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무새 죽이기』 속의 비속어 들여다보기

비속어는 사회 전반에 퍼진 편견과 차별적 인식에서 탄생한다. ‘병신’, ‘년’, ‘게이샷’, ‘레즈샷’ 등, 욕이라는 의식 없이 흔히 쓰이는 단어들도 그 뿌리는 장애인과 여성, 성소수자 차별에 있다. 하퍼 리(Harper Lee)의 장편소설 『앵무새 죽이기』에는 이처럼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한 비속어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깜둥이(nigger)’이 바로 그것이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듣는 비속어인 'nigger'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흑백간의 평등이 이루어질 수 없다. 오늘날의 '게이샷'이나 '집사람'도 이와 마찬가지로 편견을 고착화한다.


『앵무새 죽이기』는 193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한 ‘스카웃’이라는 소녀의 성장 소설이다. 그녀의 아버지인 변호사 애티커스 핀치가 백인 여성을 성추행했다고 누명을 쓴 흑인 ‘톰’의 변호를 맡는다는 내용은 이 소설의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 이야기다. 이 작품에서 ‘톰’을 비롯한 다른 흑인들을 지칭할 때 쓰이는 ‘깜둥이’라는 단어는 흑인에 대한 차별이 만연했던 1930년대 미국 남부 사회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 단어다.

소설 내부에서 흑인들은 백인들로부터 ‘깜둥이’라는 말을 듣는 것에 대해서 어떠한 불만도 표출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이 작품에서 흑인 전체를 대표하는 인물인 톰도 법정에서 스스로를 깜둥이라고 칭한다. 이렇듯 흑인들이 모욕적인 언사를 들으면서도 저항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흑백간의 권력관계에서 약자로서 받는 압력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누가 욕설이라고 생각하는 말로 불린다 해서 모욕이 되는 건 절대 아니야. 욕설은 그 사람이 얼마나 보잘것 없는 인간인가를 보여줄 뿐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지는 못해.”

애티커스가 소설 속에서 딸 스카웃에게 한 말이다. 그러나 욕설은 그의 생각처럼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비속어는 차별의 증거일 뿐만 아니라, 차별의 원인이기도 하다. 비속어는 사용하는 매 순간마다 차별적인 인식을 고착시킨다. 그러므로 차별적 편견을 담은 언어의 존속은 평등의 실현에 큰 걸림돌이다.

오랫 동안 여성을 보호의 대상으로 프레이밍하는 데 종교와 정치, 과학까지 합세했던 것처럼, 편견의 기저에는 사회 전체가 만들어낸 의식적인 문제가 있다. 그러므로 편견의 원인으로 비속어만을 지적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사람들이 비속어를 무비판적으로 사용하는 행태가 편견을 고착화하는 데 일조하였음은 분명하다. 사람들이 흑인을 매일 ‘깜둥이’라고 부르고 여성 배우자를 ‘집사람’이라고 부르는 사회에서 어떻게 평등을 기대할 수 있을까. ‘깜둥이’라는 단어가 존속하는 사회에서 평등에 대한 희망을 품기란 또 얼마나 힘든 일인가.

이 글에 등장하는 ‘깜둥이’와 같은 단어는 우리 사회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병신’, ‘문디’, ‘~년’, ‘호모’와 같은 비속어는 물론이고 ‘집사람’, ‘내조’와 같은 일상어들도 모두 2016년 현재 ‘깜둥이’의 다른 얼굴로서 우리 입에서 내뱉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우리의 혀로 타인을 옭아맬 수 없도록 차별적 비속어는 사라지거나 완곡어로 대체돼야 한다. 완곡어 운동의 유의미성은 비단 욕설에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쟁이’라고 생각하던 사람을 ‘신앙인’으로 생각하면 그를 보는 관점이 달라진다. 사람들은 ‘빠순이’를 한심하게 보지만 누군가의 ‘팬’이 되는 일은 개인 취향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다른 표현을 사용했을 뿐인데 그 느낌은 상이하다. 자연스럽게 ‘생겨난’ 단어가 아니라 ‘만들어진’ 단어인 만큼 완곡어는 그저 공기 속을 부유하다가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은 생각한 대로 말하기도 하지만 말하는 대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 만큼 이 노력이 유의미함은 분명하다.

『앵무새 죽이기』의 법정에서 마이옐라를 비롯한 모두가 ‘nigger’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는 한 번쯤 상상해봄직하다. 그것이 재판의 결과를 바꿨을지는 알 수 없지만, ‘깜둥이’가 진술했다고 생각하는 것과 ‘톰’이라는 한 남자가 진술했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톰 자신부터 자존감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배심원들이 한 명의 ‘깜둥이’가 아닌 ‘톰’이라는 한 남자의 운명에 대해 조금쯤 생각해 보지 않았을까.


제목에 대해 의아해하는 사람이 많다. 독자들 중 누구도 앵무새를 ‘죽이는 대상’으로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 제목이 엉뚱하게 느껴지는 것이리라. 『앵무새 죽이기』라는 제목은 소설 속 애티커스의 어릴 적 경험에서 비롯한 것이다.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는 앵무새를 사냥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라는 것이 애티커스의 생각이다.

여기서 앵무새는 작품 속 흑인과 동일시된다. ‘앵무새 죽이기’라는 제목을 보고 ‘앵무새를 왜 죽여?’라는 생각이 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종차별’ 또한 엉뚱한 일로 여겨져야 한다. 마찬가지로 ‘여성 홀대하기’, ‘장애인 무시하기’ 또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회가 상식적인 사회다. 그리고 그 출발은 사회의 ‘앵무새’들을 어떻게 부르느냐에 있다.

 

최서인 기자
kekecathy@yonsei.ac.kr

<자료사진 허핑턴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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