무 뭐라 하지 말아, (능청스럽게) 기차는 한참을 아니오고, 당신은 종종 걸 음으로 달아나고, 바람은 쌩쌩하여 마음은 시려운데 발은 자꾸 욱신대고… 그 러니 즉시 돌아오면 이천리가 득이잖아? 그래서 되짚어 온 거야.

자야 정말…… 못 말리겠는 남자네요.

백석 무슨 소리야, 날 말릴 수 있는 건 세상에 당신뿐인걸. 내 세상엔 당신뿐이 없어.

자야 (부끄러워 괜히 반대편을 바라보다, 백석의 손을 살포시 잡고) 그래도 실은 기뻐요. 다시 와주셔서.

백석 (사랑스럽다는 듯 웃으며, 자야의 어깨를 감싸 안는다) 그럼 이제 나랑, 평생 같은 하루를 보내볼까.

걷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지며 그 위로,

2화

바다

소제목이 뜬다.

페이드아웃.

S#12(경성, 낮, 백석의 집)

페이드인.

백석 다녀왔습니다. 아버지.

백석부 이제야 오는 게냐? 참, 아들 얼굴 보기가 쉽구나.

백석 …죄송합니다. 교사 일이 영 바빠서요.

백석부 허울 좋은 핑계인거 다 알고 있다. 아무튼, 앉아봐라. 긴히 할 얘기가 있어.

백석 (말없이 앉는다. 불안하다.)

백석부 이제 네 나이도 곧 스물일곱인데…… 혼기가 한참 지났지. 안 그러냐?

백석 아버지, 그건 제가 알아서

백석부 알아서라고? 장남이면서 그런 말이 나와?

백석 이제는 자유연애도 활발한 시대입니다. 반드시 가문에서 정혼한 여인과 혼인 해야 하는 건 낡은 관습이에요. 무엇보다 제겐 이미 혼인을 약속한 여자가 있 습니다.

백석부 (가소롭다는 듯) 그래? 어느 가문의 누구더냐? 들어나 보자.

백석 그건…(말을 잇지 못한다)

백석부 (혀를 차며) 내 모를 줄 아느냐? 한낱 기생이나 끼고 살고 있더구나.

백석 (조금 발끈해서) 그런 식으로 말씀하지 마세요!

백석부 누구 앞에서 소리를 질러? 됐다, 이미 다 정해졌어. 너도 보면 마음에 쏙 들게다. 외모도 곱고, 유서 깊은 가문의 막내딸로…

백석 아버지, 어떻게 그러십니까? 저보고 그 사람 얼굴을 어찌 보라구……정혼자에 대한 예의도 아닙니다.

백석부 이미 다 얘기 된 일이야. 거부할거면, 우리 집에서 영영 나가거라. 난 그런 장남은 둔 적 없으니.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백석 아버지!

홀로 남겨진 백석. 얼굴을 감싸 쥐며 괴로워한다.

S#13 (함흥, 자야의 집)

표정이 좋지 않은 자야.

세화가 들어온다.

세화 (걱정돼서) 다 죽어가는 얼굴이구나. 피골이 상접하겠어.

자야 (애써 웃으며) 죽기는.

세화 벌써 며칠 째니? 그 분이 떠나신지.

자야 …보름이 넘었지.

세화 소식도 딱히 없구? 그대로 거기 눌러 사는 것 아니야?

자야 그러실 분은 아니야. 만약 영영 못 오게 된다 해도, 편지라도 주시겠지.

세화 어휴, 어쩌다 이렇게 됐대. 첨에 네가 그 백석 시인과 연애한다며 소개시켜 주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자야 그때 네 반응이 참 재밌었지. 둘이 제법 친해지지 않았어?

세화 (끄덕이며, 자야를 웃겨주기 위해 일부러 조금 과장해서)내가 우리 향이 마음 에 생채기 하나 내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해두었는데. 감히 이 지경을 만들 어? 안되겠어, 처리해야겠어.

자야 (힘없이 웃다가) 아무래도 본가의 반대가 심하신가봐. 하긴, 그럴 법도 해. 나 는 기생이니까.

세화 어찌 알았어?

자야 사실 서방님의 본가에서부터 날아온 서신을 봤거든. 기생과의 교제는 당장 그 만두고 어서 경성으로 올라와라, 서둘러 정혼을 해야 한다… 뭐 그런 내용.

세화 뭐라구? 어쩜 좋니…… 그런데도 그걸 보냈어? 어떻게든 말렸어야지.

자야 백 번은 그러고 싶었지만… 다 내 이기심인거니까. 서방님께 폐가 되는 일이 될 듯해서.

세화 (안타깝다)이기심이라니. 둘은 어엿이 사랑하는 사이잖아.

자야 우리야 그렇지. 하지만 세상눈에는 떳떳하지 못한 걸. (살짝 북받쳐서) 세화 야, 나는 두렵다. 내가 괜히 그분의 앞길을 막게 될까봐. 그분을 못살게 굴까 봐.

세화 (슬퍼서) 나도 참 서러워. 기생은 맘대로 연애조차 할 수 없는 세상이. 내 배 필이 뻔히 다른 여인과 혼인하게 될 판국에도 순순히 보내줘야만 한다는 게……어쩜 이렇게 가혹하니.

자야 (말없이 듣는다)

세화 (걱정스럽게) 그래도 너무 상심치는 마. 끼니도 좀 챙기구. 응?

자야 (말없이 웃다가) 아참, 경성엔 언제 올라가니? 곧 떠난다고 했지.

