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서인 기자의 이/맘/때의 예술가

이제는 별이 돼 
역사에 남은 예술가들에게도 
꼭 대학생 때의 나이, 20대 시절이 있었다. 

오는 25일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는 ‘샤갈, 달리, 뷔페 展’에서는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세 거장의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오늘날까지 명예의 한가운데 서 있는 거장들의 ‘이맘때’를 ‘샤갈, 달리, 뷔페 展’을 통해 더듬어보자.

23살, 색으로 물들다

다채로운 색깔과 그림 전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환상적인 행복감은 샤갈((Marc Chagall, 1887~1985) 작품의 정체성이다. 그러나 ‘샤갈, 달리, 뷔페 展’에 전시된 샤갈의 그림들은 30대 중반부터 말년까지의 그림이다. 샤갈의 20대는 전시실에 없고, 우리의 시선에서도 벗어나 있다.
청어 창고 직원의 아홉 명의 자식 중 첫째로 태어난 그는 늘 가난과 유대인 차별에 시달렸다. 20세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유학하던 그의 작품은 오늘날 사람들이 전시회에서 보는 샤갈의 작품과는 거리가 멀다. 당시 그는 비관학파에 관심을 가지며 어두운 색채로 민속적이고 종교적인 주제를 다루었다.
미술학교 교장이었던 레온 바크스트는 그런 샤갈에게 파리 유학을 권했다. 파리에 입성한 샤갈은 돈이 부족해 공동 숙소에서 머무르며 홑이불이나 속옷에다 그림 연습을 했다. 그러나 그는 낮이면 루브르 미술관에서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고전 미술에 심취했으며, 레제, 모딜리아니 등과 교류하며 파리 화단에서 주목받던 인상주의와 야수파에 대해서 연구했다. 샤갈에게 ‘색채의 마술사’라는 별명을 가져다준 풍부하고 환상적인 색채 사용은 이때 시작된 것이다. 
‘샤갈, 달리, 뷔페 展’에서 관람객들을 매혹하는 그의 색채는 40세, 60세, 70세 샤갈의 것이지만 그 이면에는 23살, 집 떠나 쪽잠을 자면서도 낮에 겪을 새로운 경험을 기대하던 그가 있다. 그에게 20대란 변화의 시기였다. 그를 유학시켰던 바크스트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네 색채는 춤을 추는구나.’

이 구역의 미친놈은 나야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1904~1989)의 초현실주의는 프로이트 이론을 기반으로 판화와 영화, 고전주의와 부족 미술 등 수단과 장르를 가리지 않고 뻗어 나갔다.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만들고 싶은 욕구가 넘쳤던 20세의 그는 고전주의를 추종하는 왕립 아카데미에 다니면서도 당시 태동하던 입체주의와 미래주의를 몰래 실험하곤 했다. 
자유분방했던 달리는 눈길을 끌 만한 일들을 거듭했다. 신임 교수의 실력을 인정하지 않고 항의해 정학 처분을 받는 한편, 독재정권에 반대해 한 달간 투옥되기도 했다. 그는 결국 퇴학당했는데, 시험에서 답안 제출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퇴학 이후 다양한 모더니즘 예술가들과 교류하면서 초현실주의 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정치적 참여를 거부해 다른 회원들과 반목하게 되면서 초현실주의 그룹에서도 제명됐다.
정학과 투옥, 퇴학과 집단에서의 제명은 정치적, 예술적으로 변동의 시기였던 1920년대 사회를 고려하더라도 결코 보편적인 행보는 아니다. 또한, 돈과 명예를 손에 거머쥔 한 분야의 최고 성공가가 취한 노선이라고도 상상할 수 없다. 오늘날 생각하기로 ‘성공’이란 남들과 비슷한 길을 걸으면서 그들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데서 오는 것이니까. 그러나 그는 ‘다름’을 택해 미치광이 소리를 들으면서 결국 범접 불가한 ‘우월함’에 도달했다. 그의 치밀한 광기와 독보성이 결국 성공의 열쇠가 돼 준 것이다. ‘샤갈, 달리, 뷔페 展’에서 찾아볼 수 있는 「승리의 코끼리」, 「서랍이 달린 밀로의 비너스」등의 기발한 작품들은 달리가 초현실주의 그룹에서 벗어난 뒤 구축한 그의 독자적인 세계의 표현이다. 초현실주의 그룹에서 왕따였던 그는 오늘날 초현실주의의 화신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가 성공에는 정해진 길이 없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내가 제일 잘나가

베르나르 뷔페(Berbard Buffet, 1928~1999)는 추상화가 주류를 이루던 20세기 미술에서 구상화를 그려 성공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19세에 첫 개인전을 열 정도로 주목받는 인재였다. 20대에 그는 이미 피카소와 견줄 정도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래서 ‘샤갈, 달리, 뷔페 展’에서도 「교외」등 그의 초기 작품들을 많이 만나볼 수 있다. 
20세의 그가 그렸던 것은 전쟁 중 나치가 점령했던 파리의 거리였다. 뷔페는 공포에 사로잡힌 황량한 거리를 자를 대고 그은 듯한 날카로운 직선과 회갈색 위주의 색채로 표현했다. 그리고 이때 전쟁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했던 특징적인 선은 그의 작품에 후기까지 등장하며 그를 거장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야말로 어린 천재였던 그는 막대한 부를 거머쥐지만, 그의 이른 성공은 사람들의 질투를 불러일으켰다. 당시 대중은 예술가에게 터무니없는 순수성을 요구했고, 사람들은 오로지 뷔페가 부자라는 이유로 작품의 예술성을 폄하했다. 하지만 뷔페는 세간의 비난을 무시하고 죽는 날까지 손에서 붓을 놓지 않았다. 오늘날 그가 가진 ‘거장’이라는 이름의 그늘에는 어린 날 보인 번뜩이는 영특함뿐만 아니라 말년의 우직한 열정까지 녹아 있다. 그의 명성은 젊은 날에 완성된 것이 아니었다.

세 명의 거장이 성공한 배경은 각기 다르다. 청년 시절, 샤갈은 새로운 경험을 통해 결정적인 변화를 겪었고 달리는 ‘마이웨이’를 걸었으며, 뷔페는 이미 성공해 있었다. 으레 사람들은 정해진 시기에 정해진 과제를 해내야만 ‘성공’에 다가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과업을 이루기 위한 왕도란 없다. 세 거장의 인생에서 성공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각기 다르듯이 말이다.

최서인 기자
kekecathy@yonsei.ac.kr

<자료사진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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