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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연세문화상] 불꽃으로 날아든 나비

[오화섭 문학상(희곡 분야) 가작]

불꽃으로 날아든 나비

안성준(사학·18)

과거

S#1

스크린 자막: 1909년, 밤, 어느 숲속

(한 중년 남성이 어린 아이를 업고 도망가고 있다. 주변에서 들리는 총소리, 옆에 있는 바윗 틈에 숨는다.)

헌병경찰: 이제 다 끝났다! 그만 순순히 나오고 아이는 풀어주어라!

잠시 바깥을 보려던 남성, 밖의 경찰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총알이 빗발치듯 날아오면서 암전.

(암전 속 총소리만 계속된다. 다시 켜지자 재판장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고 판사가 법봉을 치고 있다. 판사는 객석과 마주하며 앉아 있고 방청석들은 객석을 등지고 있다. 양 옆에는 민경준과 검사.)

현재

(S#2 자막: 2018년, 낮, 재판장)

판사: 모두 정숙하십시오. 지금 검사의 신문이 있습니다!

검사: 소송인께선 민영환 씨의 증손자분이 맞습니까?

민경준: (두루마기를 입은 장년의 나이의 남성) 네 맞습니다.

검사: 소송인은 교과서에 민영환씨가 헤이그 특사를 지원한 인물, 아니 그 일원으로 기재되고 1905년에 자살한 기록을 정정할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까?

민경준: 네 맞습니다. 거기에 대한광복회 참가 사실, 외교 활동 등을 독립 운동으로 인정해 달라는 것입니다.

검사: 바로 이 부분이 본 검사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입니다. 민영환씨의 행적에 대해서 정작 친손자인 민경준 씨는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민영환씨는 1905년 11월 30일 오전 6시경, 45세의 한창 나이로 2천만 동포와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유서 2통을 남기고 품고 있던 단도로 목을 찔러 자결, 순국한 것은 널리 알려진 상식이자 점증된 사실입니다. 지금 다른 분도 아니고 그 분의 후손께서 그 사실을 완전히 부정하시는 것입니다. (방청객에서 웅성거리는 소리)

민경준: 제가 설명할 기회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판사장: 소송인, 발언하세요.

민경준: 여러분이 알고 있는 것은 거기까지가 맞습니다. 그러나 민영환씨는 그때 순국하시지 않았습니다. (재판장이 조용해지자) 저희 조부는 건국 훈장을 받으셨지만 기득권 척족으로 살다가 자살한 것 가지고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는 오명을 쓰고 있습니다. 어떤 논문에서는 대표적인 여흥민씨 세도가로만 묘사되었습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국가의 배상금 청구나 빼앗긴 땅을 어거지로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을 정정하자는 것이지요.

검사: (도전적으로 민경준을 돌아보며) 유서 남긴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요? 아마 가장 유명한 유서 중 하나일텐데 말입니다.

민영환: (대한제국 예복을 입고 민경준 뒤에서 등장해 천천히 나오면서) 그게... 꼭 그때를 위한 유서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암전)

과거

(S#3 자막: 1905년 11월 29일, 낮, 종로의 한 길거리 전차 안, 사람들이 신문을 돌려보고 있다.)

행인 1: (어린 아이에게) 그러니깐,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나라가 말 못하는 벙어리 신세다. 그거야. 다른 나라한테 말할 목소리가 없어진 거지.

행인 2: (거들며) 다른 놈도 아니고 녹봉 먹는 견공들이 그랬다고. 그딴 놈들은 왜나라에서 태어나서 나라 팔아먹었어야 하는데.

행인 1: 배가 가라앉을 때도 쥐새끼들부터 빠져나간다고......(전차가 급정거하며 다들 혼비백산한다.)

전차 조종사: 소란 떨지 마소. 무슨 대감 마차 지나간다고 그런거요. (민영환이 탄 차가 지나간다.)

행인1: 보소. 저거 분명히 왜놈들한테 꼬리가 빠지라고 아부하러 가는 모양새일거요.

(차 안의 민영환, 조약 체결을 호외로 알리는 신문을 찢는다. 초조한 듯 시계를 본다.)

(암전)

(S#5 1905년 낮, 유림들이 광화문 밖에서 읍소하고 있다.)

유림들: 조약에 서명한 흉적들을 처형하고 조약을 파기해야 합니다 폐하!

유림 대표: (백발이 성성하지만)단발을 명하실 때도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더니, 이게 어인 일입니까? (도끼를 들며) 이 도끼가 국권 회복의 부월이 아니라면, 이 구차한 목을 끊어 주시옵소서!

헌병대장: (군인들에게) 전하께서 안정을 취하시게 모두 끌어내란 명이다. (차에서 내려선 민영환에게) 죄송합니다. 폐하께서 환후가 편찮으셔서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명입니다.

조세형(1등 서기관): (열내며 삿대질) 이놈! 급히 알현하러 오신 대감이시다. 서기관인 나는 상관 없어도 이 분이 누군지나 아느냐?

헌병대장: (구석으로 조세형을 부른다. 조용하지만 위협적으로) 10년 전쯤인가 일입니다. 상궁 둘이 급한 일이 있다고 보내주었더니 알고보니 주상전하와 세자 마마가 아라사 공사관으로 도주한 일입니다. 그 때 날아갈뻔한 제 목은 지켜야 하지 않습니까? (조세형, 분한 듯 노려보다가 침을 뱉고 나간다.)

유림1: (끌려나가면서) 네놈들은 어찌 제멋대로 폐하를 전하라 하느냐?

유림2: 총검은 제 나라 사람들에게 들이대라고 받았느냐? 그 옷은 누가 입혀 주었느냐?

조세형: (민영환에게) 안되겠습니다. 차라리 담을 넘는게 빨라 보입니다.

(차로 돌아서지만 바퀴 하나가 없어진 상태다. 두 사람, 허탈한 듯 서로를 바라본다.)

(S#6 1905년 해질 무렵, 민영환의 집으로)

인력거꾼: 이거 분해서 저는 못살겠습니다.

민영환: 위정자로서 할 말이 없네. 눈이 떠 있을 땐 항상 부끄러워.

인력거꾼: 우리 조국을 왜놈들이 삼키지나 않았지 아가리 안에 넣은 것과 뭐가 다릅니까요? 어디 죽어도 억울해서 마음 편히 죽겠습니까?

민영환: 그럼 산 사람은 마음 편히 살겠나......

인력거꾼: 그래요, 난 내 한 목숨 바치렵니다. 억울해서 살지 못하겠습니다.

민영환: 그것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방법이라면 방법이지. 하지만 세상에 알릴 방법은 많지만, 귀중한 목숨을 구할 방법은 없다는 걸 기억하게.

인력거꾼: 세상 사람들이 나같은 인력거꾼 말도 어디 들어준다요. 선생님 말씀도 안듣는 판국에.

민영환: 나도 이 세상 떠나고 싶네. 그러나 나는 황제 폐하께서 남긴 임무가 있다고 하네. 그것 때문에 죽지 못하는 것이야.

인력거꾼: 그 일, 일본놈들이 어디 방해할 일입니까?

민영환: 방해만 하겠나. 그걸로 난 죽었다 생각하고 살아야지. (한숨을 내쉰다)

인력거꾼: (무언가 생각하는 눈치이다.) 다 왔습니다 선생님.

행랑아범: 아이고 괜찮으십니까 나으리? 궐 밖에서 문전박대를 당하셨다면서요?

민영환: 이것도 고초라 하기엔 부끄럽네.

행랑아범: 저기 건너편에 사는 인력거꾼이랑 구분이 안 갈 정도라니까요.

