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부할 수 없는 삶의 고통을 견뎌내는 법

 

아버지는 딴사람이 되어 있었어요.
얼굴은 일그러지고, 눈 안에서는 눈알들이 구르고,
눈의 핏줄들은 벌겋게 튀어나와 있었으며,
텁수룩한 수염에서는 거품이 뚝뚝 듣고 있었지요.

- 에우리피데스 『헤라클레스』

 

헤라클레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손꼽히는 영웅이다. 그러나 비극 시인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에서는 다르다. 에우리피데스의 작품 속 헤라클레스는 광기에 사로잡혀 잔혹하게 아내와 세 아이를 살해한다. 이 헤라클레스는 유달리 비극적이다. 흔히 그리스 신화에서 인간은 오만방자함에 대한 대가로 신에게 고통받지만, 헤라클레스의 광증에는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영화 『유전(Hereditary)』에서는 끔찍한 헤라클레스의 비극을 두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헤라클레스에게 운명을 바꿀 선택권이 있었다면 덜 비극적이었을까?”

 

피할 수 없는 비극,
“그냥 받아들여”

 

『유전』은 주인공 애니의 어머니, 엘렌의 장례식에서 시작된다. 낯선 방문객이 가득한 장례식의 분위기는 예사롭지 않다. 수상한 장례식이 마무리된 후에도 애니 가족에게는 연이어 이상한 일이 닥친다. 엘렌의 무덤이 훼손되는가 하면, 급기야 애니의 딸인 찰리까지 교통사고로 죽게 된다.

찰리의 죽음을 기점으로 애니와 남편 스티브, 아들 피터는 집 안팎에서 환영과 환각에 시달리고 빙의되는 등 기묘하고 두려운 상황을 마주한다. 이 모든 것은 열렬한 악마 숭배자였던 엘렌 때문이다. 엘렌은 악마를 소환하기 위해 그의 남편과 아들, 손자인 피터에게까지 손을 뻗쳤다. 종내에는 피터의 몸에 악마가 소환되며 영화가 끝난다.

한편, 피터의 학교 수업에서 이 음산한 영화의 주제의식이 비친다. 헤라클레스의 운명 선택권에 대한 교사의 질문에, 한 학생은 “헤라클레스는 선택권이 없었기에 더 비극적인 인물”이라고 대답한다. 선택권이 없는 비극과 있는 비극 중, 신이 부여한 존속 살해라는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한 헤라클레스의 고통이 더욱 비극적이라는 것이다. 이때 헤라클레스와 애니의 유사함이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애니에게도 가족의 참상이라는 비극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애니는 악마의 음모를 저지하려고 고군분투했지만, 3대에 걸쳐 이어진 가족의 비극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정해진 운명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유전』의 서사가 특히 무서운 이유는, 이처럼 인간이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의 잔혹함을 고스란히 그려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애니의 캐릭터 포스터에는 “지금 일어나는 일, 나만 막을 수 있어”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그러나 이를 비웃듯, 메인 포스터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가족은 선택할 수 없다. 그냥 받아들여”

▶▶ 영화 『유전』의 포스터. 애니의 가족에게 정해진 비극을 받아들일 것을 말하는 문구가 인상적이다.

 

우리를 엄습하는 ‘무의미함’의 공포

 

『유전』은 헤라클레스와 애니 가족이 직면한 부정한 운명을 그려내며, 선택할 수 없는 비극의 비참함을 부각한다. 선택권이 없는 비극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인간의 모든 발버둥을 무력화한다. 그렇기에 인간을 한없이 왜소하고 고통스럽게 만든다.

이어지는 맥락에서 인간은 어느 정도 비극적 존재라고 볼 수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삶의 고통이라는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근간에는 ‘삶과 고통은 불가분의 관계’라는 니체의 진단이 있다. 이에 인간은 고통을 견디기 위해 고통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한다. 우리대학교 철학과 김동규 강사는 지난 2009년 논문에서 “고통은 의미의 그물망에 들어올 때 비로소 견딜만한 것으로 변용된다”며 “현재의 고통은 미래의 사회적 성취 등과 연결될 때 참을 만한 것이 된다”고 부연했다. 예컨대 밤샘 공부는 누구에게나 어렵다. 그러나 이에 ‘진학과 취업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면, 그때부터 밤샘의 고통은 견딜만한 것으로 바뀐다.

 

사실 고통에 대해 사람을 분격하게 하는 것은 고통 자체가 아니라, 고통의 무의미함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

 

그러나 모든 고통을 의미화할 수는 없다. 일례로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맞이한 사람에게 상실의 고통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에게 고통은 ‘고통’ 자체일 뿐, 성장의 거름 따위의 이유를 부여할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누구에게나 의미화의 범주 밖에 놓인 고통은 존재한다. 또한 삶을 견디기 위해 고통에 의미를 부여한 노력이 무력해지는 순간도 필연적으로 도래한다. 고통을 끝낼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났기에, 인간은 비극적이다.

 

‘할 수 없어요’를 외칠 용기

 

오늘날은 특히 ‘고통의 의미화’와 ‘무력화’ 과정이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있다. 철학자이자 작가인 한병철의 『피로사회』 속 진단에 따르면 21세기는 성과사회며, 성과사회의 이상은 생산의 최대화다. 성과사회는 생산성 향상을 위해 사람들에게 ‘할 수 있음’의 도식을 주입한다. ‘할 수 있음’ 도식은 ‘불가능한 게 없다’는 긍정성의 과잉으로 직결된다. 이 점에서 사람들의 고통에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담보라는 의미가 부여된다고 할 수 있다. 무엇이든 참고 견디면 원하는 것을 모두 성취할 수 있다며 긍정을 강요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할 수 있음’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은 낙오자로 취급받는다. 한 작가는 “(성과사회의 사람들이) 할 수 있음을 할 수 없을 때 우울증이 발발한다”며 우울증이 이미 대중적인 현상이 됐다고 주장한다.

 

컴퓨터는 엄청난 연산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다. 머뭇거리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 한병철 『피로사회』 

 

▶▶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 그는 고통을 긍정하고 삶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자세를 강조했다.

 

이때 니체에게서 돌파구를 찾을 수 있다. 니체는 의미화의 과정을 거쳐도 완전히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그 고통조차 사랑하고 긍정할 것(운명애, Amor Fati*)을 제안한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이 견디기 힘든 고통을 끌어안는 경지에 오르는 길은 요원하다.

이에 앞서 니체의 다음 제안을 참고할 수 있다.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어떤 자극에 즉시 반응하지 않고 속도를 늦추고 중단하는 본능을 발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중단하는 본능은 ‘할 수 있음’의 반대인 ‘할 수 있음을 할 수 없음’이며, 일종의 쉼표인 셈이다. 또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며 스스로를 착취하던 것을 멈추고, “나는 할 수 없다”고 외칠 용기를 갖는 것이다. 무한 긍정의 성과사회 속에서 피할 수 없는 고통은 부정을 통해 완화된다.

 

우리는 주어진 비극적인 고통도 안고 갈 여유를 얻기 위해 ‘할 수 없음’을 연습해야 한다. 그 끝에는 나에게 주어진 삶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운명애(Amor Fati)’가 있을 것이다.

 

*운명애(Amor Fati): ‘운명에 대한 사랑’으로, 니체 철학에서는 삶과 고통을 그 자체로 수용하고 포용하는 자세를 의미한다.

 

 

글 이현진 기자
bodo_wooah@yonsei.ac.kr

<자료사진 네이버영화, 네이버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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