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김예진 (사회·17)

우리대학교는 오는 2020학년도 입시부터 논술전형에서 논술성적 100%로 학생을 선발한다. 즉, 수능 최저등급 기준을 폐지한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필자는 수능 최저등급 폐지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필자는 입시제도 전반에 회의적인 입장이고 이를 개선하지 않는 이상 최저등급 폐지가 무의미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사회의 주요 키워드는 ‘세습’과 ‘불평등’이었다.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는 여러 의견 중 대다수는 입시가 모두에게 공정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맞는 말이다. 20대 80, 아니 1대 99의 사회에서 80 혹은 99의 사람들은 불공정에 분노한다. 그런데 정말 입시가 ‘공정’해지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걸까? 불공정은 불평등에서 기인한다. 입시가 공정해져서 모두가 본인이 ‘노력’한 만큼의 대학에 가면 그건 공정한 건가? 평등한 건가? 공정하게 줄을 세운다고 해서 그게 평등하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다. 우리가 무언가를 함에 있어서-그게 입시든 다른 무엇이든-공정하다고 느끼기 위해서는 우선 과정과 결과가 모두 평등해야 한다.

노력이란 무엇인가. 애초에 필자는 ‘노력’조차 허상이라고 생각한다. 본인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뤄낸 모든 것이 본인의 ‘능력’과 ‘노력’ 덕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학벌이다. 이미 일명 SKY 대학이라 불리는 해당 대학교 학생의 약 70%가량이 9, 10분위인 현재 사회에서는 노력조차 사회적 구성물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노력 없이 우리대학교에 왔다는 뜻이 아니다. 교육 인프라가 열악한 지방 소재 고등학교 출신 학생과 유명 강사와 학원이 몰려있는 서울 소재 고등학교 출신 학생은 대학에 오기까지 보고 듣고 경험한 모든 것이 다르다. 2번의 수능을 경험한 필자는 지방의 중소 도시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후 1년 동안 강남의 유명 재수학원에 다니며 지역 간 교육 격차를 절절하게 느꼈다. 이 세상에 100% ‘노력’과 ‘능력’만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은 없다.

필자는 고등학생 때까지 정시보다 수시가 더 ‘공정’하다고 생각했다. 수시는 본인이 학교에서 얼마나 노력하고 활동을 하느냐가 중요한데 정시는 얼마나 좋은 수업을 듣고 수능에 최적화되어 가는가가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울에서 수험생활을 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대학의 서열이 존재하는 한 어떤 제도도 결코 공정해질 수 없다. 수시든 정시든 각 전형에 특화된 사교육 시스템은 무조건 존재한다. 그리고 그런 시스템은 자본이 있는 사람일수록 접근하기 쉽다. 우리 사회에서 자본은 곧 정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대학교는 과연 이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바탕으로 최저등급을 폐지했는가? 필자는 평범한 학부생이라서 속사정은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보여주기식 제도 변화는 대학의 잔고를 불리는 결과만 낳을 뿐이다. 필자가 졸업한 고등학교는 지방 소재의 비평준화 일반 고등학교인데 이 학교에서 논술로 대학을 가는 사람은 1년에 1명 있을까 말까였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까지 논술로 대학을 가는 건 사실상 ‘불가능’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술로 대학에 오는 학생은 해마다 있고, 대학에서 만난 논술로 합격한 지인 중 값비싼 논술 강의를 듣지 않은 사람을 본 적은 없다. 최저가 있던 과거에도 그랬는데 최저 없이 논술 100%로 선발을 하면 이와 같은 상황이 더 심화되지 않을까? 입시전형 중 어떤 전형이 조금이라도 더 좋은지 나쁜지, 공정한지 불공정한지 필자는 모르겠으나 확실한 건 현재의 구조에 대한 성찰 없이 생각 없이 단순히 ‘최저를 폐지했으니까’라며 으쓱대는 건 자기 위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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