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종 교수 (우리대학교 문과대학)

나는 주로 텍스트 ‘읽기’를 통해 성장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듣기’의 도움을 받았다. 그 대상은 텍스트가 아닌 음악이었다. 우리대학교에 재학하던 시절 나는 당시 고전음악 감상실을 찾곤 했다. 당시 내 마음을 사로잡은 음악가와 작품은 브루크너(Anton Bruckner)의 교향곡 5번이었다. 신에 이르고자 하는 갈망과 방황, 좌절과 초극의 대서사를 음악으로 형상화한 이 작품은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이나 프랑스의 샤르트르 대성당을 연상케 했다. 하늘을 가르는 듯한 이 곡의 종결부를 듣는 순간에 나는 어렴풋이 이것이 내 인생의 곡이 될 것이라고 예감했다. 그러나 이는 일종의 수태고지였을 뿐, 브루크너의 음악에 나의 귀가 완전히 열린 것은 아니었다.
 

십여 년이 흘러 모교에 교수로 돌아온 나는 방학이 되면 대학원생들과 여행을 떠나곤 했다. 한번은 전라남도의 선암사를 지나다 마침 쏟아지는 비를 피해 근처 찻집에 들렀다. 손님이 없는 한옥의 찻집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찻집에 얼마 안 되는 CD들을 들춰보다가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을 찾아냈다. 우리는 찻집 아르바이트생의 배려로 전 악장을 큰 볼륨으로 감상할 수 있었다. 기억에 없는 무명 교향악단의 연주였건만, 그동안 내가 들어본 그 어떠한 연주보다 큰 감명으로 다가왔다. 베토벤의 사자후가 활짝 열어 젖혀진 찻집 문밖에서 수직으로 낙하하는 빗줄기와 함께 내게 감히 득음(得音)이라는 표현을 연상케 할 정도로 강력하게 내려꽂혔다. 온몸은 아니더라도 온 귀가 열리는 느낌이었다.
 

여행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와서도 그 느낌을 잊을 수 없었다. 선암사 앞 찻집에서 열린 귀로 브루크너의 교향곡 전곡을 감상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먼 선암사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대신 인천 부평에서 만화카페를 운영하는 죽마고우를 찾아갔다. 그 카페의 한쪽에 있는 널찍한 DVD 방을 일주일에 하루 저녁 전세 내어 사용해도 좋다는 양해를 얻었다. 나는 곧 음향기기와 스피커를 장만해 DVD 방을 음악 감상실로 만들었다.


선암사 여행에 함께 했던 대학원생들을 중심으로 음악 감상 원정대를 꾸렸다. 대학원 수업이 끝나면 그들과 함께 부평으로 가 친구의 DVD 방에서 볼륨을 높여 실컷 음악을 듣고 늦은 밤에 서울로 돌아오곤 했다. 우리의 배고픈 영혼은 음악에 취해 한껏 고양됐다.


나는 위대한 음악에서 얻은 체험을 학생들과 공유하고 싶었다. 그래서 철학과 음악을 주제로 한 강의를 구상했다. 대학원과 학부 강의 모두 매주 두 시간은 음악의 이해에 도움이 되는 예술철학의 고전을 읽고 토론하고, 나머지 한 시간에는 한 주에 한 악장씩 음악을 감상하고 이에 대해 서로 의견을 나눈다. 학부 수업의 경우는 강의실에서 유튜브 동영상으로 한 악장씩 연주실황을 시청하고 의견을 나누고자 수업 계획을 짰다. 계획은 수립했지만 처음 도전하는 수업 방식이라 과연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을지 자신이 서지 않았다.


지난 3월, 수업 첫 주가 시작됐다. 대학원 수업에는 열두 명의 학생들이 참석했다. 두 시간 동안 수업에 대한 개괄적 소개와 텍스트 읽기를 마치고 멀티미디어실로 내려가 브루크너의 교향곡 4번의 첫 악장을 감상했다. 학생들은 진지하게 음악을 감상했고, 의견 나눔도 나름대로 활발했다. 학부 수업에는 25명의 학생들이 참여했다. 첫 강의에서는 수업에 대한 개괄적 소개를 했고, 두 번째 수업에서는 한 시간가량 지문 읽기를 한 뒤, 역시 같은 곡을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다른 실황 연주로 감상했다. 종종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름 다양한 의견들을 선보였다.


그러나 대체로 시간이 흐를수록 학생들의 반응은 성숙해졌다. 지문으로 음악을 이해하는 데 있어 도움이 되는 배경적 철학 지식을 축적했고 고전음악을 계속 듣다 보니 그에 대한 귀가 조금씩 열리는 듯했다. 이렇게 우리는 브루크너, 베토벤, 말러에 이르는 한 학기 동안의 대장정을 무사히 마쳤다. 말미에는 수업에서 듣고 익힌 예술철학과 음악의 세계를 각자 자신에게 접목하는 수준까지 다다른 듯했다.


학기가 끝난 뒤 학생들의 강의 평가를 읽어보았더니 대학원 수업과 학부 수업 모두 호의적인 평가가 절대다수였다. 철학과 함께 영혼의 음악을 찾아 떠난 한 학기 동안의 순례에 나를 믿고 따라와 준 학생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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