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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되면 스스로 정해야 해, 결정은 네 몫이야”영화 『문라이트』로 ‘다름’을 넘어 ‘나’와 마주하기
  • 오한결 기자
  • 승인 2019.05.27 05:00
  • 호수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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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미술평론가 존 러스킨(John Ruskin)은 말했다. “햇볕은 감미롭고, 비는 상쾌하고, 바람은 힘을 돋우며, 눈은 마음을 설레게 한다. 세상에 나쁜 날씨란 없다. 서로 다른 종류의 좋은 날씨가 있을 뿐”이라고. 사람들은 이를 알고 있지만, 정작 일상에 치여 대부분의 삶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놓친다. 『문라이트』는 관객을 잠시 한 흑인 소년의 곁으로 데려간다. 전혀 다른 세상에 사는 그의 성장은 특별해 보이지만, 대부분이 겪는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처음 ‘리틀’을 알아봐 준 그들

『문라이트』는 마이애미에 위치한 리버티 시티를 배경으로 한 소년의 성장을 그린다. 그곳은 카리브해 너머에서 들어오는 마약상들의 주요 활동지이기도 하다. 어느 날 친구들의 괴롭힘을 피해 소년이 마약 창고에 몸을 숨기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잠시 후 창고 주인인 마약 밀매상 ‘후안’이 그를 발견한다. 후안은 소년에게 이름이 뭐냐고 거듭 물어보지만 좀처럼 대답이 없다. 한참 뒤, 소년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짧은 두 마디를 뱉는다.

“제 이름은 ‘샤이론(Chiron)’이에요.
주변에서는 ‘리틀(little)*’이라고 불러요.”

소년의 말에 후안은 곧잘 “그래 리틀”이라고 말한다. 이어 후안의 아내 ‘테레사’는 “난 샤이론이라 부를게”라 답한다. 그러나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소년은 아직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후안과 테레사 부부는 말이 없는 샤이론에게 대답을 강요하지 않는다. 첫 만남 이후 그들은 샤이론에게 가끔 따뜻한 밥과 잠자리를 제공할 뿐이다.
소년은 빈민가에서 태어나 마약 중독자인 어머니 ‘폴라’의 방치 속에 살아간다. 주변 아이들은 그가 왜소해서, 그리고 호모**처럼 보인다는 이유로 멸시한다. 샤이론은 살아남기 위해 타인의 시선과 사회의 압력을 버텨내야만 한다. 소년에겐 자신과 함께 있어 줄 어른, 자신을 지켜봐 줄 버팀목이 필요했다.

후안이 샤이론을 바닷가로 데려가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후안은 바닷물에 들어간 샤이론에게 “넌 세상 한가운데 있다”고 말한다. 소년을 삶의 변두리에서 바다의 출렁임이 느껴지는 세상의 중심으로 데려간 것이다. 후안은 샤이론에게 바다에서 헤엄치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뭍에서 경직된 상태로 살아가던 샤이론은 물 위에서 천천히 자유로워진다. 소년은 후안에게서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조금씩 배워가고 있었다.

사춘기의 ‘샤이론’
길고 깊은 성장통을 지나

가정에서조차 홀로였던 샤이론은 자라나면서 성적 취향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다. 화장실에서 남자아이들의 성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샤이론의 시선. 관객은샤이론의 성적 호기심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다. 샤이론은 이를 밖으로 드러낼 수 없다. 그는 친구 ‘케빈’에 대한 성몽(性夢)을 꾸며 자신의 욕망을 환상으로 표출한다.

달빛 아래 해변에서 케빈과 보낸 밤은 샤이론의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이 된다. 샤이론은 감정을 추스르려 당도한 바다에서 우연히 어릴 적부터 친구였던 케빈과 마주친다. 샤이론은 자신의 삶을 털어놓으며 그의 유일한 친구에게 정동(情動)을 느껴 키스를 나눈다. 이어 샤이론은 케빈의 손에 의해 처음으로 사정하는 경험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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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샤이론이 속한 가정에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사치처럼 보인다. 폴라는 홀로 샤이론을 부양하며 점점 나약해진다. 폴라는 샤이론을 계속 돌봐주는 후안에게 화를 내며 그가 자신의 아들임을 주장한다. 그러나 동시에 샤이론에게 심한 욕설을 퍼붓고 마약 살 돈을 뜯어내는 이중적 모습을 보인다. 그녀의 모습은 현재 미국 내 흑인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흑인 빈민가에서 마약으로 인해 수감과 재수감을 반복하는 사례는 빈번하다. 이런 과정에서 주류사회에 편입하는 것이 사회적·제도적으로 불가능한 흑인들이 생겨났다.

