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문학상-시 분야] 수상소감


윤승리(독어독문·12)


나치시대를 살았던 독일의 시인 브레히트는 자신의 시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에서 "이런 시대에 아름다운 서정시를 쓰는 것은 그로테스크" 라고 말했습니다.

이번 시는 죽은 물고기처럼 조류에 따라 흘러가는 제 모습에 경악을 한 뒤 쓰게 되었습니다. 저는 아름답지 못한 시구를 토해내고 있습니다. 그 시구를 읽노라면 답답하고 괴롭습니다. '터널을 지나는 창문 열린 버스 안'처럼 매캐하고 숨 막힙니다.

부끄러움에 대한 고백이며 괴로움에 대한 실토이기 때문입니다. 대학생활 5년동안 나름 많이 배웠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제가 뱉어낸 말은 강박에 사로잡힌 언어들이며 수치의 전개입니다. 황지우, 김수용 시인의 저항시를 읽으면서도 불의에 순응하고 침묵하며, 그것을 묵과해온 저에 대한 수치스러움입니다.

어쩌면 시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네의 하루는 버스요금처럼 매일 층층이 쌓인 괴로움의 총화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우리학교의 풍경을 사랑합니다.

총천연색의 꽃들과 벚나무가 만개하는 봄과 팔레트에 짜놓은 유화물감들이 펼쳐진 듯한 가을은 빈약한 언어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하염없이 몇시간이고 필름카메라의 뷰파인더(렌즈)만을 바라본 적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달력 몇 장이 통채로 찢겨나간 듯 명미로운 풍광들이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없습니다. 아름다움을 기억하지 못하고, 노래하지 못 하는 시대를 살고 있으매 통탄합니다.

마지막으로 조야한 단어들의 나열을 시로서 평가해주신 교수님께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박영준 문학상-소설분야] 수상소감


김건(철학·10)


당선되었다는 전화를 받고 난 뒤,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가 잠시 떠올랐습니다. 그 때는 어두운 방에서 홀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제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먹혀 들어가던 그 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쓰기 시작 했던 글이, 이제는 제 스스로를 이렇게 웃게도 만들어 준다는 것이 아직까지도 얼떨떨합니다.

글을 쓰는 것은 늘 즐거우면서도 괴롭고, 또한 두렵습니다. 우선, 혼자 글을 쓰고 있을 때는, 글을 쓴다는 행위 자체 만으로 다른 모든 것을 잊을 수 있고, 또한 그런 몰두의 상태는 저에게 은밀한 즐거움을 줍니다. 하지만, 그 몰두의 상태를 지속하는 것은, 세상만사 안 그런 일이 어디 있겠냐마는, 잔인한 고통을 선사합니다. 그리고 글을 마쳐갈 무렵에야 두려움이 찾아 옵니다. 처음으로 아이를 혼자 밖으로 보내는 부모의 마음이 이럴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스스로의 글에 대한 온전한 믿음과 사랑과는 별개로, 내가 낳은 글이 남들에게 어떻게 읽힐지에 대한, 소심한 성격에서 비롯되는 어쩔 수 없는 그런 두려움입니다. 하지만, 즐거움과 괴로움, 그리고 두려움 사이의 불가사의한 간극이 늘 신기할 따름입니다.

문학의 즐거움에는 쓰는 즐거움과 읽는 즐거움뿐 아니라, 읽히는 즐거움도 있겠죠. 제가 써온 조악한 글들을 읽어주고 평해준 여자친구 노희수 양에게, 그리고 친우 이준호 군에게, 또한 응원해주시고 도움 주신 많은 다른 분들께 진심 어린 감사의 말을 올립니다. 이 분들이 없었다면, 전 일찍이 혼자 거꾸러졌을 것입니다. 또한 졸업을 앞둔 저에게 큰 선물을 주신, 연세대학교, 연세춘추 관계자 분들, 연세문화상 심사위원 분들께도 감사의 말을 올립니다.


[오화섭 문학상-희곡분야] 수상소감


윤세훈(언홍영·15)

 

우선 미흡함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저의 글을 당선작으로 뽑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 심사평을 읽지 못한 상태에서 추측하건대 미숙한 글임에도 불구하고 현 시국과 관련된 시의적인 소재에 큰 점수를 주셨기에 지금의 당선이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부족한 부분을 폭넓은 경험과 부단한 연습을 통해 채워 나가서, 앞으로 훌륭한 글을 통해 감동을 주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인종은 인종주의의 자식이지 아버지가 아니다.’ 『세상과 나 사이』라는 타네하시 코츠가 저술한 책의 나오는 문구입니다. 이 문구에서 희곡이 시작했습니다. 세상의 기원, 저 뿌리 끝에서부터 있을 것 같은 ‘색’이라는 개념 또한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린색’을 통해 인종을 나누고 계급을 부여하는 인위적인 절차를 오랜 시간에 걸쳐서 밟아왔습니다. 그렇다면 그 계급 위에 그려진 위계질서는 절대적인 것일까라는 의문이 들었고 언제든지 뒤바뀔 수 있다는 점을 피력하고 싶었습니다. 물론 그 유동적인 가치의 종지부에는 비판과 회의가 기다리고 있지만.

제 희곡 속 세계에선 어떠한 색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색(color)이라는 단어 또한 없습니다. 그러던 도중 ‘색’이 나타났고 현실 세계의 검은색을 ‘흰 섹’이라고 이를 명명하기에 이릅니다. 현재의 권력구조, 가치체계처럼 형성된 단어 또한 진리는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자 ‘섹’이라고 다르게 명명했습니다. 그래서 만약 이 희곡이 상연된다면 관객들이 관극하는 동안 역전된 개념이 사용되는 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경험을 제공하고 싶었습니다.

또한 희곡 세계에서 ‘섹’이 탄생하고 가치가 부여되는 인위적인 과정을 통해 기득권층을 포함한 사회전체를 비판해봤습니다. 가치의 역전마저도 결국 기득권층의 유지를 위해서 일어나는 것은 아닌지, 전문적인 검토보다 사소한 기호를 통해 중대사안이 결정되는 건 아닌지, 그들이 대중을 어떻게 다루는지, 현 대한민국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제가 느끼고 있는 이 무기력감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를.

고심 끝에 결말을 희망보단 절망적인 방향으로 선택했습니다.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할 의무는 없기 때문이죠. 그렇다고 절망의 메시지를 전달한 것은 아닙니다. 이 글을 훈훈하게 마무리 짓기보단 더 강력한 문제 제기를 통해 문제 의식을 환기하려는 의도였습니다. 문제 의식의 끝에 희망 혹은 절망 중에 어떤 것이 위치해 있을진 저를 포함한 여러분 모두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창한 말일 수도 있지만 ‘섹’의 세계가 반복되지 않도록 정의는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하며 ‘당연함’에 의문을 던질 수 있는 대한민국 국민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저의 부족한 글을 당선작 목록에 포함시켜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저작권자 © 연세춘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