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The Y
[교환X읽기] 팩트풀니스
  • 민수빈 이희연 기자
  • 승인 2019.11.03 23:08
  • 호수 53
  • 댓글 0

실에 충실한 관점, 낙관

- 공포와 위험을 구분할 줄 아는 명확한 시선

책을 읽은 뒤, 『판사유감』이란 책에서 읽은 문구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냉소적으로 구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어. 담대하게 낙관주의자가 되라구” 냉소가 낙관보다 수월한 시대다. 언제는 그러지 않았겠냐만, 텔레비전을 켜면 전 세계 곳곳의 나쁜 소식이 귀를 따갑게 한다. 주변에서도 잘 됐다는 웃음보다는 한숨이 더 자주 들린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 한스 로슬링은 우리가 ‘담대한 낙관주의자’로 살아도 된다는, 다소 이상적인 화두를 던진다. 하지만 그 근거는 전혀 공상적이지 않다. 오히려 지극히 현실적이고, 타당하다.

사실에 충실한 관점, 낙관

책에 등장하는 질문 하나를 던져보겠다. 지난 20년간 세계 인구에서 극빈층 비율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놀랍게도 답은 ‘절반으로 줄었다’이다. 갈수록 경제가 어려워진다는 말로 가득한 뉴스들과는 상반되는 ‘팩트’다. 문제를 틀린 독자들에게 작가는 ‘맞추지 못했다고 실망하지 말라’고 말한다. 전 세계의 저명한 과학자, 유력 언론인, 고위 정치인들 또한 오답을 말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러한 ‘억측된 고정관념’을 벗어던지고 올바르게 세상을 조망하기 위해 ‘factfulness’, 즉 ‘사실 충실성’을 갖춰야만 한다고 조언한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진 시대가 진보할수록 통계와 객관적 자료로는 파악할 수 없는 수많은 문제가 생긴다고 생각했다. 현대인을 지배하는 우울감과 경쟁으로 인한 긴장, 인권탄압 등이 그 예다. 책의 초반부에서 저자의 낙관에 큰 공감을 보낼 수 없던 이유다. 그러나 인간의 10가지 본능에 관한 저자의 설명은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세상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 질문을 던지게 한다. 특정 사건의 부정적 측면이 더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부정본능’, 문제의 해결책을 찾는 과정에서 전반적 규모만으로 문제의 크기를 가늠하는 ‘크기본능’ 등이 그 예다. 이러한 오해와 왜곡이 더해진 관점은, 우리가 사실을 정확하게 바라볼 수 없게 만든다.

작가는 핵발전소 붕괴 사고로 인해 ‘죽음의 도시’란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은 후쿠시마를 예로 든다. 이미 전 세계의 언론과 사람들은 유출된 방사능이 도시와 인근 국가까지 돌이킬 수 없는 악영향을 미쳤다고 단정 짓는다. 그러나 통계에 따르면 사고 이후 후쿠시마에서 사망한 1천600여 명 중 방사능으로 인해 사망한 이는 단 한 명도 없다. 대부분이 사고 후에 급증한 스트레스로 인해 사망한 것이다. 저자는 핵발전소 붕괴 사고의 참혹함과 그 공포를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치부하는 게 아니다. 나쁜 상황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왜곡된 관점이 불러오는 ‘공포’와 객관적 ‘위험’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낙관’이란 단어를 사용했지만, 저자는 낙관주의자가 아닌 사실 속에서 발전 가능성을 찾아내는 ‘가능성 옹호론자’에 가깝다. 유입되는 정보를 무조건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이의를 제기하고 비판하는 것이다. 이러한 객관성은 그가 자신을 가능성 옹호론자라 정의하는 데에 힘을 더한다. 요즘 말로 하자면 ‘근거 있는 자신감’이다. 미사여구 가득한 위로가 아닌, 통계를 근거로 하는 위안은 어색하지만, 안도감을 준다.

나도 모르는 새 나는 세상을 오해하고 비관했던 건지도 모른다. 세상을 향해 불신과 좌절을 품는 대신, 다시 한번 세상을 믿고 무한한 가능성의 불씨를 바라보고 싶어진다. 저자는 혀를 내두를 정도로 정확한 통계와 정보를 설파한다.

