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혜진 기자의 이런 만화같은 세상

‘시청자 여러분, 뉴스룸은 지금부터 지진 관련 특보로 전환하겠습니다.’ JTBC는 지난 12일 저녁, 이 한 마디로 영웅이 됐다. 내로라하는 방송사 중 기존 시나리오를 중단하고 지진특보를 내보낸 건 JTBC 한 곳뿐이었다. ‘역시 JTBC’, ‘깨어있는 언론’이라는 수식어가 뉴스룸과 앵커 손석희의 어깨 위로 쏟아졌다. 난세(亂世)에 영웅이 난다는데, 지금이 정말 난세인가보다.

3권中 좀비에게 공격당할까 몸을 숙이는 히데오. 그는 용기를 내야할 때마다 “아이 앰 어 히어로”를 읊는다.

재깍재깍 좋은 정보를 전달해주는 언론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아직 『아이앰어히어로』의 일본보다는 조금 낫다. 이 만화 속 언론은 사실파악도 제대로 못 한 채 변죽만 울려대기 때문이다. 
『아이앰어히어로』는 좀비 바이러스가 창궐한 일본을 배경으로 다양한 인간군상을 조명하는 이야기다. 휴머니즘이라기엔 감동요소가 약하고 스릴러라기엔 묘하게 심금을 울린다. 주인공 이름은 히데오(英雄, ‘영웅’의 일본어 독음)지만 우리가 기대하는 영웅호걸은 아니다. 적당한 도덕관념, 적당한 팔랑귀에다 조금 심하게 찌질한 소시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난세 속의 히어로다. 국가의 보호를 기대할 수 없는 이때, 혼자 힘으로 오롯이 살아남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5권中, TV뉴스는 아나운서의 좀비화를 숨기고 있다.

재난만화에는 클리셰가 하나 있다. 그중 하나가 ‘무능한 국가’다. 이들은 재난이 발생해도 시민을 보호하기는커녕 우왕좌왕 자기 살기에 급급한 집단으로 비춰진다. 『아이앰어히어로』에서 정부는 어찌나 무능한지 4권에서야 겨우 등장하고, 그마저도 채 열 컷이 안 된다. 그들은 ‘반사회적 장애’, ‘외출 자제’라는 말로 사태를 축소하기 바쁘다.
만화 속 현실에 대한 자세한 상황설명은 뉴스가 아닌 커뮤니티 댓글창을 통해 이뤄진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고? 우리 현실이 그렇다. 12일 경주지진 후 SNS를 중심으로 우스갯소리가 돌았다. ‘지진이 발생하면 믿을 건 페이스북 뿐’이라는 말이었다. 국민안전처 사이트가 먹통이 되고 재난문자도 받지 못한 상황에서 페이스북에는 실시간 뉴스와 지인들의 소식이 갱신됐다.
‘지진희 알림’(@jijinhee_noti)이라는 메시지 채널도 등장했다. 이는 ‘텔레그램’ 메신저의 채널 중 하나로, 디시인사이드 ‘지진희 갤러리’의 게시글 알림이다. 이름 탓에 지진이 발생할 때마다 폭주하는 이 갤러리는 실제로 지난 21일 아침 기상청보다 3분이나 빨리 지진 발생 사실을 전달했다. 이처럼 정부에 대한 불신 속에서 우리는 커뮤니티와 SNS로 몰리고 있다. 
 

6권中 위기에 빠진 히데오를 모른척했던 동료가 그를 다시 만나게 되자 ‘인간’을 들먹이며 변명한다.



『아이앰어히어로』는 히데오라는 개인을 묘사하는 데 무려 20권을 할애하고 있다. 심지어 그의 찌질한 일상을 묘사하는데 백여 페이지를 쓰느라 좀비는 1권 막바지에서야 겨우 등장했다. 이유는 하나다. 무적불패의 재난 속에서 믿을 수 있는 건 나 자신, 즉 개인뿐이기 때문이다. 20권이 넘어가도록 국가는 주인공에게 티끌만큼의 도움도 주지 못한다. 좀비 바이러스라는 매뉴얼 따위 없는 상대와 마주쳤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진에 대한 아무런 대비도 대책도 없는 우리 사회에 지진이 좀비와 얼마나 다를까.

우리는 곧 『아이앰어히어로』 한국판을 찍게 될지도 모르겠다. 국가가 제공하는 사회적 보호망에 대한 기대는 이미 무너졌다. 그간 이 사회 속에서 살아온 시간이 무색하게 우리는 나 자신 또는 서로의 아량에 기대야 하는 것이다. 이 상황이 당연하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다만 확실한 건 인간, 그리고 인간의 정(情)이라는 불확실함을 좇는 일은 썩 유쾌하지 않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저 운이 좋아 살아남을 수 있길 빌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장혜진 기자
jini14392@yonsei.ac.kr
<자료사진『아이앰어히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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