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리 매거진부장 (AS/정외·16)

뒤숭숭한 가을. 이런저런 생각들로 가득 찬 머릿속. 생각만 해도 괜히 마음이 공허해지는 순간들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그리울 때
짝사랑은 아프다. 상대와 내 마음이 일치하지 않아서, 또는 상대에게 내 마음을 전할 수 없기 때문에 특히 더 씁쓸하다. 연인을 향한 짝사랑만이 아픈 건 아니다. 평소 부모님께 잘 표현하지 못하는 것, 소중한 누군가에게 쉽게 마음을 전하지 못하는 것도 다 ‘짝’사랑이다. 그런데 만약 그런 사랑하는 사람을 하루아침에 못 보게 될 줄 알았더라면, 그런 짝사랑 따윈 하지 않았을 거다.

#끝은 진짜 ‘끝’이라는 것
흔히들 말한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인생, 미래가 어떻게 될진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고. 불확실한 삶에선 사랑도, 공부도, 건강도, 당장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게 현실이다. 그나마 삶에서 가장 확실한 진실이 있다면, 우린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이다. 아리송한 세상을 이제 조금 이해하는 데 21년이 걸렸는데, 언젠가 끝이 있다니! 그럼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거지. 어떻게 해야 삶에서 좋은 ‘끝’이란 걸 맞이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언젠가 막을 내리는 영화 한 편을, 우린 왜 이렇게 아등바등 보고 있는 걸까.

#지구 속 우울감
이럴 때가 있다. 누군가 밝은 표정을 짓다가도 한순간에 무표정, 심지어 무표정을 넘어 왠지 모를 슬픔으로 가득해 보일 때. 이때 “왜 우울해?”라고 물으면, 돌아오는 건 “나 안 우울한데? 그냥 평소 표정이 이런 거야”라는 대답. 아무 이유 없이 마음 한쪽이 무(無)로 가득해질 때가 있다. 어느 순간 마음이 차분해지고, 축 가라앉을 때. 알 수 없는 명상에 젖어 들 땐, 애써 괜찮은 척 표정 관리를 하곤 한다.

#나도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
나중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진로를 고민하다 보면 먼저 내 상황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내가 지금 하는 일은 결국 무엇을 위한 일인 걸까. 이러다 보면 때론 내가 확실하다고 생각한 미래에 대해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삶에 확신이 서지 않을 때, 알 수 없는 불안감에 그냥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리고 싶다.

지금 내 삶이 가벼운 성장통을 겪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결코 나만 이런 아픔을 겪고 있는 건 아닌 듯하다. 주변을 조금만 둘러봐도 다들 고시 공부를 하니 마니, 대학원을 가니 마니, 남자친구랑 금세 이별하니 마니 등 모두 각자의 인생 고민 하나쯤은 품고 있는 듯하다.
신기한 건 이런 아픔에 대한 우리의 자세이다. 각종 매체로부터 접하는 누군가의 아픔을, 우린 언젠가부터 그것이 마치 자기 일인 양 관심 가지고, 각자의 고민을 보듬어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는 이런 아픔을 단순히 인지하는 차원을 넘어, 좀 더 적극적으로 서로의 아픔을 ‘공유’하는 시대가 됐다. 단적인 예로, 페이스북 ‘대나무숲’ 페이지에 올라오는 사연만 봐도 그렇다. 누군가가 올린 남사친, 여사친에 대한 사랑 고민부터, 각자의 진로 및 시대적 고민 등의 이야기는 장르를 불문하고 불특정 다수로부터 쉽사리 공감받는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서로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기에, 이를 모두가 무의식적으로 어루만져 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슬픔은 여전하다.
그리고 아직은 모든 슬픔이 똑같이 이해되는 시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린 또다시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보내주어야 할 순간을 맞이할 것이다. 영원할 것 같은 불확실함 속에서도 정작 영원한 것은 없음에 슬퍼한다. 그리고 가끔은 뭐라 확실하게 정의될 수 없는 스스로에 불안해지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은 가까이서 봤을 땐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은, 매번 삶의 숱한 아픔과 마주해야 하는 우리들에게 참 배부른 조언 같다.

멀리서 봐도 슬플 것 같은 인생.
이러한 삶에서 잠깐이라도 희극을 맛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 하루도 입가에 옅은 미소를 품을 줄 아는 그대는, 
이 삶이 우리에게 주는 유일한 
행복이다.


이 가을, 아파도 우리가 꿋꿋이 살아가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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