세화 그래, 이런 널 두고가야 하는 게 영 맘이 쓰이지만…

자야 내가 애도 아니구, 걱정 말어.

세화 (자야의 손을 잡아주며) 언제라도 놀러와. 알았지?

자야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S#14-1(경성, 백석의 집)

백석은 홀로 탁상 앞에 앉아 시를 쓰고 있다.

그때 백석의 아내가 차를 들고 들어온다.

아내 우롱차를 내왔습니다. 향이 아주 좋아요.

백석 (외면하며) 고맙습니다, 두고 가오.

아내 …언제까지 저를 안 보실 생각입니까?

백석 (사이) 첫날부터 말했다시피, 내게는 이미 정인이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 대와 혼인하였으나 마음을 내줄 수는 없어요. 미안합니다.

아내 (씁쓸하게) 저도 원치 않았고, 다 알고는 있었음에도… 서글퍼지는 건 어찌할 수 없네요.

백석 (진심으로) 미안해요.

아내 마음까진 아니어도, 눈길 정도는 내어줄 수 있지 않나요?

백석 눈길이 가는 곳에 마음 또한 따라 걷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내 ……가보겠습니다.

백석 나를 마음껏 원망하세요.

아내 (체념하듯) 됐습니다, 서방님 또한 피해자인데요. 그럼…….

아내는 가볍게 목례하며 나간다.

백석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말이 없다, 다시 시를 쓴다.

시를 쓰는 백석의 모습이 점점 흐려지고, 내레이션이 흘러나오면서 바닷가를 거닐고 있는 백석의 모습으로 화면이 서서히 전환된다.

S#14-2(바닷가, 해질녘)

슬픈 얼굴로 바다를 바라보며 걷는 백석.

내레이션과, 자막이 깔린다.

백석 (N) 바닷가에 왔드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뒤선 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는 것만 같구려

바닷가는

개지꽃에 개지 아니 나오고

고기비눌에 하이얀 햇볕만 쇠리쇠리하야

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섧기만 하구려

-백석 <바다>

페이드아웃.

S#15(함흥, 자야의 집, 아침, 가을~)

페이드인.

마루에 앉아 멍하니 대문 쪽만 바라보고 있는 자야.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자야 누구세요?

끼익-문이 열리고, 누군가 손에 쥔 꽃다발만 불쑥 튀어나온다.4)

자야 (어리둥절해하다가, 떨리는 목소리로)설마…여보?

백석 (들어오며)자야, 드디어 돌아왔어.

자야 (울 것 같은 얼굴로 가만히 바라본다)

백석 (팔을 벌리며) 보고 싶었어, 한시도 빠짐없이.

자야 (멍하니 바라보다, 달려가 그의 품에 안긴다.)

백석 (미소 지으며) 이제야 살 것 같네.

자야 (백석의 품에 고개를 파묻고 흐느끼듯) 왜 이제야 오셨어요? 한참을 기다렸어 요. 다 이해하려고 하면서도… 두려웠어요. 이대로 영영 아니오실까봐.

백석 내가 그럴 리가 없잖은가. 우리 자야를 두고, 십 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날 게 뻔한데?

자야 능청은, 이천리나 잘도 갔다 오셨으면서.

백석 (꽃다발을 건네며) 자야, 받아줄래? 당신을 꼭 빼다 박았길래.

자야 치, 이런 걸루… (꽃다발을 받는다)

자야 (꽃만 쳐다보며, 망설이다) 그래서… 어떻게 되셨어요? 결국… 장가 드셨지 요?

백석 어? 그걸 어떻게… (미안해서, 고개를 숙이며) 미안해, 자야. 내 할 말이 없 어.

자야 (애써 괜찮다는 듯, 웃는다)

백석 (다시 고개 들며) 그래도 나, 눈길조차 안 줬어. 내가 그랬잖아. 자야 아닌 다 른 여자는 쳐다보기도 싫다고.

자야 …잘하셨다고 하면 안 되는데, 잘하셨다고 하고 싶은 제가 얄궂네요.

백석 (가슴 아파서 말없이 바라보다, 슬퍼서) 나는 이전이나 지금이나 늘 당신뿐이 없는데… 이제는 그런 말을 해도 진실이 되지 못하는 걸까.

자야 (사이) 아녜요, 사실이 어떻던, 제가 믿으면 그것은 진실이고 진심이 되지 않 겠어요.

백석 자야….

자야 (애써 의연하게) 일단은 들어가요, (백석을 잡고 집 안으로 들어가며) 조찬은 드셨나요? 왜 이리 이른 아침부터 달려오셨어요.

백석 (생각하다 결심한 듯, 들어가려는 자야를 잡아 멈춰 세우며) 자야, 내 할말이 있어. 본가에 있는 동안 죽 고심한 거야.

자야 네?

백석 나와 만주에 가자.

자야 만주를요…? 어째서...

백석 그곳으로 떠나 살자. 말했었지. 세상의 불필요한 소음 같은 건 다 던져버리 고… 여생을 둘이 오붓하게, 오순도순 사랑하면서. 응?

자야 (놀라서) 여보……그치만, 저 하나 때문에 그렇게까지…

백석 내 세상은 당신뿐이 없다고 하였잖아. 나라든 장소든, 그게 중요한가. 당신이 있는 곳이 곧 내 세상인데. (다시 한 번) 나와 함께 가자.

자야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인다)

S#16(그날 밤, 방 안)

자야와 백석은 함께 이불을 덮고 누워있다.

자야 …주무세요?