민영환: 허허, 저 친구 하는 일에 비해 식견이 아까운 친굴세. 그 말 들으니 참 좋네

행랑아범: (어이없음) 얼른 들어가 쉬십시오. 아! 엄 상궁이라는 분이 웬 나팔 모양 물건을 보내셨는데요?

민영환: 쓸데 없는 뇌물은 진작 내다 버리라 하지 않았는가?

행랑아범: (혼잣말로) 값이 두둑히 나갈 것 같은데...

민영환: 잠깐만 아범, 누가 보냈다고?

(S#7 1905년 밤, 민영환의 사랑채)

조세형: 축음기? 서양에서도 귀하다는 물건은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민영환: (축음기를 조작하면서) 폐하께서 외부와 접촉이 차단 될 것이라는 걸 짐작하고 계셨어. 알현을 해봐야 누군가의 입으로 퍼질게 분명하다고 여기신게지. 그래서 왕래가 자유로운 엄귀인 마마를 통해 이걸... 됐다!

“(빠른 속도로) 민 대사 부득이하게 어명을 이렇게 내리게 되었네. (민영환과 조세형, 신기해하지만 곧 축음기 앞에 네 번 절한다.) 지금 나라의 외교권이 일본에게 넘어가게 된 급박한 상황이네. 나는 이 구주궁궐에 갇혀 모기 목소리를 내는 것보다 조선의 자주성을 보장할 수 있는 국가에서 머물며 침탈의 부정성을 호소하고, 역적들을 파면하기 위해 새로운 중추원을 해외에 만들 생각이네. 이 기반을 다져줄 위인은 유럽 6개국 전권대사를 지낸 자네뿐이니, 일을 수행해 주길 바라네. 하지만 흉적들이 자네의 움직임을 알고 무슨 방해를 할지 모르니, 생사를 기만해서 미국으로 건너간 뒤, 조미수호통상조약의 거중조정 항목을 들어 요구하고, 여의치 않으면 서방 강국들에 도움을 청하게. 나는 자네의 임무를 완수한 후 밀항을 해서라도 옮기고 싶지만 여의치 않을 경우, 왕자라도 보내어......”

민영환: (이상하다고 여기며 축음기를 만지는 조세형에게) 그 사물도 1분 정도밖에 녹음을 못해서 그런 듯 하네. 이게 폐하의 밀명이었군.

조세형: 헌데 대감, 생사를 기만하라는 것은...? (민영환이 고개를 끄덕이자 한숨을 내쉬며) 일이 여간해선 성공하기 힘들텐데...

(S#8 1905년, 아침, 민영환의 앞마당)

(암탉이 운다)

민영환: 허허, 나라가 이 모양인데 암탉은 그걸 모르는가...

행랑아범: 나으리! 이런 괴변도 다 있지요!

민영환: 무슨 일이냐.

행랑아범: 그, 그 인력거꾼이 중병에 걸렸다며, 선생님을 한번 뵙고 싶다고 말합니다.

민영환: 그 영감 어제까지는 괜찮더니.. 어서 가봅세!

행랑아범: 선생님께서만 와달라고 합니다.

민영환: 그래??

(S#9 1905년, 아침, 민영환이 인력거꾼의 집에 들어간다)

(인력거꾼은 칼이 목에 찔려 있는 상태, 옆에는 편지가 남겨져 있다)

민영환: (깜짝 놀라며) 이게 뭔가, 중병이라니?

경부: (경례하며) 종로 경찰서 경부입니다. 대감께서 어찌 여기로... 아무래도 이자는 자살한 듯 합니다.

(경부가 밖을 둘러보는 사이 옷 안의 편지를 발견한다. 편지는 인력거꾼의 목소리로 내레이션된다.)

나라가 망조의 길로 접어들었고 왜는 우리의 정신을 빼앗는 것도 모자라 나라를 빼앗았습니다. 이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어제 선생님께 대화를 해본 후 생각된 것은 아무래도 스스로 목숨을 끊어 황실의 은혜에 보답하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억울함을 알리는 것밖에 이 미천한 몸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침 선생님께서 공개적으로 하기 힘든 일이 있다고 해 겉보기에 비슷한 제 몸뚱아리라도 바치고자 합니다. 선생님, 선생님이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이 황실과 조국의 보존을 위해, 제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주기만을 바랄 따름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제 유언은 선생님께서 지으시고 이는 없애주십시오.

죄송합니다. 저는 이 살기 어려운 세상 먼저 지겠습니다.

민영환: (눈시울이 붉어진다) 저, 경부, 내 길을 잘못 들어선 것 같으이. 이 참극이라고는...

경부: 제가 보기엔 이 자가 자살한 이유가 이번 일 때문인 듯 합니다.

민영환: 의분에 자살했다는건가?

경부: 뭐 그런거지요. 동료 인력거꾼 말로는, 이자 집이 외곽의 토막촌인데, 어떤 대신이 그쪽 당을 개발한다고 토막촌 사람들을 다 몰아내려 했답니다. 그래서 청원으로 그걸 막았는데 얼마전 조약으로 도로 몰려나게 되었답니다. (민영환의 굳은 표정을 보고 겸언쩍어하며) 죄송합니다. 쓸데없는 말이 길었습니다.

(길을 나서자마자 편지를 화로에 불태운다.)

S#10, 1905년 낮, 민영환 집 사랑방

조세형: (벽에 걸린 석파란을 보며) 인력거꾼은 길어도 12년인가 달리고 살면 골병들어 죽는다던데...

민영환: 자네는 그의 죽음이 헛되다고 생각하는가?

조세형: 지금 와서 망자 이야기 하는건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무엇인가 생각났듯 석파란에서 눈을 떼고) 아! 대감, 이렇게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행랑아범, 바깥에서 마당을 쓸다가 고함 소리에 깜짝 놀란다.)

민영환: 그걸 지금 말이라 하는가? 한스럽게 간 사람을 고이 장례시키기는커녕 어찌 그런 생각을!

조세형: 고정하십시오. 지금 밀명을 바로 시행하지 못하는 것도 그 문제 때문이지 아니잖습니까? (민영환이 대꾸가 없자)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닙니다. 통감부라는게 설치되고 나면 그땐 정말 기회가 없어집니다!

S#11, 1905년 12월 1일, 저녁, 민영환의 집(초상집)

(앞에서는 경찰들이 문상객들의 출입을 막고 있다. 사회 명사들이나 몇몇 문중 사람들만 들어간다.)

조세형: (나래이션) 거짓으로 죽음을 위장한 만큼 장례식도 철저히 해야 합니다.

(염을 하고 있는 장의사들과 그들을 감독하는 조세형)

조세형: (나래이션) 잠시동안만, 잠깐만 그 인력거꾼은 나리 역할을 합니다.

민영환: (나래이션) 그런만큼 인력거꾼의 가족들을 잘 보살펴 주게. 자네 아니면 살필 사람도 없어.

문중 사람1: (민영환의 가족들에게) 지병도 없는데 이렇게 돌아가시다니요. 참으로 허망하십니다. (민영환의 부인과 앳된 얼굴이 아이들이 서 있다.)

문중 사람2: 아이고, 민겸호 대감이나 황후마마가 비명에 가신 이후로 이렇게 허망한 경우는 처음 봤습니다. (가족들, 어색하게 인사한다.)

문중 사람1: (문중사람2에게) 아이고, 염을 제대로 안했는지 냄시가 진동하네그려..

조세형: (나래이션)너무 놀라시진 않게 가족 분들에게만 일단 미리 알리십시오. 친지 분들은...

민영환: (나래이션, 단호하게)누구에게도, 절대 알리지 말게.

