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리선. Ferry Naminoue. 2012년 10월 1일 퇴역. 2013년 3월부터 인천-제주 항로 투입. 위풍당당하게 바다를 가르던 시절은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았다. 그저 여행객들을 태우며 오가는 고물이 됐을 뿐이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 누군들 이 배의 이름을 말해보기나 했을까.

2014년 4월 16일. 다급한 속보로 일어났던 대낮의 파란은 곧 잠잠해졌다. 곧바로 전원 구조 소식이 들려왔다. 누가 시키기라도 한 듯. 지켜보던 이들은 모두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저녁이 됐다. 잠자리에 들려던 차 습관처럼 틀어놓은 저녁 뉴스가 팽목항 앞바다에 반쯤 잠긴 배를 비췄다. 화면에는 전원 구조됐다던 사람들이 있었다. “구조됐다며?”

 

수십 년 같던 나흘이 지나갔다.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는 사실은 모든 것이 거짓임을 보여줬다. 부모들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행진을 시작했다. 이미 늦었다는 무력감을 애써 접어둔 채 ‘내 자식을 살려내라’고 울부짖었다. 평소보다 일찍 따뜻해진 4월의 공기는 저주였고, 일찍 저무는 해는 절망이었다. 아이들의 얼굴은 빠르게 변해갔다. 주변의 만류로 아이의 마지막 모습도 보지 못한 부모는 아이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내 애는 아니길’하던 바람은 ‘이번엔 내 아이길’하는 바람으로 변했다. 자식의 죽음을 눈으로 똑똑히 확인한 부모가 안도하는 나날이었다. 생지옥이 있다면 이곳일까.

싱그러움이 넘쳤을 아이들의 배움터는 무채색의 공터가 됐다.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을 교실 문엔 먼지가 쌓여 갔다. 아침마다 엘리베이터에서 인사하던 그 학생. 저녁에 엄마와 장을 봐 들어오던 그 학생. 내 식당에 아버지와 밥 먹으러 오던 그 학생. ‘그 학생’들을 더는 볼 수 없었다.

다른 이들도 죄의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뉴스를 보고 “그래도 빨리 구조돼서 다행이네”라고 말하며 점심을 마저 먹던 순간, 죄를 지은 것만 같았다. 갈 곳 잃은 마음들은 분향소로 하나둘 모였다. 슬픔과 먹먹함이 대한민국에 드리웠다.

조용하던 펜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권력 앞에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가 있을까. 두려움을 용기로 이겨낸 이들은 ‘미궁의 7시간’ 알아내기 대작전을 시작했다. ‘에이 설마’ 했던 마음은 분노로 바뀌었다. 아니라고 믿고 싶은데 자꾸만 증거가 나온다. 대통령 대신 대변인이 브리핑에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단다. 대응책 발표까지 100분이나 걸린 이유가 있단다. 분명 우리 손으로 뽑은 ‘대통령’인데. 오천만의 반절이 믿은 사람인데.

배신감, 연대감, 정의감이 뒤섞인 발걸음은 청계광장으로 향했다. 엄중한 수사와 처벌을 요구하는 목소리의 불꽃은 매일이 다르게 타올랐다. 너무나 오랜만에 뜨거운, 대한민국의 오월이었다.

노란색 리본이 책가방, 서류 가방, 옷자락에 매달렸다. 팽목항에 계속 머무를 수는 없었기에. 어느덧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찾아왔기에. 우리는 그렇게 혼자, 또 함께 있었다. 노란 리본은 곧 우리의 마음이었다.

이번에는 기적이 찾아올 것 같았다. 세상이 바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냄비는 식어갔다. 팽목항을 비추던 카메라는 한두 대씩 사라졌다. 그러나 더는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세월호’, ‘팽목항’에 머물던 리모콘과 마우스는 비껴갔다. 노란 리본은 조용히, 조심스레 떼어졌다. 서랍 어딘가에 깊숙이 놓였다.

 

어느덧 5년이 지났다. 우리가 주춤하던 사이 항구에 남은 이들은 아이의 영정만 챙긴 채 쫓겨났다. 4·16 기억공원을 설립하려는 안산 시민연대와 ‘혐오시설 건립 반대’를 외치는 조합원들이 대치 중이다. 묻고 싶다. 변화의 약속은 팽목항에서 고개를 돌린 것이냐고.

 

어느덧 5년이 지났다. 묻고 싶다. 당신의 노란 리본은 어디에 있나.

 

글 민수빈 기자
soobni@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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