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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기찻길 옆 오막살이, 그래도 생은 계속된다신촌 무허가 주택지에 사는 사람들
  • 김인영 김병관 윤채원 기자
  • 승인 2019.10.06 19:14
  • 호수 52
  • 댓글 0

연세대 앞을 지나는 경의선 철길 옆엔 무허가 주택지가 있다. 한국전쟁 이후 살 곳이 없던 사람들이 철로를 따라 판잣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이후 1970년대부터 시행된 도시 계획에 따라 무허가 주택들은 차례로 철거됐다. 하지만 이들이 살던 지역은 겨우 철거를 면했고, 그렇게 삶은 이어졌다. 번화가 한복판에 있지만, 사람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이곳을 『The Y』가 방문했다.

기자를 제일 먼저 맞이한 것은 집 안이 적나라하게 보일 정도로 현관문을 열어 둔 판잣집이었다.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골목에 있었지만, 집주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문을 열어놓고 있었다. 집 안에 들어가자마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뜨거운 열기가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환기도 제대로 되지 않는지 방에서 퀴퀴한 냄새가 났다.

이곳의 주민들과 대화를 나누는 내내 기차가 굉음을 내며 지나갔다. ‘쿵쿵쿵’ 진동이 울릴 때마다 금이 간 벽이 떨렸다. 집 앞 골목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차가 지나다니는 골목은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이 비좁았다. 기찻길 옆 열악한 판잣집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

주요 명소로 꼽히는 동네에 살지만, 모두에게 외면받고 있는 이들의 삶을 생생하게 전하기 위해 포장마차를 운영하는 정운채(65)씨, 용마인쇄소를 운영하는 박선화(68)씨, 주부 김정혜(74)씨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우리는 철길 옆에 삽니다

-신촌 무허가 주택지 가상 좌담회

일시: 2019년 10월 3일

장소: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세로13길

기자: 어떻게 이곳에 살게 됐나요?

정: 나는 광주에서 팬티만 달랑 챙기고 상경했어. 머물 곳도 없고, 돈도 없으니까 집값이 싼 이곳에 살게 됐지. 여기는 서민 중의 서민들이 사는 곳이야. 여기서 십여 년간 살다가 얼마 전에 이사했어. 더는 이런 곳에서 살 수가 없겠더라고.

박: 나는 신문사에서 조판 일을 했어. 그러다 기술을 배워서 여기에 인쇄소를 차렸지. 이곳처럼 유동인구가 많으면서 임대료가 싼 곳이 없었어. 열악한 환경인 줄 알았지만 먹고 살아야 하니까 어쩔 수 없었지.

김: 이곳에서 산 지는 정말 오래됐어. 여기서 낳아 기른 우리 큰 애가 벌써 49살이 됐으니까. 처음 여기 온 1971년엔 이 근방이 다 허름했거든. 그중에서도 여기가 무허가 주택이라 집값이 가장 저렴했지. 돈 없이 시골에서 올라왔으니 이곳에서 살 수밖에 없었어.

기자: 이곳에서 지내면서 겪은 어려움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정: 이 집 자체가 굉장히 불편해. 못 하나도 제대로 박을 수가 없는 불량주택이라 늘 물이 새. 제대로 된 집이 아니니 여름에는 40도가 넘고 겨울에는 엄청나게 추워. 폭우가 쏟아지는 날에는 기찻길 옹벽이 무너져 집을 덮칠까 봐 걱정이야.

낙후된 건물이라 보기도 싫어. 바퀴벌레도 우글우글하고 쥐도 왔다 갔다 해. 신촌에 이런 곳이 드물지. 언제 철거당할지 모르니까 사비를 들여 리모델링을 할 수도 없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 바쁜 사람들이 무슨 돈이 있어서 리모델링을 하겠어. 또, 새롭게 지으려면 소방도로도 고려해야 해서 집이 더 좁아지지. 여기 사는 사람들이 다 노인들이라 대충 살다가 여기서 죽겠다는 거야. 보통 75세에서 90세 사이라 갈 데도 없어.

박: 기차가 지나가면 집이 쿵쿵 울려. 기찻길 진동 때문에 온 벽에 금이 갔어. 언제 무너질지도 모르는 거지. 그리고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보니 한 집에서 불이 나면 줄줄이 다 타버리는 거야. 전기배선이 노후화돼서 위험한 상황이지. 철도 용지 변상금도 너무 비싸. 나는 한 달에 48만 원을 내. 심지어 집값 시세에 따라 임대료도 함께 올라. 한 달에 100만 원 정도 버는데 임대료로 절반을 내는 거야. 그렇다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복사밖에 없는데 나앉을 수도 없고, 하루하루가 막막해.