백석 (막 잠들려다가) 응? 아직.

자야 그런데 정말로, 두렵지 않으세요? 먼 타지까지 나가서 산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더군다나 이곳에 어엿한 직장도 가문도 있고, 앞으로 더더욱 출 세할 수 있으신데.

백석 (졸려서) 자야… 그런 건 죄다 신경쓰지 마. 말했잖아. 나는 당신만 있으면 된다고….

자야 하지만……

말을 잇지 못하는 자야.

정적이 흐르다, 몸을 돌려 백석을 바라보면, 그는 어느새 곤히 잠들어있다.

자야 (혼잣말로 읊조리듯)……제가 당신의 앞길에 놓인 짐짝이 된 것만 같은 걸 요.

페이드아웃.

S#17(이튿날, 함흥역)

백석 (만주행 기차표를 들고 웃으며) 고마워 자야, 나와 함께 가줘서.

자야 (표정이 좋지 않다)

백석 가서 집도 구하고, 일자리도 구하고, 시도 쓰고… 땅이 넓으니 시 또한 넓어 지지 않겠어?

자야 …네, 그럼요. 저. 여보. 청이 하나 있습니다.

백석 응? 무엇이지?

자야 아까 오다본 붕어과자가 너무 먹고 싶어서요. 혹시 사와주실 수 있나요?

백석 그래? (귀여워서) 진즉 말하지 그랬어. 얼른 사올게.

백석은 붕어과자를 사러간다. 가다말고 한 번 뒤를 돌며,

백석 (손을 흔들며) 금방 올게!

자야 (덩달아 손을 흔들며, 말없이 웃는다.)

백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자야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린다.) …미안해요, 여보.

자야는 고이 접은 쪽지를 백석의 짐 위에 올려둔다.

그녀는 제 짐을 챙겨, 뒤를 돌아 역 안으로 향한다.

S#18(잠시 후, 돌아온 백석)

붕어과자를 사들고 온 백석.

하지만 자야는 온데간데없고, 백석의 짐만 덩그러니 놓여있다.

백석 자야? 어디 간 거지…? 짐도 다 들고.

그때, 자야가 남겨둔 쪽지를 발견한 백석.

읽는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다, 사색이 된다.

백석 자야…… 자야!!!

자야를 찾아 뛰어가는 백석.

S#19(기차 승강장)

경성행 기차가 들어오고,

자야는 기차에 오르기 전, 슬픈 얼굴로 옆을 바라본다.

자야 안녕, 나의 연인.

기차에 오르는 자야와, 자야를 찾아 헤매는 백석의 모습이 한 화면에 교차되며 엔딩.

3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S#20(경성, 세화의 집)

세화가 들어온다.

둘은 앉아서 대화를 나눈다.

세화 진향아, 중반은 먹었니?

자야 응, 대강 먹었어.

세화 요 근처에 괜찮은 가락국수 집이 생겼다기에, 거기나 갈까 했는데…

자야 (힘없이)다음에 가자. 고마워.

세화 갈수록 말라가선… 그러니까 왜 경성으로 왔어, 같이 만주에 가지.

자야 (고개를 저으며)그건 너무 이기적이잖아. 그분께 너무 죄송스러운 일이야.

세화 그렇다고 무턱대고 경성으로 올라와?

자야 그냥, 그 순간은 그분의 일생에서 내가 영영 사라져주는 게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젠 혼인도 하신 몸이고, 나만 없으면 어여쁜 부인과 함 께 일도 하고 시도 쓰며 행복하게 살아가실 분이잖아.

세화 (안타깝다)

자야 그래도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아니면 당장 잘 곳도 없었을 텐데.

세화 말도 마, 갑자기 짐 싸들고 눈물범벅돼서 나타난 널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자야 (웃으며) 하하. 그랬었지. 그것도 벌써 보름 전 일이네….

세화 (망설이다) 후회되지는 않니? 그립지는 않고?

자야 후회되지. 그립고, 보고 싶고……

세화 그럼 돌아가는 건…

자야 내가 무슨 염치로 그러겠어. 아마 나를 무척 원망하고 계시겠지.

세화 …….

자야 아무튼, 조만간 방을 구해 나갈 수 있을 거야. 미안, 너무 오래 신세를 졌네.

세화 아니야, 어차피 나 혼자 사는 집인데 보름 가지고. 더 있다가도 된단다.

자야 (고개를 젓는다) 아니야. 어떻게 그래.

세화 …(무언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자야를 바라본다.)

두 사람의 모습이 풀 샷으로 멀어지며 그 위로,

3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소제목이 뜬다.

S#21(경성, 길거리, 낮, 초겨울~)

세화는 양손에 장을 한가득 보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때, 누군가 짐 한쪽을 들어준다.

백석 너무 무거워보입니다.

세화 (고개를 돌려 백석임을 보고 놀라서)!!! 백석?

백석 (애써 미소 짓지만, 몹시 지쳐 보인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세화 여긴 어떻게…

백석 그 사람을 찾아왔어. 아마도, 네 집에 있을 듯한데.

세화 (당황하여 눈알을 굴리며) 글쎄, 나는 잘.

백석 …(담담하게)나는 이제 갈 곳이 없어. 자야를 찾아내기 전까진, 어디든 나 아갈 수 도, 돌아갈 수도 없으니까. 위치를 알려주지 않는다면 평생을 경성 한 복판을 떠도는 부랑자가 되어 처절한 생을 마감하게 되겠지.

세화 (안쓰럽지만, 애써)지금 협박하는 건가요?