(암전)

S#12

(항구에서 양복을 입고 있는 민영환과 두루마기를 입은 조세형)

조세형: (다소 놀란 듯) 문중 분들이 너무 많다면야...

민영환: 많아서가 아니네. 그저 알리지는 말게.

S#13

(다시 초상집, 문상객들의 대화가 두런두런 들린다.)

문상객1: 자네들, 민영환 대감이 지병이 아닌 것쯤은 알고 있지?

문상객2: 통감부가 민 대감이야기 막는 것만큼은 한 발 늦었지. 신문에 그렇게 유서가 나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조세형: (항구에서 민영환에게) 대감이 죽음은 인력거꾼과 마찬가지로 포장될 것입니다. 그래야 일본이 알아서 죽음의 진실을 은폐하려 들테니깐요.

문상객3: 살다살다 별 괴이한 일도 있지. 혈죽 말이야.

문상객4: 에휴~ 칼로 어설프게 찍어서 몇 시간을 고생하다 가셨답니다. (행랑아범, 몰래 엿듣는다.)

민영환: (나래이션)그리고 마지막은 행랑아범을 통해 헛소문들을 퍼뜨린다?

조세형: (나래이션)혈죽은 함경도 지방에서 나는 적죽(赤竹)으로 각색할 생각입니다.

S#14

(배로 오르는 민영환, 표정이 어두워 보인다.)

민영환: 일이 잘못되어도 나에게 전달되진 않을 걸세. 일의 성패가 자네에게 달렸네.

조세형: 걱정 마십시오. 다 잘 될 것입니다.

(민영환, 배에 올라서 모자를 벗고 흔든다. 증기선이 무겁게 제물포를 바져나간다.)

S#15, 1905년, 낮, 미국 국무부(자막)

스티븐슨(미국 동아시아부 고문): 그러니깐, (종이 뒤적거리며) 이 양피지같은 종이에 적힌 게 미합중국과 조선이 23년전에 체결한 조약이라는 말씀이시군요.

민영환: (영어로) 절차상 하자도 없을뿐더러 진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스티븐슨: (줄안경을 코에 걸치며 끄덕인다.) 민 대사께서 가져오신거니 의심은 하지 않겠습니다.

민영환: 중요한 건 이 부분입니다. 여기 1항, 거중조약 항목이 있소. 미국은 조선의 자주성과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고 조선을 보호할 권리가 있습니다.

스티븐슨: 그러니 대사께선...

민영환: 루스벨트 대통령과의 면담, 미국의 규탄 성명서를 받아야 하오. 또한 우리 황제께서 희망하시는 건...

스티븐슨: (곤란하다는 듯) 대통령께선 러시아에서 오신 지 얼마 되지 않아 면담이 힘든 것처럼 보입니다. 또한 미국은 다른 국가들에게 간섭을 할 순 없소. 특히 일본같은 문명국에겐 말입니다.

민영환: (상황을 이해한 듯 표정이 굳는다.)

스티븐슨: 민 대사님의 명성을 알고는 있지만 한계는 한계입니다. 다만... 대통령 따님, 그러니까 영애께서 동아시아로 여행을 가시는데 조선도 들러서 각하의 친서를 전달하도록 하게 힘써보겠습니다.

민영환: (스티븐슨 말이 끝나가자 일어선다.) 제가 너무 기대를 했나 봅니다.

스티븐슨: (마찬가지로 일어나며 손을 내민다.)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민영환,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지만 악수를 하지 않는다.)

스티븐슨: (다시 한 번 손을 내밀며)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민영환: (손을 세차게 잡으며 조용하고 단호하게) 약속했잖소. 조선의 자주성 침탈을 좌시하지 않겠다고. 러시아만이 위협은 아닙니다. 조선에게 미국은 서양 국가 중 처음으로 수교를 한 국가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건 딱 한 가지, 그 조약 1항만 지켜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기억하시오.

스티븐슨: (어깨를 으쓱한다. 민영환이 나간 후 국무부 직원에게) 보았는가? 조선인들은 순수하다 못해 순진할 정도야. 그리고 그 순진함이 다혈질과 무능력을 그대로 드러내게 하지.

S#13, 1905년, 낮, 한인 유학생의 하숙집

이군(유학생): 선생님, 면담은 성공적이었습니까?

민영환: 줄을 이어주어서 고맙네. 예상하고 있었지만, 미국인 역시 그렇게 편협할 줄은 몰랐군. 그리고 황제의 망명정부 희망은 발설하지 않길 잘했어.

이군: 그래도 미국이 가장 문명이 발전한 나라가 아닙니까? (민영환이 짐을 싸는 것을 보고) 아니 벌서 떠나시게요? 동포들께 격려하는 인사라도 해 주시지요.

민영환: 미안하네. 자체하지 않고 내일로 갈 생각이야.

이군: 어디로... 말입니까?

S#16, 1905년, 아침, 영국 런던

(하숙집의 괘종소리 울린다. 크게 울리던 괘종 소리는 어느새 런던의 빅벤 소리로 울린다. 사람이 번잡하지만 비위생적인 런던 시내가 보인다.)

(민영환, 호텔로 보이는 한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랭터스터 부인(호텔 주인): 6년 만에 돌아오셨네요. 앰배서더 민. 그때 호의에 보답할 기회도 없었는데요.

민영환: (모자 벗으며) 호의라니요. 아, 이제 어엿한 호텔 주인이 되셨군요.

S#17, 1905년, 낮, 런던의 호텔방

민영환: (타자기 앞에 앉아 타자를 두드리며 읽고 있다.) 친..애하는 주아라사 이범진 공사. 내 조선에 직접 연락할 수 없어 그대에게 이 편지를 보냅니다. 폐하께서 가장 기대하셨지만 미국은 우리의 요구사항을 거절한 것으로 보입니다. 황은이 망극한데도 소임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바...

S#18, 1905년, 낮, 런던의 주 오스트리아 총영사관

오스트리아 총영사: (민영환의 설명을 한참 들은 뒤) 동아시아의 사정이 그렇게 복잡하군요. 조선의 사정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비참하다는 것 역시 알겠습니다.

민영환: 제가 오스트리아에 겸임 대사로 있으면서 알게 된 것은 오스트리아는 제국 중에서도비인간적으로 식민지를 착취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총영사: (이해하지 못하다가 웃으며)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건 우리 나라가 보유한 식민지가 없기도 하지요. 대사, 솔직히 말씀드리면 본국은 극동에 개입할만큼 여유도 없고 강국도 아닙니다. 조선과 달리 우리는 여러 민족들로 구성되어서 나라 안 사정이 복잡하지요.

민영환: 우리는 서로 교류가 없던 사실은 잘 압니다. 하지만 오죽하면 저희가 이렇게 하겠습니까?

S#19, 1906년,저녁, 런던의 한 레스토랑

(민영환이 다양한 방식으로 다른 나라 대사관, 공사관, 총영사관과 접촉하려는 것이 빠르게 보여진다. 직접 대사관에 들르거나, 그의 호텔방을 방문하거나, 만찬에서 누구와 접촉하기도 한다. 하지만 동시에 낙담하는 모습도 보여지고 쓸쓸히 돌아서는 모습도 겹쳐져 보인다. 경쾌한 음악이 배경음악으로 깔리지만 더 상황을 반어적으로 보이게 한다.)

