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투수, 최동원을 찾아서

‘불세출의 투수’라고 한다. 불꽃 같은 강속구와 폭포수 같은 커브볼, 그가 등판하는 날이면 상대 타자들은 모두 압도됐다. 그는 야구에 온몸을 바쳤다. 그러나 너무도 빨리 마운드에서 내려와야 했다. 쓸쓸히 사라져간 영웅, 바로 고(故) 최동원 선수(경영·77)다.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투수


고교 시절 17이닝 연속 노히트노런, 프로야구 한 시즌 최다 탈삼진(223개), 롯데 자이언츠(아래 롯데) 6년간 완투율 76%(완투율 역대 1위), 단일 시즌 최다승 2위(27승), 1984년도 정규시즌 MVP….

최 선수는 다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기록을 남겼다. 누구보다 잘, 누구보다 많이 던졌다. 무수한 기록 중 그를 가장 잘 나타내는 기록은 단연 ‘1984년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4승’이다. 7전 4선승제로 치러지는 한국시리즈에서 에이스 투수는 두 번 정도 선발 등판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최 선수는 당시 약팀이었던 롯데의 승리를 위해 1·3·5차전에 모두 선발로 나섰다. 그는 매 경기 완투하며 2승을 거뒀다. 

6차전에서 팀이 질 위기에 처하자 최 선수는 구원 등판해 5이닝을 무실점으로 막고 구원승을 거뒀다. 그는 6차전까지 홀로 31이닝을 소화하며 시리즈 스코어를 3:3으로 이끌었다. 당시 최 선수와 배터리*로 호흡을 맞췄던 NC다이노스 한문연 코치는 “동원이 형 혼자 힘으로 3승 3패까지 이뤄냈다”며 “최강팀 삼성 라이온즈를 상대로 한 대단한 성공이었다”고 회상했다. 시리즈 우승을 가리는 7차전이 다가왔다. 최 선수와 당시 롯데 강병철 감독의 유명한 대화는 여기서 탄생했다. 

“우짜노 동원아 여기까지 왔는데…” 
“마, 함 해보입시더”

그는 지친 어깨를 이끌고 마운드에 올랐다. 그리고 7차전에서도 완투승을 거뒀다. 그의 이름은 ‘무쇠 팔(鐵腕)’이 됐다.

 

불멸의 라이벌 
최동원 vs 선동열

 

선동열 전 국가대표팀 감독은 최 선수와 함께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투수로 꼽힌다. 실력 면에서는 물론, 당시 최 선수와 선 감독은 출신 지역(부산 vs. 광주), 학교(우리대학교 vs. 고려대), 소속팀(롯데 자이언츠 vs. 해태 타이거즈) 등 모든 방면에서 첨예한 대결 구도를 형성했다. 불멸의 라이벌은 운명적이었다.

두 선수의 볼을 모두 받아본 한 코치는 “동원이 형과 동열이는 다른 스타일의 투수”라며 최 선수를 ‘위에서 내리찍으며 짓누르는 투수’로, 선 감독을 ‘팔을 최대한 앞으로 끌고 나와 솟아오르는 볼을 던지는 투수’로 기억했다. 한 코치는 “동원이 형의 볼은 라인이 있어 더 치기 어려웠다”고 덧붙였다. 선 감독은 최 선수를 어떻게 기억할까. 그에게 최 선수는 롤 모델이자 우상이었다. 선 감독은 “고교 시절부터 동원이 형을 목표로 삼고 단련했기에 선동열이라는 투수가 있었다”고 전했다.

최 선수와 선 감독은 일인자의 자리를 두고 세 번 맞대결을 펼쳤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대결에서는 두 사람이 각각 한 번씩 승리했다. 그리고 지난 1987년, 세 번째 맞대결이 성사됐다. 한 코치는 “세 번째 대결을 앞두고 언론이 들끓었다”며 “당시 선수단 내부는 ‘지면 큰일 난다’는 분위기로 가득했다”고 말했다. 대결이 시작되고 치열한 경기가 이어졌다. 9회 말까지 점수는 2:2, 연장전이 이어졌다. 승부는 15회까지 가려지지 않았다. 결국 두 선수의 마지막 맞대결은 200구가 넘는 진검승부 끝에 무승부로 막을 내렸다.

 

영웅이 마운드를 내려오면

 

최 선수는 마운드 위에서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하고 승부욕이 넘쳤던 사람이었다. 마운드 아래에서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최 선수의 어머니 김정자(85)씨는 그를 ‘지독한 연습벌레’, ‘야구밖에 모르는 바보’, ‘항상 베푸는 사람’으로 기억했다. 초등학교 야구부 시절, 햇볕이 뜨거워 모두가 쉴 때도 그는 꿋꿋이 연습하다 쓰러지기도 했다. 김씨는 “그렇게 힘들게 연습하고서도 집에 와서는 단 한 번도 힘들다는 내색을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최 선수는 집에서도 연습을 이어갔다. 천막에 페인트로 스트라이크 존을 그리고 저녁마다 200구씩 던지며 투구 연습을 했다. 또 일주일에 한 번씩은 하체 훈련을 위해 허리에 끈을 묶고 자동차를 끌었다.