백석 협박이라니, (다소 진지하게) 간청이오.

세화 (고민하다)그렇지만 만일, 자야가 함께 가기 싫다고 하면

백석 (끄덕이며)받아들여야겠지. 다만, 대화를 나누고 싶은 거야. 한번이라도 눈에 담고 싶은 거고.

세화 (백석을 바라본다)…따라오세요.

S#22 (세화의 집)

자야는 홀로 마루에 앉아 발장구를 치고 있다.

그때, 대문이 열린다.

자야 세화야, 왔…!!

백석 (슬프게 미소 지으며) 자야.

세화 (눈치 보며)미안하다, 도저히 뿌리칠 수가 없어서….

자야 (당황하며, 백석의 눈을 피한다)

백석 (다가가서, 자야와 눈을 맞춘다.) 나 좀 봐 줘. 보고 싶었는데.

자야 (떨리는 눈으로 백석을 바라본다. 눈물이 날 것 같고)

백석 …일단 나가서 좀 걸을까? (세화를 흘깃 보며) 보는 눈도 있고 한데.

세화 그래, 나가서 경성 구경도 좀 하고, 진득하게 이야기도 나누고 와. 둘 다 얼 굴이 반쪽이 됐잖아. 맛있는 것도 좀 먹고.

자야 (고개를 푹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난다.)

백석과 함께 나가는 자야.

세화 (한시름 놓으며) …괜찮겠지? 저런 걸 참사랑이라고 하는구나.

세화는 봐 온 장을 정리한다.

S#23(길거리, 저녁~밤)

백석 아까 그 집, 참 맛있었지? 역시 당신의 친구라 그런가. 맛집을 잘 아네. 간만 에 괜찮은 국수를 먹었어.

자야 그러게요. 맛이 좋았어요.

백석 …그치만 자야, 당신은 잘 먹지도 않던걸. (손목을 잡으며) 이렇게 말라서 되 겠어? 이제부터 토실토실하게 살 찌울 테니까, 각오하라고.

자야 무슨, 잡아먹으시게요?

백석 그럼. 지금은 영, 한 입 거리도 안 되겠어.

자야 하하.

백석 드디어 웃어주네.

자야 (다시 웃음을 멈춘다)

백석 (눈치 보며) 방금 말은 괜히 했나? 난 그저 웃는 게 고와서.

자야 그냥 웃음일 뿐인데요, 뭘.

백석 (가만히 자야를 바라본다)

말없이 걷는 두 사람.

멀찍이서 세화의 집이 보인다.

백석 벌써, 다 와가네.

자야 …….

백석 한동안은 여기서 지내는 건가?

자야 곧 나갈 거예요. 방을 구해서.

백석 돈은 있나?

자야 모아둔 돈이나… 여기서 기생 일을 하며 벌고 있지요.

백석 그렇구나.

자야 (사이)벌써 다 왔네요.

백석 길이 참 짧네. 더 같이 있고 싶었는데.

자야 …….

백석 어여 들어가, 시간도 늦었는데.

자야 (고민하다) 저, 왜 안 물어보시나요?

백석 응?

자야 그때… 왜 도망쳤는지, 왜 말도 없이 떠났는지.

백석 (듣고 있다)

자야 (점점 감정이 북받쳐서)저를 원망하셔야죠. 꾸짖으셔야죠. 화를 내셔야죠.

백석 (한참 말이 없다가)내가 어찌 감히 그러겠나.

자야 !

백석 내가 어떻게 당신을 원망하겠어. 다시 만난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기쁜데, 어 떻게 화를 내겠어. 예뻐하기도 모자란데.

자야 …당신, 정말이지...

백석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 같아. 당신의 행동에는 다 연유가 있겠지. 설 령 없다하더라도… 당신이 하는 일은 없는 연유를 만들어서라도 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자야 (눈물이 흐른다) 도대체 왜, 제가 뭐라고….

백석 뭐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여인이지.

자야 (눈물을 닦으며) 그런데 왜… 돌아와 달라거나, 다시 떠나자거나, 혹은, (머뭇 거리다) 이별하자거나… 아무런 말씀도 안 하시나요? 이대로 말없이 떠나시게 요? 아니면 아무 일 없던 듯, 내일도 다시 와주실 건가요?

백석 (대답 없이, 희미한 미소만 짓다가, 봉투 하나를 자야의 손에 쥐어준다.)

자야 ?

백석 가볼게.

뒤돌아서 떠나는 백석.

자야는 붙잡지 못하고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봉투를 연다.

긴 시가 적힌 종이가 들어있다.

자야 (종이를 펼쳐 읽으며)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백석 (N)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5)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6)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5) 백석의 내레이션이 흘러나올 때부터, 자야를 그리워하며 시를 쓰는 백석의 모습으로 장면이 바뀐다. 실제로 눈 내리는 걷기도 한다.

자야 (달려와서 백석의 손목을 붙잡으며) 서방님!!

백석 (멈칫하고, 뒤를 돌며) 자야..

자야 미안해요.

백석 미안하다는 말은 줄 필요 없어.

자야 그러면…

백석 (애달프게) 내가 진정 받고 싶던 건 따로 있는데.

자야 ……사랑해요.

백석 (자야를 껴안는다)

포옹하는 두 사람.

달빛이 환하게 두 사람을 비춘다.

6) 여기서부터 편지를 읽고 백석을 찾아 뛰어가는 자야의 모습으로 장면이 바뀐다.

S#24(경성, 주막(세화의 집으로 대체 가능))

백석, 자야, 세화는 옹기종기 모여 앉아 술을 마시고 있다.