민영환: (레스토랑에서, 맞은편에 조선의 골동품을 유심히 보는 더비 남작에게) 외무부 차관님, 영국은 일본과 동맹을 맺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국은 극동에 위협이 러시아가 아닌 일본이라는 것을 간파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비 남작: 작은 섬나라 조선의 이야기도 있지만, (민영환이 손을 내밀어 정정해주려다가 참는다.) 우리 대영제국도 사정이 있습니다. 여러 나라 대표들을 만나면 아시겠지만 지금 전 세계가 우리와 러시아 간의 그레이트 협정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영국은 다름 아닌 그 협상의 주체입니다. 영국이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느냐, 마냐의 문제란 말이오. 안된 이야기이지만... 이란, 오스만, 부동항 등 숙제가 쌓여있는 와중에 새로운 주제로 영국이 심혈을 기울여온 협상을 날라가게 할 순 없습니다. (낙심한 민영환에게) 식사 값은 제가 지불하겠습니다.

(민영환,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다. 사람들은 신기한 듯 쳐다보다 갈길을 간다.)

S#20, 1906년, 밤, 런던의 한 레스토랑

사환1: 죄송하지만, 이제 나가주셔야 합니다. 신사님?

사환2: (사환 1이 꼼짝 못하는 것을 보고) 나와 봐. 자는 것 같은데? 이제 일어나셔야 합니다.

사환1: (혼잣말로) 인도 사람이 이렇게 생겼나? 중국 사람 같기도 하고...

사환2: 이 사람 쓰러졌어! 일단 병원으로 불러야 할 것 같은데? 민영환을 흔들며 정신 차려 보세요!

S#21, 1906년, 아침, 런던 병원

랭커스터 부인: 식사와 숙면은 제대로 취했어야지요. 간경화에 걸렸답니다.

민영환: 신문... 있으십니까? (랭커스터 부인이 넘겨주자)

민영환: (부스스한 얼굴로 신문을 펴며) 병원 직원한테 신문을 달라 하더니 이걸 주더군요.

(탁자 위의 종이, “Go to zoo Monkey“ 와 같은 말들이 적혀 있다.)

랭커스터 부인: 몹쓸 사람이에요.

민영환: 내가 만난 외교관들이 말은 좋았지만 다 그렇게 대한 것 같아요. 멸시하고, 내 일 아니라고 어설픈 동정을 주고, 신기해하고...

민영환: (랭커스터 부인이 말을 하지 않자) 물론 이런 분위기를 모르는 건 아닙니다. 저도 오랫동안 6개국 겸임 대사라는 과분한 책임을 맡기도 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한 국가만은, 한 대표만은 희망을 주길 바랬습니다. 어...?(신문의 한 대목을 보고 놀란다.)

랭커스터 부인: 앰배서더 민, 저 동양 사람들은 누구인가요? (병실 안으로 동양 남성들이 들어온다.)

S#22, 1906년, 낮, 런던 호텔

민영환: (타자를 작성하며) 일본 대사관 사람들이었습니다. 내가 살다살다 일본인 아나키스트라고 우기는 날도 왔습니다.

랭커스터 부인: 앰배서더 민, 나는 당신의 활동이 알려지는 것보다 건강이 정말 걱정됩니다. 나는 내 삼촌이 간경화로 죽는 걸 보았습니다.

민영환: (잘 듣지 않고 타자에 몰두한다.) 부인, 이번일은 정말 기대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S#23, 1906년, 낮, 러시아 모스크바 주대한제국 공사(자막)

이위종: (편지를 들고 읽는다.) 이범진 공사 보시오. 내년이면 네덜란드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립니다. 47개국의 나라가 초대되며, 러시아의 빌레도프 백작이 의장입니다...

이범진: 요점만, 요점만 읽어줘. 그 부분은 이미 알고 있어.

이위종: 그런데 이 47개국의 명단 중 대한제국이 열 두 번째 나라로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필시 아라사가 일본과 전쟁하는 동안 우리나라를 끌어들이기 위해 목록에 올린 듯 한데, 이참에 을사년에 강제체결된 부당 조약과 강제 침탈을...

이범진: 아니 이 사실을 내가 왜 모르고 있었지? 우리가 엄연히 대표를 보낼 수 있다는 말 아닌가?

이위종: 아버지, 한 부분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니 폐하의 근신인 이용익을 보내주시오. 그는 하루에 한양에서 전주까지 걸을 수 있는 위인이며 통역 능력이 있습니다. 나 역시 네덜란드 로테르담으로 갈 것이오.”

S#24, 1907년, 아침, 로테르담 항구

민영환: 정말 노고가 많았습니다.

이준: 민 대감, 오랫동안 우리말을 안 써서 그런지 많이 야위었구만 그래. 문중 사람들하곤 화해하지 않고 홰외로 나온겐가? (민영환, 미소만 짓는다.)

이상설: 참의 이상설이라 하옵니다. 이준 검사님을 보좌하기 위해 왔습니다.

민영환: 수고하셨소. 이회영 선생이 사람을 잘 엄선하셨습니다. 헌데 뒤에 신사분은 누구인지? 이용익이 아닌 것 같은데... 아! 자네는 이 공사 아들이구만!

이위종: 부족한 통역이나마 도와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민영환: 훌륭하게 장성했구만... 헐버트 선생은 미국으로 가셨습니까?

이상설: 예, 통감부를 완벽하게 기만하기 위해 수고해주셨습니다.

민영환: 헌데...

이위종: (표정이 어두워진다.) 이용익 선생께선 폐하의 밀명을 받고 연해주를 옮기다가 참변을 당하셨습니다. 공식적으로는 동포가 죽였다고 하지만...

이준: 그가 너무 유명한 폐하의 근신인게 탈인 것 같아. 일본이 그를 너무 예의주시했어.

S#25, 1907년, 밤, 헤이그의 호텔

이위종: 로테르담까지는 러시아 근위대의 도움을 받았지만 이제는 안위를 조심하셔야 합니다.

민영환: 폐하의 친서는 가져왔는가?

이준: 통감부에게 걸릴 뻔했지만 용케도 구해왔네.

민영환: 헤이그의 박람장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영향력이 미치고 있습니다. 그들의 저지를 피하려면 미리 회의장에 들어가 우리의 대표권을 요구해야 합니다.

S#26, 1907년, 낮,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장

(세 명의 조선 대표단들이 초조하게 대기하고 있다. 회담장이 열리자 곧바로 들어간다.)

민영환: (나래이션) 공식적인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더라도 각 대사들에게 조선독립 찬성과 망명정부 수립을 호소해야 합니다.

(회담장, 조선 대표들로 인해 소란스럽고 혼란스럽다. 조선 대표들은 스스로 만든 명패 “Corea Empire”를 들고 항의한다. 외국 기자들도 모두 조선 대표들 쪽으로 몰려간다.

이준: (나래이션) 기억하게. 각 국가들의 대표 한 사람 한 사람이 중요하다. 섣부른 신분 노출과 소득 없이 기자 회견을 진행하면 일제가 우리의 의도를 간파하게 하고 나라와 폐하의 안위가 더욱 위태로워질 수 있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국제의 동정이 아니라, 각국 대사들의 설득이야.

(이준, 이위종, 이상설이 회담장에서 쫓겨나는 모습이 슬로우모션으로 드러난다. 밖에 나가려고 하지만, 기자들이 포진해 있는 것을 보고 탈출구를 찾으려다 뒷문을 본다.)

(암전)

현재

S#27, 2016년 현재, 낮,-법정

검사: 잠깐, 잠깐, 이건 너무 말이 안되는 내용이지 않습니까!

판사: 검사, 이의가 있으면 정식으로 신청하시지요.