김: 우리 집은 10년 전에 지붕이 무너졌어. 폭우가 오던 날 말 그대로 뻥 뚫렸지. 이대로는 살 수 없겠다 싶어서 구청에 허가를 받고 집을 고쳤어. 깔끔해졌지만 이제는 언제 쫓겨날지 몰라서 불안하네.

우리 집은 시유지였다가 철도 용지로 변경됐고 다시 시유지가 됐대. 그 과정에서 부지 변상금이 3천만 원 밀렸다고 고지서가 날아오더라고. 내가 올해로 74살이고 남편은 77살이야. 남편이 담벼락 쌓아 번 돈으로 먹고사는데 우리가 무슨 수로 3천만 원을 낼 수 있겠어. 그런데 강제 퇴거시키겠다는 고지서는 자꾸 날아오고 신용불량자로 만들겠다고 위협까지 해. 무허가 건물에 사는 건 맞으니 어디에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고 하루하루가 불안하지.

박: 세금도 못 내는 사람이 대부분인데 뭘. 여기 스물 몇 가구 중에서 세금 내는 사람은 서너 가구밖에 없어. 낼 돈이 없으니 말이야. 죽기만을 기다리는 거지.

정: 사람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해줘야 하는데, 그런 게 없어. 정부에서든 철도청에서든 보기 좋고 살기 좋게 리모델링을 해서 재분양을 하든가 싼값으로 불하*를 하든가. 선거 때마다 의원들이 공원을 만들겠다, 주차시설을 만들겠다고 하지만 아직 바뀐 건 하나도 없어.

박: 변두리 동네도 아닌데 빈민촌으로 보이니까 외국인들이 사진 찍어가. 청와대, 서울시장, 서대문구청장, 철도청장에게 다 도움을 요청했어. 그런데 돌아오는 답은 다 똑같아. 계획이 없대. 서울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게 얼마나 웃겨. 호소를 해봤자 들어주질 않아. 우리 같은 힘없는 사람 목소리를 누가 들어주겠어. 주민들의 고통과 경제적 부담 같은 걸 밖에다 얘기해줘. 그래야 높은 사람들이 이런 문제가 있다는 걸 알고 관심 가질 거 아니야.

#2019년 무허가 주택지에 사는 사람들

1950년대부터 경의선 철길 옆은 새로운 삶을 꿈꾸며 상경한 사람들의 보금자리였다. 6·25전쟁 이후 북으로 가지 못한 실향민들, 일자리를 찾아 상경한 농촌 청년들, 번화가를 찾아 도심으로 온 영세 자영업자들… 갈 곳이 없던 그들은 철길 옆에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제재소에서 버린 목재로 지은 열악한 집이었지만 그들에겐 꿈을 꿀 수 있는 터전이었다. 오늘날 신촌의 유일한 무허가 주택지인 이곳은 부푼 꿈들의 보금자리로 우리 곁에 남아있다.

중국인 노동자 A씨는 수개월 전 서울에 왔다. 돈을 벌기 위해 한국에 온 그는 일자리가 많은 신촌에 터 잡기를 원했다. 그에게 무허가 주택은 유일하면서 최선인 선택지였다. 다른 곳에 비해 월세가 월등히 쌌기 때문이다. “비좁고 불편하지만, 별수 있나요. 돈 벌러 왔는데 참고 살아야죠.” 신촌의 식당에서 일하고 있다는 그는 돈을 벌어 가족 곁으로 돌아가는 게 꿈이다.

청년음악가 B씨(22)에게도 무허가 주택은 최선의 선택지였다. 그는 음악인이 되기 위해 신촌에 왔다. 음악가들의 주 무대인 홍대와 가깝고, 문화가 발전한 신촌에서 살고 싶었다. 부동산 중개업자를 통해 소개받은 무허가 주택은 그가 바라던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월세도 쌌고, 외진 곳에 있어 아지트 같은 느낌이 났고, 층간 소음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열악하지만 음악 하기엔 좋으니까요. 그게 가장 중요하죠.” 얼마 전 만든 노래로 호평을 받았다는 그는 틀을 깨는 음악가가 되는 게 꿈이다.

무허가 주택지 사람들은 낯선 이를 경계했다. 가난한 생활을 보여주기 싫다며 취재를 거절하는 주민도 있었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대화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들려줬다. 그들은 매일 막막하다며 한숨을 쉬다가도, 이곳에서 이룬 것들을 어수룩하게 자랑하기도 했고, 부푼 꿈들을 펼쳐 보이기도 했다. 무허가 주택지가 형성된 지 70년, 이곳에서도 이야기는 계속된다. 이제는 우리가 귀 기울일 차례다.

*불하: 공공단체나 국가의 재산을 개인에게 파는 일

글 김인영 기자
hellodlsdud@gmail.com
김병관 기자
byeongmag@yonsei.ac.kr

사진 윤채원 기자
yuncw@yonsei.ac.kr

김인영 김병관 윤채원 기자  hellodlsdud@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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