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채빈 (국문·18)

『날개』와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읽지 않은 대한민국의 수험생은 없다. 필자 또한 (물론 발췌된 부분이었지만) 이 두 작품을 50번은 더 읽었을 것이다. 물론, 그 당시에 읽은 『날개』와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수능특강과 수능완성에 도표로 우리가 외워야만 하는 것들이 잘 정리돼 있었고, 많은 모의고사와 평가원 문제들의 오지선다는 항상 유사한 패턴으로 반복됐다. 필자는 고등학교 수준의 교육과정에서 항상 맞는 답을 골라왔기에 ‘문학을 잘 이해하는’ 사람의 축에 속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무정』부터 『겨울의 눈빛』까지 전문을 모두 정독하면서 지금까지 필자가 ‘이해해 온 것’은 아니, 사실 ‘암기해 온 것’은 ‘문학’이 아니라 ‘정리된 개념’에 불과했음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교육방식의 획일성, 통일성 때문이겠지만, 필자를 포함해 대한민국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문학의 모호함을 모호함 그대로 수용하는 자세를 갖추지 못했다. 『무정』의 영채를 보면 구여성이라고 명명해야 하고, 선형을 보면 신여성이라고 명명해야 한다. 이외에도 문학이 쓰인 시기와 작품을 무조건적으로 연결 지으려고 하며, 각 작품의 의의와 한계를 T자형 도표로 정리해야 한다. 심지어는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쓰인 작품들에도 이 작품은 어떤 것 때문에 이상하고, 저 작품은 저런 것 때문에 이상하다며 딴지를 건다. 우리는 지금 문학 작품을 분석하고 정리하는 능력만을 발전시키고 있을 뿐, 작품 그대로의 가치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여유를 갖지 못하고 있다.

수업 시간에 이를 피부로 느낀 것은 이전의 토론과 달리, 『날개』와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다룬 토론에서는 그 아무도 섣불리 질문을 한다거나, 발표자와 다른 생각을 지적한다는 등의 활동이 확연히 줄었다는 것이다. 독자들이 설득력이 부족한 자신의 새로운 의견을 제안하는 것을 경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문학 작품이라는 것은 서로 다른 배경지식이나 사상을 가진 독자들에 의해 다양한 시각으로 읽히는 것이 당연하다. 독자가 백 명이라면 작품을 해석하는 시각 또한 백 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꾸준히 본인 외에 나머지 아흔 아홉 명을 설득시킬 수 있는 시각만을 찾아다닌다. 물론 그 자세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타인과는 다른 자신의 의견을 존중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출 필요성을 재고하고 싶은 것이다.

최근에 ‘알쓸신잡(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이라는 tvN 프로그램 중에, 김영하 작가가 자신의 작품이 교과서에 실리는 것을 반대한 것에 대한 질의응답을 했다. 김 작가는 “저는 문학작품을 쓰잖아요. 단편 소설을 주로 싣는데 그걸 잘라서 실으면 안돼요. 처음부터 끝까지 보도록 쓴 작품인데… 지문처럼 들어가 있으면 안 된다는 말이에요.”라고 응답했다. 필자는 이에 매우 동의한다. 유럽에서는 단편 전체를 읽고 토론하거나 에세이를 쓰게 하는 교육 방식을 사용하나, 우리나라는 한 두 단락만 잘라내 교육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문학 작품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를 끌어내리고 긴 글을 읽을 때 필요한 집중력 또한 성장시키지 못한다는 명백한 한계가 존재한다.

한편, 우리나라 문학 교육의 또 다른 문제는 정해진 답을 찾게 하는 것이다. 문학이라는 것은 자기만의 답을 찾기 위해 읽는 것이다. 작가가 숨겨놓은 주제를 찾는 보물찾기가 아니라는 뜻이다. 심지어 작가들은 그런 보물들을 숨겨놓지 않는다. 작가들은 독자들이 문학 작품을 읽고 다양한 감정을 느끼도록 한다. 그리고 독자는 다양한 감정을 느끼는 과정을 통해 자기 감정을 발견하고 타인을 잘 이해하도록 노력해야하는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감수성을 개발하는데 문학 작품이 쓰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조각난 내용 속에서 단순히 답을 찾는 방식으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적어도 교육을 전원 버튼을 누르는 것처럼 한 순간에 바꿀 수는 없으니, 다시 『날개』와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오면, 우리는 ‘모호성’을 ‘분명’하게 수용할 수 있어야한다. 정해진 답을 찾기 위해 모호함을 계속 거부하고 쳐낼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정답을 찾기 위해 똑같은 한 텍스트를 여러 사람이 여러 시각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관용이 필요하다. 자신만의 정답이 본인을 제외한 아흔 아홉 명을 설득할 수 없어서 무가치한 것이 아니라, 문학을 통해 한 개인의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의미가 있음을 아는 자세 또한 필요하다.

교육은 인간의 의식에 영향을 주는 활동이므로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한다. 특히 수학과 과학처럼 정해진 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마다 주관을 가지고, 성장시키고, 공유할 수 있는 문학과 관련된 교육이라면 더더욱 신중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의 문학 교육과 개인의 문학에 대한 자세가 모호성을 분명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때, 그제서야 우리는 비로소 텍스트로부터 얻을 수 있는 진정한 가치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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