세화 안 피곤합니까? 함흥에서 여까지 왔는데.

백석 괜찮네, 우리 자야를 보니까 다 충전이 돼서.

자야 참, 세화 앞에서 그러지 마시라니깐. 쑥스럽잖아요.

세화 진짜, 옆구리가 허전해서 살겠나… 대단도 하십니다. 함흥과 경성을 오가는 장거리 사랑이라니. 주말마다 내려오기도 힘들지 않으세요?

자야 나도 그래서 너무 죄송스러워.

백석 힘들긴 하지, 그래서 아예 여기로 눌러 살려고.

세화,자야 (동시에 놀라서 백석을 보며) 네?

백석 뭘 그리 놀라나? 교사직에 사표를 내게. 너무 오래 일하긴 했어.

자야 그럼 집은요? (사이) 본가에 들어가시는 건가요?

백석 아니지. 당신과 함께 살아야지.

자야 네?

백석 우리 함께 살자. 함흥에서처럼 가까운 곳에 살자는 게 아니고, 아예 살림을 합치자는 말이야.

자야 여보..!

백석 진짜 부부가 되는 거지. 매일 잠들기 전에, 일어나자마자 서로 얼굴 마주하면 그게 곧 부부 아니겠어?

세화 (헛기침하며) 저기, 그런 얘기는 제발 둘만 있으실 때 하시지요? 허구한 날 누구는 없는 취급한 채 사랑을 나누시니. 정말, 머쓱하고 서러워서 못 살겠 네.

백석 내 벗이라도 소개해줘? 자야도 몇 번 만나서 아는데, 다 괜찮아.

세화 나 참,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요!

자야 (웃으며) 미안해. (장난스럽게 백석을 노려보며) 그러게, 그러지 좀 말라니까 요. 애정표현은 자중하셔요.

백석 (억울해서) 왜 나를 혼내 키나?

세화 (웃으며) 다들 술이나 들어요.

화기애애하게 웃고 떠들며 술을 마시는 세 사람.

S#25(경성, 백석과 자야의 신혼집, 마당)

백석은 집을 바라보고 있다.

자야가 와서 선다.

자야 왜 여기 서 계시나요?

백석 그냥, 우리가 이곳에서 동거한다는 게 새삼 신기하고 좋아서. 믿기지가 않고.

자야 (웃으며) 함께 산지 벌써 이레나 됐는데 아직도 그러세요?

백석 벌써라니, 겨우지. 앞으로 한평생은 같이 살 것인데.

자야 참… 줄 것이 있는데.

백석 응? 줄 것?

자야 눈 좀 감아보셔요.

백석 (기대하며 눈을 감는다.)

자야 (넥타이를 매준다) 이제 뜨셔요. 선물이에요.

백석 (넥타이를 보고, 기뻐서) 넥타이?

자야 (수줍게) 그냥, 늘 받기만 한 듯 하여… 별 건 아니지만은… 잘 매주세요.

백석 (신나서) 당연하지! 자야. 나는 백날 천날 이 넥타이만 맬 거야. 넥타이가 닳 거나 하지는 않겠지? 잘 때조차도 목에 걸고 자야겠어.

자야 (부끄러워서) 또, 또 과장하신다!

백석 진짜인 걸? 자야, 사랑해!

백석은 기뻐하며 자야를 껴안는다.

S#26(백석과 자야의 신혼 집 앞)

백석은 꽃다발을 사들고 온다.

백석 우리 자야가 좋아하겠지?

그런데, 집 앞에 서 있는 한 남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백석 누구…

백석부 (뒤를 돌며) 이제야 오는 게냐?

백석 (놀라서) 아버지! 기어코 집까지 찾아오셨습니까? 여긴 어찌 아시고.

백석부 (무표정으로) 네가 드디어 정신이 나갔구나?

백석 !

백석부 당장 돌아오거라. 해야 할 일이 많아.

백석 해야 할 일이라뇨,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백석부 본처는 내팽개쳐놓고, 기생과 살림이나 차려? 참 잘하는 짓이구나.

백석 그분과는 이미 다 정리한지 오래지 않습니까.

백석부 그래, 그건 됐어. 허나 이혼을 했으면 재혼을 해야지.

백석 그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저보고 또 혼인을 하라고요?

백석부 그게 뭐? 흔한 일이다. 물론 네가 진작 처음부터 백년해로를 했더라면 이럴 일이 없었겠지만.

백석 말도 안돼요. 또 그 사람의 가슴에 대못을 박을 수는 없습니다.

백석부 네 부모 가슴에 대못을 박는 건 괜찮고?

백석 …….

백석부 석아. 네가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백석 …….

백석부 네가 그토록 애정하는 그 기생은, 정 무사할 것 같으냐?

백석 무슨, (표정이 변하며) 아버지! 설마…!

S#27(같은 시각, 길거리)

자야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한 손에 장을 든 채 걷고 있다.

그런데, 낯선 남자가 그녀의 뒤에 나타난다.

성큼성큼 자야에게로 다가서는 남자.

자야에게 팔을 뻗는다.

자야 (인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며)!!

엔딩.

4화(최종회)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S#28(길거리)

자야 (뒤를 돌아보며) !!

자야 (놀랐다가, 누군지를 보고) 어머, 오랜만이어요!

친구 하하, 누군가 했는데, 역시 자야 씨가 맞구려?

자야 갑자기 어깨를 잡으셔서, 깜짝 놀랐지 뭐예요.

