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영 ZERO 零’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타인의 불행을 보고 슬며시 웃음이 지어진 경험이 있는가? 아무렇지 않게 그렇다고 대답하기도 어려운 질문이다. 많은 사람은 타인의 불행에 긍정적으로 반응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심하게는 앞에서는 행운을 빌어주면서도, 도리어 교묘하게 남의 불행을 조장했을 수도 있다.

 

약자를 먹잇감 삼아
우아하게 행해지는 식인 행위

 

食人(식인). 1918년 『광인일기』에서 루쉰은 식인의 공포에 사로잡힌 한 광인을 보여줬다. 한 세기가 흐른 지금, 김사과의 소설 『0 영 ZERO 零』은 또다시 식인을 말하고 있다. 『광인일기』 속 식인은 사람을 실제로 먹는 행위를 지칭했다면, 『0 영 ZERO 零』 속 식인은 한층 세련됐다. ‘독일 문학을 전공한 명문대 출신의 프리랜서 번역가이자 독립문학 잡지의 편집위원’은 『0 영 ZERO 零』의 주인공 ‘나’의 그럴듯한 타이틀이다. 괜찮은 사회적 위치에 있는 ‘나’는 우아하고 선량한 미소를 띠고 있다. 그러나 내면에서는 줄곧 군침을 다시며 사냥감을 찾는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식인食人하는 종족이다.

……세상은 먹고 먹히는 게임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즉, 누구를 잡아먹을 것인가?”

 

‘나’의 세계관이 명확히 드러나는 장면이다. ‘나’는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몸을 움직이며 누구를 잡아먹을지 고민한다. ‘나’의 연인, 학과 동기, 대학 강의에서 만난 학생, 심지어는 부모가 대상이 되기도 한다. 식인이라 하면 유혈이 낭자한 모습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의 식인 행위는 그런 구석이 없다. 착한 눈빛에 다정해 보이는 말투로 모든 일은 평온하게 흘러간다. 먹잇감이 된 상대방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에게 서서히 먹히기 시작한다.

연인이었던 성연우는 ‘나’의 면밀하게 꾸며진 도끼질 몇 번에 삶이 망가졌다. 재능있는 제자 박세영 또한 ‘나’의 식인에 놀아났다. ‘나’는 괜찮은 지위와 몇 차례의 계산적인 말로 박세영을 그가 재능을 가진 사디스틱한 영미권 산문의 세계에서 떼어냈다. 대신 무겁고 난해하고 자기 파괴적인 독일 문학 시라는 막다른 세계로 몰아넣었다. 그렇게 박세영은 성장해야 할 20대 초반의 시기에 예상치 못한 위기를 맞게 됐다.

흥미로운 건 ‘나’의 식인 세계관 역시 자신보다 강한 누군가에게 먹히면서 형성됐다는 것이다. ‘나’가 다니던 초등학교에 꿈속의 공주 같이 생긴 한 여자아이가 전학 왔다. 그 아이는 단숨에 사람들을 홀리며 ‘나’가 반년 동안 쌓은 명성과 매력을 무너뜨렸다. 그녀는 잡아먹는 인간들과 잡아먹히는 인간들로 세상이 나뉜다는 진리를 ‘나’에게 알려줬다.

‘나’의 말대로 먹고 먹히는 식인 세상은 피라미드 구조를 띤다. 현실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사냥감을 물색하는 눈은 자연스럽게 약자를 향하기 마련이다. 복잡한 사회를 온갖 사람들이 엉켜 살아가고 있다.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는 어떤 일이라도 할 준비가 돼 있다. 그중에는 윤리와 감정적으로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일도 많다. 무서운 건 그 사실을 알면서도 살아남기 위해, 어떠한 경우에는 재미를 위해 행한다는 점이다. 그렇게 식인은 주변인들을 잠식해 나간다.

 

매력적이고 선량한 가스라이터

 

소설 속 식인 사회는 허구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나’가 자행하는 행동은 현실에서도 공공연하게 일어난다. 특정 사람이 누군가를 서서히 망쳐놓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 경우가 있다. 이와 같은 일종의 식인 행위는 ‘가스라이팅(Gaslighting)’으로 설명할 수 있다.

가스라이트 효과(The Gaslight Effect)을 최초로 규정한 로빈 스턴(Robin Stern)은 그의 저서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에서 가스라이팅을 설명했다. 저서에 따르면 가스라이팅은 ‘암암리에 행해지면서 상대방을 조종하는 특정한 형태의 정서적 학대’를 의미한다. 가해자인 가스라이터(Gaslighter)는 대상자에게 혼란과 의심의 씨앗을 반복적으로 뿌린다. 그에 따라 피해자인 가스라이티(Gaslightee)는 점차 자신을 의심하기 시작하며 끝에는 정서적으로 지배받게 된다. ‘나’가 그랬던 것과 같이 가스라이터가 나르시시즘이 강하고 가스라이티에게 이상적인 존재로 여겨지는 존재일수록 가스라이팅은 쉽게 일어난다.

