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매년 11월 둘째 주 목요일이 되면, 모두가 숨죽인다. 하늘을 훨훨 나는 비행기도 공항 주변을 맴돈다. 운전자는 자동차 경적 한 번 울리길 꺼리고, 경찰은 경찰차를 몰며 학교 주변을 오간다.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교회와 성당, 절에는 연신 손뼉을 맞잡고 기도드리는 어머니들로 가득 찬다. 대한민국의 수능 날 풍경이다.

옛말에 ‘여측이심(如厠二心)’이라고 했다. 뒷간에 갈 적 마음 다르고 올 적 마음 다르다는 뜻인데, 지금 심정이 꼭 그렇다. 고3·재수를 겪으며 그토록 긴장되고, 떨리고, 무서웠던 수능이건만 지금은 내심 즐겁기까지 하다. 

우선 수능 날 하루를 거저 쉰다. 해가 중천에 뜰 무렵 일어나, ‘지금쯤 수학 19번 문제를 풀고 있겠네’라는 발칙한 상상을 해볼 수 있다. 또 침대에 누워 페이스북·유튜브를 살펴본다. ‘의대생이 풀어보는 이번 수능’ ‘00대학교 00학과 학생은 만점을 받을 수 있을까’ 따위의 제목으로 온갖 콘텐츠가 올라온다. 이런 것들 하나하나가 나름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다.

 

2. 
올해도 어김없이 11월 둘째 주 목요일이 지나갔다. 올해도 비행기가 상공을 떠다녔고, 경찰차 역시 분주히 학교를 오갔다. 교회와 성당, 절도 ‘수능 기도’를 드리는 어머니들로 가득 찼다.

이게 수능이다. 굳이 학생들이 느끼는 압박·긴장을 얘기하지 않아도 충분하다. 수능을 맞이하는 대한민국의 모습에서 ‘수능’의 무게를 짐작할 수 있다.

 

3.
수능은 매년 ‘역적’을 하나 낳는다. 지금껏 탄생한 역적은 수능이 치러진 햇수만큼이나 그 종류도 제각각이다. 수능을 출제하는 평가원부터 지진 같은 천재지변까지 다양한데, 올해는 좀 유별나다. 

‘국어 31번 문제’가 올해의 수능 역적으로 사실상 정해진 모양새다. 이유는 간단하다. 학생들이 어려워한 탓이다.

수능 국어 31번 문제가 낳은 후폭풍이 상당하다. 우선 비판적인 내용이 중론으로 보인다. “최상위권 변별용 문제치곤 어려웠다”는 평이한 비평부터 “괴랄한 문제”라는 악담까지 나온다. 수능 당일부터 한동안 토씨 하나까지 낱낱이 해부됐음에도, 국어 31번 문제는 여전히 화젯거리로 소비된다.

‘국어전문가’를 자청하는 인물의 해설이 학원가를 중심으로 퍼진다, 글로 이름 좀 날린 작가의 신랄한 비판이 신문과 방송을 탄다, 본인을 ‘00공학도’로 소개한 사람의 독설을 듣는 식이다. 물론 18%에 불과한 정답률도 한몫했다. 국어 31번 문제를 소비하는 방식이 이토록 다름에도, 이들 모두는 같은 곳을 가리킨다. 국어 31번 문제는 괴물이다.

 

4. 
국어 31번 문제는 잘못이 없다. 출제 목적과 변별력 유무를 떠나, 국어 31번 문제를 괴물로 만든 장본인은 바로 우리들이다. 

‘수시 확대 정시 축소’는 어느 정부를 가리지 않고 공통된 교육 기조였다. 오는 2020년, 정시로 대학에 입학하는 인원은 7만 9천 명가량이다. 반면 수시 입학생은 약 26만 8천 명에 달한다.  

정시의 문은 갈수록 좁아지는데, 이를 통과하려는 사람 수는 썩 줄지 않는다. 고등학교 졸업 인원이 줄었지만, N수생이 늘어난 탓이다. 이번 2019학년도 수능에 응시한 인원은 59만 4천924명이다. 10년 전인 2009학년도 수능에서도 59만 명이 응시했다.

더 나아가 교육 당국은 ‘쉬운 수능’ 기조를 선언했다. 그즈음 수능부터 과목별 만점자가 1%를 넘기 시작했다. 문제의 시작이다. ‘물수능’ 논란 속에서 평가원장이 교체되고, 교육 당국은 매 수능마다 새로운 정책 기조를 발표했다. 수능 과목별 1등급 커트라인이 90점 대와 80점대를 오간 시점도 이쯤이다.  

 

5.
수능은 줄세우기다. 이를 부정하긴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가 끝없이 논의해야 할 것은 ‘어떻게 줄 세울 것이냐’이다. 이번 국어 31번 문제는 평가원이 내놓은 대답이다.

약 60만 명의 학생을 한 가지 기준으로 줄세워야 한다. 1등급부터 9등급은 물론 최상위권까지 변별해야 한다.  ‘정답률 18% 짜리의 괴랄한 문제’는 선택이 아닌 필수였을지 모른다. 수능을 변명한다, 국어 31번 문제는 우리가 만든 괴물이다.

 

 

 

글 정준기 기자
joonchu@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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