친구 미안해, 반가운 마음에…….(짐을 들어주며)석이는?

자야 아마도 집에 계시지 않을까요? 출타를 하셨거나.

친구 그렇구먼. 그런데 요새…석이는 괜찮나?

자야 네? 괜찮다뇨?

친구 어? 음… (생각하다, 말을 돌리듯)암 것도 아니네. 이제 동절긴데 둘 다 고뿔 안 들게 조심하고.

자야 (의아해하며) 네? 네...걱정해줘서 감사해요. 오랜만에 식사라도 함께 하고 가 실래요?

친구 아냐, 선약이 있어서. 이것만 집까지 들어줄게.

자야 괜찮아요! 별로 무겁지도 않은데요. 저 주세요. (짐을 가져간다)

친구 그러면 난 가볼게, 다음에 또 봅세.

백석의 친구는 손을 흔들며 제 갈 길을 간다.

자야 (갸우뚱하며) 그나저나 괜찮나, 무슨 말씀이시지… 그냥 안부인가?

홀로 걸어가는 자야의 뒷모습 위로,

최종회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소제목이 뜬다.

S#29 (백석과 자야의 집, 겨울~)

백석이 술에 취해 들어온다.

백석 자야~~ 우리 자야~~

자야 (놀라서 달려 나가며) 여보!! 또 만취하신 거예요?

백석 만취라니. 만취까진 아닌데. 천취야, 천취.

자야 무슨 그런 농담을… (백석을 부축하며) 요새 왜 이렇게 술을 자주 하세요. 잘 드시지도 못하면서.

백석 그치, 난 술을 잘 못하지. 우리 자야는 잘 하는데.

자야 저도 그리 잘하는 건 아닙니다. 어휴, 무거워라.

백석 (갑자기 진지하게) 내가 많이 무겁나?

자야 네?

백석 미안해, 내가… 내가 많이 무겁지? 내가 너무 무겁게 하지.

자야 무슨… (당황하여) 농이었어요. 그렇게 무겁지는,

백석 나는 무거워. 이 세상이… 내게 너무 무겁다. 그래서 덩달아 당신도 무겁게 할까봐, 내 무게 하나 못 견뎌서 함께 휘청이게 될까봐… 그게 너무 무섭다.

자야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무슨 일 있으신 거지요?

백석 (눈을 감고)자야...자야아....

자야 네, 저 여기 있어요.

백석 늘 거기 있어줘...자야....자야....나도 자야지...

자야 네?

백석 (잠든다)

자야 여보? 서방님? (어이가 없어서) 진짜 주무세요? 허….

자야는 잠시 걱정스럽게 백석을 바라보다가, 그를 끌고 집 안으로 들어간다.

S#30(세화의 집)

둘은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세화 (놀라며) 뭐? 또 혼인을 했다고?

자야 (끄덕이며) 어쩔 수 없지. 어쩐지 근래에 줄곧 집에 잘 안 들어오시더니.

세화 그래도…너무한 거 아니니? 아무리 네가 기생이라지만!

자야 (착잡하게) 요새 상황이 많이 힘드신가봐. 한동안 서방님이 과음하시던 시기 가 있었거든. 친구 분께 얼핏 들은 얘기도 있고해서, 친구 분을 찾아가서 여 쭈어 봤는데… 가정 내 불화가 극심하다고 하셨어. 맘고생도 심하시고.

세화 (뭐라 해줄 말이 없다, 술만 마신다)

자야 (술을 마시고, 점점 취기가 오른다) 세화야, 나는 정말… 그 분의 발목을 붙들 고 있는 거겠지?

세화 그런 생각 하지 마. 그래도 그 분은 널 가장 사랑하시잖아.

자야 (생각하다)사랑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은 것 같아. 반대로, 사랑이 할 수 있는 일은……나는 왜 한가지 밖에 떠오르지 않는 걸까.

세화 어? 설마, 너 또…

자야 (말없이 술을 먹다가, 감정이 북받쳐서) 세화야… 나 너무 힘들어. 실은, 며칠 전에 그분의 아버님께서 찾아오셨어.

세화 뭐? 정말로? 뭐라고 하셨는데?

자야 (눈물이 날 것 같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세화 (달래며) 아니다, 안 들어도 알 것 같아. 힘들면 말하지 마.

자야 차라리 나 혼자만 힘든 거면 괜찮아. 그렇지만, 나한테까지 찾아와 저런 말씀 을 하실 정도면… 서방님은 얼마나 힘드실까? 여태 묵묵히 견디고 계셨던 거 잖아. 나만 아니었어도 겪지 않아도 됐을 일들을.

세화 (가만히 듣고 있다)

자야 나는 오래전부터 자꾸만 내가 짐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게 정녕 옳은 관계 일까.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 열녀 강명화의 심경이 어떠했을지 비로소 이 해가 돼. 그녀가 왜 그런 정사(情死)를 저질렀을지가.

세화 (놀라서) 뭐? 강명화? 진향아, 너 설마 그런 몹쓸 생각까지 하려는 건 아니 지?

자야 (힘없이) …응. 그건 아니야. 서방님까지 나락으로 떨어트릴 수는 없지…. 나 만 떠나면 되는 것을.

세화 (자야의 손을 잡아주며) 그렇게 힘들면, 차라리 멀리 떠나자. 이대로 있다가는 네가 정말 그런 무서운 선택을 할까봐 겁이 나. 떠나도 이승으로 떠나야지. 응?

자야 (간절하게)함께 가줄 거니? 나, 이 조선을 떠나고 싶어.