검사: 예, 이의 있습니다. 이용익 이야기와 세 명의 헤이그 특사 이야기는 사실입니다. 이준 열사가 검사 역할로 논리적인 설득을 담당하고, 이상설 열사가 정부 관리로서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주장하고, 7개 국어에 능한 이위종 열사가 통역을 담당하셨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죽은 민영환이 제4의 헤이그 특사라니요! 너무 조상의 활동을 미화하시려는 것이 아닙니까?

변호사: 검사는 지금 증인에게 인신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판사: 인정합니다. 검사, 그 부분은 자제하시고, 증인은 검사의 이의에 대해서는 증언에서 해명할 수 있습니다.

민경준: 그 부분은 헤이그 특사의 성공적인 여론전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조선의 밀사들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기자회견과 인터뷰, 화제를 끌 수 있었을까요? 이들이 회담장에서 한 호소 때문으로 보기에는 그들이 접촉한 관료들과 기자들은 모두 높은 위치에 있었습니다. 이는 그들의 뒤에서 이러한 회견을 후원한 이가 있어다는 것입니다. 또한 당시 신문에도 조선인 특사들이 세 명이었다는 말은 하지 않고 “당시 회담장에 있던 조선인들 중 세 명”과 사진을 찍었다고 보도했습니다.

검사: (답답하다는 듯이) 그런 추측성 증거 마시고, 기록과 같은 기록으로 제출하면 될 일이지 않습니까?

과거

S#28, 1907년, 저녁, 헤이그 호텔방

이위종: 이번에 기자들이 몰려든 것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이준: (화를 참는 듯) 내가 우려한 최악의 상황이다. 대표들은 아무도 못 만나고, 정작 언론인들과 꼬이게 되었다니.

민영환: 이왕 이렇게 된 이상, 여론전으로밖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준: (모두들 화들짝 놀란다.) 그렇게 해선 아무 진전도 없게 된다. 되려 우리를 보낸 이를 일본이 색출하려 들 것입니다.

민영환: 이미 우리의 신분이 발각되었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우물쭈물하면, 기자들도 웬 동양인들이 난동을 피웠다고 생각하고 곧 관심이 사그라들 수 있습니다.

이상설: 저도 대사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지금 길이 여론전밖에 없습니다.

이위종: 검사님, 아무래도 가장 합리적인 계책이 원활한 언론과의 접촉인 듯 하니 도와주십시오.

(이준, 말 없이 창가 쪽을 본다.)

민영환: 생각이 많으실 테니 생각할 시간을 드리자. (세 사람, 한 명씩 나간다.)9

S#27, 1907년, 밤, 헤이그 호텔방

민영환: (옆에 다가오며) 아직 심란한가 보십니다.

이준: 두려워. 이미 우린 실패를 맛 본 사람들이네. 또 좌절하는걸 견디지 못 할 것 같아서 그러네. 자네, 2년간 만난 언론인도 없지 않은가?

민영환: (고개를 끄덕이며) 그럴 수 있지요. 하지만 저는 죽은 사람으로 살 수밖에 없었고, 검사님과 생각이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준:......

민영환: 한 오 년 전쯤이었습니다. 우리 동포 중 한 명이 전 재산을 들여서 밀항선을 타고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황색인이라고 몰매를 맞고 골병이 들어서 제 명을 살지 못했습니다. 그 때 미국 정부에 항의하려고 했는데, 동포들이 제 바짓가랑이 잡으면서 막았습니다. 안 그래도 어렵게 얻은 막노동직인데 그 일로 항의하면 날아갈지 모른다고...

그래서 마지막에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삶이 나아졌겠습니까?

이준: 민 대사, 자네의 노고는 잘 아네. 하지만 누가 뭐라 해도 우리는 이번 기회를 이렇게 쓰려고 받은 것은 아니었네.

민 대사: 제가 2년간 소위 ‘동료 외교관들’에게 넘어지고 멸시받아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망명 정부는 꿈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어떤 나라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아도 우리나라에게 줄 순 있는 건 연민뿐입니다. 그 미약한 무기라도 최대한 활용하자는 이야기입니다.

(달밤이 더욱 어두워진다.)

S#30, 1907년, 낮, 헤이그 회담장 앞

이위종: (이상설의 말을 번역하며) 어제 저희들을 보았듯이 우리는 정식으로 초대받은 대한제국의 대사들입니다. 우리는 지금 부당한 국가들의 이익에 밀려 이 자리에서 나라를 대표해야 합니다.

조선의 국토는 일본에 의해 찢겨졌습니다. 우리의 문화를 하나 둘씩 빼앗겨야 했습니다. 그래도 한때나마 일본이 러시아보단 나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재갈을 물리고, 노예로 만들려고 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회담장 호위병들, 이들을 연행해가려 한다. 하지만 그들을 막아선 기자들)

기자1: 이들이 자신의 뜻을 말하게 해달라!

기자2: 이들이 누구를 죽인 것은 아니지 않는가?

이위종: (군인들에게 밀리면서도 연설한다.) 저희들의 뜻을 지켜주시니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희 나라가 해방이 되려면...

S#31, 1907년, 낮, 헤이그의 호텔방

이든 기자(영국인): 대사님, 요즘 조선 사람들이 화제가 되어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이준: 예 그래도 다행입니다. 여기 있는 이위종 대사는 외모 덕분인지 조선의 왕자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특히 인기가 많다고 하더군요. (민영환, 사환인 척 하면서 도와주고 있다.)

이든 기자: 내일 기자회견에서 각 정부의 고위 관료들도 많이 참석할 예정입니다. 그 자리에서 대사님들은 어떻게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실 생각입니까?

이준: 저와 이상설 참의가 할 연설에서 이위종 대사가 통역을 할 예정입니다. 저희 대사단은 내일이 가장 기대되는 날입니다.

(인터뷰가 끝나고, 세 사람은 이든 기자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민영환은 슬며시 물러나있다.)

이든 기자: (사진기를 챙기고 떠나면서) 솔직히 나는 영국 기자로서 당신 나라 사람들을 도울 이유가 없습니다. 막 일본과 우호 조약을 맺은 영국이 일본을 도발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러분께 행운을 빕니다. 여러분의 호소력은 사람들을 충분히 사람들을 설득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S#32, 1907년, 저녁, 헤이그 호텔방

민영환: 이상설 참의, 이위종 통역관이 어디에 있나?

이상설: 저도 찾아보고 다녔는데, 어디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준: 놈들이 움직인 것 같아. 이위종이 잡혔어.

민영환: 누구 짓입니까? 일본 대사관이 잡아간 것입니까?

이준: (쑴을 헐떡이며) 다른 네덜란드 특파원이 전해줬는데, 일본 놈들이 아내가 중병이고 아버지가 체포되었다는 거짓 정보를 흘린 다음에 유인해서 경범죄로 체포하게 했다고 하는구만.

이상설: 흉악한 자식들. 내일 통역은 누가 하죠?

민영환: 내일은 놓쳐서는 안되는 기회입니다. 제가 어떨 수 없이 나서야겠습니다.

이준: 안되네. 자네까지 언론에 나오면 정말 목숨이 위태로워져.

민영환: 그럼 외국인 기자 중에 조선어를 아는 인물을 어떻게 불러옵니까?

이상설: 허 이거 마땅한 대안이 없으니 원...

민영환: 어짜피 그들은 내 존재도 모르니 내일 기자회견이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겠나?

S#33, 1907년, 밤, 헤이그 호텔방

사환: 오늘도 편안하게 주무시길 바랍니다. 위험이 되지 않게 문을 걸어 잠그고 주무시길 바랍니다. (이준, 이상설, 문을 걸어 잠그고 들어간다.)