비관적인 다수는 ‘침팬지’가 아니다

- ‘세상은 나아지고 있다’는 믿음에 그들이 동의할 수 없는 이유

많은 사람은 생각한다. 세상에는 잘못된 것들이 너무 많고, 이는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고. 한스 로슬링은 그의 저서 『팩트풀니스』에서 이렇게 생각하는 대다수를 ‘침팬지보다도 못하다’고 말한다. 소득수준, 사망률, 교육률, 문맹률, 환경오염, 여성 인권 등 어느 분야를 보더라도 세상은 자명하게 나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독자를 열심히 설득한다. 온갖 통계를 제시하며 세상은 점점 나아지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통계를 확인해도, 세상에 대한 의심을 떨쳐내기란 쉽지 않다.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침팬지’이기 때문일까? 죽었다 깨어나도 변하지 않는 ‘극적 존재’이기 때문일까? 과연 사람들의 비관론을 단순한 오해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나은 세상’의 기준은 무엇인가

통계는 세상이 나아졌는지를 보여주는 기준이 된다. 하지만 통계만 가지고선 세상을 온전히 판단할 수 없다. 저자가 지적한 것처럼, 전 세계 국가의 91%는 저소득국가*에서 벗어났고, 기대수명이 50세 미만인 국가는 없다. 하지만 현재를 ‘모두가 잘살게 된, 나아진 세상’이라고 판단하기는 이르다. 세계가 이전과는 다른 국면을 맞이했고, 경제지표 비교만으로 삶의 질을 설명할 수 없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예전엔 소득수준이나 영아 사망률과 같은 경제지표가 긍정적으로 변화했다면 국가가 발전했다고 판단할 수 있었다. 어느 정도는 타당한 분석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세상에서 ‘나음’을 결정하는 요소는 경제지표뿐만이 아니다.

수치로 환산할 수 없는 것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정신적 요소다. 현대사회의 모습을 떠올려보라. 모두가 모두를 혐오한다. 정치 성향, 종교, 나이, 성별, 성적 취향, 생김새 등 그 이유도 천차만별이다. 오죽하면 저널리스트 카롤린 엠케는 현대사회를 ‘혐오 사회’라고 지칭했을 정도다. 우울증은 어느새 ‘현대인의 감기’가 됐다. 수많은 국가의 자살 예방프로그램에도 자살률 수치는 여전히 높다. 끝이 보이지 않는 무한한 경쟁 속에서 인간은 상품이 된다. 그러나 사회 안에서 ‘다름’이 갖는 의미에 대한 통계를, 무한경쟁 구조의 잔인함을 나타내는 통계를 본 적이 있는가? 경제지표는 점점 상승하는데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런 세상에서 ‘나음’을 판단하는 기준 중 하나로 정신적 요소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은 감정이 소거된 숫자만으로 정의할 수 없다.

우리의 본능은 잘못이 없다

세상에 대한 사람들의 비관적 의심은 단순한 오류가 아니다. 세상에는 통계가 드러낼 수 없는 부분이 있고, 이에 대한 사람들의 비관은 충분한 이유가 있다. 하지만 저자는 구조의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개인을 나무란다. 저자는 “비난 본능은 진실을 찾아내는 능력, 사실에 근거해 세계를 이해하는 능력을 방해한다. (중략) 세계의 중요한 문제를 이해하려면 개인에게 죄를 추궁하기보다 시스템에 주목해야 한다.”고 설명하면서 정작 시스템의 모순을 찾지 못하고, 애꿎은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비난한다.

저자는 오랜 시간에 걸쳐 굳어진 인간의 본능을 오류로 단정해버린다. ‘부정본능’이 그 예다. 인간은 너무 극적인 존재이기에, 나쁜 것에 지나치게 집중해서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본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그러나 이를 단지 잘못된 본능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인간은 지금까지 나쁜 일을 충분히 많이 겪어왔기 때문이다. 지도자의 잘못된 판단으로, 특정 집단이나 개인의 이기심으로, 또는 피할 수 없는 자연재해로. 비슷한 이유로 발생한 비극이 끊임없이 반복돼왔다. 그래서 인간은 지금껏 발생해 온 나쁜 일의 이유가 될 수 있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환경을 예로 들어보자. 국제협약과 사회 각계의 끊임없는 노력에도 사람들이 지구온난화 등 문제를 염려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그것이 언제 자연재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닥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3만 년을 살아온 인간의 경험이 축적된 데이터, 즉 우리의 본능은 생각보다 더 정교하다. 이를 오류라고 치부하는 것보다는 본능의 근원을 찾는 것이 저자가 강조하는 ‘세상에 대한 명확한 이해’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

자신을 ‘가능성 옹호론자’라고 칭하는 한스 로슬링. 그가 말하는 가능성 옹호론자가 ‘모든 측면에서 세상을 이해하고, 그에 따른 가능성을 옹호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낙천주의자에 가깝다. 숫자만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은 나아지고 있다’는 그의 획기적인 판단은 어쩌면 섣부른 결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저소득국가: 1인당 GNP가 765달러 이하인 국가. 국제연합개발계획(UNDP)의 인간개발지표에 따른 구분이다.

글 민수빈 기자
soobni@yonsei.ac.kr
이희연 기자
hyeun5939@yonsei.ac.kr

<자료사진 리디북스>

민수빈 이희연 기자  soobni@yonsei.ac.kr

<저작권자 © 연세춘추,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