세화 그래. 이런 널 어떻게 혼자 보내겠어. 영영 뜨는 것은 무리여도, 머리라도 잠 시 식혀야지. 세상만사에 떨어져서 생각을 정리하면 한결 나아질 거야. 진짜 상황이 좋아질 수도 있는 거구.

자야 고맙다, 세화야. 넌 내 평생의 벗이야.

S#31(항구, 상해로 떠나는 세화와 자야)

세화와 자야는 상해행 배에 오른다.

S#32 (자야와 백석의 집, 달포 뒤)

‘달포 뒤’ 라는 자막이 뜸.

백석은 멍하니 마루에 앉아있다.

그때, 문이 열리고 편지를 가득 든 자야가 들어온다.

백석 (놀랐다가, 침착해져서) 자야.

자야 편지를 한가득 보내셨더라고요. 세화의 집으로.

백석 행방도 모르고, 소식도 모르고, 기약도 모르는데…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었거든. 언젠가 당신이 봐주기만을 기다리는 일.

자야 .....

자야는 백석의 옆에 가 앉는다.

잠시 적막이 흐른다.

자야 또 안 물어보시나요? 어딜 갔다 이제 왔는지, 왜 가버렸는지.

백석 왔으면 됐지.

자야 (차가운 백석의 모습에 조금 눈치를 보다)마지막 편지에, 이걸 보면 꼭 와달 라고 하셨지요. 전할 말이 있다고.

백석 그래.

자야 무슨…

백석 (단호히) 나, 만주로 떠나게 됐어.

자야 네? (놀라다가, 서러움과 당혹스러움이 몰려와 울음을 터트린다)

백석 (잠시 바라보다 한숨을 쉬고, 그녀를 안아 토닥여주며 덩달아 슬퍼진 느낌으 로)진작 가버렸을 것을… 당신을 아니 만나보고… 혼자선 차마 떠날 수가 없 었어.

자야 (몸을 떼며) 왜…갑자기 그런 결정을 하셨나요? 정말로 가시려는 건가요?

백석 모든 것에 너무 지쳤어. 당신은 죄 없이 거듭하여 쫓겨나고, 나 또한 집에 들 어가서 편안히 등을 붙일 단 한 칸의 방이 이 땅에는 없는 일에.

자야 (안쓰럽다)

백석 나는 더는 이곳에선 살 수가 없어. 이런 내게 유일한 안식처던 당신은, 툭하 면 달아나고, 말도 없이 도망가고…

자야 (고개를 숙인다)

백석 달아나도 나와 함께 가야지. 그래야지.

자야 여보...

백석 나와 함께 가자. 더러운 세상은 다 벗어버리고 만주로 가서, 함께 살자.

자야 여보, 저는……

자야는 한참 망설이다, 결심한 듯 입을 연다.

자야 (고개를 들며, 애써 침착하게) 여보, 사람의 연 중에서도 가장 절대적이고 질 긴 것이 바로 핏줄인데, 아무리 떠난다한들 그것을 매몰차게 끊어버릴 수 없 다는 건 아시잖아요. 하물며 이 사태의 근원은 저에게 있을 텐데, 함께 떠나 기까지 한 걸아시면… 더는 서방님의 불화에 불씨가 되고싶지 않아요. 제 양 심이 허락지않아요.

백석 …지금 나를 말리는 건가? 여태 내 말을 듣고도?

자야 네. 하지만 정히 가야만하시겠다면, 조용히 혼자 떠나서 작품이나 많이 쓰셔 요. 그러다 한두 해만 지나면 상황도 제법 달라질 것이고, 부모님께서도 노여 움이 풀리시겠지요. 그때까지 유학 가신 셈 치고 참고 지내다가 서서히 돌 아오셔요.

백석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나보고 홀로 가라고?

자야 (망설이다, 단호하게) 네. 저는 갈 수 없어요.

백석 (격양돼서) 결국, 또 나를 버리는 건가? 사람이 어찌 이리 모멸 차!

자야 (마음이 아파서) 버리다니요, 어찌 그런 말씀 하세요

백석 (분함과 동시에 울 것 같은) 만일 이대로 영영 나를 못 보아도?

자야 (슬픔을 참고 애써 달래듯)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다고 하셨잖아요. 아무리 몸이 멀어진다하더라도 제 마음가엔 항상 당신이 사는 걸요. 우리는 결코 멀어지지 않아요.

백석 다 허울 좋은 소리인 것을! 어서 일어나. (애절하게) 정녕 나를 사랑한다면 함 께 가야지. 함께 떠나요, 응?

자야 (결국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젓는다) 저는 갈 수 없어요. 제발, 혼자 떠나주 셔요.

백석 (말없이 눈물을 흘린다)

자야 영영 헤어짐이 아니에요. 잠시 물러나는 것뿐이에요. 시간이 많이 지난 후 에… 꼭 다시 만나요. 다시 사랑을 해요.

백석은 상처받은 얼굴로 자야를 말없이 바라본다.

정적이 흐른다.

백석 (다소 진정해서) 내가 아무리 붙잡고 애원해도, 당신은 굽히지 않을 거지? 설 령 강제로 데려가려해도, 홀연처럼 떠나버릴거지.

자야 (사이) 제가 미우시죠?

백석 밉소.

자야 !!

백석 너무 미워, 그치만…

백석은 자야에게 다가간다.

백석 (자야의 눈물을 닦아주며) 내가 당신을 어찌 진정으로 미워하겠나.

자야 여보….

백석 조금도 아프지 말고, 춥지도 말고.

