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진의 소설, 『딸에 대하여』를 읽는다

최명빈 (국문/문화인류·19)

널어놓은 옷가지들이 채 마르기도 전에 수북이 쌓이는 빨래들, 씻어놓은 그릇에 물기가 마르기도 전에 또다시 쌓이는 지저분한 그릇들, 분명 밥솥 가득하게 해 뒀는데 이내 동나는 밥, 매일 내놓아도 잠깐 사이에 작은 산을 이루는 쓰레기들, 태풍이 상륙해도, 폭우가 쏟아져도 밤이 지나면 누군가는 일터로 나가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한 달도 되지 않아 바뀌는 쌀 포대, 잊을 만하면 날아오는 공과금 고지서와 카드값 명세서. 삶을 떠받치는 건, 이다지도 하찮고 자질구레한 것들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에 묶인 사람들은 이렇듯 서로의 삶을 지탱하는 자질구레한 것들을 요구하거나, 충족해주며 살아간다. 서로가 서로에게 촘촘한 그물망처럼 얽힌 삶의 조건이 되는 것이다.

김혜진의 소설 『딸에 대하여』는 엄마, ‘나’의 말하기다. 화자는 필자가 앞서 말했던 하찮은 삶의 조건들만으로 이미 충분히 휘청거리고 있지만, 그린과 레인, 젠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나’의 그물망을 조여온다. 끝이 없는 고된 노동을 견뎌도 2층 셋방 수리비 하나 마련할 수 없는 화자가 집으로 돌아와 허겁지겁 수박을 퍼먹는 장면을 보고 있자면 필자라도 나서서 그린과 레인, 젠을 돌려세우고 싶을 지경이다. 그러나 적당한, 견딜 수 있을 만한 슬픔이란 없고, 힘들면 기다려주는 고통 따위 기대할 수 없는 우리네 삶이 그렇듯이 ‘나’가 할 수 있는 것은 딸 그린이, 딸의 친구도 애인도 아닌 레인이, 자신이 돌보는 환자 젠이, 한곳에 얽혀 자아낸 힘겨움을 겪어내는 것뿐이다.

‘나’의 딸 그린은 어느 날 갑자기 파트너 레인의 손을 잡고 ‘나’의 집에 들이닥쳐 ‘나’의 일상에 균열을 낸다. 요양보호사인 ‘나’가 돌보는 치매 환자, 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죽음을 향해 달려가며 ‘나’를 한시도 가만히 놓아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들은 내내 불화하면서도 ‘과연 누가 누구에게 가족이 돼줄 수 있는가’라는 묵직한 물음을 향해 함께 나아간다. 친구도 아니고 부부도 아닌 레인과 그린은 서로에게 가족이 돼줄 수 있을까? 젠과 ‘나’는 가족일까? 레인과 ‘나’는 가족일까?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는, 무연고자 젠을 향해 점점 더 노골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요양원의 비용 절감 요구를 보다 못한 ‘나’는 젠이 평생 후원했다던 띠팟을 만나고 오는 길에 주저앉는다.

세상에 그 여자는 어쩌자고 이런 한심하고 어이없는 일을 몇십 년 동안 한 걸까. 그게 뭐든, 언제나 받는 사람은 모르는 법이다. 그건 다만 짐작이나 상상으로는 알 수가 없는 거니까. 자신이 받는 게 무엇인지, 그걸 얻기 위해 누군가가 맞바꾼 것이 무엇인지, 그래서 그 돈이 어떤 빛깔을 띠고 무슨 냄새를 풍기며 얼마나 무거워지는지 결코 알 수 없다. 그런 귀중한 걸 누군가에게 줘야 한다면, 줄 수 있다면, 가족이 유일하다. 숨과 체온, 피와 살을 나눠 준 내 자식 하나뿐이다. 젠은 왜 이런 허망한 일을 벌일 걸까. - 『딸에 대하여』 中

그러니 ‘과연 누가 누구에게 가족이 돼줄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은 곧 ‘대관절 가족이 무엇이길래 이토록 가족에게만은 다 내어줄 수 있다 하는지’를 묻는다. 결국 ‘나’의 절망은 젠을 넘어 딸 그린을, 딸의 파트너 레인을 넘어 ‘가족’이 아니면 아무것도 나눌 수 없는 이 세상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얼굴도 본 적이 없는 이국의 아이에게 평생 피, 땀, 눈물로 일궈낸 몫을 떼어 나눠줬던 젠의 과거는, 자식 하나 만들어낼 수 없는 그린과 레인이 서로를 위해 헌신하는 현재와 겹쳐진다. 연고가 없다는 이유로 젖은 기저귀를 다시 사용하도록 강요받으며 손발이 묶인 채 주사로 점철된 삶이 기다리는 시골 요양원으로 내쳐지는 젠의 현재는, 자식 하나 만들어내지 못할 그린과 레인의 미래와 만난다. 이 기막힌 겹쳐짐 앞에서 ‘피와 살을 나눈 존재’를 부여잡는 ‘나’를 누구도 탓할 수 없다.

‘나’의 발걸음을 쫓던 필자가 숨을 헐떡이며 마침내 발견한 것은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을 떠받치는 자질구레한 것들의 무게와, 너무도 쉽게 ‘선을 넘는’ 지난한 삶의 과정에서 피와 살을 나눈 이가 아니면 믿을 수 없게 되어버린, ‘아수라장’이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필자는 젠의 마지막을 지키는 ‘나’와, 그린, 레인에게 비치는 한 줄기 햇살을 맞이하고 나서야 책장 밖으로 빠져나올 채비를 한다. 햇살이 내게 속삭인다. 이들에게 서로의 삶은 고통과 슬픔인 날이 더 많겠지만, 종종 그 안에 작은 기쁨이 깃들지 않겠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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