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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명절의 이방인
  • 이희연 기자
  • 승인 2019.09.02 02:52
  • 호수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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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대의 명절, 추석(秋夕). 가을 중 달빛이 가장 좋은 밤이라는 뜻이다. 추석의 보름달은 밤하늘을 환하게 밝히지만, 어떤 이들은 달빛의 그림자에 가려지기도 한다. ‘명절의 이방인’이 돼버린 그들의 이야기를 담아봤다.

# 40대 맏며느리 조씨의 명절
명절, 좋은 날이죠. 그동안 못 보던 가족들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고. 하지만 명절이 주는 스트레스는 무시할 수 없어요. 이건 대한민국의 며느리라면 대부분 공감할 거예요. 저는 시댁 식구들이 아주 많아요. 남편 위로 다섯 명의 누나가 있고, 아래로는 남동생이 하나 있으니까요. 제 나이가 거의 오십이 돼가지만, 형님들이 모두 저보다 윗사람이기 때문에 항상 할 일이 많아요. 우선, 20명이 넘는 식구의 끼니를 책임져야 해요. 장을 보는 일도 만만치 않고, 모두의 식사가 끝날 때까지 음식이 모자라지 않게 계속 만들어야 하죠. 그렇게 폭풍 같은 식사가 끝나면 여자들은 따로 부엌에서 급히 밥을 먹어요. 식사 후 과일과 커피를 바로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에요. 또, 저희는 제사를 아주 엄격하게 지내는 편이라서 제사상 준비도 해야 해요. 음식의 종류와 배열, 식기 놓는 자리까지 모두 정해져 있죠. 명절에는 선산에 직접 가서 제사를 지내는데, 살인적인 경사의 선산을 등반하고 나면 어김없이 몸살이 나곤 해요. 막상 여자들은 절을 올리지도 못하는데 말이에요.

# 대전에 사는 재수생 이씨의 명절
11월이 수능이니까, 추석이 있는 9월에는 쉴 시간이 없어요. 아직 개념정리를 끝내지 못한 과목이 있다면 하루바삐 끝내야 하고, 본격적으로 문제풀이를 하면서 감을 익혀야 하니까요. 소위 말하는 ‘문제풀이 기계’가 돼야 하는 시기인 거죠. 명절 연휴에도 학원은 쉬지 않고 학생들을 위해 추석 특강을 열어요. 모의고사를 보고 해설 강의를 해 준다거나, 취약한 개념을 마지막으로 잡아주는 강의를 하죠. 다들 명절에 쉰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 것 같아요. 3일이라는 시간 자체는 짧아 보이지만, 이걸 가볍게 여겨서는 안 돼요. 3일만 쉬려다가 일주일을 통으로 날리는 불상사가 생길 수 있거든요. ‘내년 추석은 꼭 쉬어야지’, ‘수능이 끝나면 마음껏 놀아야지’라는 생각으로 버티는 수밖에 없죠. 올해는 가족들과 함께 즐거운 명절을 보낼 거라 기대했는데. 텅 빈 집에 홀로 남아 공부를 하는 명절은 올해로 끝났으면 좋겠네요.

# ‘대학·청년성소수자모임연대(QUV)’ 카페인(가명)씨의 명절
저는 *시스젠더 게이로 살아가는 25살 카페인입니다. 저희 집안은 외가와 친가 모두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에요. 집안 분위기는 굉장히 보수적이죠. 그래서 가족 모임에서 사회적 소수자를 향한 편견이 좋은 안줏거리가 돼요. 특히 제가 커밍아웃을 했던 열여덟 살 이후로 가족들은 명절마다 저의 복장과 장신구 착용, 언행 등을 검열했어요. 다른 친척들에게 저의 ‘다름’을 알려서는 절대 안 된다며, 우리 가족의 정상성 유지를 위해 함구하라고 요구했죠. 사실 저의 친척 중 한 사람은 동성애 혐오로 유명한 목사예요. 심지어 퀴어축제 같은 행사에서 매번 동성애 반대 시위에 앞장서기도 해요. 그런 사실을 알고 나니 가족 모임에서 그 사람을 만났을 때 분노와 경멸을 참기 어려웠어요. 저에게 그 사람은 저와 제 친구들, 그리고 수많은 성 소수자들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일 뿐이에요. 그런 사람을 단지 친척이란 이유만으로 명절과 같은 가족 모임에서 만나야 한다는 게 고통스럽습니다. 명절은 제게 상처뿐인 날이에요.

이건 비단 성 소수자만의 문제는 아니에요. 타인이 원하는 모습으로 지내야 했던 명절, 만나기 싫은 사람을 마주해야 했던 명절, 사랑으로 포장된 간섭을 애써 웃어넘겼던 명절. 이런 명절에 대한 기억을 하나쯤은 가지고 있지 않나요?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의 명절은 개인에 대한 존중과 이해 없이 ‘가족이기 때문에’ 웃어넘기는 혐오 표현이 없는 명절이 되기를 바라요.

*시스젠더: 타고난 생물학적 성별과 성별 정체성(gender identity)이 일치하는 사람

글 이희연 기자
hyeun5939@yonsei.ac.kr

이희연 기자  hyeun5939@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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