민영환: 나도 곧 들어가겠네. 이것만 태우고... (담배 하나를 들어 입에 문다. 잠시 정적, 누군가 그의 입에서 담배를 빼 간다.)

이준: 여비가 떨어져도 담배는 여전하나? (너털웃음)

민영환: 형님, 헤이그에 오시고 한 숨도 안 쉬고 온 몸을 불사르듯이 일하셨습니다.

이준: 자네보다야 더 하겠는가? 나는 죽는 시늉은 안 했어.

(이준도 담배를 하나 뽑아 핀다. 민영환이 불을 붙여준다.)

이준: 이봐, 민 대사. 나는 속죄하기 위해서 이렇게라도 하는 거야. 러일전쟁 때만 해도 조선을 삼키려는 흉악한 코쟁이이고 일본은 그래도 가까운 이웃으로 대할 줄 아는 나라인 줄 알았다 이 말이야. (사이) 그 때 일본을 지지하는 연판장을 쓴 내 손모가지를, 아니 내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었는데.

민영환: 누군들 실수하지 않습니까? 아라사가 너무 형편 없이 패배했습니다.

이준: (한숨 쉬면서) 내일... 내일 잘하면 우리가 임무를 마칠 수 있을까? 왕족들도 온다는데.

민영환: 그건, 같이 알아 보시지요. (싱긋 웃는다.)

이준: 솔직히. 너무 답답해, 가끔 내가 하필 이런 나라에 태어났나 하늘을 한탄하기도 했고 말이야. 차라리 백 년만 일직 자랐으면 마누라하고, 각다귀들하고... (말 멈추고) 헛된 말 그만 하겠네. 자네도 눈 좀 붙이게.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다. 민영환도 툭툭 털고 방으로 간다.)

S#34, 1907년, 새벽, 호텔방

(검은 그림자가 복도에 비춘다. 그리고 잠깐 격투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는 유유히 호텔방을 나간다.)

민영환: (방 밖에 황급히 뛰어나간다. 문이 열린 방 하나를 발견하고 들어간다.) 이게 무슨 변고요! (이상설도 놀라 방 밖을 나온다.)

민영환: 이 형, 아무리 상황이 답답해도 의분을 이기지 못하다니요! 여기 호텔의 의사 좀 불러 주게! (이상설은 뛰쳐나간다. 이준의 배에서 피가 왈칵 나온다.)

이준: 할복은 왜놈들이나 하는거야. 내가 이런 짓...(피가 입안에 고여 발음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내 방만 문을 잠구지 않았어. (민영환, 상황 파악한다. 이준이 다시 들어갈 땐 방문을 잠그지 않아 암살자의 표적이 된 것이다.)

민영환: (목메인 목소리로) 조금만 참으시오. 곧 응급처치되고 의사도 올테니......

이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어이 민 대사, 다음에 허망한 개죽음 당할 때 오면, (쓴 미소 지으며) 죽는 거 너무 자랑하지 마. 지난번처럼, (힘겹게) 제 나라 건사 못하는 건사, 제 나라 없는 대사 주제에 무슨...(기침하며 피가 나온다.)

민영환: (다급하게) 쓸데 없는 말 좀 하지 마십시오. 피가 왈칵 나오지 않습니까?

이준: 이 못난 놈 제사 지내지도 말고..(눈물 흘리며) 한스럽기만 하다. (조용히 숨을 거둔다.)

(이상설, 다른 방의 의사와 들어오지만, 곧 상황을 파악하고 고개를 숙인다. 민영환, 허망한 듯 죽은 이준의 팔을 살아 있듯이 들었다 놓았다 한다. 그 때마다 힘없이 늘어지는 이준의 팔)

S#35, 1907년, 낮, 헤이그의 작은 장례식장

(풀려난 이위종, 목놓아 이준의 관을 잡고 운다. 이상설과 민영환도 침울하다.)

이상설: 여론이 점차 이상하게 변하고 있습니다. 일본이 움직인 듯 합니다.

민영환: (쉰 목으로) 알고 있네.

이상설: 이런 말을 제가 하기에 그렇지만, 이준 검사님이 죽은 경위에 대해서도 여러 신문사들이 부풀리고 있고, 자살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우리가 동양의 대담한 사기단이라고 추측하는 신문조차 있습니다.

민영환: 일단 검사님의 유해는 이곳에 묻어두고, 자주권을 되찾는 날이 오면 그 때 우리 손으로 고국으로 옮겨드리자.

S#36, 1908년, 헤이그 호텔 앞

이상설: 저는 앞으로 미국의 동포들을 모으는 단체를 만들고, 이 통역관은 아라사로 돌아가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합니다.

민영환: 자네들은 최선을 다했어. 분명히 자네들은 능력이 있지. 그 능력을 헛되게 버리지 말게. 이위종 통역관에게도 폐하의 친서를 니콜라이 황제에게 전해주고. 러시아가 그나마 덜 썩은 동아줄이야.

이상설: 직접 전해주시지요... 나라 안에서도 우리 정체가 퍼져서 폐하가 퇴위당하셨다고 합니다.

민영환: 알고 있네.

이상설: 이위종 통역관이 기다릴 것입니다.

민영환: 아니야. 내 이범진 공사 때문에 그 얼굴을 못 보겠네. 그럼 부디 잘 가게. (뜨겁게 포옹한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이상설이 민영환을 떼려고 하지만, 그가 눈물을 흘리고 있음을 알고 가만히 있는다.)

돌아가는 민영환, 그의 손에는 꾸깃꾸깃한 전보가 손에 들려 있다. 전보에는 “이상설 참의 이위종 통역관에게 비보를 전해주시오. 실은 형인 이기종 씨가 특사 건으로 통감부에 잡혀가 고문사하였는데 그가 병사했다고 이야기 해 주시오.”

현재

S#37, 2016년, 낮, 재판장

검사: 좋습니다. 백 번, 천 번 양보해 민영환씨가 숨은 헤이그 특사라고 칩시다. 그런데 대한 광복회라고요?

판사: 검사, 대한 광복회가 정확히 어떤 단체입니까?

검사: 대한 광복회는 영남, 충청을 중심으로 만든 비밀 결사단체로 군자금 모금을 위해 활동했습니다. 1910년대 와해되자 흩어져 만주로 달아나는데, 그 중 김좌진은 북로군정서를 설립합니다. 사령은 박상진, 부사령은 김좌진, 그리고 고문은...

민경준: 민영환. 고문은 민영환이었습니다.

검사: 소송인, 이제는 웃음도 나오질 않는군요. 이정도면 허언증 아닙니까?

민경준: 조부님게서 헤이그에서 미국에 요양하시는 동안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가 다음과 같았습니다. (검사에게) 글로 쓴 증거를 달라고 하셨지요? “나의 외교활동은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있소. 그러니 가문 사람들과 유력자들에게 은밀히 돈을 빼돌려 지방에 망명 정부 내지는 단체를 설립하려 하는데...”라고 적혀 있습니다. 외교활동에서 자금 모금 활동으로 돌리신 것이지요.

검사: (너털웃음) 차라리 안중근 의사가 말한 “김두성” 사령관도 민영환 씨라고 하시지요! 그나저나 갑자기 외교 활동에서 돌아선 것은 또 무슨 바람이 들어서 그러셨겠습니까?

판사: 검사, 주의 하시오.

(암전)

S#38, 1909년, 오후, 조선 통감부

데라우치 통감: (전쟁으로 오른 팔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 왼팔을 내밀며) 어서오게, 화폐정리 사업이 마무리되고 있다고?

메가타 고문(재정고문): 예, 상인들이 역시 빠져나온 한편, 우둔한 토착 상인들은 모두 내려앉았습니다. (두껍게 쌓인 서류들을 보고)

이게... 다 뭡니까?

