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문화적 공간이 된 신촌 철도 시설

1921년 경의선 신촌역 영업 개시는 신촌 철도 교통의 황금기를 열었다. 경의선은 병참기지였던 용산과 신의주를 철도로 잇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는 우리나라를 대륙침략의 발판으로 삼으려는 일제의 전략이었다. 그런데 본래 목적과 달리, 사람들은 일상적 용도로 경의선을 많이 이용하기 시작했고, 이는 신촌역 개통으로까지 이어졌다. 비록 최근에는 이용객이 줄었지만, 신촌역을 시발점으로 한 철도 교통의 흔적은 지금도 신촌·이대 지역 곳곳에 남아있다. 

 

#도심 속 예술 공간, 신촌 굴다리에서 신촌역 토끼굴까지

여정은 연세대에서 시작됐다. 백양로를 따라 한없이 내려가다 보면 대로변 건너편에 선 굴다리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잿빛을 띠는 콘크리트 굴다리를 처음 본 사람은 대개 그 어마어마한 크기에 압도당하곤 한다. 마치 ‘연세로의 수문장’ 같다.

한없이 간절했던 수험생 시절. 모든 곳에 합격과 관련된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굴다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제는 별 감흥 없이 지나가곤 하지만, 다리 아래 그늘막을 통과하며 또 하나의 독수리가 되는 기분 좋은 상상을 했다. 

굴다리 내부엔 크고 작은 벽화들이 차가운 콘크리트 벽을 도화지 삼아 수놓아져 있었다. 이 그림들은 지난 2015년 한국철도시설공단이 ‘벽화문화창작소’와의 협업을 통해 시행한 ‘벽화로 물들이는 철길 만들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그려졌다고 한다. 아기자기한 벽화들 덕분에 자칫 도심 속 흉물로 보일 수 있는 굴다리가 재평가된 것이다.

가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창천교회 골목을 지나다 보면 명물 삼거리에 도착한다. 빽빽한 상가들 사이로 신촌 민자역사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토끼굴은 저 옆 어딘가에 있을 텐데” 혼자 되뇌며 두리번거릴 때쯤 토끼굴이 그 모습을 내보였다. 굴다리 위 우거진 수풀 사이로 경의·중앙선 철로가 보였다. 입구에 다다르자 안을 가득 채운 그라피티가 눈에 들어왔다. 토끼굴은 그라피티 프리존이다. 그라피티 아티스트들은 행인이 비교적 적은 밤부터 새벽 사이, 이곳에서 재능을 맘껏 뽐낼 수 있다.

입구 쪽에 그려진 세월호 리본이 눈에 띄었다. 그라피티 아트가 이런 주제까지 다룰 수 있다니. 굴다리의 역할은 철로를 떠받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작가의 진심 어린 고민이 표현된 그림들은 이 공간에 예술을 가미했다. 별다른 제재 없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장소지만 그곳에서 음미할 수 있는 그라피티 아트. 토끼굴 특유의 어두움과 들릴 듯 말 듯한 기차 소리는 내가 서 있던 곳을 여느 전시장 부럽지 않게 만들었다.

 

#신촌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구 신촌역사

 

새로 지어진 신촌기차역 앞에는 고즈넉해 보이는 구 신촌역사가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한때 기차를 기다리는 이들로 붐볐을 것이다. 플랫폼에 줄지어 서 있을 이들의 모습을 그려보니, 구 신촌역사 주변은 유난히 한산해 보였다.

건물 외벽에는 ‘신촌관광안내센터’라고 큼지막하게 쓰여 있는 안내판이 달려있다. 건물 내부는 일종의 전시장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창문 틈으로 비치는 햇살 아래에서 신촌 교통역사를 담은 흑백사진들이 과거 신촌의 정취를 내뿜고 있었다. 전시장 내부에는 예전에 사용되던 기차 시간표도 전시돼있었다. 시간표를 꽉 채운 운행 일정은 신촌역이 얼마나 활발히 이용됐는지를 보여줬다.

일전에 아버지 친구분께 들었던 얘기가 생각났다. 젊은 시절을 신촌에서 보냈다던 당신은 신촌역을 “신촌역은 조그마한 시골 역 같이 수수했다”라며 “작은 역이었지만 파주나 문산에서 등하교하는 학생들이 많이 타 등굣길엔 늘 붐비던 기억이 있다”라며 회상했다. 

 

연세대를 지나 신촌 굴다리를 건너 신촌역 토끼굴, 그리고 구 신촌역사까지. 신촌 철도 교통의 흔적은 신촌·이대 지역에 이전과는 조금 다른 목적을 위해 굳건히 남아있다. 단순히 철도 시설 그 이상의 역할을 하는 지금처럼, 시간이 흘러 이 장소들이 또 어떤 탈바꿈을 할지 기대된다.

 

글 연세춘추
chunchu@yonsei.ac.kr

사진 하광민 기자
pangman@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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