학교에서 샤이론이 처한 상황은 그를 더욱 극단으로 몰고 간다. ‘터렐’을 주축으로 하는 또래 학생들은 그들의 놀림감이었던 샤이론을 때리라고 케빈을 회유한다. 케빈은 또래 집단의 압박을 이겨내지 못한 채 결국 주먹을 날린다. 학교는 피해자인 샤이론의 이야기를 듣고자 하지만 그가 처한 복합적 상황을 이해하지못한다. 샤이론은 어른들의 피상적 접근에 염증을 느껴 스스로 사태를 종결짓고자 마음먹는다. 다음 날 샤이론은 교실에 들어와 케빈을 부추긴 주동자를 의자로 내리쳤다.

“때가 되면 뭐가 될지 스스로 정해야 해.
그 결정을 다른 사람이 할 순 없어.”

후안은 소년 샤이론이 앞으로 주체적인 삶을 살길 바랐다. 이는 영화 전반에 걸쳐 지금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던지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세상은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마저 허락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샤이론 역시 케빈과 사랑을 나눴으나 이를 지속할 수 없었다.

샤이론은 터렐을 의자로 내리치는 ‘결정’을 하기까지 가정과 사회가 주는 압력을 묵묵히 견뎌냈다. 샤이론은 어머니 곁에 갈 수 없었고 아이들의 놀림도 참아내야 했다. 그러나 자신이 사랑했던 케빈마저 본인에게 등을 돌리자 샤이론은 폭발한다. 이 사건으로 샤이론은 교도소에 가게 되지만, 드디어 자신의 솔직한 감정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상처를 감췄던 ‘블랙’
케빈을 만나 외꺼풀을 벗다

영화의 마지막 장은 10년 후 출소한 샤이론을 보여준다. 샤이론은 이전과 많이 달라졌다. 그는 소년 시절에 만난 후안처럼 마약상이 됐고, 비싼 차를 몰며 가짜 금니를 낀다. 주먹질에 쓰러졌던 소년의 몸은 어느새 근육으로 덮였다. 마약 밀거래 후 자신이 거느린 수하에게 장난으로 액수가 맞지 않는다며 겁을 주기도 한다. 소심했던 샤이론은 사라졌다.

그러던 어느 날 케빈이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과거의 실수를 사과하고 샤이론을 자신의 식당으로 초대한다. 케빈이 내온 따뜻하고 소박한 요리는 후안과 테레사의 환대와 겹쳐 보인다. 케빈은 둘 사이 끊겼던 시간을 궁금해 하나 샤이론은 쉽게 터놓지 못한다. 샤이론은 수감 생활을 마치고 자신이 마약상이 된 이유를 설명했다. 케빈은 자신이 알고 있던 샤이론의 모습이 아니라 당황한 기색이다.

“이건 네가 아니야… 정체가 뭐야?
넌 누구야, 샤이론?”

교도소에 들어간 이후 샤이론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어린 날의 쓰라린 기억에서 벗어나고자 소년 샤이론을 지웠고 끝내 자신을 감췄다.

하지만 케빈과의 아련한 추억, 그날 밤의 기억은 샤이론의 가슴 속에 남아있었다. 강인하게만 보였던 성인 샤이론은 케빈 앞에서 다시 과거의 샤이론으로 돌아간다. 변해버린 샤이론에 질문을 던진 케빈. 이에 샤이론은 본인의 몸에 손을 댄 사람은 그날 밤 이후 아무도 없었다고 답한다. 샤이론은 케빈에게 기댔고, 케빈은 미소를 짓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시선은 다시 바다를 향한다. 후안에게 물에 뜨는 법을 배웠던 바다, 달빛 아래 케빈과 사랑을 나눴던 그 바다. 사실 샤이론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금목걸이와 비싼 차, 마약상이라는 직업을 걷어내자 푸른 밤, 케빈과 함께 있던 샤이론이 드러난다.

영화는 미국의 극작가 터렐 앨빈 맥크레이니(Tarell Alvin McCraney)의 희곡 『In Moonlight, Black Boys Look Blue』를 각색한 작품이다. 이는 어떤 인종이든 어떤 성적 지향을 가졌든 관계없이 푸른 달빛 아래서는 누구나 푸른색을 띠게 된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샤이론이 케빈 곁에 영원히 머무를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샤이론이 계속해 자신의 삶을 결정해나가길 묵묵히 지켜본다.

*본인은 원치 않았지만, 나약하고 별 볼 일 없는 아이라고 놀리기 위해 주변 아이들이 붙인 별명이다.
**영화에서는 동성애자를 낮잡아 부르는 말로 통용된다.


글 오한결 기자
5always@yonsei.ac.kr

그림 민예원

오한결 기자  5always@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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