데라우치 통감: 이번에 조선 황제가 기차 타고 여행 가지 않았는가, 정신 없는 사이 왕궁에서 가져온 것일세.

메가타: 1896년, 이때가 러시아 공사관에서 보낸 친서군요. 20년간 노력이 이 때 헛수고가 될 뻔하지 않았습니까?

데라우치 통감: 지금은 추억이지. 이건 왕의 밀서들일세. 이회영에게 보내는 편지, 황성 협회에게 독립 협회를 뒤엎으라고 보낸 친서...

(뭔가 눈여겨 보며) 이건 뭐지? 이..용익에게, 헤이그로 나의 친서와 함께 가져가면 민영환이 그의 능력과 지인들을 동원하여 후원할 것이오.

메가타: 민영환? 지난 헤이그 사건에서는 없던 인물인데?

데라우치 통감: 그게 아니라... (두꺼운 장부를 넘기며) 민영환, 민영환... 여기 있다! 이럴수가! (메가타에게 넘겨준다.)

메가타: 민영환, 몇년에 참의를 지내고, 10년전인가 주6개국 겸임... 대사를 지내고, 왕비의 척족이다. 꽤 거물이지요. 가만... 그리고 1905년 자살?

데라우치 통감: 이 친서에는 민영환이 복귀하길 바란다고 적혀있어. 죽은 줄 알았던 자가 우리 턱 밑에 숨어있을 수 있어.

그 때 감쪽같이 우리를 기만하고 해외에서 방해활동을 한거야.

메가타: 이럴게 아니라 어서 그를 체포해야 합니다.

데라우치 통감: 아니야... 섣불리 조선인들에게 소문을 퍼뜨리지 말고, 조만간 반도의 경찰권도 곧 해제될 걸세. 그때 그를 채포한다.

메가타: 체포한 후에는 어떻게 합니까? 비밀 단체들, 인물들과 연줄이 달려 있을 것 같은데요?

데라우치: 연줄이 달려 있는 자가 아니라 연줄들을 쥐고 있는 자야. 민중에게 빌미를 잡히지 않기 위해 은밀히 체포해야 한다... 그리고, 철저히 그를 취조해야지! 이제 나와 자네는 직접 손 댈 필요가 없네. 유능한 일본 경찰이 잘 해줄 게야.

S#39, 1909년, 밤, 민겸지의 집,

민겸지(민국신보 사장): (방 안에서 대면한 민영환과 총 든 두 명을 보고 사색이 되어) 이봐 영환이. 나 누군지 알아보겠나? 어째 자네만 팔이 안으로 굽질 않는가?

민영환: 형님, 형님 머릿속엔 어릴 적 추억이나 좋은 기억밖에 없겠지만, 제 머릿속엔 마마께서 돌아가신 뒤에 가장 먼저 왜놈에 고개 숙인 위인밖에 없습니다. 수백 명이 되는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먼저 말입니다.

민겸지: (...! 비굴하게 털썩 무릎 꿇으면서) 내가, 내가 그랬다는 것은 차마 변명하고 싶지 않네. 하지만 나는, 뒷날을 위해서, 여흥 민씨 일가의 이름으로 몸뚱아리를 희생한 것이다. 그것만은 알아줘야 돼.

민영환: 하지만 민족의 이름으로는 아니지요. (옆에 총 든 인물들, 총을 바짝 들이대며 긴장감이 고조된다.) 형님, 일이 틀어져도 형님의 이름은 드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나라가 독립되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때 일이 부끄럽다면, 속죄의 의미로 적선을 하시지요. 위해를 가하지는 않게습니다.

민겸지: (무거운 침묵 후 천천히 장물대로 가서 지폐들과 금괴를 내놓는다.) 자네도 사람이고, 가족이 있는 몸이니, 명줄이나 끊지 말아주게.

(민영환, 말 없이 돌아선다. 두 명의 사람이 총을 발사하려 하자 민겸지는 총에 맞았다고 생각하고 눈을 질끈 감는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민영환: (밖에서 신발을 신으며) 저는 약속을 지켰습니다. (방 밖을 나온 두 명과 걸어가다가 미련이 잇는 듯 돌아와서) 형님은 어째서 그렇게 추잡하게 변하신 것입니까?

민겸지: (사랑방 안에서 정신을 차린듯) 자네는... 그래도 잘 나가는 역관일 땐 봐줄만 했는데 어째 떠돌이 중처럼 구걸을 하고 다니는가? (민영환, 대답 없이 재빨리 사라진다. 그 직후 일본 경찰들이 민겸지의 집을 포위한다.)

S#40, 1909년, 밤, 경기도의 한 야산

광복회 단원1: 그래도 대감께사 나서시니 자금 모금이 어느정도 활력이 트이는 것 같습니다. 역시 이런 운동도 가문이 좋아야 잘 돼나봐.

광복회 단원2: 그러게 말이야. 이전에는 네 번을 연달아 실패했잖아! 흔히들 여흥 민씨 척족 중 감투 쓴 자만 천 명이라는데, 일 원씩만 가져와도 얼마입니까?

(아래에서 누군가 올라온다. 두 단원, 위협감에 총을 겨누지만 곧 거둔다.)

단원2: 부사령님...단원들하고 어찌 이곳까지.

김좌진(부사령): 민 고문님은 무사하신가?

민영환: (힘겹게 올라오며) 내 목숨도 아직은 질기네.

김좌진: (시간이 지난 후) 민 고문님이 숨어계신 사이 영남 조직의 연결망이 완전히 뚫렸습니다. 박상진 사령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고, 저는 남은 기호 출신 단원들을 인솔해서 겨우 왔습니다.)

민영환: 상황이 이러면 더 이상 모여다니기 힘들 것 같다. 씁쓸한 말이지만 상황이 그렇지 않느냐. (주머니에 손을 넣다가 화들작 미끄러질 뻔한다.)

단원2: (별일 아니라는 듯) 선생님도 참... 주머니의 납덩이 가지고선.

(한편 단원들, 민영환의 말을 수긍한다. 서로 믿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김좌진: 광복회 회원들은 각자 자택 외 가장 믿을 만한 자의 집으로 은신하고 있다가 개별적으로 만주로 가도록 한다. (민영환에게) 고문께서도 자리를 피하시지요.

S#41

(민영환, 눈을 뜨고 보니 일본군에게 포위되어 있다. 감옥으로 전환되는 장면, 만신창이가 된 그의 모습이 클로즈업 되어 있다.)

경찰1: 너 하나 죽어도 세상이 신경 쓸 것 같아? 이미 죽은 자가 죽었다고 슬퍼할 사람은 없어!

경찰2: 그 정도로도 독종인 것은 인정해 줄테니, 남은 단원들의 행방을 이제 그만 말 하시지요. 혀 한 번만 놀리시면 혀 뽑힐 일도 없습니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깨는 민영환, 어느 집 사랑채에 깨어 있다.)

S#42, 1909년, 아침, 민길상의 집

민길상 (민영환의 사촌형): 뭘 그리 놀라시는가, 걱정 말고 푹 쉬시게. 지금 어디 돌아다닐 몸도 아니야.

(민영환, 힘겹게 고개를 끄덕인다.)

민길상: 단월아, 물수건을 좀 가져오너라.

S#43, 1909년, 낮, 민길상의 집

민단월: (민영환이 먹고 남은 상을 치운다. 신문과 문서들을 읽는데 몰두하는 민영환에게) 그런데 아버지께서 그러셨는데, 어르신께서는 왜 그렇게 문중 사람들을 싫어하시나요?

