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학교에 춘추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춘추에 대해 한 마디 글을 쓰려고 하니 막연한 기분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떠올려 보면 나에게 춘추는, 무엇보다 춘추에 있는 사람들이다. 이건 딱히 감동적인 이야기는 아니고, 좀 웃기는 이야기다. 나는 내가 속한 동아리나 학생회, 학내 단체 등에서 운영진이나 대표직을 맡은 적이 있었는데, 다음 학기에는 함께 할 수 없겠다며 나에게 말해오는 사람들 중엔 꼭 “춘추를 하고 싶어서” 또는 “춘추를 하게 돼서”가 이유인 경우가 있었다. 그러면 춘추에 동료를 빼앗긴 나는, 우선 바빠질 그의 생활에 이것저것 걱정을 하고 난 후엔 내심 춘추에 질투를 하곤 했던 것이다.

나는 그들이 춘추에 가서 쓴 기사를 읽는다. 그들이 쓴 기사가 아니더라도, 그들이 만들어 가고 있는 춘추를 읽는다. 나는 그들이 이전에 나와 함께 이야기했던, 내가 아꼈던 그들의 모습처럼 춘추가 기사를 써주기를 바라게 된다. 예컨대 나는 저번 학기부터 이번 학기에 걸쳐 류석춘 교수 관련 춘추 기사를 눈여겨봤다. 개중에는 사건 초기에 류 교수와의 인터뷰를 진행해 그의 입장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 류 교수 성폭력 발언과 그 이후 학교의 미비한 대처에 대해 영상으로 잘 정리하고 있는 것 등이 핵심적이었다고 본다. 그 사이에도 춘추는 류 교수의 1학기 강의 개설, 학생들의 규탄 행동, 징계 처분 등의 사건을 꾸준히 기사화했다.

내가 춘추에 바라는 것은 그들의 임무가 ‘기사화’ 그 이상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기성언론의 문제로 흔히 지적되듯이, 기사화를 위한 기사화는 의미가 없다. 최근에 춘추에서 낸 정의연 관련 사설을 유의 깊게 본 기억이 있는데, 이 사설에 대해선 개인적으로 문제의식이나 지향점이 상당히 모호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춘추는 언어라는 도구를 가지고 우리 학교의 어떤 부분을 만들어나가는 주체다. 나는 춘추가 그 언어를 누군가에게는 가장 아프고 소중할 곳에 쓰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선 춘추를 필요로 하는 목소리를 찾아 나서야 할 것이다. ‘기삿거리’를 찾아가는 시간보다 더 오래 사람과 함께하고 펜을 잡길 바란다. 이것은 현장에서 춘추를 더 많이, 더 깊이 만나게 되기를 바라는 내 사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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