최 선수는 자기관리도 철저했다. 선수 시절 같은 방을 썼던 한 코치는 “밤 9시 즈음이면 동원이 형이 TV와 불을 끄라고 했다”고 말했다. 일찍 일어나 남들보다 먼저 훈련하기 위함이었다. 한 코치는 “동원이 형은 야구에 대한 열정이 누구보다 대단한, 재미없는 선배였다”고 회상했다. 김씨 또한 “스타가 되고 나면 예쁘게 꾸미고 돈 쓰는 데 관심 가질 만도 한데 동원이는 오로지 야구가 전부였다”고 말했다.

최 선수는 항상 남에게 베푸는 사람이었다. 김씨는 “동원이는 선수 생활 하는 동안 연봉 외에 따로 받는 상금이나 상품을 모두 기부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1984년 정규시즌 MVP로 받은 자동차를 그 자리에서 방위성금으로 기부했다. 대회 우승으로 병역을 면제받아 다른 방법으로라도 책임을 다하기 위함이었다. 최 선수는 후배들을 위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선 감독은 1982년 세계 야구선수권대회 합숙 훈련 당시 최 선수가 해준 말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했다. “많이 먹고 많이 뛰어라.” 투수의 기본기를 잡고 계속해서 갈고 닦으라는 뿌리 깊은 조언이었다. 최 선수의 이 한 마디는 선 감독의 선수 생활 내내 자극제가 됐다. 마운드 아래에서 최 선수는 누구보다 따뜻한 사람이었다.

 

어두운 곳을 밝히다 떠난 사람

 

최 선수는 동료들의 아픔을 지나치지 못했다. 당시 프로야구 2군 선수들은 생계유지조차 힘든 연봉을 받으며 생활하고 있었다. 지난 1988년 최 선수는 무명 선수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프로야구 선수협의회(이하 선수회) 설립을 추진했다. 최 선수는 최고의 대우를 받는 슈퍼스타였기에 아쉬운 것이 없었음에도 어려운 선수들을 돕고자 나섰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이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선수단은 선수회를 반겼으나 구단들은 극렬히 반대했다. 당시 구단들은 선수들의 선수회 참여를 막기 위해 급히 합숙 훈련을 실시하거나 선수들에게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구단들은 최 선수의 선의와 정의감을 사욕으로 포장했다. 롯데와 부산야구의 상징이었던 그는 결국 삼성으로 트레이드됐다. 한 코치는 “최고의 야구 스타가 거대 기업 앞에서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허무했다”며 “동원이 형 혼자 희생한 것이 마음 아팠다”고 말했다. 온몸을 바쳐 팀에 헌신했던 그는 쓸쓸히 팀에서 쫓겨났다.

삼성으로 트레이드된 후 최 선수는 몸도 마음도 상해있었다. 팀의 승리만을 위해 혹사해온 그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였다. 새 유니폼을 입고 마운드에 오른 최 선수는 리그를 호령하던 이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한 코치는 “그때 동원이 형의 볼은 예전과 달랐다”며 “폼은 그대로였지만 전혀 힘을 쓰지 못하는 듯해 보였다”고 말했다. 그리고 1990년, 시즌을 마치고 그는 은퇴를 결심했다. 최 선수는 이미 몸과 마음을 심하게 다쳐 더는 야구를 할 수 없었다. 그의 나이 겨우 서른둘이었다. 많은 야구 선수들이 전성기를 맞을 나이에 그는 야구공을 내려놨다.

 

최 선수가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지 8년이 지났다. 오는 14일은 그의 8주기다. 선 감독은 “내 우상이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났다”며 “곁에 남아 야구계의 선구자가 돼줬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한 코치는 “최동원이 기억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어린 선수들이 최 선수의 이름을 알고, 그에 대한 기억이 이어지길 바란다는 것이다. 최 선수가 대중에게 어떻게 기억됐으면 하냐는 질문에 김씨는 “야구 하면 최동원, 최동원 하면 야구. 그뿐이다”고 답했다.

부산 사직구장 전광판 한 쪽엔 그의 등 번호 11번이 새겨져 있다. 11번 선수의 강렬한 볼도, 아픔에 흘린 눈물도, 그의 치열하지만 외로웠던 인생도 이제는 볼 수 없게 됐다. 영웅은 그렇게 쓸쓸히 떠났다. 그는 떠났지만, 우리는 최동원을 기억한다.

 

*배터리 : 투수와 포수를 함께 이르는 말

 

글 박진성 기자
bodo_yojeong@yonsei.ac.kr

<자료사진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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