민영환: (무시하려다가 문서를 두고 돌아 앉는다.) 그게 말이다... 나는 벼슬에도 오르지 못하는 서생이었는데 어떻게 은혜를 입어서 과거 시험도 보지 않고 높은 자리에 올랐지. 그런데 일본 사람들이 나를 도와준 분을 죽이고 나라가 잘못대로 돌아가지 않게 했단다. 그럼 너는 어찌 하겠느냐?

민영환: (민단월이 대답하지 않자) 우리 집안 사람들은 가족을 위해서라고 앞다투어 일본 사람들에게 고개를 굽혔단다. 너무 환멸감이 들어서 이야기를 하지 않다 보니깐 여기까지 이르렀더구나.

민단월: 아버지는 그분들이 가문을 지켜주었다고 훈장을 받았다고 하셨어요.

민영환: 단월아, 이름을 그렇게 높이느니 차라리 알려지지 않는게 낫단다.

S#44, 1909년, 밤, 숲속

김좌진: 박상진 사령이 자백을 하는 바람에 동지들이 몇 명 더 잡혔습니다.

민영환: 그를 너무 탓하진 말게. 자기 혀를 깨무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김좌진: 선생님쎄서 계신 마을까지 왜군이 들이닥쳤다고 하옵니다. 같이 삼원보로 피하시지요.

민영환: (고개를 내저으며) 늙은이와 젊은이가 함께 가면 잡힐 가능성이 곱절로 커진다네. 지금 내게 있는 자금을 모두 받고, 바로 이곳을 뜨게.

S#45, 1909년, 밤, 민길상의 집

(민영환, 밤중에 뒷간에 가려 한다. 방 안에 말 소리가 두런두런 들리기에 귀를 기울이니)

쇠둥이(하인): 아니 주재소에는 무슨 일로요? 우물이 또 막혔나요?

민길상: 정말 시급한 일이니 빨리 다녀오게.

(민영환, 불안감이 엄습한다. 뒷간에 가는 척 대문으로 가는데)

민길상: 야밤에 어딜 가는가?

민영환: 네, 이런저런 잡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저 밖에 산보나 다녀오려 합니다만.

민길상: 여기가 산하고 맞닿아서 짐승들이 또 내려올지 모르네. 집 안에서 조금 거닐지 그래.

민영환: (어색하게) 그럴까요? 그럼 그냥 방에 들어가겠습니다.

(집 안에 들어가자 민길상,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러다가 민영환이 들어간 자리를 보며 화들짝 놀라고 방 안에 들어간다.)

민길상: 이게 무슨 짓!(말문이 막힌다.)

민영환: 다른 자도 아니고, 어떻게 형님이 그러실 수 있습니까? (품에 단월이가 안겨 있다.) 친척 하나 재워주는게 그리 힘든 일입니까?

민길상: 아이를 내려놓게.

민영환: 그리 할 순 없지요. 일제에 잡혀가느니 차라리 을사년에 죽은 놈이 되겠습니다!

(단월을 안고 숲 속으로 뛰는 영환, 뒤에 바짝 일본 헌병들이 올라온다. 몸을 강 앞 절벽 틈에 숨기는 영환)

단월: (부스스 깬 후,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른다. 영환이 입을 막아 소리는 나지 않는다.)

민영환: 무서워하지 말아라. 곧 너의 집으로 갈텐 걱정 말고 기다려라.

(밖에서 민길상의 목소리가 들린다.)

민길상: 이제 빠져 나올 수 없네. 죄 없는 아이를 해코지하지 말고 나오면 헛된 목숨을 버릴 일이 없네.

민영환: 나라는 무슨 죄를 그렇게 지었는데 해코지 입니까? 내게는 폭탄이 하나 있습니다. 이거 터져서 여럿 다치기 싫으면 멀리 물러나십시오.

(갈등하는 헌병경찰들, 결국 조금씩 물러 나온다. 잠시 후 뛰쳐나오는 단월)

민길상: (옆의 하인에게) 집으로 데려가 재우게. 많이 놀랐을 게야.

S#46, 1909년, 새벽, 숲 속

민영환:(독백) 잡히면...동포들이 위험하고, 죽으면...사람들을 기만한 꼴이 되고...

(밖에서 “어서 나오라!” “항복하라!”와 같은 고함소리가 들린다. 민길상도 초조한 듯 보고 있다. 민영환, 천천히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온다. 하지만 그는 주변에 일본군들이 곳곳에 매복한 것을 알고 있다.)

(천천히 걸어가던 민영환, 주머니에서 조그마안 납덩이를 꺼낸다.)

민길상: 폭탄 이야기가 맞았나봅니다.

헌병대장: 저자가 다치면 안된다, 막아라! (헌병대원들이 달려가는게 슬로우모션으로 보인다. 민영환, 화면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몹시 슬픈 눈빛인다. 그리고 슬그머니 주머니 속 납덩이를 꺼낸다.)

현재

S#47, 2016년, 저녁, 변호사 사무실

변호사: 선생님, 죄송한 이야기이지만, 재판이 조금 어려워질 듯 합니다.

민경준: 증거가 적어서 그렇습니까? 역사학자들이 인정하기 싫어서입니까?

변호사: 한 번도 이런 청구가 성공한 적은 없었습니다. 이런 청구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선생님께서 조부님을 위해 뜻을 꺾지 않으시면 저는 옆에서 도와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이미 재판으로 충분히 사람들에게 조부님의 존재를 더 잘 알리신 것 같습니다.

(암전)

S#49

민영환, 이위종, 이범진, 이준, 노년의 민단월, 이상설, 김좌진이 관객을 등지고 서있고 민경준은 민영환 뒤에 서 관객을 보고 있다.

이범진: (관객에게 돌아서며) 나 이범진은 경술국치를 보고 분을 이기지 못해 한 많은 생을 뜨게 되었소. 내 아들은...

이위종: (관객에게 돌아서지 않고 무릎이 꺾여 쓰러진다.)

민경준: 이위종 선생께선 일본군과 유격전을 하다가 순국하셨습니다. 오늘날까지 어디에 묻혀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상설: (관객에게 돌아서며) 나 이상설은 나라를 잃은 지 4년 후 숨을 거두었소. 절대 이 죄인의 장례를 치르지 말라고 하였소.

이준: 황제께선 결국 해외로 망명하시지 못했고, 내 유해는 광복 18년 후에서야 고국의 땅을 밟을 수 있었소.

김좌진: 나는 1929년, 다름 아닌 같은 민족, 일제의 주구에게 총을 맞고 만주에서 쓰러졌습니다.

민경준: (털썩 앞으로 쓰러지며) 이제 할아버님의 이야기를 증언해줄 사람이 없습니다. 단월님밖엔...

노년의 민단월: (관객에게 돌아서며) 선생님, 저는 마지막에 증조부님께서 돌아가시는 걸 본 사람입니다. 그 분의 뜻은 당신의 죽음이 독립 후에도 알려지지 않길 바라는 것입니다. 을사년에 죽은 줄 알았던 사람들을 속이는게 되기도 하고, 이름 없이 죽은 이들에게 너무 미안해하셨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역사를 알리려는 뜻이 참으로 가상하시지만, 진실이 알려지지 않으셔도 그분께서 섭섭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여전히 관객에게서 돌아서있는 민영환, 돌아선채로 쓰러진 증손자를 껴안는다.)

(암전)

S#50

(민경준, 오랫동안 바닥의 혈죽을 본다. 어느새 혈죽은커녕 자국도 없다. 헛것인 것이다. 민경준은 전화기를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끝>

연세춘추  chunchu@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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