가스라이터의 유형은 크게 3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선 ‘학대와 조종’하면 생각해내기 쉬운 소리 지르고, 때리며, 협박을 일삼는 난폭한 유형이 있다. 이에 더해 매력과 낭만으로 가스라이티를 통제하는 매력적인 유형, 합리적이고 좋은 사람으로 보이나 내면에서는 상황을 조종하려 드는 선량한 유형이 있다.

과거 물리적 폭력으로 일어났던 일들이 현대에서는 교묘한 방식으로 포장돼 일어나고 있다. 이렇게 현대의 식인 사회는 상대방을 정서적으로 조종하는 가스라이팅으로 구현되곤 한다. 그중 ‘나’는 앞에서 말한 유형 중 매력적이면서도 선량한 유형의 가해자라 볼 수 있다. 매력적이고 선량한 유형의 경우 대부분 상황에서 바람직하다고 판단돼 가스라이팅을 알아차리기 힘들다. 그 틈을 타 가스라이터는 재빠르게 정서적, 상황적으로 가스라이티의 우위에 올라 상황을 자유자재로 조종하며 파멸로 이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가스라이팅과 같은 식인 행위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기분이 안 좋고 지친 선배가 아픈 후배를 보러 병원을 다녀온 뒤 표정이 한결 나아지는 것을 보며 ‘나’가 했던 생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람들은 누군가 각별한 타인의 불행을 바란다.

각별한 타인의 불행을 커튼 삼아

자신의 방에 짙게 드리워진 불행의 그림자를 가리고자 한다.”

 

자신의 불안한 현실을 가리고, 나아가서는 즐거움을 쫓기 위해 타인의 불행을 바란다. 사회에 속해 높은 수준의 윤리관을 교육받아 온 대부분 사람에게 듣기 거북한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감정적으로 누군가의 실패나 불행을 봤을 때 슬며시 미소를 짓게 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 이는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는 감정으로 ‘누군가의 실패나 불행을 보았을 때 무심코 솟아나는 기쁜 감정’을 의미한다.*

 

사악한 쾌락이 주는
자기성찰의 기회

 

샤덴프로이데는 독일어로 불행을 뜻하는 ‘샤덴’과 기쁨을 뜻하는 ‘프로이데’가 합쳐진 말이다. 익숙한 표현을 찾자면 ‘쌤통’이라고도 할 수 있다. 능력 있는 제자 박세영이 재능을 발휘 못하고 헤매는 상황을 바라보길 즐기는 ‘나’가 사이코패스로 보이는가. 그러나 상황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샤덴프로이데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감정이다. 유명인의 몰락을 보며 느끼는 은밀한 감정, 친구가 자신보다 잘 나가다가 불운의 사고를 겪게 된 것을 보며 느끼는 오묘한 감정 등이 모두 샤덴프로이데의 예시다. 이외에도 시기심에서 비롯되는 샤덴프로이데는 크고 작은 관계에서 무수하게 나타난다.

아무리 쾌감이라고 할지라도 샤덴프로이데는 마주하기에 그리 유쾌한 감정이 아니다. 남들 앞에서 숨기고 싶은 감정에 가깝다. 심지어 타인의 불행을 통해 느낀 묘한 즐거움과 후련함 뒤에는 자신에 대한 혼란과 수치심, 심하게는 자기혐오가 몰려온다. ‘나’는 식인 행위에서 오는 샤덴프로이데와 같은 감정을 당당하게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나 실은 ‘나’는 자신을 짓누르는 박세영의 환상에 시달리며 혼란스러워했다.

그렇다면 샤덴프로이데는 항상 나쁜 감정이기만 한 걸까. 샤덴프로이데는 타인에 대한 시기심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런데 이 시기심은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다. 같은 상황에서도 타인에 대한 시기의 감정은 해소 방식에 따라 달라진다. 시기심은 잘난 누군가를 끌어내려야 한다는 방향에서는 악한 시기심이 될 수 있다. 반대로 시기의 대상처럼 혹은 그 이상의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방향으로 자기 성장의 원동력으로 삼아 선한 시기심이 될 수도 있다. 또 다르게는 시기의 대상이 동경의 대상으로 바뀌어 시기심이 존경심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이렇듯 시기심에서 비롯되는 샤덴프로이데는 자기성찰의 기회를 제공하는 얼마든지 선한 감정이 될 수 있다.

 

“0. 제로. 없다. 아무것도 없다.

지금 내가 응시하는 이 텅 빈 허공처럼 완벽하게 깨끗하게 텅 비어 있다.”

 

서로를 노리는 식인의 세계 속 잡아먹는 사람과 잡아 먹히는 사람은 합쳐서 ‘0’이 된다. 식인 행위를 하며 타인의 불행으로 기뻐하는 개인에게도 남는 건 없다. 제로다. 그렇다고 해서 그저 비난하고 외면할 일은 아니다. 오히려 이를 자연스러운 것이라 인정하고 선한 방식으로 풀어나가는 편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니카노 노부코, 노경아의 『샤덴프로이데』(2018)에서 발췌.

 
글 홍지영 기자
ji0023young@yonsei.ac.kr

<자료사진 Yes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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