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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역사라는 무대, 그 뒤편의 여성들
  • 민수빈 기자
  • 승인 2019.11.03 23:04
  • 호수 53
  • 댓글 0

역사 시간에 배운 여성 위인의 이름을 대보라고 한다면, 우리는 몇 명이나 말할 수 있을까? 다른 나라의 위인까지 포함한다고 해도, 아마 열 손가락을 넘기기가 어려울 것이다. 우리가 여성 위인을 잘 알지 못하는 이유는 무관심 때문만이 아니다. 여성이 배제된 남성 중심적 역사 기록에서 여성들의 이야기는 야사나 에피소드로 취급되기 일쑤였다. 역사를 뜻하는 영어 단어 ‘history’의 어원이 ‘his+story’라는 뼈있는 농담이 있을 정도니까 말이다. 지난 2010년 여성가족부가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 의뢰해 초·중등 교과서 110권을 분석한 결과, 교과서에 등장하는 인물 10명 중 9명이 남성이었다. 빛조차 보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여성들의 이야기를 조명했다.

화형당한 최초의 여성 신학자,
마르그리트 포레트(Marguerite Porete)

바야흐로 중세 유럽은 신과 남성만이 목소리를 낼 수 있던 시대였다. 종교적 업적을 남긴 인물을 떠올리면 루터, 칼뱅, 아퀴나스 등의 남성만 생각나는 이유도 그 때문일 터. 이에 굴하지 않고 신학을 공부했던 최초의 여성 신학자가 바로 포레트다. 포레트는 신학 공부를 마친 후 프랑스어로 『소박한 영혼의 거울』이란 신학서를 출간했다. 당시에 라틴어가 아닌 언어로 쓰인 글은 제대로 된 글로 인정받지 못했음은 물론 죄악시됐다. 그런 상황에서 여성 저자가 집필한 것도 모자라 프랑스어로 쓰인 이 책은 당시 최고의 문제작이었다. 또한, 이 책은 다른 학자들의 책을 한 권도 인용하지 않고 성서만을 인용해 당시 유력 학자들의 노여움을 샀다.

중세 교회는 그의 파격적인 도전을 가만히 지켜보지 않았다. 책들은 전부 수거돼 불태워졌고, 포레트 또한 ‘이단죄’로 화형당했다. 다행히 불태워지지 않은 책들이 남아있어 15세기부터 그의 책이 다시 읽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최초의 여성 신학자였던 포레트의 이름, 최초로 자국어 신학서를 집필했다는 계몽적 업적은 남성 신학자들에 가려져 주목받지 못했다.

가부장제의 그림자 뒤에서 단명한 조선 최고의 시인,
허난설헌

500년 조선 역사에 등장하는 대표 인물 중 여성은 기껏해야 조선 최고의 현모양처로 불린 신사임당 정도다. 하지만 신사임당과 비슷한 시기에 일본과 중국의 내로라하는 문장가들이 극찬한 여성 문장가가 조선에 있었다. 바로 허난설헌이다. 그는 『홍길동전』으로 잘 알려진 허균의 누나이기도 하다. 허난설헌은 8살의 나이에 이미 ‘허씨 5문장’이라 불렸다. 그는 당대의 문장가였던 아버지 허엽에 버금갈 수재였다. 그가 결혼 전 남긴 87편의 시는 당대 남성 시인들 못지않은 문학성을 갖췄다고 평가받는다. 신선 세계에 관한 목가적 시와 가난한 이들의 삶을 다룬 현실 비판적 시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양반집 규수로서 시집을 가야만 했던 현실 때문에 그는 학문과 글짓기를 멈춰야 했다. 남편이었던 김성립과의 불화, 명민한 며느리를 못마땅히 여긴 시어머니와의 갈등, 두 자식의 죽음과 유산까지 경험한 허난설헌은 38살의 나이로 쓸쓸히 숨을 거뒀다. 그는 유언으로 동생 허균에게 “내가 쓴 시 모두를 불태워달라”고 했지만, 허균은 이를 명나라에서 편찬해냈다. 훗날 정조도 허난설헌의 재주에 감탄했다고 전해진다. 만약 그가 어릴 때처럼 자유로이 평생을 살았다면 조선, 나아가 한국사를 대표할 대문장가가 됐을지 모른다.

눈앞에서 세기의 발견을 도둑맞은 여성 과학자,
로절린드 프랭클린(Rosalind Franklin)

과학자들에게 20세기 최고의 생물학적 발견을 묻는다면, 십중팔구 ‘DNA의 이중나선 구조 규명’을 꼽는다고 한다. 이 발견의 주인은 제임스 왓슨(James Watson)과 프랜시스 크릭(Francis Crick)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업적의 실제 주인은 여성 과학자 로절린드 프랭클린이다. 그는 1920년 런던의 유대인 금융가 집안에서 태어나 영국의 명문대학인 킹스칼리지의 연구원이 됐다. 그리고 끈질긴 관찰과 연구 끝에, DNA가 이중나선 구조를 띠고 있음을 증명하는 X선 사진을 얻어 냈다.

그런데 그와 함께 일하던 연구원 모리스 윌킨스(Maurice Wilkins)의 제보로 왓슨과 크릭은 그 사진을 프랭클린의 허락 없이 열람했다, 그 사진 덕분에 그들은 연구에 성공했다. 왓슨, 크릭, 윌킨스는 이 업적을 인정받아 1962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프랭클린이 X선 때문에 얻은 난소암으로 세상을 떠난 지 4년 후의 일이었다. DNA의 구조를 실물로 밝히는 데 성공한 최초의 과학자, 프랭클린. 하지만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는 거의 없다.

글 민수빈 기자
soobni@yonsei.ac.kr

민수빈 기자  soobni@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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