백석 잘 지내요.

자야를 지나쳐 나가버리는 백석.

자야는 백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그가 완전히 사라지자 주저앉아서 엉엉 운다.

페이드아웃.

S#33(북한, 10년 뒤, 공원 벤치, 초여름)

페이드인.

자막-10년 뒤, 1950年 6月.

백석과 그의 친구는 벤치에 앉아 대화를 나눈다.

친구 서울로 가겠다고?

백석 그래.

친구 어째서? 그토록 지긋지긋해서 떠난 곳 아니었나. 네 고향도 여기 정주고.

백석 (회상하듯, 살짝 미소 지으며) 그러했지. 그러하나,

친구 ?

백석 두고 온 인연이 있어서.

백석 꼭 다시 찾아야만 하거든.

친구 인연? (생각하다) 설마, 자야?

백석 (대답 없이 미소만 짓는다)

친구 (놀라서)벌써 10년 전 인연을 아직도 못 잊었나? 자네도 참 징하네.

백석 사는 내내 못 잊을 인연 하나쯤은 다들 품고 살지 않나.

친구 (고개를 저으며) 허, 글쎄다.

백석 (말없이 하늘을 바라본다)

S#34 (전쟁 화면)

경보가 울리고 북한군이 남침했다는 속보가 터진다.

전쟁이 일어났음을 보여주는 장면이 한동안 지나간다.

S#35(3년 뒤, 서울, 다방, 여름)

자막- 1953年, 7月 1日

자야는 홀로 앉아 공책에 무언가를 적고 있다.

그때 세화가 맞은편에 와 앉는다.

세화 미안, 오래 기다렸니?

자야 (공책을 닫으며) 아니야. 나도 좀 전에 왔어.

세화 (손부채를 치며) 날씨가 왜 이리 더운지. 넌 이번에 졸업한다고 했나?

자야 (고개를 끄덕인다)

세화 새삼스레 대단하다. 우리 다 권번에서 기생일이나 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넌 중앙대 영문과씩이나 졸업하구. 참 성공했어.

자야 (씁쓸하게 웃는다) 그러게, 진작 이랬었으면… 달라졌을까.

세화 응?

자야 아무것도 아니야.

세화 (생각하다)아… 또 그분을 생각하는구나.

자야 ....

세화 (조심스레) 아직도 많이 그립니?

자야 (창밖을 보며, 담담하지만 쓸쓸하게) 평생의 한이지, 뭐. 그때 그분을 따라갔 어야만 하는데. 이토록 세상이 달라져서 평생 아니 보게 될 줄 알았다면.

세화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너무 후회하지 마.

세화 (분위기를 환기시킬 겸 밝게) 얘, 우리 밥이나 먹으러 가자. 요 근처에 기가 막힌 양식집이 생겼다는데, 먹어봤어?

자야 (가만히 듣고 있다가, 미안하다는 듯 웃으며) 아니. 그치만 오늘은 안 될 것 같아.

세화 응? 왜 그러니? 속이 안 좋아?

자야 ……응. 그런 셈이지. 나 잠시 변소 좀 다녀올게.

세화 어? 그래. 다녀와.

자야가 일어나가고, 세화는 문득 테이블에 놓인 자야의 공책을 발견한다.

세화 이게 뭐지?

공책을 펼치자, 과거 백석이 써준 ‘白石’ 이 보이고, 그 뒤로는 빠르게 넘기다가, 마지막으로 글이 써져있는 페이지에서 멈춘다.

(공책 클로즈업)

자야 (N) 여보, 오늘은 당신의 생일입니다. 저는 아직도 유독 당신의 생일날만 되 면, 그리움과 후회가 목 끝까지 차올라 어떤 것도 못 먹겠어요. 당신을 삼켜 내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아무것도 삼킬 수가 없습니다. 쉼 없이 흐르는 시간 과 하루바삐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다만 변하지 않는 게 하나 있다면, 그건 제 그리움일 것 같아요. 그런데 과연 당신도… 아직 자야를 그리워하실까요. 기억 해주실까요?

S#36 (북한의 어느 길거리, 가을)

백석은 언젠가 자야가 선물해준 넥타이를 맨 채, 씁쓸한 얼굴로 길가를 홀로 거닐고 있다.

백석 (N)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잠풍 날씨가 너무나 좋은 탓 이고

가난한 동무가 새 구두를 신고 지나간 탓이고 언제나 꼭 같은 넥타이를 매고 고운 사람을 사랑하는 탓이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또 내 많지 못한 월급이 얼마나 고마운 탓이고

이렇게 젊은 나이로 코밑수염도 길러보는 탓이고 그리고 어느 가난한 집 부 엌으로 달재 생선을 진장에 꼿꼿이 지진 것은 맛도 있다는 말이 자꾸 들려오 는 탓이다

백석<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S#37 (다시 1999年, 자야의 집)

여자 (사이) 정말 안타까운 사랑이야기에요. 제가 다 마음이 아파요.

老자야 ....

여자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천억 원이나 넘는 재산을 기증하기로 결정하는 건 쉽 지 않으셨을 텐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아깝지 않으세요?

老자야 (사이) 천억 원?

S#38 (과거 회상)

S#23의 시를 건네주고 돌아선 백석에게, 자야가 달려와 포옹하는 장면(대사는 없이)위로 자야의 내레이션이 흐른다.

자야 (N) 고작 그런 게 아까울 리가 있나.

자야 (N) 천억 원이 그 사람 시 한 줄만도 못해.

fin.

연세춘추  chunchu@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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