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만이 사는 세상

정예일 (교육·16)

문제는 언제나 문제의식을 동반한다. 어떤 것이 문제라고 인식하기 때문에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때문에 어떤 관점에서는 문제가 아닌 것이 다른 관점에서는 심각한 문제로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문제의식이 타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중성, 위급성, 시기 적합성 등의 요소를 가지고 있어야 그것이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개인이나 집단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그것을 무한히 투입할 수 없어서 우리는 수없이 산적한 문제 중에서 세심하고 깊이 있는 의식적 진단을 통해 선정한 문제만을 해결해야 한다.

2018 평창 동계 패럴림픽이 3월 7일에 개최됐다. 하지만 지금 평창은 올림픽 때와 비슷하다고 할 수 없는 응원 열기와 관심 속에서 그들만의 리그를 치러내고 있다. 15일 한국방송협회에 따르면 공영방송사들은 패럴림픽 중계 편성시간을 평균 40시간까지 확대했다. 개막식 때만 하더라도 평균 20시간에 지나지 않았던 편성시간을 공영방송사들이 늘린 이유는 패럴림픽을 외면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한 일간지에서는 이들 중계가 일본 NHK(62시간), 미국 NBC(94시간), 영국 채널4(100시간)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고 비판했다. 문재인 대통령 또한 같은 날 패럴림픽 중계방송을 더 편성해달라고 요청했고, 이에 따라 공영방송사들이 편성 확대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공영방송사를 질책하기 이전에 우리가 생각해봐야 하는 몇 가지 지점들이 있다. 올림픽과 비교했을 때, 패럴림픽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관심은 훨씬 적은 편이다. 패럴림픽과 관련해 발생하는 콘텐츠의 양, 시청률, 재생수, 검색 빈도 등 여러 수치를 살펴봐도 그렇다. 올림픽의 표어처럼 ‘Citius, Altius, Fortius(더 빠르게, 더 높이, 더 강하게)’하지 않은 경기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목을 집중시키는 스타 플레이어가 없기 때문인지,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방송사는 대중들의 반응을 편성시간에 반영한다. 공영방송을 비롯한 지상파방송의 ‘공적 역할’은 대단히 중요하지만, 한국방송시장의 특성상 지상파 방송사가 경영난을 겪고 있기 때문에 시청률이 낮게 나오는 패럴림픽 중계방송의 편성을 늘리기 힘든 현실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공정하게 보도해야 하지만, 인기를 좇을 수밖에 없는 언론의 책무와 생리는 항상 긴장 관계 속에 있는 것이다.

언론이 반드시 공적 역할을 준수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바람직해 보이지만, 이전에 우리는 자문해야 한다. 우리는 왜 패럴림픽에서 ‘영미!’를 외치고 있지 않은가? 물론, 패럴림픽이 인기를 끌지 못해서 중계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상황은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언론의 생리보다 책무만이 강조될 때, 윤리가 언론을 점유할 때 열린 사회는 훼손된다. 이런 사안이 있을 때마다 무조건 방송사들의 자율적인 책임감을 신뢰하는 것 또한 바람직하지 않다. 또한, 단순히 편성시간만을 기계적으로 늘리는 것은 의미가 없다. 우리 모두의 관심이 서로에게 향해 소외되는 사람이 없을 때 진정한 의미의 평등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자유와 평등, 공정함에 대한 논쟁은 시기와 형태만을 바꿔가며 계속해서 나타난다. 한쪽의 평등함이나 자유 등의 가치가 얼마 정도의 설득력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그 시대와 사회의 가치의 방향성이 결정된다. 이것은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의 거대 담론의 영향을 받았던 모든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인간은 변하지 않는데, 시대가 변하는 것이다. 패럴림픽 중계문제를 진단하면서, 우리는 원초적인 질문으로 돌아가야 한다.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것은 어떤 것이 공정한 것인지를 이해하는 일이다. 공정한 사회를 구성하는 방법이 어떤 것이든 간에, 인간과 공동체의 근원적이고 핵심적인 본질을 놓쳐선 안 된다. 우리가 이 질문에 답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고 해도 답은 요구된다. 끊임없는 질문과 답의 과정 안에, 저마다의 ‘그들만이 사는 세상’이 ‘우리가 함께 사는 세상’으로 바뀌어나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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